시드니 내 한인 공동체

정착, 경제적 적응, 그리고 한국어와 한국 문화의 진흥

한길수/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9/03/29 [09:53]

 

▲   © 한길수


이 글은 지난 3월 출간된 고려대학교 윤인진 교수가 편집한 단행본 「세계의 코리아타운과 한인 커뮤니티」중 한길수 교수(멜번 모나쉬대)의 논문(제4장 시드니 내 한인 공동체)을 저자의 허락을 받아 본지에 3-4회로 나누어 연재한다.<편집자 주>

 
1.서론

 
호주는 다문화주의의 성공으로 잘 알려진 바 있다. 한인들은 1970년대에 처음 호주에 도착하기 시작했으며 그 이후 상당히 중요한 소수자 공동체로 확립되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한국 경제 발전의 궤적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최근 몇 년간 사회적 통합은 호주와 그밖의 다른 지역에서의 에스닉 연구에 있어서 다시 논쟁을 일으키는 주제가 되었다. 다양성이 호주와 같은 다문화적인 사회에서 본질적인 특성으로 장려되는 반면에, 얼마나 다양한 에스닉 집단들이 자신의 국가적인 정체성으로서 ‘호주인임’을 표방하는가는 중요한 질문인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한인 이주민들은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했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이 연구는 특히 이민자들의 사회경제적 특성과 관련하여 호주로의 한인 이민 역사를 재검토한다. 이러한 특성들은 호주 사회에서 한인 이민자들의 정착 패턴과 경제적 적응에 명백하게 영향을 끼쳤다.
 
이에 따라 한인 이민자들은, 다문화적 호주의 다양한 사회적 풍토에 정착하게 되면서, 젊은 세대가 한국어 능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장려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였다.
 
호주 내 대다수의 한인 이민자들은 New South Wales 주와 그리고 특히 Sydney 내 메트로폴리탄 지역에 정착하였다. 지난 국가 인구 조사에서 나타난 호주에서 살고 있는 한국 태생 74,538명 중, 41,819(56.1%)가 New South Wales에 살고 있었다 (ABS, 2011).

 
2.시드니로의 한국 이민 역사

 
1920년대에, 소수의 아이들이 호주에 정착하였는데 이들은 한국에서 온 호주 선교사들에게 입양된 아이들이었다. 1921년과 1941년 사이에 몇몇의 학생들이 학업을 위해 호주로 오게 되었다 (ADIC, 2011: 1).
 
호주 시민권을 획득하는 것과 관련하여, 곽묘임 씨는 호주 군인과 결혼하여 1957년에 호주 시민권을 부여받은 첫 번째 한국인이 되었다. 1960년대 후반에 이민 규제가 약간 완화된 이후에 상당수의 한국인 전문직 종사자들이 1969년에 도착하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1971년의 인구 조사에 따르면, 호주에 살고 있는 한국 태생의 사람들은 468명에 불과했다(ADIC, 2011: 1).
 
대략적으로, 1970년대와 2000년대 사이에 한국으로부터 호주로의 이민은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다. 1970년대에서 1980년대 중반까지의 ‘사면’, 가족상봉 이민, 1980년대 중반에서 1990년대 초반까지의 숙련되고 독립적인 이민, 그리고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까지의 사업 이민이 있다.
 
본국의 경제 그리고 사회 발전의 주요 단계들과 한인들을 해외로 송출하는데 있어서의 변화들은 이주민들이 한국을 떠나는 시기와 그들 각각의 사회 경제적 특성들에 반영되어 있다.
 
호주 정부가 이민자들의 수용을 그들의 구체적인 자격과 요구조건들에 따라 달리하는 것 역시 호주의 경제 그리고 사회 발전의 다른 단계들에 상응한다.
 
1960년대에 한국인들 중 자본을 소유했으나 미국이나 캐나다로 이민을 갈 수 없었던 이들은 최종적으로는 차후에 아메리카의 북부로 이주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남미로 향하였다.
 

물론 많은 한인들이 미국에서 영주권을 획득하였다(Kim, 1981). 자원과 직업이 없었던 한인들은 고등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일자리를 찾아 전쟁 중인 베트남이나 서독으로 떠났다.
 
1960년대에 한국의 높은 실업률과 1962년에 정부의 이민정책은 농촌 지역에서 대도시로 이주한 이들을 포함하여, 많은 도시 빈민들로 하여금 해외에서 일을 하거나 이주하는 것을 고려하도록 부추겼다.
 
해외 취업은 특히 대학 교육을 받지 못한 이들에게 매력적이었다. 일정 기간의 직업 훈련 기간은 그러한 사람들로 하여금 해외에서 일을 할 수 있도록 자격을 부여 하곤 하였다(Han, 2000b; 2003; Yoon, 1993).
 
약 25,000명의 군인들과 민간 노동자들이 베트남 전쟁 중에 미국인, 영국인, 그리고 호주인과 연합하여 일을 수행하기 위해 남베트남으로 떠났으며(Kim, 1981: 54; Vogel, 1991: 62), 이는 한국으로 하여금 상당한 자본을 획득하도록 하였다(Cole and Lyman, 1971: 135).
 
미국인과 한국인은 1973년에 남베트남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1975년 4월의 전쟁 바로 직전과 직후에 몇몇의 한국인들은 미국으로 떠났고, 500명의 한국 민간 노동자들은 진보적인 Whitlam 노동 정부 계획의 일환이었던 1개월짜리 ‘Easy Visas’를 통해 호주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김형식, 2000b; Han, 2003: 40; 이재형, 2011).
 
다른 나라에서 온 이들뿐만 아니라 486명의 한국인들 역시 비자 기간보다 더 오래 머물렀으나 이후 1976년 1월에 Whitlam 정부에 의해 호주 내에서 합법적인 상태로 머무를 수 있도록 사면을 받았다(이재형, 2011: 143; 백시현, 1990: 24; 양명득, 2010: 120).
 
1976년의 사면이라는 좋은 소식은 중동, 서독, 그리고 우루과이와 브라질과 같은 남미 국가에 있는 한인들에게도 전해졌다. 그 소식은 심지어 한국 내 미군 부대의 군사 기지인 동두천시에까지 전해졌는데, 이곳은 베트남에서 일하기로 선택했던 수많은 한국인들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이로 인해 수많은 한국인 관광객들이 호주로 오게 되었다. 호주 정부의 통계에 의하면 1970년대 중반에 비자 기간 초과 체류자들의 수는 2,500명에 달하였다(김정엽 and 원종인, 1991: 129에서 재인용).
 
1980년 6월에 있었던 두 번째 사면은 188명의 한국인들에게 영주권을 제공하였다(백시현, 1990: 24). 그 이후 수년간, 한국인들, 주로 남성들은 호주의 이주민 가족 재회 계획을 통해 가족 구성원들과 함께 지낼 수 있게 되었다(김방이, 1986: 21; 김정심, 1992: 431).


<표 4-1>

▲     <표 4-1>


한국에 있는 노동력 수출 중개 업체들이 라틴 아메리카로 이주하는 첫 번째 집단을 꾸린 것은 일제강점기 시대였다. 중개 업체는 John Meryers라는 영국 중개인과 협력하였는데, 그는 멕시코 농장으로 이주할 일본인과 중국인 노동자들을 모집하는데 성공하지 못하였다.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고 일본 정권 하에서 고통을 받고 있었던 많은 한국인들은 그러한 제안을 받아들였다(현규환, 1976).
 
총 1,033명이었던 첫 번째 집단은 1905년 5월 15일에 멕시코, Salina Cruz의 항만에 도착하였다. 22개의 다른 농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면서 그들은 강제 수용소에서 일하는 것처럼 느꼈고 많은 이들이 무단이탈을 시도하였다(탁나현, 1987).
 
1960년대 초반에 브라질 정부는 자국 농장의 발전을 위해 농업 이주민을 찾고 있었다. 17개의 가구 내 91명의 사람들이 1962년 브라질에 도착하였고, 브라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멕시코 그리고 볼리비아와 같은 남미 국가로의 한국인 이주가 재개되는 시점이었다(Kim, 1981: 49; KDI, 1979: 37).
 
그러나 농부가 되기 위한 선별 기준과는 달리, 그들 중 절반은 농부가 아니었고 농사에 관심이 있는 것조차 아니었다. 이에 따라 농장에 정착하기 훨씬 이전에 그들은 브라질 내의 도시들이나 쿠바, 미국 그리고 캐나다와 같은 다른 목적지로 떠나갔다.
 
남미에서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상파울루, 부에노스아이레스, 그리고 리우 데 자네이루와 같은 대도시에서 정착하였고 농업을 그만두었다(동아일보, 1974, Kim, 1981: 55에서 재인용; 현규환, 1976: 1036; KDI, 1979: 124).
 
이주와 해외 공동체에 대해서 다루는 한국 학술지 『해외 동포』(1992)에 의하면, 잠재적 한국 이주민에게 멕시코가 매력적인 목적지가 된 이유는 미국으로 입국하기에 좋은 전환지점이었기 때문이다. 멕시코는 또한 호주로 입국하기에 좋은 전환지점이기도 하였다. 남미에 있는 많은 한국인들은 호주에서 사면을 받은 이들에 대해 전해 듣고 호주로 이주해 왔다(Coughlan, 1995: 384).

 

<표 4-2> 

 

▲     <표 4-2>


 
1972년에서 1978년까지 대략 50,000명의 한국인들이 중동지역에 있는 아랍 국가들의 건설 현장에서 일을 하였다(New York Times, 1978). Kim(1981)은 100,000명 이상의 많은 한국인들이 당시에 해당 지역에서 일하고 있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1979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 지역에만 68개의 한국 건설 기업과 93,000명의 한국인들이 진출하였다(Vogel, 1991: 62). 중동지역에서 계약 기간이 만료된 이후, 많은 이들이 미국(문광환, 1989: 32)이나 호주와 같은 다른 목적지로 이주하였다.
 
동아연감(Kim, 1981: 54에서 재인용)에 따르면, 1963년과 1974년 사이에 약 17,000명의 한국 광부와 간호사가 서독에서 일했다고 한다. 한국 광부들은 유고슬라비아, 이탈리아, 터키와 같은 다른 국가들에서 온 광부들에 비해 높은 수치의 사상자를 기록했다(현규환, 1976: 1050).
 
서독에 파견된 한국 간호사 중 20%는 자격이 있는 간호사로 고용되었고, 80%는 간호 보조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나중에 대부분은 간호사로 등록되는 자격을 충족하였다(현규환, 1976). 1970년대 후반의 경제 침체 기간 동안, 서독은 이주노동자를 추방하였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배우자와 함께 숙련 간호 이주민으로서 미국에 입국하였고(Kim, 1981: 54), 다른 이들은 캐나다로 떠났으며(현규환, 1976; 엄인호, 1987: 45), 약 20-30개 가구가 호주로 떠났다(김만석, 1988).
 
요약하자면, 해외에서 계약을 맺은 한국인들 중에서 몇 천 명은 계약이 만료되고 나면 관광 비자를 통해 호주로 입국하여 그 이후에 사면으로 영주권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에 적은 수의 숙련/독립 이주민들만이 호주 내 한인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었을 때 베트남, 중동, 남미, 그리고 서독에서 온 한국인들이 호주 한인 이민자의 대다수를 차지하였다(Han, 2003: 46).
 
서독에서 온 이들은 유일하게 호주에 도착하기 이전에 이민 신청을 제출하고 그들의 기술이나 간호직 자격 조건에 의해서 숙련 이주민으로 호주에 입국하였다. 마지막으로 처음에 관광객으로 입국하여 나중에 1970년대에 이르러 영주권자로 정착하게 된 한국인 집단은 동두천시에서 온 80가구였다.
 
그들은 이전에 동료였던 사람들이 호주에 정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호주에 이주해 왔다(Han, 2003: 46). 1970년대에 이주해온 거의 대부분의 초기 이주민들은 시드니 지역에 정착하였다.
 
1976년도와 1980년도 사면은 호주의 성장하는 경제에 노동력을 공급할 뿐만 아니라, 이웃 아시아 국가들과의 협력 관계를 전략적으로 구축하는데 기여했다. 더 나아가, 이러한 발전은 1973년 소위 말하는 백호주의 정책의 공식적인 폐지 이후로 진행되었다.
 
건강한 신체적 노동을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은 두 차례의 사면에 대한 자격을 충족하는데 중요한 기준인 것으로 드러났다. 1979년에 호주 정부는 다면적 수치 평가를 시행했는데, 이는 잠재적 이주자들이 이수 교육, 영어 구사 능력, 연령 기준에 반하는지 그리고 호주 사회 및 경제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잠재성에 대한 평가였다. 이러한 새로운 이민 계획 하에서, 숙련/독립 그리고 비즈니스 이주가 1980년부터 이루어졌다.
 
사면 이주자들과는 달리 숙련 이주자들은 한국에서 비교적 더 잘 교육받고 사회 경제적으로 부유했었다. 그들은 신체적으로 건강했을 뿐만 아니라 전문적인 기술을 갖추고 있었다. ‘비즈니스 이주민’이라는 범주는 고용을 창출하고 호주 경제를 다시 활성화하기 위해 설계되었다.
 
비즈니스 이주민들은 건강하고 숙련된 사람일 것으로 기대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업을 시작할 자본을 갖추고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1987년과 1993년 사이에 3,490명의 한국인이 비즈니스 이주민 범주로 호주에 입국하였다(김영성, 1998: 51).
 
1988년 서울 하계 올림픽은 한국 경제에 있어서 전환점이었는데, 한국은 국제적으로 좋은 경제성과를 보이기 시작했고 상당히 많은 수의 한국인들이 해외 교육과 해외여행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부터 호주는 한국인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여행/이민 목적지 중 하나였다. 2002/3년에는 호주에서 공부하고 있는 한국인 학생이 11,270명이었고, 2003/4에는 14,735명, 그리고 2009년에는 35,708명이었다.
 
마지막 수치는 세 번째로 높은 숫자였는데, 중국인 학생이 첫 번째 그리고 인도인 학생이 두 번째로 많았다. 또한 많은 수의 워킹 홀리데이 비자 소지자들이 호주에서 12개월 혹은 더 오랫동안 머무르고 있었다. 이러한 학생들은 시드니, 브리즈번, 멜번에 있는 한인 공동체 내 활발한 경제의 중요한 요소였다.

 
 3.정착 패턴

 
소수의 전문가들과 단기 직업 훈련생이 시드니에서 성장하는 한인 공동체의 주요 구성원을 이루었다. 그러나 시드니 내에서 한국인들이 적었기 때문에 그들의 정착이 1970년대 중반까지도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다(김영성, 1998: 42, 46). 논의한 것처럼, 호주에서 한인들의 수가 상당히 증가한 것은 1976년과 1980년의 사면을 통해서였다.
 
1976년에는 1,460명의 한국인이 그리고 1981년에는 4,514명의 한국인이 있었다(양명득, 2010: 121). 이에 따라 1980년 즈음에 한인 공동체의 형성이 분명해졌다.


<표 4-3>

▲    <표 4-3> 

 


해당 년도 기준으로 호주에서의 한국인(한국 태생) 수
·출처: ADIC, 2011; Coughlan, 2008.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거의 모든 한국인이 시드니를 통해 호주로 입국한 듯했고 이들의 대부분이 시드니에 정착하였다. 1973년 기준으로 그들 중 73.4%가 시드니에 거주하고 있었다. 1977년에는 66.7%, 1979년에는 65.9%, 1984년에는 79.0%, 그리고 1991년에는 73.5%가 거주하고 있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호주에 사는 한국 태생의 사람들이 74,538명이었고 그중 53.9% 혹은 40,175명은 시드니 메트로폴리탄 지역에서 거주하고 있었다(ABS, 2011). 시드니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비율이 이처럼 상당히 감소한 것은 New South Wales 이외의 다른 주로 새로운 이주자들을 분산시키고자 한 정부 정책 때문이었다.
 
두 번째로, 시드니에 사는 한국인은 호주의 다른 지역에 사는 한국인보다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고 시드니 지역에서는 사망률이 더 높게 나타났다. 또한 2001년 ABS 통계는 비교적 나이가 어린 아이들보다 나이가 많은 아이들의 수가 많았으며 이는 출산율의 감소를 의미했다(이경숙, 2008: 174).
 
김영성(1998: 45-6)은 왜 한국인이 시드니 지역에 집중되어 살게 되었는지에 관한 몇 가지의 원인들을 제시했다. 첫 번째로, 도시생활에 익숙한 한국인은 호주에서 가장 대도시인 시드니에서 규모의 경제와 더 나은 고용 기회를 누릴 수 있었다.
 
두 번째로, 시드니 지역에는 이미 많은 한국인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더 많은 한국인을 끌어들였는데 이는 연쇄 이주 현상에 해당된다.
 
세 번째로, 많은 수의 한국인으로 인해 존재했던 식당과 같은 에스닉 사업들 그리고 현지 에스닉/언어에 기반한 관광 산업이 성장하면서 더 많은 한국인을 끌어들이기도 했다.
 
네 번째로, 시드니와 서울 간의 직항이 도입되어 두 도시 간의 항공 여정이 용이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시드니에는 많은 한인 사회 네트워크와 우수한 교육 기관이 있다.
 
시드니에 거주하는 한국인의 공간적 정착은 그들이 호주로 이주해왔을 때 지녔던 그들의 사회 경제적 특징을 반영했다. 사면 이주민들은 Redfern과 같이 낮은 사회경제적 인구가 거주하고 있는 도심지역에서 그들의 삶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점차 자신의 경제적 지위를 개선함에 따라 도심지역으로부터 옮겨 가고자 했다.
 
중요한 점은 잠재적 한국인 이민자들이 이민 이전에 경험했던 ‘사회경제적 괴리감’의 지속은 시드니에서의 공간적 정착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1960년대 후반에 직장에 다닐 뿐만 아니라 시드니 대학교나 시드니 공과대학교, 혹은 전문대학에 다니고 있던 소수의 학생들은 Glebe와 같은 캠퍼스 근처에 살고 있었는데 이는 직장으로의 출퇴근과 학업을 위한 선택이었다.
 
소수의 학생들은 동남아시아에서 온 새로운 한국인들을 시드니 공항에서 맞이해 주었고 새로 온 이들은 Glebe와 근처의 Redfern에 정착하게 되었다.
 
사실, ‘260 Charlmers Street, Redfern’은 베트남과 캄보디아에 있는 미군 기지에서 일하다가 1973년에 관광객으로서 호주에 입국한 김동삼의 유명한 거주지였다. 동남아시아에서 이주해 온 이들은 취업 기회, 아파트 구하기, 영주권 신청서 제출 방법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시설을 통해 입국하였다(이경숙, 2008: 175).
 
Redfern 주변에 초기 한국 이주자들의 잠재적 고용주가 될 수 있는 곳으로는 봉제 공장, 신발 제조 공장, 그리고 타이어 공장이 있었다.〠 <계속>


한길수|멜번 모나쉬 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미디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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