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인종차별 테러

관용과 포용, 서로 인정하는 자세 필요

주경식/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9/03/29 [10:18]

 

▲ 뉴질랜드 남섬 크라이스트처치 이슬람사원 총기 사건을 애도하며 지난 3월 17일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에 뉴질랜드 실버펀(silverfern, 은색고사리) 형상을 투영했다. ©국민일보    

 

▲ 차량 속 영상에 범인으로 추정되는 남성의 모습. ©국민일보    


지난 3월 15일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Christ -church)의 모스크 두 곳(알누어 모스크와 린우드 이슬람센터)에서 벌어진 총기테러 참사는 전 지구촌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범인은 철저히 계획된 테러를 자행했으며, 이슬람 모스크 두 곳에서 게임을 즐기듯 총기를 무차별로 난사하여 50명의 무고한 생명들을 앗아갔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이기 위해 범인은 이슬람 신자들이 많이 모이는 ‘금요일 기도시간’을 선택한 것이다. 더욱이 끔찍한 사실은 소형 카메라를 부착한 헬멧을 쓰고 이 처참한 광경을 인터넷으로 생중계했다는 사실이다.

 

▲ 이번 사건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무기. ©국민일보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번 뉴질랜드 테러의 주범이 호주인이라는 사실이다. 그의 이름은 브렌턴 태런트(Brenton Tarrant)로 현재 28세이고, 뉴 사우즈 웨일즈(NSW)주 북부 그라프톤에서 태어나서 그 지역에서 자란 가난하지만 평범한 백인 가정의 청년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극우 백인 우월주의자라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그가 테러를 자행한 이유는 “이민자들이 백인의 나라를 더럽히고 있기에 백인의 나라로 되돌리기 위해” 테러를 자행했다는 것이다. 

 

▲ 총기 난사 사건 주변에 놓여 있는 시신 한 구. ©국민일보    


그는 치밀하게도 범행전에 73페이지 분량의 선언서(Manifesto)를 뉴질랜드 총리를 포함, 몇 군데 미디어와 30곳 이상의 장소로 이메일을 보냈다.
 
그 선언서를 보면 “위대한 백인들의 나라로 되돌려야 한다는 제목으로 자신은 백인우월주의자이고 인종주의자로 현재의 이민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다”라고 적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동안 학계와 미디어에서는 이슬람포비아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이론일 뿐이라는 논쟁들이 있어왔는데 이번 뉴질랜드 테러는 이슬람포비아가 실재할 뿐 아니라 그것도 아주 치명적으로 퍼져 나가고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슬람포비아 그리고 인종차별

 

▲ 슬픔 가득한 여인. ©국민일보    

 


이러한 끔찍하고도 처참한 테러로 전 세계가 놀라고 슬픔에 잠겨 있는데, 설상가상으로 호주의 상원의원인 프레이저 애닝(Fraser Anning)은 미디어를 통해 뉴질랜드에서 이러한 테러가 발생한 것은 “이슬람 극단주의들을 수용한 뉴질랜드 이민정책” 때문이라는 발언을 했다. 그는 작년 8월에도 연방의회 첫 연설에서 ‘무슬림 이민금지’를 요구했고, 더 나아가서 호주는 백호주의 정책으로 회귀해야 한다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애닝 의원 역시 이슬람 혐오, 아시아 혐오, 난민 혐오등을 내세워 자신의 정치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이민자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많은 생각이 교차한다. 작년에 타계한 역사학자 박정신 교수는 ‘인류의 역사는 칸막이 역사’라고 했다. 인류의 역사는 나와 이웃 사이에 울타리를 치고, 부족과 부족 사이에 금을 긋고, 국가와 국가 사이에 담을 쌓아온 칸막이 역사라는 것이다.
 
그의 통찰력은 사실이다. 인류는 현존하는 이래로 계속해서 나와 이웃 사이에 울타리를 치고 나라와 나라 사이에 금을 긋고, 인종과 민족을 구분하고 경계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21세기가 지나면서 교통문명과 인터넷의 발달은 전 세계가 일일 영향권 안에 들어오게 하였고 세계의 많은 국가들이 갈수록 다문화국가로 변해 가고 있는 실정이다. 대한민국만 하더라도 동남아시아에서 이주해온 노동자가 2백만 명을 넘어서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호주만 하더라도 2백여 개의 소수민족이 함께 어울려 살고 있는 다문화국가이다.
 
이러한 지구촌 시대를 다른 민족 다른 언어 다른 종교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은 실제적인 고민일 수밖에 없다.
 
기독교 신앙의 배타성이 모든 것을 배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받고 있는 가장 큰 비판 중의 하나는 ‘폐쇄성’과 ‘윤리의 부재’이다. 한국 기독교는 유독 배타적이다.  ‘진리’ 자체가 유일한 것이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배타성을 지닐 수밖에 없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자신만이 절대적 진리라고 생각하기에 기독교와는 다른 일체의 것들에 대해서 눈과 귀를 닫고 소통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문제가 있다.


 
현대 사회는 다원화된 사회이다. 종교적으로도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섞여 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다원화된 세상에서 살아갈 때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 일지라도 서로 인정하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 추모객들이 크라이스트처치 식물원에 마련된 총기 난사 테러 희생자 추모소 인근에서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포옹하고 있다.©국민일보    



우리의 신앙은 지키되 다른 사람에 대해서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 사실 다른 사람에 대한 경직된 폐쇄성은 근본적으로 열등감으로부터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중세 에스파니아 지역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은 오늘날 다문화된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실제적인 교훈을 주고 있다
 
1095년 십자군 원정이 있기 전 중세교회는 이슬람이 점령하고 있던 에스파니아 남부지역을 회복하기 위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이베리아 반도까지 쳐들어갔다. 이 때 이베리아 지역에서 무슬림을 쫒아낸 후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 지역에 이미 토착 기독교가 존재하고 있었 던 것이다.
 
이것을 ‘모자라브 (Muzarab)문화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기독교인들이 공존하고 있었고 아랍 문화 속에서 토착 기독교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지역에는 기독교와 이슬람뿐만 아니라 유대교까지 공존하고 있었다.
 
학자들은 8세기부터 15세기까지 이베리아 반도에서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가 공존하고 있었던 다문화를 ‘콘비벤시아(convivencia: 공존)’라고 부른다. 이것은 각기 다른 종교인 기독교와 유대교, 이슬람교가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었던 것을 보여주는 실예라 할 수 있다.

 

▲ 크라이스트처치 추모공원 묘지에서 열린 총기 테러 희생자 장례식에서 시민들이 희생자의 관을 어깨에 메고운구하고 있다. ©국민일보   



무엇이 폐쇄성을 가져오는가? 그것은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전혀 들으려고 하지 않는 과도한 배타주의적 사고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미 8세기에 그것도 이슬람이 지배하던 사회에서 무슬림과 기독교, 유대교가 공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현대 기독교를 부끄럽게 한다. 그동안 기독교가 여타 다른 종교들과 맺었던 관계 방식은 주로 ‘배타주의’와 ‘폐쇄주의’였다고 할 수 있다.
 
테러를 자행했던 브렌턴과 막말을 해대는 에닝 의원의 종교가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기독교인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기독교문화가 녹아 있는 호주사회에서 자란 사람들이고, 적어도 정상적인 교육들을 받은 사람들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안에 내재되어 있는 인종에 대한 차별과 다른 종교에 대한 혐오와 배제는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우리의 따뜻함을 보여줘야 할 때

 
뉴질랜드 참사 다음 날인 16일 저녁에 멜번에서 극우 시위를 마치고 프레이저 애닝 의원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을 때 한 용감한 17세 소년이 애닝 의원의 머리에 계란을 깨트렸다가 그에게 주먹질을 당했다. 방송을 통해 그 장면을 보면서 소년의 행동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소년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애닝 의원에게 다가가 아무 말도 없이 그의 뒷통수에 계란을 깨트렸던 그의 행동은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마도 이 소년은 애닝 의원의 말이 옳지 않다는 것을 그의 계란세례를 통해 표현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어른은 그 소년을 주먹질로 다짐했다. 애닝 의원의 의원직을 박탈해야 한다는 온라인 청원자가 불과 이틀 만에 80만 명을 넘어서고 있다. 아직 세상에는 따뜻한 사람들이 더 많다.
 
테러가 일어나자마자, 저신다 아던(Jacinda Ardern)뉴질랜드 총리는 히잡을 쓰고 피해자들을 찾아가 부둥켜안고 같이 슬퍼했다. 뿐만 아니라 “이 일이 결코 이슬람 이민정책을 바꾸지 못할 것이다”고 강하게 대변했다.
지금 세계 곳곳에서 차별과 배제와 혐오 대신에 “여러분이 바로 우리”라고 하는 가슴 따뜻한 연대를 통해 희생당한 피해자가족들과 모슬렘들을 위로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이곳 호주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지역 모스크를 찾아가 헌화를 하며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심지어 영국 멘체스터의 한 모스크에는 한 사람이 “여러분은 나의 친구입니다. 여러분이 기도할 동안 제가 여러분을 지키겠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모스크 입구에 서서 그들을 위로하고 있는 것도 보았다.
 

▲ 법원에 출두하고 있는 뉴질랜드 총기난사 주범인 브렌턴 태런트. ©국민일보    



이러한 장면을 보면서 필자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마음으로 공감하고 응원을 보낸다.
 
이 세상을 무엇으로 바꿀 수 있을까? 아니 아무리 노력해도 이 세상은 바뀌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 세상을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들 수 있다.
 
인종과 민족과 종교가 다를지라도 관용과 포용을 가지고 모든 사람을 따뜻하게 대하는 것이야 말로 21세기 다문화국가 안에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가장 첫 번째 걸음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주경식 |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호주비전국제 대학 Director
사진제공=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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