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 내 한인 공동체(3)
정착, 경제적 적응, 그리고 한국어와 한국 문화의 진흥
 
한길수/크리스찬리뷰

의심의 여지없이 정 씨의 근면한 노동과 신중한 전력이 기여 요인이 되었으나, 비교적으로 호황이었던 호주의 경제상황이 아니었다면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담들은 물론 한인 공동체뿐만 아니라 호주 전체에서도 매우 예외적이고 드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2) 숙련 기술 이주민
독립이민과 숙련 기술이민을 통해 입국한 한인 이주자들은 한국에서 혹은 호주로 이주하기 이전에 교육을 잘 받았으며 전문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호주에서 이들 중 대다수는 전문직에 종사하지 않았고 호주 이주의 선발에 기준이 되었던 기술을 활용하지 않았다.
 
한인 숙련 기술 이주자 중 10-20% 미만이 전문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Han, 1999b: 15). 이러한 연구 결과와 일치하는 것으로 Inglis와 Wu(1992: 207)는 자신들의 연구 시기에 한인 공동체 내에서 숙련 기술/독립 이주민의 비율이 높게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한인을 제외한 여타 남성 이주자들이 전체 신규 이주민들보다 관리직, 전문직, 그리고 준 전문직에 종사하는 비율이 높다고 보고하였다.
 
Inglis와 Wu(1992)는 또한 다른 에스닉 집단과 비교해봤을 때, 한인 남성과 여성들이 공장 기계공/노동자로 고용되는 경향이 더 크다고 보고하였다. 필자는 이들 중 높은 비율이 숙련 기술/독립/가족 재회 이주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본다(Han, 1999a; Han and Han, 2010; Min, 1984).
 
필자는 숙련 기술 이주자의 노동 참여율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몇 가지 요인을 제시하고자 한다. 사면 이주자들이 육체적 노동을 수행하도록 준비되어 있던 반면에, 숙련 노동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들은 교육을 잘 받았고 전문적 직업을 가지고 있었으며 호주 이민 담당 공무원에 의해 ‘선별’되었기 때문이었다. 구조적으로 깊이 뿌리내려져 있는 차별적 문화와 숙련/기술 이민자들의 높은 열망은 사면 이주자들보다 숙련 이주자들의 노동 참여에 부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다(Han, 1999b: 15).
 
더 나아가, 1980년대의 경제 불황이 심화되면서 이들의 부족한 영어 능력은 직업을 찾거나 해외에서 취득한 자격을 호주에서 인정받는 과정에 있어서 불리하게 작용하였다(Laurence, 1986; Inglis and Philps, 1995). Birrell과 Hawthorne(1997)은 1980년대 중반부터 이주해온 숙련 이주민들이 그 전에 이주해온 이주민들, 예컨대 사면 이주자들보다도 적절한 일자리를 찾는데 덜 성공적이었다고 보고한 바 있다. 이는 한국에서 온 숙련 이주민의 대부분에게도 해당되는 일이었다(Han, 2000b: 94).
 
필자의 선행 연구에서 밝혔듯이 대부분의 숙련 이주자들은 성인을 위한 영어 수업을 6개월 혹은 그 이상 수강하는 것이 그들로 하여금 실용 영어를 습득하거나 직장에서 동료들과 어울릴 수 있도록 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는 그리 놀랍지 않은 일이었다(Han, 1999a). 사실상 숙련 이주자들이 적절한 직업을 찾을 수 있게 하는 다른 지원은 없다(Duivenvoorden, 1997). 적은 수의 숙련 이주자들만이 그들의 전문지식에 관련한 직업을 찾는 기쁨을 누렸지만 그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러한 이유 중의 하나는 영어 능력의 부족이었다.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일자리를 찾은 숙련된 이주자들 사이에서는 성공의 정도가 다양하다. 혼자서 일하기를 거부하고 주어진 과제가 무엇인지에 대해 기꺼이 질문하는 사람들은 잘 어울리는 편이다.
 
반면 고립되어 있고 질문을 ‘잘 묻지 않는’ 사람들은 업무 수행 성과가 좋기 어렵고 그들은 한 조직에서 일하는데 있어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직장에서 중요한 것은 효율성과 생산성이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은 납득할 만하다(Han, 1999b: 16).
 
1990년대 초반에 이주해온 컴퓨터 기술 숙련 이주자 130명 중에서 약 30%가 90년대 중반에 컴퓨터 관련 전문직에서 근로하고 있었다. 나머지는 청소와 같은 ‘단순’ 노동에 관여하고 있었고 적은 수는 배관 작업, 한국 식료품 가게, 한국 식당 등과 같은 영세사업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러한 관찰 결과는 Birrell과 Hawthorne(1997)의 연구 결과와 놀라울 만큼 차이가 났는데, 이들은 비영어권 출신 컴퓨터 전문가들이 중국이나 필리핀과 같이 불리한 송출국에서 이주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주 후 곧 짧은 기간 내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Han, 1999b: 18). 언어와 문화를 제외하고 한국 숙련 이주자들에게는 효율적으로 일을 수행하고 조직 내에서 구성원으로 인정받기 위해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어려움은 결코 극복하기 쉽지 않으며 한국 이주민에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예컨대, 많은 수의 교사들이 호주로 이주해왔으나, 비영어권 출신의 교사들이 교직에서 일하는 숫자는 매우 적은 숫자로 나타나고 있다. 교사로 일을 하고 있는 이민자들은 ‘호주인’ 경쟁자들보다 훨씬 더 자격을 갖춘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교직을 구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Inglis and Philps, 1995).
 
필자는 한인 숙련 이주자들이 직면하고 있는 많은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특히 제한된 영어 실력이 작업 능력을 약화했다고 제시한 바 있다(Laurence, 1986). 이주자로서의 삶을 위해 소득을 벌어야한다는 압박감은 그들로 하여금 영어 실력을 더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다. 그러는 동안, 그들의 실력은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여 구식이 되고, 이는 그들의 자존감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그들이 전문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로부터 더 멀어지게 만든다.
 
이는 한국에서 비교적 재정적으로 부유하고 호주에서 전문직업을 통해 경제적인 풍요 이상의 것을 얻을 것이라고 기대한 숙련 이주자들에게는 실망스러운 일이다. 대신에 그들은 육체적으로 힘들고 긴 근무 시간을 요하는 ‘단순’ 노동이나 영세 사업에 의존하고 있다. 이민 생활 초기에는 품위 있고 질 좋은 생활이 중요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경제적 필요를 충족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게 느껴졌다(Han, 2000b: 100-1).
 
시드니 한인 공동체의 두 명의 한인 저널리스트들에 따르면, 90년대 중반에, 한인 노동 인구의 50%가 육체노동, 청소, 건설현장 일용직, 혹은 상거래에 관여했었을 것이라고 한다.
 
또한 한국인들은 그러한 ‘단순 노동’에 관여하는 것에 대하여 문화적으로 부끄러워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1991년 인구조사에 의하면(BIMPR, 1995: 22), ‘한국 출생 남성들은 육체노동자와 이와 관련된 노동자(24.9%), 그리고 상인(21.9%)으로 고용될 가능성이 더 높았다’고 한다.
 
1996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호주에서 한국 출생 인구의 실업률은 12.7%를 기록했다고 하는데, 이는 호주의 국가적 평균수치인 9.1%보다도 훨씬 높은 수준이었다(Coughlan, 2008: 55). 1990년대의 인구 총 조사의 시점과 사면 이주자의 상당 부분이 영세사업 소유주, 무역업자 또는 은퇴자인 점을 고려할 때 위의 통계 수치에는 상당수의 숙련 이주자가 포함되었을 수 있다.
 
숙련 이주자들은 육체노동 혹은 영세 사업에 관여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는데 그런 직업들은 상대적으로 적은 초기 자본금이 요구되었을 것이다. 김용호(Kim, 1995)의 조사 역시 사면 이주자가 숙련 이주자 그리고 비즈니스 이주자에 비해 영세 사업에 관여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3) 비즈니스 이주자: 사업자에서 ‘스포츠 장기 휴가객’으로

 

시드니 한인회의 이배근 전 회장은 1995년까지 약 400명의 이주자들이 호주에 도착했으며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상당한 규모의 사업’을 운영하지 않았다고 본인에게 말해준 바 있다(Han, 1996: 83). 이민 자문관, 필자의 연구 정보원, 그리고 비즈니스 이주민 응답자들에 의하면, 대략 한인 비즈니스 이주민의 10%가 한국으로 귀국하였고, 다른 10%가 사업을 운영하고 가족이 호주에 머무르는 동안 한국과 호주를 오갔으며, 30%가 호주에서 사업을 운영하고, 50%가 골프나 낚시와 같은 스포츠를 하거나, 혹은 엄밀히 말하자면 무직 상태에 있었다.
 
그들이 사업에 관여하지 못했던 일반적인 이유로는 영어 실력의 부족함, 호주 사회에 대한 이해의 부족, 그리고 높은 임금을 들 수 있다.
 
특히 마지막으로 더욱 까다로운 조건으로 작용한 것이 있는데, 한국에서는 값싸고 훈련된 노동력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지만 호주에서의 사정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사업을 설립하고 운영하는데 필요한 신뢰할 만한 정보 자원을 찾을 수 없었다. 한국에서 자산의 일부를 처분한 후에 1980년대 후반에 이주해온 비즈니스 이주자들은 약 35만 불을, 1990년대의 비즈니스 이주자들은 최소 65만 불을 기본 요건으로 구비하여야 했다(Han, 1996: 82).
 
따라서 사업 설립에 필요한 금액의 하한에 거의 가까운 금액을 가져온 이들에게는 사업을 시작하는데 충분한 자본을 갖추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비즈니스 이주자들은 사업과 이민자 삶 전반에 관한 정보를 자유로이 공유할 수 있는 그들만의 동호회를 유지하곤 했었다. 사업 실패와 상당한 자본 손실에 대한 실제 경험은 그들로 하여금 새로운 사회 경제적인 맥락에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것을 꺼리게 했다.
 
한인 비즈니스 이주자들은 보통 50대 후반이거나 혹은 그보다 나이가 더 많았기 때문에 호주에서 소득을 벌어들일 수 있다는 보장이 없는 이상 ‘돈 없이 외국에서 사는 것은 비참할 것이기 때문에 그냥 가지고 있는 것을 고수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Han, 1999b: 24). 필자의 연구에 참여한 비즈니스 이주자 응답자들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기까지는 적어도 5년이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이 사업을 시작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들의 관점에서는 몇 가지의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 한국에서 ‘큰’ 사업을 운영하는 이들은 호주에서 ‘작은’ 사업을 운영하는 것이 그럴만한 가치가 없었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들의 자존감과 은행 잔고에 의존하는 생활은 그들로 하여금 육체 노동을 찾는 것을 가로막았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충분히 나이가 들었고 ‘은퇴’할 만하다고 생각했다(Han, 1999b: 24).
 
호주에서 사업을 운영했거나 노동일과 같은 다른 직업에 종사했던 비즈니스 이주자들은 1989년 이후에 이주해 왔기보다 1987년이나 1988년에 이주해온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그들은 대개 연령대가 낮았고 자녀들이 학교에 가거나 대학교를 다니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비즈니스 이주에 필요한 공식적 금액이 1987-88년에 35만 불에서 1989년과 그 이후에는 65만 불로 증가했기 때문이다. 1987-88년에 이주해온 이들은 더 적은 자본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새로운 장소에 빠르게 적응하는 촉매제로 작용하게 되었다. 비즈니스 이주자들은 한국에서 가져온 자본 덕분에 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유리한 점을 좀 더 갖추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전반적인 생활 방식과 직장에서 정착하게 된 방식은 숙련 이주자들과 비슷한 것처럼 보였다(Han, 1999b: 24).
 
몇몇 비즈니스 이주자들은 한국에서 자본을 좀 남겨두고 사업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는 그들에게 중요한 소득 원천이 되었다(Han, 1999b: 26). 마지막으로 상당한 비율의 비즈니스 이주자들은 무직 상태였고 비즈니스 이주자만의 독점적인 협회를 통해 ‘호주는 돈을 벌기 위한 장소가 아니라 소비하기 위한 장소’라는 생각을 고취시켰다. 이들은 주로 서로와 함께 골프를 치며 지내곤 한다.

 

4) 시드니에 있는 한인 공동체 내 영세 사업
 
한국인 이주자의 수가 증가하면서 한인 사업 활동이 한인 공동체 내에서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한인 공동체 내 사업 활동은 많은 한인 이민자들에게 중요한 소득 원천이 되어왔다.
 
1970년대 말에는 한인 소유의 사업체가 20개 미만이었지만 1986년에는 250개로 증가하였다(백시현, 1990: 25). 그 수치는 1990년에는 400으로, 1997년에는 1,300으로 증가하였다. 사업체 수와 더불어 사업 종류도 1992년에는 62개에서 1997년에 101개로 증가하였다(이경숙, 2008: 180).
 
시드니 CBD, Parramatta, 그리고 Chatswood에 있는 한인 소유 사업체들은 한인 고객들뿐만 아니라 한인이 아닌 고객들 또한 확보하였다. 그러나 Campsie, Strathfield, 그리고 Eastwood에 있는 한인 소유 사업체들은 주로 한인 고객들을 대상으로 하며 사업들 간의 경쟁 또한 위에서 언급한 세 지역들에서 보다 치열하다.
 
호주동아의 2004년 공동체 조사(이경숙, 2008: 180에서 재인용)에 따르면 가장 인기가 많은 사업 10개 종류는 식당(87), 미용실(56), 식료품 가게(55), 건강식품(51), 이주 대행사41), 의류(39), 약초(35), 해외유학 대행사(34), 회계사(34), 그리고 여행 대행사(31)였다. 이 중 몇몇의 사업체들은 한국인 여행객 혹은 한국에 있는 잠재적 이주민 혹은 학생들에 크게 의존하였다.
 
이경숙(2008)은 그러한 종류의 사업이 번영하기 시작하면 비슷한 업종들이 짧은 시간 안에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며 이 같은 치열한 경쟁은 특히 공동체의 경제적 상황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Campsie지역에 있는 한인 소유의 사업체들은 베트남을 통해 이주한 사면 이민자들과 1970년대 중후반 이들과 결합하기 위해 이주한 가족들에 의해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Campsie 지역은 다양한 종류의 많은 수의 사업체들로 ‘코리아타운’의 이미지를 유지하고 있는데 Strathfield와 Eastwood는 한인 소유의 사업체들을 지속적으로 끌어모으고 있다.
 
Eastwood는 1984년부터 한인 소유 사업체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는데 신발 수선 가게가 가장 처음 설립되었고, 그 이후 1987년에 식료품 가게가 들어섰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한인 이주자들은 특히 자녀들의 교육을 목적으로 Eastwood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2008년에 당시에는 8개의 사립 코칭 스쿨이 있었다 (이경숙, 2008: 180). 한인 유학생들과 그들의 가족은 Strathfield에 있는 한인 사업체의 주 고객을 이룬다. 이들 고객들은 한국적 생활방식, 헤어스타일, 패션을 유지하고자 하며 이는 특히 미용실, 의류점, 식당 그리고 식료품 가게의 설립으로 이어지게 한다.
 
또 중요했던 사업은 비디오 대여점이었는데 이는 1990년대에 한국 TV 시리즈와 영화를 공급하던 곳이었다. Kings Cross와 Bondi Junction 또한 중요한 한인 사업 지역으로 발전하였다. 1980년대 후반에 한인 소유의 Capital Hotel 개업 이래로 식당과 기념품점과 같은 사업들이 뒤따라 생겨났다. 영어를 배우는 많은 학생들이 Bondi Junction에 있는 한인 소유 사업체의 주 고객을 이루었다.
 
2011년 ABS 조사에 따르면, 교외 지역에는 1,666명의 한국 태생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Chatswood에 있는 한인 사업들은 특히 숙련/비즈니스 이주자, 외교관, 한국 기업에 의해 파견된 노동자들을 유인하였다. 마지막으로 Parramatta는 최근 들어 한인 이주자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거주 지역이 되었고 이 지역에서의 사업체들이 지속적으로 번영하고 있다(이경숙, 2008: 184-6).

 
6. 한국어, 한국 예술과 한국 문화의 보전

 
한국 문화와 전통을 유지하는 것은 한인 이민자가 자신의 에스닉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은 자신이 한인 공동체 내에서 모국의 문화를 공유하는 내집단의 구성원임을 확인시켜준다.
 
이는 또한 나머지 호주 인구와 상호작용하면서 그들이 외집단의 구성원들과 자신을 구분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 장에서는 한인 이민자가 젊은 세대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한국 예술과 문화를 진흥시키는 방식에 대하여 논의하고자 한다.
 
대체로 시드니에서는 한국어를 가르치고 홍보하는 다섯 가지 방법이 있다.

(1) 대학교 학과를 통한 방법, (2) 정부가 운영하는 고등학교 졸업증서를 위해 학생들을 준비시키는 토요일 한국어 학교를 통한 방법, (3) 초등학교에서 한국어를 제 2언어로 배우는 방법, (4) 교회나 절 같은 종교 조직 내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방법, 그리고 (5) Linfield 한국 학교 혹은 호주한국 학교와 같은 독립 학교를 통한 방법이다.
 
한글, 한국 문화 그리고 역사를 가르치는 것은 한인 공동체 내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는 한인 이민자들이 다음 세대에 이를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김인기, 2008b: 234). 김인기는 한국 정부 지원의 교육 센터가 한국어 교육과 학습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시드니에 있는 한국 영사관 내에 설립되었다고 언급하였다.
 
그러나 센터는 어떤 종류의 조직적인 지원도 거의 받지 못했다. 한인 공동체 내에서의 이런 교육에 대한 노력은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아이들을 둔 한국 이민자들에 의해 재정적으로 지원 받고 있다. 다음은 몇 가지 성공적인 한국어 교육 노력에 대한 소개이다.
 
첫 번째로, 시드니 한인 학교는 176 Redfern Street, Redfern에서 1978년 11월 13일에 시작하였다. 개교식에 참석한 하객들로는 시드니 한국 영사관, 서울에서 온 두 명의 교회 목사, 그리고 시드니 한인 연합교회의 김상우 목사가 있었다. 처음에 학생들은 화요일과 목요일마다 학교에 참석하였고 이후에는 학생들의 일상적인 학업 부담으로 인해 주말로 변경되었다.
 
시드니한인학교와 시드니 내 한인사회는 1979년 Sydney Town Hall에서 삼일절 기념식을 공동 주최하였다. 기념식은 ‘한국인의 밤’을 포함했는데 이중창, 독창, 춤, 그리고 시 낭송 등의 공연이 진행되었다. Town Hall의 좌석들은 만석이었다. 시드니한인학교는 계속 성장하였고 가장 많은 학생 수는 120명에 달하였다.
 
학교는 84 Redfern Street, Redfern에 있는 더 넓은 부지로 옮겼고 1985년에는 또 다시 141 Lawson Street, Redfern에 있는 부지로 이동하였다. 후자는 박상규에 의해 기부되었는데 그는 학교의 교감 선생님이자 청소 용역업체를 운영하고 건물을 매입하기 위해 소득을 벌었다고 한다. 부모들은 카풀을 통해 학생들의 통학을 제공했고, 학교 운영비는 한국 정부와 학교 간부들이 부담했다(김인기, 2008b: 235).
 
시드니한인학교는 또한 한국어 말하기 대회를 주최하였는데, 이는 한국어와 ‘한국의 민족정신’을 홍보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졌다. 학교는 한인 이주민, 외교관 그리고 한국 기업의 임시 거주민의 자녀들이자 1.5 및 2세대 한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데 유일하게 적절한 장소였다.
 
그러나 학생 수가 급격하게 감소하면서 학교의 역할 역시 줄어들었는데 결국 2004년 12월에 폐교하였다. 이는 많은 한인 교회들이 그들만의 한글학교를 운영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한인 교회는 호주 내 한인 공동체에서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유지하는데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쳐왔다(Han, 1994).
 
두 번째로, Linfield ‘한국 학교’와 ‘호주 한국 학교’는 독립적 학교들이었다. 한인 이주민들과 대한 상공 회의소는 1993년 5월 1일에 Linfield 학교를 처음 설립하였다. 처음에는 Linfield 초등학교에서 매주 토요일마다 교육이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이후 1997년 4월에 Turramurra 초등학교로 장소를 옮겼다.
 
이 학교는 한국에서 사용하는 교육과정, 교과서, 그리고 보충 자료를 각 학년마다 사용한다. 이는 미래에 한국으로 귀국했을 때 학교에서의 적응을 촉진시키기 위함이었다. 이 교육 과정은 또한 한인 이민자 자녀들로 하여금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높은 수준으로 학습하게끔 만든다.
 
이들이 토요일 하루에 학습하는 분량은 한국에 있는 학교에서 학생들이 일 주일 동안 배우는 학습량의 수준이다. 2008년을 기준으로 25명의 교사와 280명의 학생들이 있었으며 유치원에서 12살까지 13개의 다른 학년으로 이루어져있다. 학습 과목은 한국어, 수학, 사회, 한국사, 지리학, 음악 그리고 중국어였다.
 
그러나 신기현 박사(UNSW 한국어학과 교수)는 이 학교 교장으로서 교육 과정을 조정했고 임시 거주 학생들과 영주권 취득 학생들의 교육 과정을 구별하였다. 학생들의 과외 활동은 한국 문화와 긴밀한 연관이 있는 춤, 음악 밴드 그리고 오케스트라를 포함한다. 학교 교사들은 대부분 한국에서 몇 년간 가르친 경험이 있었다. 학부모 협의회는 학교 근처에 매점을 운영하기도 하였다(김인기, 2008b: 240).
 
1991년에 NSW 교육부가 한국어를 중학교와 고등학교 교육과정에 포함할 중요한 외국어 중의 하나로 채택하면서 호주 한국학교는 1992년 9월에 설립되었다. 시드니 한국 영사관, 한국 교육 센터, 그리고 시드니 한인 사회는 이 학교 설립을 지원하였다. 학교는 본래 Belmore에서 개교하였고 현재는 Pennant Hills High School에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학교의 핵심 목표는 한국어, 한국사, 한국 문화 그리고 중국어를 가르침으로써 ‘자랑스러운 한국계 호주인’을 양산하는 것이다. 학생은 유치원에서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 학생까지 다양하며, 학생의 한국어 능력 수준에 따라 8개의 다른 분반에서 공부를 하게 된다.
 
또한 여러 가지의 교외활동도 존재하는데 창의적 글쓰기, 전통 스포츠, 한국 전통 노래 부르기, 그리고 전통 악기 연주 등이 있다(김인기, 2008b: 242).
 
세 번째로 Saturday School of Community Languages는 특히 중요한데 학생들(9학년에서 12학년)로 하여금 대학교 입학시험인 HSC(High School Certificate)를 준비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국어는 1992년에 HSC 과목 중 하나로 채택되었고 첫 코호트(cohort)가 한국어 시험을 1994년에 치렀으며 대학 공부를 1995년에 시작하였다.〠 <계속>


한길수|멜번 모나쉬 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미디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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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5/27 [17:15]  최종편집: ⓒ christian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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