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세의 생활을 중시하는 시대의 기독교 신앙
 
최성수/크리스찬리뷰

돈의 힘


현대를 설명하는 개념적인 설명이 많이 있지만 가장 쉬운 길을 택한다면 이렇다. 오늘 우리는 현세의 생활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시대에 살고 있다. 현세의 생활을 중시한다는 사실에는 삶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보장하며 지속 가능하게 하는 동력에 큰 비중을 둔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기본적으로는 힘이라 말할 수 있지만, 이것은 시대에 따라 변하는 매우 다양한 얼굴을 갖는다. 일에 대한 대가로써 돈은 대표적인 모습이다. 돈은 삶의 안정을 가져다주고 건강한 삶의 환경을 조성하며, 권력을 무력화시킬 수 있고, 명예를 사들일 수 있다.
 
세계 정치에 작용하는 돈의 힘을 고려한다면 한층 더 나아가서 세계를 변화시키는 동력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현세의 생활이 중시된다는 사실은 몸과 몸의 주변 환경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전제한다. 생명활동의 주체로서 뿐 아니라 인격의 주체로서 몸은 현세의 생활을 주체적으로 이끄는 실재이다. 과거 특히 종교적인 세계관이 지배적인 때에는 영혼과 육체의 문제에서 특히 영혼만이 인격의 주체로서 중시되었다.
 
육체를 경시한 건 아니지만 육체는 감각적인 세계에 속한 것으로 초월적인 세계로 비상하는 영혼의 활동을 제한할 뿐이었다. 오늘날에는 육체와 영혼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고 영육 통합체로서 몸으로 이해하지만, 적어도 당시에는 그렇게 이해되었다. 현세의 생활이 중시되는 데에는 영육 결합체로서 몸의 르네상스를 전제한다.
 
현세의 생활이 중시된다는 사실은 구원을 중시하는 세계관의 침체 내지는 몰락을 전제한다. 행복의 지연 혹은 구원을 위해 현실의 고통을 감수하는 일은 설득력을 잃고 있다. 종교적인 세계관이 등한시되고 오히려 현세에서 몸이 지각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삶(필자는 의미를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을 영성으로 본다, 책 “대중문화 영성과 기독교 영성”을 참고하면 좋겠다.
 
이런 의미에서 영성이 있는 삶이 중시된다. 오늘날 구원은 초월적인 세계로의 이행이 아니라 몸이 경험하는 삶의 기쁨과 행복이다. 관건은 현세의 생활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의미있는 말과 현세의 생활에 가치를 부여하는 의미 있는 행동이며 또한 행복한 삶을 보장하는 정치·경제 체계를 구원으로 여길 수 있게 하는 의미 있는 삶이다.
 
그러나 현세의 생활을 중시한다고 해서 미래를 포기하는 건 아니다. 몸의 보존과 지속을 위해 곧 다가 올 세대의 지속적인 생존을 위해 세계의 지속 가능성을 찾는다. 현세의 생활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안전한 미래를 염두에 두는 이유는 몸으로써 인간의 보존과 지속이 가능하게 하려함이다.
 
현세의 생활을 중시하는 세계관이 오늘날 기독교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이며 또한 문제이다. 인간이 몸을 갖고 있기 때문에 쉽게 극복하기 힘든 딜레마다. 세상은 현세의 생활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정위되어 있고, 모든 가치들은 그쪽을 지향하고 있다.

 
교회 앞에 놓인 세 갈래 길

 
적어도 이런 현상은 대세다. 이런 때에 현실을 떠날 수 없고 오히려 현실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도록 보냄을 받은 그리스도인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흡사 막다른 골목같이 여겨진다.
 
좁기도 하거니와 더는 나아갈 방법이 없다. 현세의 생활에 대한 기독교 신학적인 재평가가 이루어지든가 전통적인 기독교 세계관의 설득력을 입증해야 할 시점이다.
 
이와 관련해서 교회 앞에 놓인 길은 세 갈래다. 현세의 생활을 중시하는 태도에 세례를 베풀어 그것으로부터 얻는 간접적인 유익(기복신앙과 교회의 양적인 성장 등)에 만족하거나 아니면 성속을 분리하고 세속을 정죄하여 세상에서와는 다른 가치와 의미가 있는 삶을 요구하면서 구원의 세계를 부각시키는 것이다.
 
이도저도 아니면 교회 안과 교회 밖의 삶이 다른 이중성을 관용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마냥 이중적인 삶을 관용할 수는 없으니 적어도 말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우선시하면서 현세의 생활에 충실하게 사는 것을 묵인하는 것이다. 보통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포장된다. 이것들과 다른 것이 있다면 소위 진보적이라 불리는 목회 행위에서 볼 수 있다.
 
이런 질문을 생각해보자. 현세의 생활을 중시하는 건 잘못인가? 몸의 경험에 가치를 부여하고, 삶의 개인적인 차원을 중시하는 것, 몸이 건강하고, 평안하며, 기쁨을 누리며, 궁극적으로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고 또 누리는 일은 결코 잘못이 아니다.
 
문제가 된다면 그것이 타인과의 공존을 위협하거나 간과하는 일로 나타나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는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면 법을 어기지 않는 범위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한다.
 
그러므로 현세의 생활을 중시하는 건 결코 잘못이라 볼 수 없다. 그러므로 현세의 생활을 중시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말하는 입장에선 현세의 생활을 정죄하지 않고 중시하되 개인주의적이지 않고 이기적이지 않으며 사회 정의와 평화에 기여하는 신앙의 실천을 강조한다.
 

공존의 생존과 번영을 지향하지만 기복주의와 맘몬이즘을 철저하게 비판하며, 정의롭지 못하고 폭력적인 행위를 어떤 경우에도 용납하지 않는다. 쉽게 말해서 현실 비판과 사회 개혁을 통한 재구성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려고 한다.

 
현세의 생활과 기독교

 
이상의 네 가지 가능성은 현재 한국교회가 선택하여 가고 있는 길이다. 무엇이 옳은 길인지를 묻는 건 현실적으로 모두를 만족할 만한 대답을 찾기가 어렵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현세의 생활에 매몰되지 말아야 하며, 그렇다고 그것을 등한시하고 장차 임할 하나님의 나라에만 목을 맬 수도 없다. 신앙과 삶의 이중성을 관용한다는 건 더더욱 힘든 일이다. 하나님은 온전한 거룩함을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질문은 이렇다. 첫째, 현세의 생활을 중시하는 태도가 어찌해서 기독교에게 문제가 되는가? 앞서 언급했지만, 현세의 생활을 중시하는 사람은 대체로 현실 지향적이다. 초월적인 세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현실에서 행복이 구원이다.
 
또한 현세의 생활을 중시하는 사람은 개인주의적이다. 개인을 넘어 공동체를 구현하는 일에 가치와 의미를 두지 않는다. 현실에서 행복이 구원이라는 메시지를 긍정하면서 그것을 개인의 행복으로 환원한다. 모든 것은 개인과의 관계에서 비로소 의미와 가치를 갖는다.
 
또한 그것에 전념하는 가운데 몸이 경험할 수 있는 또 다른 세계 곧 초월적인 세계의 현재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며, 보이지 않지만 역사에서 작용하는 섭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직 합리적인 것과 질서를 통해서만 역사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다. 설령 보이지 않는 존재와 힘과 작용을 믿는다 해도 오직 합리적으로 이해가 가능하며 또한 현세의 생활에 유익을 주는 범위에서만 인정한다.
 
둘째, 현세의 생활을 중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직접적으로는 현실이 주는 매력에 사로잡혔기 때문이지만, 간접적으로는 교회에 대한 실망과 좌절이다. 불의한 교회가 원인 제공자이다.
 
목회자와 성도의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행위는 교회의 행위와 말씀 자체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켰다. 교회의 각종 부조리는 교회가 강조하고 추구하는 초월적인 세계에 대한 회의를 가져온다. 교회 스스로가 자신의 잘못된 행위로 하나님의 존재와 역사를 부정한 셈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로 인해 교회의 존재 의미를 깨닫지 못하게 되니 사람들은 그 대안으로 합리성이 지배하면서도 삶의 의미를 얻을 수 있는 현세의 생활을 중시하게 된다. 이것은 ‘가나안 성도’라는 현상을 초래한 원인이다.
 
셋째,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갖고 또한 현세의 생활을 중시하면서도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사는 길이 있을까? 현세보다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에 더 큰 가치와 의미를 두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인간으로서 피할 수 없는 현세의 생활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워낙 복잡하게 분화된 현실 사회에서 혜안의 답을 얻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이 질문을 염두에 두고 초기 예수를 따르던 성도들에게서 나타난 특이한 현상을 주목해보자.
 
당시 소수자로서 예수를 따르는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때문에 박해를 받았다. 순교자가 속출하는 현실에서도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부활의 약속에 대한 소망을 포기하지 않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입증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길 결코 굽히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세상의 박해를 이긴 것이다. 이들은 현세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영생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현세의 생활에서 확인하고 확증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증언할 수 있었다.
 
시대의 흐름에 쉽게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듯이, 모여 기도했으며 사도들의 가르침에 따라 살려 노력했다. 이것은 당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원인이다.
 
엄밀히 말해서 교회가 오늘날 직면한 문제는 성도가 현세의 생활을 중시하면 할수록 더욱 개인적으로 되고 또한 교회와 교회의 행위 그리고 복음의 메시지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교회는 한편으로는 개혁을 통한 교회의 갱신을 외치고 공동체를 강조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 행위에 대한 참여를 강화하고 그것을 의무로 규정하면서 직분임명을 위한 조건으로 삼을 정도가 되었다.

 
현세에서 이루어지는 성도의 삶

 
오늘날 성도가 현세의 생활을 중시하기 때문에 교회로부터 멀어진다면 현세의 생활 자체를 보는 부정적인 시각을 고쳐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신학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걸까, 아니면 성도들에게 현세의 생활로부터 부름을 받은 자로서의 사명을 이전보다 더욱 강조해야 하는 걸까?
 
종교개혁자들은 현세의 생활(사실 당시에는 기독교 세계관이 지배적인 사회였기 때문에 교회 안과 밖의 삶을 구별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과 하나님의 나라 사이에 ‘소명’이라는 이름으로 다리를 놓았다.  

 

곧 성도는 교회로 부름을 받아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하나님의 영광 안으로 초대되며, 또한 예배 후에는 예배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 가운데 나타내기 위한 부르심을 받아 세상으로 보냄을 받는다.
 
교회와 세상은 예배를 계기로 거듭 새롭게 형성되는 성도의 소명을 매개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교회 밖은 비록 유혹하는 것들로 넘쳐나긴 하지만 더는 멸망 받을 대상으로서 세속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대상이며 성도가 부름을 받아 나아가는 곳이다.
 
곧 교회 예배에서 하나님의 친밀한 사귐 안으로 초대받아 경험했던 하나님의 영광을 현세의 생활을 매개로 경험할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여 아직 믿지 않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심을 경험하도록 하는 현장이다.
 
현세에서 이루어지는 성도의 삶은 예배를 통해 경험된 하나님과의 사귐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진다. 현세의 생활 역시 예배의 현장이다. 따라서 현세의 생활을 중시한다고 해서 교회가 힘들어지는 건 아니다.
 
혹시 문제의 핵심은 현세의 생활을 중시한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갖고 사는 것을 분리한 데에 있지 않을까? 
 
현세의 생활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에게서 감격할 정도의 삶을 경험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현세의 삶을 매개로 사람들에게 감격을 줄 수 없다면 도대체 무엇으로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설득할 수 있을까?
 
현세의 생활로 부름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또한 스스로를 의미 및 가치를 부여하는 자로 자리매김하면서 하나님처럼 되려 하지 않는 한에서 자유로운 삶을 보장받았다. 필자가 생각하는 것으로 현세의 생활을 중시하면서도 그것으로 사람들에게 감격을 줄 수 있는 삶의 모습 곧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갖고 사는 모습의 기본은 다음과 같다.
 
돈을 벌 수 있으나 돈에 의지하지 않고 돈으로 삶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며 오히려 돈으로 하나님을 세상에 나타낼 목적을 실현하는 삶, 이를 위해 기꺼이 돈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나눌 수 있는 희생, 권력을 추구할 수 있으나 권력에 의지하지 않고 권력으로 삶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며 오히려 권력으로 하나님을 세상에 나타낼 목적을 위해 사는 태도, 이를 위해 기꺼이 권력을 내려놓을 수 있는 의지, 명예를 얻을 수 있으나 명예에 의지하지 않고 명예로 삶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며 오히려 명예로 하나님을 세상에 나타낼 목적을 위해 사는 태도, 이를 위해 기꺼이 명예를 내려놓을 수 있는 결단, 얼마든지 욕망에 따라 살 수 있으나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대로만 살지 않고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는 가운데 하나님을 세상에 나타낼 목적을 위한 삶, 이를 위해 욕망을 죽일 수 있는 의지 등.
 
여기서 벗어나는 삶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오히려 돈과 권력과 명예를 신뢰하고 썩어져 갈 욕심에 따라 사는 것이며 암묵적인 방식으로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려하는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닐지.〠


최성수|조직신학박사, 장신대·연세대·한남대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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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5/28 [11:34]  최종편집: ⓒ christian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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