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에 빚진 한국교회로서 감당해야 할 사명

호주 원주민과 지구촌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의료지원·봉사 활동

글|김명동,사진|권순형 | 입력 : 2019/06/25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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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주한인의료선교회(MMMA)로 단체명을 변경하고 새로운 사역을 준비 중인 이사장 최승일 목사가 본지와 인터뷰를 가졌다.     ©크리스찬리뷰

 

아시아 오지의 한센병 환자 돕기에 나섰던 ‘호주맥켄지한센선교회’(The Mackenzie Leprosy Missioin in Australia Incorporated: MLMA)가 명칭을 ‘호주맥켄지의료선교회’(The Mackenzie Medical Missioin in Australia Incorporated :MMMA)로 바꾸고 한센인에서 원주민과 지구촌 가난한 이웃을 위한 의료지원과 봉사활동까지 선교의 범위를 넓히며 새롭게 출발했다.
 
호주를 방문한 호주맥켄지의료선교회(이하 MMMA) 이사장 최승일 목사(59. 서울 상도교회 담임목사)는 “지금까지 호주맥켄지한센선교회를 후원하시고 기도하시는 분들의 헌신을 하나님께서 갚으실 것을 확신한다”며 동역자들에게 먼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이어 최 목사는 단체명을 MMMA로 개명한 이유에 대해 “한센인 신규환자가 거의 사라진 상황에서 한센인만을 대상으로 사역을 하다 보니 사역의 범위가 좁을 수밖에 없었다”며 “이제는 포괄적으로 사역의 범위를 넓혀 호주 원주민과 지구촌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의료지원활동과 봉사활동으로 적극적이고 효과적인 사역을 감당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 헤브론병원을 방문한 최승일 목사(오른쪽 2번째)가 심장수술을 받고 중환자실에서 생사의 기로에 놓여 있는 어린이(쓰레이빗)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이후 쓰레이빗은 기적처럼 회복되어 건강을 되찾았다.(2015. 8)     © 크리스찬리뷰


“의료선교를 하게 되면 당연히 그 안에 한센선교도 들어가죠. 일하는 폭이 넓어지니 앞으로 동역자도 많아지리라 보고 있습니다. 다른 의료선교단체와도 협력하고 가능하다면 캄보디아 헤브론병원하고도 협력하면서 무엇을 도울 수 있을지, 환자들을 돌봐주고 그곳에 교회가 세워질 수 있도록 소망하고 있습니다.”
 
최 목사는 대뜸 캄보디아 헤브론병원 이야기를 꺼냈다.
 
“교회 장로님들하고 헤브론병원을 갔었을 때 아, 정말 좋았거든요. 마을로 들어가 보니까 불당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걸 보고 그곳에 교회 하나만 세워도 이분들을 영적으로 구원할 수 있겠다, 이런 선한 욕심, 소망, 비전 이런 것들이 생겨나서 너무 좋더라고요.”
 
최 목사는 “정말 느낀 게 많았다”며 “의료선교에 매진하는 단체로 새롭게 거듭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 멜번에 있는 맥켄지 선교사 묘지를 찾아 헌화하고 기도하는 최승일 목사(오른쪽), 왼쪽 3번째는 이명남 선교사).     © 크리스찬리뷰

 

▲ 시드니에서 열린 MLMA 제1회 호주 선교대회에서 이사장 최승일 목사가 말씀을 전하고 있다.(2012. 9.5)     © 크리스찬리뷰

 

호주맥켄지의료선교회로 새출발

 
MLMA는 본지 권순형 발행인이 110년 전 한국에서 나환자들을 위해 헌신했던 제임스 노블 맥켄지 선교사(Rev. JN. Mackenzie, 한국명 매견시)의 희생 정신을 계승, 중국과 동남아에서 한센인 사역을 펴고 있던 이명남 선교사를 돕기 위해 만들었다.
 
2011년 5월 비영리법인 자선단체로 인가받은 ‘호주맥켄지한센인 선교회’의 초대 이사장은 서울 상도교회 최승일 목사가 맡았다. 최 목사와 권 발행인은 호주와 한국에서 선교사를 발굴, 훈련, 파송하고 선교 사역비 모금을 진행할 계획을 세우고, 2012년 9월 제1회 호주선교대회를 개최했다.
 
멜본과 시드니에서 개최한 선교대회에는 초대이사장인 최승일 목사를 비롯하여 맥켄지 선교사의 두 딸 루시와 실라 여사, 호주 선교사 Alan Stuart 목사(한국명 서두화), Dr Barbara Martin(한국명 민보은) 그리고 한국에서 이명남 선교사가 참석했다.

 

▲ MLMA 설립 축하 및 최승일 목사 이사장 취임예배가 서울 상도교회에서 열렸다.(왼쪽, 2012. 4.15)오른쪽 사진들은 MLMA 호주 선교대회와 캄보디아 의료 선교 현장을 방문한 최승일 목사.(2015. 8)     © 크리스찬리뷰

 

이날 선교회는 1차 목표로 중국에 한센복지센터를 세워 그곳을 중심으로 선교 기지로 삼고, 아시아 지역의 한센인 복음전파사역에 구심점을 이루어 나가기 위해 이명남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정했다.
 
선교회는 한센인 선교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맥켄지 선교사가 세운 창대교회(전 상애교회) 한센인 성도들을 찾아 식사 대접을 시작으로 세계의 한센인을 돕기 위한 첫발을 내디뎠으며  인도네시아 한센인 자녀들을 위한 교육지원 사업과 국제의료선교회와 협력사역을 통해 다양한 선교활동을 벌였다.
 
MLMA를 설립하게 된 배경엔 두 선교사의 아름다운 사연이 있다. 한국으로 건너간 초대 호주 선교사 중 한 사람인 맥켄지 선교사는 1901년부터 1939년까지 29년간 주로 나환자를 돌보았다. 맥켄지 선교사는 나병선교회를 통해 사역을 펼쳤다.
 
이 나병선교회는 원래 영국구라선교회에 의해 시작돼 1909년 부산에 나환자 수용소를 건립, 운영했다. 그러다 호주선교부로 이관돼 맥켄지 선교사가 이를 맡았다. 이 나환자 수용소는 1910년 2월 나환자 정착촌으로 발전해 부산 용호동의 상애원으로 자리 잡았다.
 
당시 이명남 선교사는 13세에 소록도 병원에서 한센병을 치료받고 상애원에서 양계를 하며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예배 중에 목사님이 누가복음 17장 11-19절 말씀으로 하시는 설교가 마음에 생생하게 다가와 박혔다. 예수님이 고쳐주신 열 명의 한센 환자들 중에 한 사람만 감사를 드렸다는 내용이었다.
 
이 선교사는 이때 ‘나 자신이 감사한 한사람이 되어야 겠다’고 결단했고 1999년부터 중국과 동남아에서 한센인을 위한 선교사역을 펴왔다. 자비량으로 선교하던 이 선교사는 2010년 호주에서 온 선교사 후손들과 권순형 발행인의 안내를 맡게 됐다. 이때 이 선교사의 간증을 듣고 감동받은 권 발행인이 그를 돕기 위해 MLMA를 설립한 것이다.

 

▲ 1999년부터 중국과 동남아에서 자바량으로 한센인 사역을 펼치던 이명남 선교사(왼쪽). 이 선교사는 ML MA선교사로 파송 직전 2014년 5월 9일 67세의 나이에 갑작스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멜본선교대회에서 최승일 목사와 환담을 나누는 이명남 선교사.(2012. 9)     © 크리스찬리뷰


권 발행인은 선교회 설립 감사예배에서 “부산에서 풀빵 장사를 하던 이 선교사의 아내가 구청의 강제철거로 이마저도 할 수 없어 선교비 마련이 막막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이 선교사의 사역을 돕는 한편 호주 선교사들에게 진 빚도 갚는다는 심정으로 법인을 설립했다”고 고백했다.
 
권 발행인은 이 사역을 한국교회와 함께 섬기기 위해 18년 동안 호주에서 목회하다 2006년 상도교회 담임목사로 청빙돼 간 최승일 목사에게 이사장직을 제안했다. 최 목사는 “100여년 전 이 땅에 들어와 나환자들을 위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자신의 생명을 다해 헌신한 맥켄지 선교사의 선교정신을 이어받아 복음에 빚진 한국교회로서 감당해야 할 사명이다”며 이사장직을 수락했다.
 
“사실 이사장직을 제의받고 많은 시간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섬기라는 마음을 주셔서 수락하게 되었는데 미력하나마 맥켄지 선교사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의 빚을 갚아 나가는 선교회가 되도록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소록도여 안녕’의 저자 이명남 선교사는 한센인에 대한 사회의 무시와 냉대, 차별을 극복하고 2000년 이후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 지역의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구호사역과 복음사역에 헌신했으나 2014년 5월 향년 67세의 나이로 갑작스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한국 나환자들의 친구’로 알려진 맥켄지 선교사는 1939년 은퇴했으나 그가 선교에 기여한 공헌은 그다음 세대로 이어졌다. 맥켄지 선교사는 네 명의 딸(의사 1, 간호사 3)을 두었는데 첫째 딸 헬렌(한국명 매혜란)은 산부인과 전문의로, 둘째 딸 캐서린(한국명 매혜영)은 간호사로 두 자매가 6.25 한국전쟁 당시 의료혜택을 받을 수 없었던 산모와 어린이들을 위해 예수의 사랑정신으로 1952년 9월 부산 좌천동에 일신부인병원(현 일신기독병원)을 세웠다.
 
1993년 4월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아기에게 친근한 병원’으로 선정된 일신기독병원은 현재 부산에 화명일신기독병원, 맥켄지일신기독병원, 정관일신기독병원, 미얀마 일신베다스다병원 등 5개 지역에서 성장하고 있다.
 
최승일 목사가 의료선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샘 의료선교회’ 호주지부를 맡으면서였다. 
 
“호주에서 10년 넘게 섬겼습니다. 한국으로 가서도 샘 의료선교를 도와 일하다 보니 의료선교가 뭔지 배웠고요. 그런데 정말 신선한 충격을 받은 게 캄보디아 헤브론병원 김우정 선교사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저렇게 귀한 사역을 하게 하시는구나. 천사를 보는 것 같았어요. 그러니까 제대로 의료선교에 눈을 뜨게 해주신 분은 김우정 선교사님입니다.
 
저도 호주에서 자란 사람으로서 항상 호주에 빚진 자 된 심정이었거든요. 그래서 호주에서 하는 일에 조금이나마 동참할 수만 있다면 저는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 기쁜 겁니다. 제가 힘도 없고 자격도 부족하지만 하나님,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필요하시다면 기꺼이 섬기겠습니다, 자연스럽게 기도를 드릴 수 있었죠.”


최 목사는 “우연히 시작한 일이었는데 지금은 의료선교가 내 사명이 됐다”고 말했다.

 

▲ 헤브론병원을 방문한 상도교회 당회원들이 병원 로비에서 김우정 원장과 기념촬영을 했다.(2016. 9)     © 크리스찬리뷰

 

잠든 전통교회를 깨우다

 
2006년 11월 서울 상도교회 담임목회자로 부임한 최승일 목사는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그는 시드니온누리교회에서 18년간 목회한 이민목회자 출신이다. 또 이민 1.5세대로 이민자의 문화와 호주의 문화 속에서 자랐고 목회했다.
 
그런 그가 돌연 이민목회를 접고 한국으로 갔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목회가 쉽지만은 않았다. 중학생 때 겪었던 문화충격보다 결코 적지 않은 역 문화충격이 기다리고 있었다.
 
상도교회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교회다. 올해로 72주년을 맞이했고 7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한강이남에서 가장 큰 교회로 꼽혔다.
 
“본당에 드럼이 없는 한국의 전통 장로교회였습니다. 장로석이 따로 있었고요, 거기 앉아서 성도들과 마주보고 예배를 드렸어요. 강대상도 묵직한 강대상 있잖아요. 네 개를 놓을 정도로 완전히 한국의 전통적인 장로교회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영적인 분위기가 굉장히 가라앉아 있었고요.
 
예를 들면 새벽 기도하게 되면 바늘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야 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아주 정적 속에서 기도하는 거죠. 그러니까 기도소리가 들리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타 교회 교인이 잠깐 새벽기도회에 참석해서 입을 열어 기도하면 장로님들이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간다고 그래요. 깜짝 놀라 쳐다보면 손을 입으로 막으면서 조용히 기도하라 하는 모습을 보니까 너무 안 맞는 거예요. 갈등이 많았지요.
 
그래서 제가 강대상 다 끌어내리고 재판장 의자 같은 장로님들 의자며 담임목사 의자 등등을 몽땅 끌어내렸어요. 그러니까 강대상 하나만 딱 놓은 상태로 모든 예배 인도하는 분들도 밑에서 예배를 드리다 순서가 되면 올라가도록 했어요. 그런 후 드럼을 갖다놓았을 때 교회가 뒤집어졌었지요.
 
그렇게 1년 반 정도 되었을 때 장로님 세 분이 오시더니 ‘목사님 떠나셔야 겠습니다’ 그러시더라고요. 저는 그때 너무 기뻤어요. 마음이 이미 떠났었거든요. 그런데 결국은 그분들이 당회를 열어가지고 ‘아닙니다. 목사님, 계셔 주십시오’ 본인들이 다시 번복해서 있게 된 거죠.”
 
최 목사는 그렇게 7-8년까지는 갈등을 많이 겪었다고 했다.
 
“장로님들이 ‘목사님, 우리는 이런 식으로 합니다’ 말끝마다 그랬어요.”
 
그는 목회(牧會)를 인회(忍會)라 했다. 목회는 참고 인내하며 견디어 가는 것이라는 그의 목회철학이 함축된 표현이었다. 목회가 너무 힘들 때, 최 목사는 하용조 목사를 찾아갔다고 한다. 하 목사는 그의 멘토였다.
 
“목사님, 저 목회가 힘들어서 도저히 못하겠습니다.”
 
하 목사는 조용히 말했다.
 
“정말 목회하기가 힘들면 전체를 보지 말고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 그 사람들만 섬기고 목회할 수 없겠어요? 그렇게 해보고 안 되면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
 
최 목사는 “그 전까지 내 의견과 주장이 매우 강한 사람이었다”며 “게다가 이민목회 18년을 하면서 어떻게 해야 교회가 성장할 수 있는 지를 목도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러나 하 목사님의 조언을 받은 후 모든 걸 내려놓았다”고 말했다.

 

▲ 서울 상도교회 주일예배 전경     © 크리스찬리뷰

 

싸움이 없는 교회로

 
“장로님들과의 관계 속에서 섬기고 또 섬겼습니다. 이제는 모두 잘 따라옵니다. 당회 들어가도 긴장이 없습니다. 사실 당회 들어가기 전에 토요일이 되면 잠을 못 잘 때도 있었죠. 수면제를 먹고 잔 적도 있습니다. 지금은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그만큼 장로님들이 많이 도와주십니다.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기보다 기다려 주시고 참아주십니다. 함께 하자고 했을 때 기꺼이 동참해 주십니다.

 

▲ 상도교회 주일예배에서 말씀을 전하는 최승일 목사     © 크리스찬리뷰

 
사실 처음엔 장로님들이 멱살 잡고 욕하면서 싸우는 모습까지 보았거든요. 무섭더라고요. 이런 분들과 어떻게 목회를 하나, 정말 힘들었습니다. 제직회도 그래요. 막 싸우시더라고요. 제가 그랬죠. ‘이런 모습을 보인다면 전 목회를 더 이상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랬더니 ‘교회에 싸움꾼이 들어왔네’라고 생각했던 분들도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젠 ‘최 목사는 싸움을 싫어하는 사람’ ‘싸움을 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여길 정도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최 목사는 전 교인 제자화 훈련에 박차를 가했다. 그가 추구하는 목회의 초점은 강력한 성령의 체험과 말씀에의 몰입이다. 이 두 가지 병행될 때 성도들이 진정한 변화가 일어난다고 최 목사는 확신했다. 
 
“훈련입니다. 사역자훈련인데 중직자들은 이 훈련을 다 마쳐야 되고, 그러고 나면 이분들에게 일할 수 있는 필드를 마련해 주는데 필드 중의 하나가 ‘일대일 제자양육’을 할 수 있는 자격을 줍니다.
 
한국에 뛰어난 목사님은 많습니다. 그런데도 왜 하나님께서 나를 한국으로 부르셨을까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결론은 마음을 담는 목회, 하나님을 향한 감동과 감격이 살아있는 목회를 해야겠다는 것입니다.

 

▲ 상도교회는 매년 몽골을 찾아가 의료봉사 활동을 펼친다.     © 크리스찬리뷰


형식에 사로잡힌 종교인들의 모습에서 진실로 마음을 드리고 인생을 드리는 성도로 변화시키겠다는 것이 저의 꿈입니다. 이런 감격과 감동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의 목회는 ‘기도목회’ ‘말씀목회’로 압축할 수 있다. 이 두 축의 목적은 분명하다. 기도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고 만나게 하겠다는 데 있다. 그래야 성도들이 변하고 교회가 변하고 한국사회가 변한다는 게 그의 일관된 생각이다.
 
최 목사는 “상도교회에서 13년 동안 목회하며 지켜본 한국교회는 물량주의, 다툼, 분쟁이라는 단어로 표현된다”며 “건물 짓는데 과도한 모습도 봤다. 하나님의 전보다는 탐욕스런 지도자의 모습과 목사의 자존심, 사람들로부터 ‘우와 큰 교회다!’라고 평가 받으며 만족해하는 모습들이었다”고 말했다.

 

▲ 몽골 의료 봉사 현장에서 환자를 안내하는 최승일 목사     © 크리스찬리뷰

 

상도교회 건물은 40년이 넘었다. 그래도 그에게서 ‘건물을 새로 건축하겠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는 현재 건물로도 충분하다며 건축할 재정이 있다면 사람을 세우고 선교하는데 사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마음은 옥한흠 목사를 통해서 배운 교회론의 요점에서 나왔다. 교회는, 건물이 아닌, 사람이라는 것이다. 성도들의 진정한 부흥도 숫자의 증가에 있는 게 아니라 성도들의 마음에 그리스도를 향한 열망과 열정이 피어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재작년이 우리 교회 70주년이었는데 감사한 것은 성도님들이 한 달 내내 한마음이 되어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임직하고, 찬양집회를 하고 나아가 선교사 파송까지 한 것입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건물이 아닌, 사람이 교회라는 본질에 충실한 모습들이었습니다. 
 

▲ 몽골 의료 선교 현장의 이모저모. 현지 경찰이 동원되어 질서유지를 해야 할 정도로 많은 환자들이 몰려든다     © 크리스찬리뷰


사실 저는 건물에 대한 욕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18년 이민목회 할 때 8번을 이사했습니다. 물론 과욕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만큼 모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건물 달라고 기도도 많이 했습니다.
 
호주를 떠나면서 예배할 수 있는 상당히 넓은 건물에 사인할 정도로 교세가 확장됐습니다. 그러나 건물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지 내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지금 상도교회 본당은 사용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40년이 넘은 건물이지만 아름답고 예쁘게 지어졌습니다. 이 건물을 그대로 지키고 싶습니다.”

 
교회는 즐거운 곳이어야 한다

 
호주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친 최 목사는 신학을 장신대에서 했다. 졸업한 후 다시 호주로 돌아가 28살에 교회를 개척했다. 한인목회를 시작하면서 그에게는 꿈이 있었다.
 
“주님, 상처받은 사람들, 내게 맡겨진 교인들을 위로하는 목회를 하겠습니다. 싸움하지 않는 교회를 만들겠습니다. 교회에서 싸움 나는 순간 저는 떠나겠습니다.”
 
수많은 목회 비전 가운데 하필이면 왜 ‘싸움하지 않는 교회’일까? 그에게는 교회 분쟁에 대한 뼈아픈 기억들이 많았다. 그가 청소년 시절 출석하던 한인교회 하나가 여러 개로 쪼개지는 현실을 목도한 적도 있었다. 그만큼 교회 안에서 극한 대립이 있었다.
 
3년 동안 단 한 주도 빠지지 않고 싸움이 계속됐었다. 경찰이 2인 1조가 뜨면 그 어떤 상황도 평정되는 게 당시 호주사회였다. 그러나 한국인은 달랐다. 한국인은 싸우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일단 싸움이 시작되면 경찰 20명이 출동해도 해결이 안됐다.
 

▲ 세 달간의 안식월 기간 중 시드니를 방문한 최승일 목사     © 크리스찬리뷰


최 목사에게는 교회분쟁이 너무도 아팠다. 자신이 담임하는 시드니온누리교회는 그런 그의 비전으로 정말 18년 동안 싸움 없는 평화의 목회가 유지됐다. 목회하는 동안 100여 명이 모이는 또 다른 한인교회와 통합한 적도 있었다. 그때 지인들은 “저 교회 교인들은 완전 싸움꾼들이다. 합쳐서는 안된다”고 충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 목사는 교회를 통합한 후에도 역시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싸움이 안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통합한 이후 최 목사의 교회는 더욱 부흥해 한인교회 중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교회가 된다. 그런 그가 갑작스레 상도교회로 부임하게 된다.
 
최 목사의 집은 늘 열려 있어 성도들의 교제 장소였다. 성도들 또한 문제가 발생하면 영어가 유창한 그에게 어려움을 호소했다. 그래서 그는 성도들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일이라면 낮이고 밤이고를 마다하지 않고 뛰어다녔다.
 
이런 최 목사가 갑자기 성도들에게 폭탄선언을 했다. ‘한국에 가겠다는 것이었다. 생명을 걸고 목회를 했던 교회였다.
 
시드니온누리교회는 온통 눈물바다가 됐다. 교인 30여 명은 아예 최 목사의 집에 진을 치고 가지 못하게 막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심지어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갈 수 없다’는 성도도 있었다.
 
최 목사의 마음에 ‘성도들이 이렇게 막는데 내가 정말 한국에 가야만 하는 건가’라는 회의감이 들었다. 이들의 만류를 뿌리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사실 그랬다. 최 목사가 한국에 가야 하는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다 한호문화협회의 초청을 받아 한국을 방문하게 됐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하루에 5개의 교회에서 주일설교를 할 정도로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는데 그중의 한 곳이 상도교회였다.
 
마침 상도교회 김이봉 목사가 은퇴를 선언하고 후임자를 찾는 중이었다. 역사적인 면에서나 규모면에서나 유명한 상도교회 후임 목회자에는 170명이 지원한 상황이었다. 상도교회에서 설교를 하고 나서 다른 교회에서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데 상도교회 성도들이 찾아왔다.
 
“목사님 저희 교회로 와 주셔야 하겠습니다.”
 
“네? 방금 설교를 했는데 무슨 일로 가야 한다는 말씀이죠?”
 
“저희 교회가 목사님을 청빙할 계획인데 지금까지 170여 명의 이력서를 받았습니다. 추리고 추려서 그중 세 분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오늘이 결정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는 교회 권사님들과 집사님들이 ‘목사님을 담임목사님으로 청빙해 달라’고 요구해왔습니다.
 
저희들도 이 말을 듣고 세 분에게는 죄송하지만 청빙을 취소하고 목사님을 청빙하기로 장로회와 제직회에서 결정했습니다.”
 
어안이 벙벙해졌다. 단지 설교를 한 번 한 것뿐인데 그것으로 최 목사를 청빙하기로 결정했다니. 최 목사의 의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결정했다는 것도 납득이 가질 않았다. 납득되지 않았던 상도교회의 손짓이 결국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결론이 내리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기도 중에 최 목사는 물론 사모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을 가졌던 것이다. 시드니온누리교회 성도들도 결국 최 목사를 상도교회로 보내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의료선교 사역에 동참해 주세요

 
상도교회의 연혁을 보면 해외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많은 예산을 들여 지속적으로 해온 것을 알 수 있다. 선교에 많은 인력과 에너지를 투입하게 된 이유가 있을까.
 
“상도교회는 제가 오기 전부터 선교사역이 활성화돼있었습니다. 40주년이 됐을 때 이미 칠레에 300병상의 병원을 지어줄 정도로 선교사역에  관심이 많았죠. 당시 공사대금이 40억 원이 들어가는 대공사였습니다. 이를 위해 원로목사님은 칠레를 20여 번 다녀오셨죠.
 
특별히 의료선교팀이 강합니다. 박병원 장로님은 의사이신데 몽골, 중국의 문호가 개방되지 않았을 때 선교를 시작하셨던 분입니다. 그분의 열정이 상도교회를 선교하는 교회로 흐름을 만들었습니다.
 
상도교회에서 저를 청빙을 할 때 제가 세 번을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결정하게 된 동기는 상도교회는 선교하는 교회라는 것이었죠. 이 전통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최 목사의 나이 59세. 은퇴를 말하기는 이르다. 그래도 그에게 물었다. 언제까지 교회 일을 할 것인가, 목회 이후의 삶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라고.
 
최 목사는 이미 생각해 놓은 게 있다. 호주든, 동남아든, 어디든 깨어진 교회들, 사정이 어려워 목회자를 모시지 못하는 교회에 가서 2년 정도씩 사례를 받지 않고 지켜드리고 교회가 든든히 세워질 때쯤 빠져 나오는 사역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역하다 보면 80세 정도가 되지 않을까요?특히 저는 이민교회에 관심이 많습니다. 이민교회를 개척해서 18년간 목회하며 이민자들의 생리와 그들의 상처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한인교회를 돌며 세우고 돕는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김동호 목사에게서 그는 은퇴 이후의 삶을 조금 더 상세히 그리게 됐다고 한다. 김동호 목사는 은퇴 이후 해외를 다니며 선교사들에게 ‘안식년’ 주기 활동을 한다고. 이처럼 설교자를 모시기 어려운 교회들을 찾아다니며 교회와 성도를 세우는 일을 하기 원하는 게 최 목사의 은퇴 이후의 삶이다. 
 
최 목사는 앞으로 MMMA를 이끌어가기 위한 방향성도 제시하며 앞으로의 각오를 밝혔다.
 
“인도네시아 한센인 자녀들을 위한 교육지원 사업과 국제의료선교회와 협력사역을 통해 호주 원주민과 지구촌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의료사역과 문화사역을 지속적으로 이어갈 것입니다.
 
의료선교 사역에 많은 한국교회가 동참해주었으면 합니다. 함께 동역할 의료진(의사, 간호사, 한의사, 약사 등)과 다양한 분야(미용, 주방, 찬양, 페인트, 목공, 시설관리, 청소, 어린이 사역, 마사지 등)에서 봉사자들의 참여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 MMMA 이사장 최승일 목사(왼쪽)와 사무총장 정지수 목사. 최 목사는 목회하면서 첫 번째로 정지수 목사의 결혼 주례를 맡았다고 말했다.     © 크리스찬리뷰


 
최 목사는 “책임감이 막중한 만큼 각오를 새롭게 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최 목사의 장점은 세계적인 시각이다. 문화적인 다양성을 몸으로 배웠고 한국어와 영어에 능통하다. 앞으로 그가 이끌어 나갈 MMMA가 어떤 모양이 될 것인지 궁금하다. 아니, 그것보다 그가 한국교회에 던질 메시지가 어떤 것일지 궁금하다. 그리고 기대해 본다.
 
한편 호주맥켄지의료선교회는 오는 7월 4일(목) 오후7시 목요찬양(시티 구세군강당)에서 MMMA 출발을 축하하는 ‘찬양의 밤’을 개최한다.〠


글/김명동|크리스찬리뷰 편집인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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