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 이민자의 자긍심을 위해 뛰다

글|주경식,사진|권순형 | 입력 : 2019/07/29 [13:56]

 

▲   8월 표지 사진/2019  © 크리스찬리뷰

 

▲ 호주 동포사회의 권익 신장을 위해 세워진 한인교육문화센터(KCC) 강병조 대표. 그는 인권운동가에서 현재는 장례 지도사로 일하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한인교육문화센터(Korean Cultural Centre, 이하 KCC) 강병조 대표를 그의 스트라스필드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몇 년 전 기자가 참석하고 있는   <시드니 인문학교실>에서였다. 그 후 시드니의 여러 인권모임에서 그를 자주 볼 수 있었다. 훤칠한 키에 검정 양복을 즐겨 입는 그는 아마도 그의 직업과 관련이 깊을 듯하다.
 
현재 장례 지도사로 ‘한솔장례서비스’ 대표로 있지만 그는 KCC 대표로 더 알려져 있다. 그의 과거 이력을 보면 더 화려하다. 여기서 화려하다는 의미는 세상적으로 알려져 있다는 의미보다는 그가 평생 인권운동가로서의 삶을 살아왔다는 의미이다.

 
동포사회의 권익을 위해

 
시드니 한인교계에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현재 한인 커뮤니티에는 ‘KCC-호주한인교육문화센터’가 운영되고 있다. 이 단체가 무슨 일을 하는 단체인지 의아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KCC는 비영리재단으로 1999년 설립되었다.

 

▲ 광주 민주항쟁 15주년 추모식에 참석한 강병조 씨 (왼쪽) ©강병조    


“KCC의 존재 목적은 한인 이민자들에게 한국의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고 동포사회의 권익을 신장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KCC는 매주 정기적인 모임들이 이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모임은 1.5세나 2세들에게 한국문화와 전통 가치를 계승하고 주요한 주제와 이슈들을 놓고 토론하는 청소년교실이 있다.


이외에도 성인 풍물패(필굿), 청소년 풍물패(필굿), 노래패(하날소래), 나비독서회, 정기 토론회, 호주 팟캐스트 지원 등 호주사회에서 한인들의 권익신장과 한국 전통문화의 계승 발전을 위해 다양한 모임들을 주최한다.
 
그리고 지난 4월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쳐치 테러 참사 때는 인종차별과 반이민 정서에 맞서 ‘호주한인동포사회의 공동성명서’를 준비하고 발표하는 일에 앞장서기도 했다.
 
“KCC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한인 커뮤니티 안에 있는 한인 단체 가운데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단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원래 KCC는 1987년 KRC(Korean Resource Centre, 한국 민족 자료실)로 시작되었다. 오래전에 이민오신 분들에게는 ‘한국민족자료실’을 알고 있을 수도 있다. 기자는 강 대표를 통해 처음 듣게 되었다.
 
KRC는 1987년 6월 애쉬필드(Ashfield)에서 처음 문을 열었다. KRC의 설립목적은 KCC와 마찬가지로 이민사회에서 한국의 전통문화와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나감으로써 민족정신을 고양하고 동포사회의 권익을 신장시키기 위해 시작되었다. 여기에서 무엇보다 동포사회의 권익신장을 강조하는 강병조 대표의 말을 한번 들어보자
 
“이민자로서 호주에서 살다 보면 여러 가지 답답한 일들을 많이 겪게 됩니다. 그런데 영어를 못하더라도 여기에서 기죽고 사는 게 아니라, 이민자로서 당당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한인 이민자들의 권익신장을 도와주자. 이것이 중요하죠.
 
그런데 그러다 보면 한국 상황이 걸리게 돼요. 한국이 떳떳해야 우리도 기를 피고 살 수 있는 것이죠. 이것이 이민 와서 오래 산 사람들이 느끼는 보편적인 정서입니다. 그래서 한국의 정치적인 권익신장이 나오게 되는 거에요.
 
우리 모국이 정치적으로 안정이 되고 민주정권이 되어야 호주에서도 우리를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국내 상황, 민주화, 남북의 통일이슈 등 조국의 정치적 신장에도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기 KRC 참여자들은 한국의 민주화와 통일 이슈에 관심이 많았다. 그때 참여했던 사람들은 김진엽, 박은덕, 권기범, 김승일, 백시현, 강병조 등 제법 우리 귀에 친숙한 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이중 김진엽 씨는 1989년 평양에서 있었던 제13차 세계청년 학생축전(평양축전)에 한국의 전국대학생협의회 대표로 임수경이 참석할 수 있도록 도와준 혐의로 한국에서 구속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때 평양축전에 참석했던 호주 한인 대표로는 박은덕, 권기범, 강병조, 김승일 등이였다. 강병조 씨도 이때 평양축전에 참석했다(이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뒤에서 다시 이어진다).

 

▲ 평양에서 개최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한 강병조, 권기범(왼쪽부터) 오른쪽은 미국에서 참가한 서혁교 씨. ©강병조   


여기에서 재미있는 사실은 KRC의 태동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재호한인기독청년회(KCYF)’로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재호한인기독청년회

 
1970년대까지 호주에 거주하는 한인 이민자들은 극소수였다. 그러나 1975년 베트남 전쟁이 종식되면서 베트남에서 근무하던 많은 한인들이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시드니로 오면서  한인 이민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미로 이민갔던 한인들이 호주로 역 이민 오는 사례도 제법 있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은 1973년 고프 휘틀럼 노동당 정부가 백호주의(White Australia Policy)를 철폐한 것과 관련이 깊다고 할 수 있다. 1980년 중반 호주에는 약 2만 명의 한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중 80%가 시드니에 거주할 정도로 시드니는 호주의 한인 밀집 지역이었다.
 
많은 경우 해외 동포사회는 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된다. 시드니도 예외는 아니어서 초기에는 시드니연합교회가 그 중심 역할을 감당했다. 그 당시 시드니에는 교회가 몇 개 있지 않았는데 당시 강병조 청년은 시드니제일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 세월호 3주기 기억식에서 추모사를 낭독하는 강병조 대표.     © 크리스찬리뷰

 

그 후 친구를 따라 한 모임에 출석하게 되었는데 그 모임이 바로 재호한인기독청년회(KCYF, Korean Christian Youth Fellowship)였다고 고백한다. 당시 이모임에는 지금도 이름을 대면 알 수 있는 사람들이 먼저 와 활동하고 있었다. 양명득, 박은덕, 권기범, 임경란, 김진엽, 강병조 등 기독청년들은 매주 모여 예배와 성경공부와 친목을 나누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국 대한민국의 소식을 접하면서 조국을 위한 기도회와 민주화 운동 등을 모색해 나갔다. 알고 있듯이 1980년대 중반은 전두환 군부정권에 맞선 학생들과 시민들의 민주화열풍으로 한국이 몸살을 앓을 때였다.
 
1987년 전두환이 정권이 만들어 놓은 5공화국 헌법에 따라 간접선거로 치룰 예정이었던 대통령 선거의 후보로 노태우를 지명해 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박종철 고문치사가 일어나고 이한열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죽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 데 해외에 있는 동포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재호한인기독청년회도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호주한인정의평화협의회’와 함께 ‘호헌철폐’서명을 받는 일에 참여하게 된다.
 
이때 강병조 씨는 매주 토요일 새벽 플래밍턴 마켓에 나가 호헌 철폐 사인을 받았다고 회고한다.
 
“그때 제가 담당한 곳은 플래밍턴 마켓이었어요. 플래밍턴 마켓에 가보면 한국 배추와 야채를 파는 장소가 있었어요. 그때 제가 거기 나가서 한인들에게 호헌철폐 서명을 받았어요, 계절이 지금처럼 약간 추울 때로 기억해요.
 
그때 저희가 서명을 2천 명 넘게 받았어요. 주로 토요일 새벽에 나가 많이 받았지요. 그거 받아서 한국에 보낸 뒤 얼마 후 6.29 선언이 나왔어요. 그래서 그때 저희들이 얼마나 기뻐했는지 몰라요. 우리가 받아낸 서명지가 의미가 있었다고 봐요.”

 

▲ 고교 시절 자양교회 학생부 단체사진(1978). 맨 뒷줄 왼쪽 끝에 안경 쓰고 손들고 있는 학생이 강병조 군이다.        ©강병조    


강병조 씨는 1982년에 이민을 왔다. 그때 먼저와 계신 어머니는 이미 시드니제일교회(당시 담임 홍길복 목사)에 출석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도 어머니를 따라 시드니제일교회에 출석을 했다.
 
그리고 그가 친구를 따라 참석했던 ‘재호한인기독청년회(KCYF)’는 그의 일생을 정의와 인권을 위한 삶을 살게 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게 한다.

 
평양 축전 참가

 
그가 청년시기에 참여했던 KCYF는 주로 시드니에 있는 기독 청년들로 구성되었고 주로 교회와 기독교 관련 일들로 모임을 이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들인지라 정의에 대한 목마름은 항상 있어왔다.

 

▲ 통일과 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을 적극 주도하고참여한 강병조 대표의 이모저모     © 강병조


특히 한국의 군부독재 상황을 보면서 그들은 기독청년들로 이 옳지 않은 사회적 이슈를 보며 어떻게 살아야 하나 성경적으로 고민했다고 한다. 그러던 때에 그들이 대 사회적 이슈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정의와 인권에 적극 참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1984년부터 2년동안 시드니에 머물렀던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의 인명진 목사의 영향이 컸다고 말한다.
 
“인명진 목사님이 1984년경에 시드니로 오셨어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그분이 2년 정도 계셨던 것 같은데, 그 때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 총무로 계셨는데 어려우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변조은 목사님의 도움으로 호주 유나이팅 교단이 초청해서 오셨던 걸로 기억해요. 그리고 그분이 저희 KCYF에 자주 오셔서 성경공부 등 지도해 주셨죠.”
 
KCYF는 1986년 3월 전두환 정권 당시 노신영 국무총리가 호주를 방문하자 시드니총영사관 앞에서 시위를 했다. “광주학살 책임자를 처벌하고 양심수들을 석방하라”는 요구였다. 이때의 시위는 동포사회의 역사에서 한국정부를 상대로 한 첫 번째 시위였다. 
 
KCYF에서 활동하던 기독청년들은 자신들의 활동에 제한을 주는 교회의 울타리를 벗어나 좀 더 자유롭게 활동하기 위해 1987년 6월에 애쉬필드(Ashfield)지역에 KRC를 세우는데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민족자료실은 이후 민족교육문화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나름 참 많은 일들을 해왔어요. 동포들의 의식들을 깨우고, 북한에 대해서도 바로 알리고, 한국의 민주화운동 지원, 비영주권자 사면운동, 통일이슈 등을 가지고 호주 국회의원들과 세미나도 하고, 그리고 그때도 우리 안에 풍물패가 있었어요.
 
그리고 지금도 기억하는데 나중에 캠시(14 First Ave Campsie)의 주택을 렌트해서 저희가 한국 책도 많이 모아서 도서 대여도 하고 그랬습니다. 민족자료실이니까 기증받은 것도 있고 한국에서 온 책이 수천 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순번을 짜서 로테이션으로 근무를 서며 도서대여도 하고 꽤나 열정적으로 활동했습니다.”
 
KRC는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리고자 동포들과 광주학살 비디오를 같이 보는 행사를 주최했다. 특히 1988년 11월 노태우 대통령이 호주 시드니를 방문했을 때 KRC는 시드니한인회를 설득해 한인회 운영위원들이 노대통령이 주최하는 만찬에 불참하도록 했다.

 

▲ 한국민족자료실이 있던 14번지 퍼스트 에비뉴 캠시를 오랜만에 찾은 강병조 대표.     ©크리스찬리뷰


 
뿐만 아니라 NSW주 의사당과 만찬이 열리던 인터콘티넨탈 호텔 앞에서 전두환과 이순자 광주학살 책임자를 처벌하고 조국의 완전한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앞당기라고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또한 많은 독자들은 1989년 세계 남자 아이스하키 선수권 대회가 호주에서 열렸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이때 한인 이민사회와 한국사회에 감동의 물결을 일으켰던 사건이 있다. 그것은 한국민족자료실이 시드니 한인회와 협력해서 남북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 공동응원을 펼친 일이다. 그 당시 기자도 한국에서 기사를 읽고 마음이 찡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나중에 이 한국민족자료실은 임수경 양이 1989년 평양에서 열리는 축전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도운 혐의로 국내신문들이 대서 특필하는 바람에 호주사회에서도 큰 이슈가 되었다.
 
강병조 씨는 이때 호주 한인 대표 중 한 명으로 평양축전에 참가했다. 한국민족자료실은 평양축전 참가 목적을 “시드니 동포사회와 호주사회에 북한을 바로 알리는 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초석을 마련하는 것”으로 두고 평양축전에 참가해서 북한 관련 많은 정보를 수집하여 통일운동을 전개하는데 활용하기로 했다.

 

▲ 1989년 7월 한국외국어대학 4학년이던 임수경 양이 전대협 대표 자격 으로 평양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방북, 김일성 주석과 포옹하고 있다.    


다행히 그는 평양축전이 끝난 후 호주로 바로 들어오는 바람에 북한을 방문했어도 큰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한국민족자료실에서 함께 활동하다가 당시 호주연합교회의 의료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부산 일신기독병원에서 일하고 있던 김진엽 선교사는 임수경 양의 평양 방문을 도왔다는 죄목으로 18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 한국외대생 임수경(가운데 한복 입은 여성)이 평양축전에 참가하고 문규현 신부와 판문점을 통해 귀환하기 직전의 모습(1989. 7.27)    


북한을 다녀온 후 강병조 씨를 포함한 4명의 북한 방문자들은 시드니 시티에 있는 연합교회(Pitt St Uniting Church)에서 북한 방문보고회를 가졌다. 그리고 북한에서 찍은 영상을 편집해 시드니 동포 3백여 명과 함께 비디오를 함께 보며 북한을 바로 알리는 운동을 펼쳤다. 지금이야 북한에 대해서 많은 정보와 바른 생각들을 가지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군부 독재정권과 반공사상으로 인해 많은 한인들은 북한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이 일은 한인사회에서 쇼킹한 일이었다.

 

▲ 강병조 씨는 한국에 나가 1999년부터 민주노총 소속의 건설산업연맹에서 일하다 2003년 시드니로 돌아왔다.         ©강병조    

 

▲ 강병조 씨는호주 건설노조(CFMEU)와 청소노조(LHMU)에서 2007년까지 일했다. ©강병조    


“그때 동포사회가 술렁거렸어요. 그리고 지인들이 말씀하시길 시드니총영사관에 갔는데 너희들 사진이 걸려 있더라. 피해 있어라 이런 말도 들었습니다. 저희야 호주 시민권자여서 괜찮았는데 김승일 씨는 영주권자라 아직 국적이 한국 국적으로 되어 있어서 많은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실제로 멀리 피해 있다가 오기도 했죠. 저희 어머니도 저 때문에 기도 많이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하하~”

 
인권운동가

 
그에게는 많은 이력이 있다. 호주 한인 커뮤니티에서 벌어진 정의와 인권이 관계된 웬만한 운동에는 그가 관련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없을 정도이다. 근래의 일로는 전 시드니 평화의 소녀상 건립 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세월호를 기억하는 시드니 행동, 시드니 촛불연대 등에서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지만 그는 이미 1990년대 초부터 민족교육문화원 Wokers Hotline에서 한인 이민자들의 권리를 위해 뛰었다.
 
1세대 이민자들이 영어가 안되니까 일하는 곳에서 부당한 일을 당해도 호소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한인들이 많이 일하던 분야가 청소, 건설, 용접 등의 직업이었다.
 
강병조 씨는 1세대 이민자들이 임금체불, 부당대우, 인종차별 등을 겪고 신고해 올 때 그들의 손을 잡고 그들의 일과 관련된 노동조합으로 가서 그들의 권익을 대변하고 그들을 대신해서 목소리를 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호주의 건설노동조합에서 일을 하게 된다.
 
그의 말을 빌자면 본인이 아마도 한인 최초로 건설노동조합에서 일한 노조 조직가(organiser) 일 것이라고 말했다.

 

▲ 5.18 광주민주화운동 37주년 시드니 기념식에서 사회를 맡은 강병조 대표.     ©크리스찬리뷰


“아마도 제가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호주의 노동조합이라는 직장에서 일한 사람일 거예요. 호주 건설노조(CFMEU)에서 1995년부터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제가 한국에 가서 1999년부터 민주노총 소속의 건설산업연맹에서 4년 동안 일을 하고 2003년 다시 시드니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시드니로 돌아온 후 2003년부터 2006년까지 호주의 건설노조(CFMEU)에서 다시 일을 하고 2006부터 2007년까지 청소노조(LHMU)에서 일을 하게 된다. 그는 시드니에 와서도 이렇게 노조에서 소수민족의 부당대우와 인권을 위해 일을 해왔다.

 

▲ 한솔장례를 설립하고 장례지도사로 일하고 있는 강병조 대표(사진 왼쪽)는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만족하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그의 인생 여정을 보면 한결같이 인권운동과 관계가 깊은 일들을 해온 것을 알 수 있다. 직업은 직업대로 그리고 직업과는 상관없는 그의 사적인 삶도 늘 인간의 천부권리와 정의를 위해 뛰어온 삶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2007년에 노동조합일을 그만둔다. 늘 프론트 라인에 서서 상대방과 대결해야 하는 직업적인 구도가 그에게 부담스러웠다. 그를 사적인 자리에서 여러 번 보았지만, 기자가 보기에도 그의 점잖은 매너와 온순한 품성을 가지고 어떻게 노조일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의문이 들었다.
 
노조일을 그만둔 후 그는 건설안전교육 강사일도 하고 국립공원의 레인저(Ranger)가 되기 위해 TAFE에서 2년 동안 환경관련(Environment) 공부를 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도 그의 직업이 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다가 2012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이문철 장례사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묘지 분양하는 일을 같이 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게 된 것이 지금 그가 한솔장례 서비스를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장례 지도사

 
사람의 일이란 모른다는 말이 맞다. 어떻게 그가 장례 지도사 일을 하게 될 것을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다행히 그는 지금 하는 일이 적성에 맞다고 한다.
 
“아마도 제 생각 같아서는 앞으로 직업을 바꿀 일이 없을 듯합니다. 그동안 여러 직업들을 거쳐왔지만 나이로 보나 지금 하는 일이 저에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시신들을 만지는데 제가 큰 부담이 없는 것도 다행이고, 그런 부분에선 기독교신앙을 가진 것이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또 가족들도 제가 하는 일에 대해 흔쾌히 동의해 주었고, 만약 가족들이 반대했다면 못했을 겁니다. 여러 가지로 지금 하는 일에 만족합니다.”
 
시드니에 한인 장례지도사가 많지 않다. 특별히 한국인이 오너가 되어 직접 장례서비스를 총체적으로 운영하는 곳은 한솔장례서비스가 처음인 것 같다.
 
강병조 대표는 사람을 중히 여기는 사람이다. 그것은 그가 여지껏 살아온 인생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리고 그는 무엇보다도 사람의 바른 도리에 대해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사람이 부당하게 대우받거나, 정의가 훼손될 때 그것을 못 참는다.
 
그는 아직도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사건이 났을 때 자신이 그때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또렷히 기억한다고 한다. 그것은 그가 사람에 대한 공감의식과 연민이 있기 때문이다.
 
기자는 인터뷰를 하면서 그가 살아온 인생과 그가 마지막 선택한 직업을 매치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가 어떤 사람인가 더욱 분명하게 다가왔다. 기자에게는 그가 진정 인간을 존중하는 사람으로 비쳐진 것이다.
 
특별히 지금 세상을 떠나시는 분들 중 많은 분들이 자기 어머니 세대라고 한다.
 
 “그분들은 참으로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70년대 말 80년대에 이민 오셔서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제가 옆에서 직접 봐서 알죠. 그분들이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참으로 눈물겹죠. 이제 그분들이 한 분 두 분씩 돌아가시는데 이제 정당한 대우를 받아야 합니다.”
 
궁금한 기자가 질문했다.
 
“정당한 대우를 받는 다는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그는 심지어 돌아가신 분들에게도 따뜻한 인간애를 가지고 있고 그분들을 진정으로 존중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저는 이분들이 많은 고생을 하시다가 돌아가시는데 가실 때 고인에 대한 예의로 최소한 한국 예식으로 한국 장의사에 의해 보내드리는 것이 예의에 맞다고 생각됩니다.”

 

▲ 한솔장례서비스 강병조 대표는 가시는 분에게 최선을 다해 마지막 예의를 다해 드려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는 돌아가신 분들에게도 따뜻한 인간애를 갖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한국분들은 많은 경우 수의를 직접 준비하거나 자녀들이 준비해 놓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 수의는 호주인들이 다루기 어렵다. 그리고 가족들이 입관준비과정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어떻게 수의가 입혀지는지 알 수가 없다. 강병조 대표는 정성을 다해서 가시는 분에게 마지막 예의를 다해 드려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의 이 말을 들으며 그의 인간에 대한 존중과 경외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살아온 삶은 결코 그의 마음과 다르지 않음을 볼 수 있었다.
 

에필로그

 
그는 현재 시드니온누리교회(담당목사 전현구)를 출석하고 있다. 그가 교회를 선택하는 기준이 재미있다.
 
“2003년 시드니로 돌아온 후 어머니가 다니는 갈보리교회(현 시드니온누리교회)에 출석했습니다. 어머니가 살아 계실 동안에는 어머니가 다니는 교회가 제 교회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1부 성가대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가 어머니를 얼마나 사랑하고 존중하고 있는지 여겨지는 대목이다.
 
마지막으로 이민교회에 하고 싶은 말을 물어보았다.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후, 그리고 촛불 정국 때 교회에서는 어쩌면 그렇게 한마디도 안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치 의도를 가지고 안하는 것 같아요. 그렇게 졸지에 자녀들을 잃은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정권이 그렇게 사유화되어 돌아가는데, 그런데 교회가 이러한 이슈들에 대해 말을 안 해요. 마치 벽을 쌓아 놓은 것 같아요, 교회가 게토화 되어 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그의 눈에 비추인 교회는 세상과 벽을 쌓은 교회의 모습이다. 성경은 교회가 존재하는 것은 말 아래 숨겨 놓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등경 위에 두고 세상을 비추기 위한 것이라고 증거한다(마 5:15).
 
이제 한인교회들이 세상과 쌓아 놓은 담을 부수고 그들이 고통당하는 이슈를 가지고 다양한 현장에서, 세상과 소통하는 모습으로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글/주경식|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호주비전국제 대학 Director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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