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립 개척과 우리 교회 우상

손봉호/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9/05/28 [11:13]

서울영동교회의 분립 개척


1976년 서울영동교회가 개척되어 교인들이 서울 강남구 논현동 상가 이층, 지하실 등에서 예배를 드렸다.
 
1978년 개척에 동참했던 고 신세훈 장로 (당시에는 집사) 내외분이 부지를 헌납하여 예배당을 짓기로 했다. 임시 설교자로 섬기고 있었던 나는 300명 이상은 앉을 수 없는 작은 예배당을 짓자고 제안했으나 제직회에서 부결되고 약 500명 정도가 모일 수 있는 건물이 세워졌다.
 
그 대신 교인이 300명이 넘으면 분립하자는 의견을 제시했고 교인들이 동의해 주었다. 1990년에 교인 수가 500여 명 되었을 때 한영교회를 분립 개척했고, 1993년에 일원동 교회, 1994년에 서울남교회, 그리고 1998년에 샘물교회를 분립 개척했다.
 
그리고 분립된 한영교회는 다시 다니엘교회를, 샘물교회는 수지 샘물교회, 은혜샘물교회, 좋은나무교회를 분립 개척하여 모교회를 비롯해서 9교회가 서울영동교회란 뿌리에서 생겨난 셈이다.
 
분립 개척의 방식은 상황에 따라 모두 달랐다. 한영교회 (2012년에 빛소금교회로 개칭)의 경우에는 지금의 송파대로 동쪽에 거주하는 교인들은 원칙적으로 새 교회로 가기로 했다. 100명이 채 안 된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본인들의 뜻도 존중했으나 대부분의 교인들은 교회방침에 잘 따랐다. 그리고 장로들이 몇 분 파송되어 몇 년 동안 새 교회에서 시무하다가 서울영동교회로 돌아간 경우도 있었다. 분립 개척을 주장했기 때문에 나도 같이 나갔다.
 
원칙적으로 자체 건물을 갖지 않기로 하고 한영외국어학교 강당에서 예배를 드렸고 대산 강당 건립에 수억 원을 기부하였으며, 상담교사를 파송하는 등 여러 가지 모양으로 학교교육을 도왔다. 처음 얼마간 교역자 사례를 서울영동교회가 담당했으나 새 교회가 잘 자라 오래 계속할 필요가 없었다.
 
서울남교회는 고신총회 회관 건물 지하 강당에서 시작하여 지금까지 모이고 있으며 원하는 교인들만 분립개척에 참여하였다. 교역자는 따로 초빙하는 방식을 택했다.
 
일원동교회는 이미 설립되어 있는 개포동교회가 그 지역의 재개발로 받게 된 부지에 새 건물을 세울 능력이 부족해서 서울영동교회가 재정적으로 보조하고 자원하는 장로 몇 분과 교인들이 나가서 교회 이름을 일원동교회로 고치고 교역자를 새로 모셨다. 가장 대규모의 분립은 샘물교회였다. 담임목사였던 박은조 목사가 약 300명의 교인과 상당수의 장로들과 함께 분당에서 세운 것이다.
 
그 뒤에도 서울영동교회와 분당샘물교회는 계속 자라 교인의 수가 각각 2천 명 정도의 큰 교회가 되었다. 이제는 서울과 분당 등에 교회가 포화 상태라 또 하나의 교회를 세우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지 부담이 되어서인지 그 이상 분립개척을 시도하지 않고 있다.
 
물론 나는 이제 은퇴하여 장로도 아니고 서울영동교회나 분당샘물교회 정책에 간여할 위치에 있지도 않다. 그러나 만약 나에게 결정권이 주어졌다면 이들 교회도 분립 개척을 계속 시도했을 것이다.

 
대형교회가 왜 나쁜가?

 
왜 대형교회가 나쁜가? 이 세상,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여러 가지가 크면 클수록,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으로 평가된다. 돈, 힘, 땅, 집 등 물질적인 것들이 대부분 그렇고 나라의 인구나 군인 수, 모임의 회원 수, 학교의 학생 수도 그렇다. 종교의 신도 수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모든 시대의 모든 기독교인들은 동료 신자들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기뻐하고 더 많아지도록 기도하고 전도한다. 한국에도 그리스도인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않겠는가? 교인 수가 많아지면 대형교회가 생겨나는 것도 자연스런 현상이 아닌가?
 
대형교회는 작은 교회들이 할 수 없는 큰 사역들을 감당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유능한 일꾼도 많고 재정도 넉넉하므로 선교사도 많이 파송하고 큰 규모의 사회봉사도 수행할 수 있다. 작은 교회들이 연합하여 하는 것보다는 시간, 재정, 과정 등을 절약할 수가 있어서 훨씬 더 효율적이 될 수 있다. 소위 규모의 경제 원리에 의하여 복음사역이 더 효과적이 될 수 있다 할 수 있다.
 
그리고 목회자나 교인들이 원하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이 교회가 대형화될 수도 있다. 목회자가 설교, 심방, 교육, 상담 등 목회를 잘 하고 성도들의 신앙이 성숙하고 전도를 열심히 하면 자연히 교회가 크게 성장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이렇게 해서 대형화된 교회들이 없지 않다.
 

심지어는 다른 교회에서 온 교인들을 환영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교인의 수가 늘어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80년 대 서울영동교회가 잘 자랄 때는 다른 교회에서 오는 신도들을 다시 돌려보내려고 노력했지만 별로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 모든 장점이나 불가피한 이유에도 불구하고 대형교회는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목회자와 교인 간, 성도 상호 간의 친밀한 교제가 어려운 것, 교회 운영이 어쩔 수 없이 기계적이고 관료적이 되는 것, 교인들이 익명적이 되는 것 등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약점이다. 그 외에도 대부분 간과되는 약점들이 적지 않다.

 

1. 우선 대형교회에서는 평신도들이 교회에서 책임있는 봉사를 할 수 없게 되고 대부분의 교인들은 수동적이 된다. 작은 교회나 개척교회에서는 거의 모든 평신도들이 이런 저런 교회의 직분을 맡지 않을 수 없다. 책임을 지고 봉사하는 과정에서 적극적이고 헌신적이 되어 신앙과 인격이 성숙하고 지도력도 생겨난다.
 

그러나 대형교회는 재정적으로 넉넉하고 구성원 수가 많기 때문에 교회의 부서들에는 부교역자나 유급 전문가들이 책임자가 된다. 자연히 평신도는 비록 열심히 봉사하더라도 책임자의 지시와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위치에 설 수밖에 없다.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봉사는 봉사자들 자신도 모르게 수동적이고 소극적이 되며 그런  위치에서는 신앙의 성숙이 이뤄지기가 어렵게 된다.
 
물론 대형교회에서도 훌륭한 평신도 지도자들이 배출되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러나 전체 교인 수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최근 기독교인의 수가 전체적으로 줄어들고 있고 교회 수도 따라서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 대형교회는 오히려 교인 수가 늘어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약한 교회가 문을 닫으면 나머지 교인들이 다른 약한 교회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대형교회로 전입하기 때문이다. 설교도 좋고 찬양대의 찬양도 멋지며 무엇보다도 자녀들의 신앙교육이 체계적으로 잘 이뤄지기 때문이라 한다. 충분히 이해가 되는 이유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거기서 과거 작은 교회를 섬길 때만큼 열심히 교회를 섬길 수 있으며 그 때만큼 책임의식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교회와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겠는가? 우선 그렇게 할 기회가 없고 기회가 주어지더라도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그동안 대부분은 소극적인 교인이 되며 아주 쉽게 명목상의 교인이 되고 만다. 거대한 군중에 휩쓸리는 무명의 교인으로 조금씩, 조금씩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오늘날 한국의 대형교회는 작은 교회들이 피눈물 나는 노력을 기울여서 전도해 놓은 교인들을 빼앗아다 명목상의 교인으로 만드는 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
 
2. 대형교회는 헌금을 적게 하게 한다.

세종대 회계학 전공 황호찬 교수가 수년 전 전국의 여러 교회의 연말 결산보고서를 검토한 결과 재미있는 현상을 하나 발견했다. 경제적으로 매우 낙후되어 있는 면 (面) 단위 지역에서 100명 이하의 교인이 모이는 교회의 교인 한 사람이 일 년간 바치는 평균 헌금 액수가 서울에서 1천 명 이상 모이는 교회의 교인 한 사람이 바치는 평균 헌금 액수보다 많다는 것이다. 교인 수가 많기 때문에 전체 헌금 액수는 대교회가 많겠지만 교인 한 사람이 바치는 헌금 액수는 작은 교회 교인의 헌금보다 적다는 것이다.
 
대형교회는 교인들로 하여금 헌금을 적게 하도록 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헌금 액수가 신앙의 강도를 객관적으로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는 반영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대형교회 교인들이 상대적으로 헌금을 적게 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주위에 수많은 교인들이 있고 교회 전체의 연보 액수도 천문학적 숫자며 예배당도 호화스럽게 꾸며져 있고 유급 사역자들이 우글거리는 상황에서 교인 개인은 스스로가 거대한 군중 사이에 끼여 있는 미미한 모래알 같이 느껴질 것이다. 거기서 전체에 대한 책임의식이 생겨나기는 쉽지 않다. 권리와 혜택은 즐기지만 책임은 지지 않으려는 일종의 군중(mass) 의식이 형성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런 현상이 어찌 헌금에만 국한되겠는가?
 
3. 대형교회는 교역자와 교인들을 교만하게 만든다.

큰 재벌회사 사원들이 갖기 쉬운 특권 의식을 대형교회 교인들이 갖게 된다는 것이다. 가끔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란 것을 알고 어느 교회에 다니느냐고 물으면 개척교회나 작은 교회 교인들은 “예, 그저 조그마한 교회에 다닙니다” 하고 마치 죄나 지은 듯 목을 움츠린다. 반면 대형교회 교인들은 “예, 제가 OO 교회에 나가지요!” 마치 시험에 합격해서 그렇게 크고 유명한 교회 교인들이 된 것 같이 반응한다.
 
훨씬 더 심각한 것은 대형교회 교역자들, 특히 담임목사의 경우다. 거대한 군중이 자기만 쳐다보며 자신의 설교를 경청하며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즉각적으로 반응할 때, 다른 동료 교역자들이 부러워하고 우러러볼 때, 정부의 고관들, 정치인들, 사회 명사들이 깍듯이 예의를 지키고 공손하게 대우할 때, 기사가 딸린 큰 차를 타고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내리는 초라한 군중들을 바라볼 때, 1등 혹은 2등 칸 비행기를 타기 위하여 3등 칸에 앉아 다리를 제대로 펴지 못하는 일반 승객들과는 다른 통로로 비행기에 오를 때, 웬만한 회사 사장이나 대학 총장보다 더 많은 월급을 받고 그들보다 훨씬 더 자유롭게 돈을 쓸 수 있을 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처럼 겸손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교인이 천 명 이상 모이는 교회의 목사가 자기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라 하기는 매우 어렵다”고 한 스코틀랜드 신학자가 지적했다 한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관찰이다. 모든 대형교회 목사가 모두 고 한경직 목사님처럼 겸손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4. 대형교회에는 부정이 일어날 소지가 많다.

돈, 명예, 권력 같은 세속적인 가치는 크면 클수록 더 큰 유혹을 유발한다. 만 원 때문에 양심을 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100만 원쯤 되면 부정한 방법을 써서라도 가지고 싶어 하고 1억이 되면 그런 유혹이 그만큼 더 커진다.
 
대형교회에 금전과 관계되는 사건이 자주 일어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런 것은 명예나 권력에도 마찬가지다. 대형교회의 담임 목사는 더 유명해지려는 유혹을 받고 대형교회에서 장로가 되고 싶은 유혹은 작은 교회에서보다 더 클 수밖에 없다. 목회자 세습이 작은 교회에서는 거의 일어나지 않고 주로 대형교회에서 일어나는 것도 그 때문이다.
 
5. 대형교회는 한국 기독교계에 ‘우리 교회 우상’을 세우는데 크게 공헌했다. 교회가 커지면 분립하고 교회가 커지는데 따르는 세속적인 힘을 키우고 누리지 않았더라면 교회 성장을 위한 경쟁이 지금처럼 치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형버스가 온 시내를 누비면서 가까이 있는 작은 교회에 나갈 수 있는 교인들을 다 끌어 모으고 많은 사례와 큰 혜택을 미끼로 유능한 설교자와 사역자들을 초빙하여 교회 간에 빈익빈, 부익부의 자본주의적 경쟁을 치열하게 만들었다.
 
그 열매가 지금 한국 기독교가 섬기는 ‘우리 교회 우상’이다.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우리 교회’의 명성이 더 중요하고 하나님 나라 확장보다는 ‘우리 교회’ 성장에 더 치중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떨어지고 기독교인 전체의 숫자가 줄어져도 ‘우리 교회’만 성장하고 유명해지면 비도덕적이고 비신자적인 방법을 스스럼 없이 자행하고, 하나님 나라에 아무리 유익하고 하나님 영광이 아무리 드러나는 일이라도 ‘우리 교회’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달가워하지 않는 상황이 벌어진다.
 
하나님보다 ‘우리 교회’가 더 중요하면 ‘우리 교회’가 우상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신앙은 교회의 목적이 아니라 교회 성장의 수단으로 변질된 것이다.
 

주일예배에 2천 명 이상이 모이면 대형교회(mega- church)라 한다는데 미국에는 그런 교회가 1천300개가 있고 세계 최대의 10개 대형교회 가운데 다섯 개가 한국에 있으며 여의도순복음교회는 교인이 80만 명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것으로 알려졌다. 대형교회가 자본주의 사회에서만 극성을 부리는 것은 교회 성장이 기업들과 비슷하게 경쟁적으로 이뤄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한국 교회사 회의 지탄을 받고 결과적으로 교인과 교회의 수가 줄어드는데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대형교회들이다.
 
지금이라도 대형교회들이 <서울영동교회>, <남서울교회> (홍정길 목사), <높은 뜻 교회> (김동호 목사), <분당 우리교회> (이찬수 목사) 처럼 과감히 교회를 분립하는 용기와 신앙을 보여 주면 한국 교회가 다시 살아나고 명예가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 〠


손봉호 박사|윤리학자. 사회운동가. 철학박사. 외국어대학교와 서울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한성대학교 이사장과 동덕여자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였다. 2011년에 나눔국민운동본부를 설립해 대표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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