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쟁의 영웅 찰스 그린 중령의 미망인 올윈 그린 여사

그대 이름은 아직도 찰리(The Name's Still Charlie)

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0/05/31 [10:55]

                                                                              
                                                                  글/김환기, 사진/권순형

▲ 6월 호 표지     © 크리스찬리뷰

 
오늘(5월 13일)은 그녀를 만나는 날이다. 그녀를 처음 본 것은 10년 전 남편인 ‘그린 중령의 50주기 추모예배’ 때이다. 강산도 변할 만큼의 시간이 흘렀지만, 세월은 그녀를 비켜 가는 것 같았다. 그녀는 건강한 모습으로 우리를 반겼다. 긴 복도를 지나 거실로 인도 받았다. 복도는 조금 어두웠지만 거실에는 햇살이 가득했다.


거실 안쪽에는 최근에 구입한 노트북이 놓여 있었다. 순간적으로 그녀의 나이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올해 87세이다. ‘백발의 할머니’가 노트북 앞에 앉아 이메일(E-mail)을 보내고, 원하는 자료를 찾아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어디 그뿐인가 오늘 저녁 모교인 시드니대학에 철학 과목을 수강하러 간다는 것이다. 그녀는 철학을 5년째 공부하고 있다. 좋아하는 철학자가 있냐는 질문에 ‘니체’라고 한다. 조금 놀란 내 표정을 보았는지 부연 설명을 한다. 

“사람들은 ‘니체’이야기만 나오면 ‘신은 죽었다’라는 말로 너무 단순화시킵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꼭 집어서 말할 수 없지만, 그에게는 지극히 인간적인 면이 있습니다.”

그녀는 삶을 이해하기 위해 철학을 공부하고 있다. 

 
그린 중령 (LT. COLONEL Charles Green) 

‘한국전쟁’이 터지자 남편인 ‘찰스 그린 중령’은 호주 육군 제3대대 대대장으로 임명을 받았다. 제3대대는 일본을 거쳐 1950년 9월 28일 부산에 상륙했다. 영연방 제27연대에 소속되어 ‘연천전투’, ‘박천전투’에서 승리를 거듭하며 북진을 계속했다. 1950년 10월 29일 ‘정주’의 치열한 전투 끝에 또 한 번의 승전보를 울렸다. 
 

▲ 호주 육군 제3대대 대대장으로 임명받고 6.25전쟁에 참전한 한국 전쟁의 영웅 찰스 그린 중령. 1950년 10월 30일, 그는 북한군이 쏜 폭탄의 파편으로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고, 11월 2일 오후 8시 30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현재 그의 유해는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되어 있다.     © Olwyn Green

 
다음날 ‘달천강’ 근처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을 때 북한군의 쏜 포탄이 그린 중령의 텐트 근처에서 터지며 날카로운 파편이 그린 중령의 복부를 관통했다. 즉각 20마일 떨어진 ‘안주’의 ‘미군 이동병원(Mobile Hospital)’으로 후송하여 수술을 받았으나, 11월 1일 오후 8시 그린 중령은 사망했다.  그때 그의 나이 30세였다.


그린 여사는 ‘안주’에서 남편을 매장할 때 찍은 사진을 보여 주었다. 무덤을 중심으로 침통해 하는 동료들이 삽을 들고 둥그렇게 서 있다. 졸지에 대대장을 잃은 부대원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남편의 전사 소식을 접했던 그린 여사의 마음은 어땠을까!  담담하게 당시의 이야기를 회고하지만 26살에 ‘전쟁 미망인’이 된 그녀의 마음을 누가 이해 할 수 있겠는가! 

당시의 상황을 좀 더 정확하게 알기 위해 그녀가 준 책자를 읽어 보았다.

▲ 87세의 올윈 그린 여사. 그는 한국전에서 전사한 남편의 영웅적인 이야기를 13년간 집필하여 1993년에 ‘그대 이름은 아직도 찰리’라는 책을 출간했으며, 최근에는 증보판을 냈다.     © 크리스찬리뷰

 
10월 30일, “멀리서 전보를 전하는 소년이 자전거를 타고 온다. 소년은 우리 집 앞에서 나에게 핑크 빛 봉투를 전해 준다.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열어 보았다.  ‘이런 소식을 전하게 되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린 중령은 한국전쟁에서 심하게 부상 당했습니다. 추후 소식 받는대로 연락해 드리겠습니다.’”


11월 1일,  “나는 일찍 잠을 청했다. 지치기도 했지만 혼자 있고 싶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창문 넘어 보니 손전등을 들고 두 사람이 집으로 오고 있었다. 해리 반크로프트(Harry Bancroft)와 가정 주치의(Family Doctor)였다. 표정을 보고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전사 하셨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그 중 한 사람이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 시드니 모닝 헤럴드에서 보도한 한국전에서 사망한 그린 중령의 장례식(1950년 11월 11일자)     © Olwyn Green

 
어떻게 죽었는지, 마지막 순간이 어땠는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며칠 후 군목인 랭(Laing)에게서 편지가 왔다.


“사랑하는 남편의 마지막 순간에 대하여 자세히 알고 싶어하리라 생각합니다.” 라는 말로 시작한 편지는 그가 어떻게 다쳤으며 이동병원으로 옮겨 어떻게 수술했는가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그는 정말 용감한 군인이었습니다. 고통 중에서도 당신과 딸에 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계속해서 주기도문을 외웠고, 저는 주님의 축복을 빌었습니다. 오후 2시경 수술을 시작하여, 4시 30분에 수술실에서 나왔지만 희망은 없었습니다. 산소 마스크도 거부하고 점차 의식을 잃어가면서 마지막으로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 호주 육군 제3대대는 1950년 10월 2일, 한국전 출정을 개시했다. 사진은 그린 중령 생전의 전투 현장과 훈장이다.     © Olwyn Green

 
'목사님, 아내에게 연락해 주세요.'


그리고 오후 8시에 임종했습니다. 그는 잠자듯 평화롭게 죽었습니다.”

“남편의 전사 소식을 듣고 나는 3년간 거의 미쳐 있었습니다. 잠을 잘 수도 없었습니다. 그날의 일들이 계속해서 머리 속에 맴도는 겁니다.”

아픈 상처를 잊고 새롭게 출발하기 위해 그래프톤(Grafton)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공부를 하면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삶이란 무엇인가를 알고 싶었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  공부가 나를 구했어요.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 ‘그대 이름은 아직도 찰리’ 증보판 표지     © 크리스찬리뷰

 
이제야 나는 그녀가 왜 그렇게 공부에 집착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파트타임’으로 일하면서, ‘국가 보훈처’(Department of Veterans Affairs)의 도움을 받아 중단했던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1958년에 시드니 대학에서 ART를 전공하여 학사 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1977년까지 TAFE에서 영어를 가르쳤고, 메도뱅크 TAFE의 ‘주임교사’를 역임하고, 1979년 은퇴한 다음 해 그녀의 삶에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다. 

 
그린 중령과 인간 찰리의 남은 이야기 

1980년 그린 여사는 그래프톤(Grafton) 근처 리스모어(Lismore) 시에서 열린 남편의 ‘기념비 제막식’에 참석했다. 그곳에서 남편의 영웅적인 이야기를 접하게 된다. 그린 중령은 1939년에 발발하는 해에 ‘소위’(Lieutenant)로 참전하여, 1945년, 25살에 중령(Lt. Colonel)으로 승진하고 최연소 대대장으로 임명을 받아 ‘뉴기니야’(New Guinea)에서 놀라운 전과를 세웠다. 

▲ 그린 중령의 생애 마지막 사진. 전사하기 이틀 전에 촬영됐으며, ‘그대 이름은 찰리’ 책자 증보판 뒷표지에 실려 있다.     © Olwyn Green

 
호주는 2차 대전 당시에는 정규군(Regular Army)이 없었고, 1948년에야 ‘창군’하게 된다. ‘한국전쟁’은 호주가  ‘정규군’으로 참전한 첫 번째 전쟁이고, 그는 첫 번째 파병부대인 제3대대(3RAR)의 대대장이다.  또한 그는 ‘호주전투사’에서 대대장으로 전사했던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기념 행사에 참석한 그녀는 남편을 위해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은 알려지지 않은 ‘그린 중령’과 ‘인간 찰리’의 ‘남은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는 것이었다.  


책을 쓰게 된 또 하나의 동기가 있다면, 당시 그녀는 ‘Graduate Diploma’ 코스를 밟고 있었다. 과목 중에 자신이 쓰고 싶은 이야기를 형식에 구애 받지 않고 자유롭게 쓰는 시간이 있었다. 그녀는 이왕이면 남편에 관한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 17세에 찰스를 만나 19세되던 1943년 1월 30일에 결혼한 올윈은 7년간의 결혼생활이었지만 실제로 함께한 날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 Olwyn Green

 
그 때부터 무려 13년간 남편이 남긴 편지와 기록은 물론 참전용사와의 인터뷰, 사진을 찍고, 역사적 사료 등을 조사하여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동분서주하며 모은 자료를 드디어 1993년에 ‘그대 이름은 아직도 찰리(The name’s still Charlie)’라는 제목으로 발간했다.


- 책 제목을 그렇게 정한 이유가 있습니까?

“군대는 위계질서가 있어서 ‘Sir, Colonel’ 등의 용어를 사용하니, 그이가 너무 멀게 느껴졌습니다. 특히 죽마고우 친구들은 그렇게 부르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친근감을 줄 수 있는 ‘The name’s still Charlie’ 라고 지었습니다.”

▲ 거실에 걸려있는 80대의 올윈 여사와 30대 찰리의 초상화     © 크리스찬리뷰

 
발간 후 남편에 대한 기록이 계속 발견되어 최근에 새롭게 ‘증보판’을 발간했다. 증보판이 나오고 첫 번째 사람이라며 사인한 후 필자에게 책 한 권을 건네 주었다. 표지에는 그녀가 좋아하는 사진을 실었다. 군용 텐트 앞에서 먼 곳을 응시하며 머그컵을 들고 서 있는 그린 중령의 모습이다. 뒷표지는 그린 중령의 생애 마지막 사진이다. 전사하기 이틀 전, 행군 중 '미 탱크'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남편이 수 많은 전투에 참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책의 처음과 마지막을 한국전쟁과 관련된 사진을 실은 것을 보면 그녀는 한국에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녀는 ‘세계전쟁사’에서 ‘한국전쟁’은 ‘잊혀진 전쟁’(The Forgotten War)이라며 아쉬워했다.

▲ 첫 돌 지난 외동딸 앤시아(Anthea)를 말에 태운 찰스     © Olwyn Green

 
2차 대전의 대승과 월남전의 패배 사이에 아무런 결과 없이 ‘휴전’으로 마무리한 전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한국전쟁’이 ‘안작’(ANZAC)과 같이 길이 기억돼야 할 중요한 전쟁임을 강조하고 있다. 


아마 호주인으로 자신만큼 ‘한국전쟁’에 대하여 많이 연구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고 한다. 호주정부도 이러한 그녀의 공로를 인정하여 2006년 1월 26일 ‘Medal of the Order of Australia’ 훈장을 수여했다.

▲ 전선에서(오른쪽 그린 중령)     © Olwyn Green


찰스(Charles)와 올윈(Olwyn)의 만남  

 - 어떻게 그린 중령을 만났습니까?”

조금 전까지 조금 우울했던 그녀의 얼굴에 갑자기 웃음보가 터진다.

잠시 그날을 회상하며 “그때가 17살 때인가, 나는 아빠가 운영하는 가게에서 일을 했어요. 어느 날 한 청년이 펜을 달라고 하는데 키도 크고 아주 잘 생겼습니다. 한눈에 반했죠. 그것이 첫 번째 만남이었어요. 얼마 후 그는 2차대전에 참전했습니다. 그 후 ‘팔레스타인(Palestine)에서 편지가 왔어요. 그에게서 온 편지였죠. 그날 산 펜으로 편지를 쓰는 거라고 하더군요. 

▲16세 홍안의 소년 최영길 군(가운데)은 6. 25전쟁 중 그린 중령을 만나 소년병으로 호주연대 제3대대에 입대하여 종군했다.     © Olwyn Green

 
그가 중동에서 돌아와 우리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 했어요. 그리고 일 주일 후에 나에게 정식으로 청혼했어요.” 그녀는 19세되던 1943년 1월 30일 결혼하여 외동 딸 ‘앤시아'(Anthea)를 낳았다. 7년간의 결혼 생활이었지만 실지로 함께한 날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앤시아’는 지금 시드니에서 ‘청각장애자’를 돕는 단체인 ‘Shepherd Centre’에서 일하고 있다. 그녀는 손자 자랑도 빼놓지 않았다. 큰 손자는 시드니대학에서 Ph.D학위를 받았고, 둘째는 음악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제 몇 주 후면 ‘증조할머니’가 될 거라며 다시 한 번 크게 웃는다.


응접실로 가면 남편과 함께 찍은 사진들이 걸려 있다. 그 중 하나는 누군가 그려준 그림인데, 얼굴에 주름이 가득하고 머리가 하얀 자신의 모습을 클로즈업하고 뒤에는 아직도 30세 청년인 그린 중령이 있다. 기억 속의 남편은 한국으로 떠날 때 그 모습 그대로 인 것 같다. 장교복을 입은 그는 키가 크고 아주 멋쟁이다. 그가 아내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가 쓴 편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긴박한 전투 상황 속에서도 올윈(Olwyn)에게 편지 쓰는 것을 잊지 않았다. 

▲ 시드니제일교회에서 열린 6.25기념예배에 참석한 고 최영길 선생.     © 크리스찬리뷰

 
1950년 10월 25일, “어제 편지가 참 많이 왔군요. 그 중에 당신 편지가 두 통이나 있었습니다. 매주 받는 편지에 감사하는데, 무엇보다 당신이 보낸 편지에 감사하고, 또 기다려 진답니다. 정말 이곳은 춥군요. 얼음이 얼고, 맑은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살을 에는 듯한 찬바람이 불어 옵니다. 날씨가 더 추워 질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추운 날씨와 함께 외로움도 몰려 옵니다. 이 두 가지 문제는 당신만 있으면 한꺼번에 해결 될 터인데…”


1950년 10월 27일, “고요한 밤입니다. 잠시 시간을 내서 편지를 씁니다. 지난 번에 보낸 편지는 받았는지 궁금하군요.  이곳은 정말 추운 곳입니다.  몸을 따뜻하게 해야 하는데 문제입니다. 다행히도 미군들이 배급한 겨울용 코트를 입으니 한결 좋아졌습니다. 하지만 추위 속에서도 우리 부대원들은 잘 싸우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점령해야 할 마지막 고지는 20마일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끝나고 빨리 집으로 갔으면 좋겠습니다…” 

▲ 지난 해 시드니제일교회에서개최한 6.25 59주년 기념예배에 참석한 호주 참전용사들과 올윈 그린 여사(왼쪽 앞줄)     © 크리스찬리뷰


최영길 선생과 호주 육군 제3대대(3 RAR) 

그녀는 최영길 선생과 아주 각별한 사이다. 영길 군은 남으로 피신하던 중 3대대와 운명적인 만남을 갖는다. 남편인 그린 중령이 호주 제3대대의 소년병으로 편입시켜 의무, 보급, 병참 등 모든 분야에서 영어와 한국어를 할 수 있는 그를 활용하였다. 

최 선생은 이런 인연으로 제3대대 도움을 받아 1968년에 호주로 이민을 왔다. 당시 호주는 ‘백호주의’(White Australia Policy) 나라였기에 이민이 쉽지 않았다. 호주 정부는 전쟁 중 최영길 선생의 공적을 인정하여 ‘Medal of Order of Australia’(OAM) 훈장을 수여했다. 메달을 받는 과정에서 그린 여사는 지대한 공헌을 했다.

“만약 남편이 살았다면 정확하게 모든 이야기를 해 줄 터인데 그럴 사람이 특별히 없어 내가 그 일을 대신 했습니다. 그에 관한 모든 자료는 ‘캔버라 전쟁기념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그녀가 전쟁기념관에 보낸 자료들을 찾아 보니, 최 선생이 어떤 경로로 3대대에 합류하게 되었는가부터 2007년 4월 7일 임종할 때까지 관련된 영문 자료는 물론이고 한글 자료도 함께 보낸 것을 알 수 있었다. 최 선생은 그린 중령의 마지막 전투에도 함께 있었다.

▲ 2007년 안작데이에 호주를 방문한 초대 주월사령관 채명신 장군이 마틴플레이스 호주 군 전사자 추모비 앞에서 올윈 그린 여사와 함께했다.     © 크리스찬리뷰

 
다시 그녀의 책자로 돌아가자. “10월 30일 오후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주위에는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어린 영길은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치열한 전투가 끝나고 밤에는 뭔가 시끌벅적할 것 같았는데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나는 무슨 일이 있는가 하여 밖으로 나왔다. 그 때 누군가  ‘보스가 부상당했다. 희망이 없다’라는 소리를 들었다. 부대원들은 하던 일을 중단하고, 그냥 앉아서 조용히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 호주군의 가평대전투 기념식에 참석해 헌화하는 올윈 그린 여사     © 크리스찬리뷰

 
최 선생은 1950년 10월부터 시작하여 전쟁이 끝나는 53년 6월까지 호주 제3대대에서 많은 일을 했다. 호주군의 경우는 12개월마다 부대를 교체하지만, 그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호주 제3대대 일원으로 복무했던 것이다. 


그린 여사는 2007년 4월 7일 최영길 선생의 ‘천국입성예배’에 참석하여 눈물로 조사를 읽기도 했다. 그의 죽음에 대한 기사와 함께 조사도 전쟁기념관으로 보내졌다. 그녀는 “그는 정말 훌륭한(Wonderful)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사려 깊은(Sensible) 사람이기도 합니다. 최 선생은 언제나 의로운 편에 서서 일을 했습니다.  호주와 한국 사이에서,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 않고 훌륭한 가교 역할을 했던 사람입니다. 이제 그가 없어 아쉽지만 아직도 나는 가족들과 연락하고 있습니다.”라고 회고한다. 최영길 선생은 구세군 교회 교인이었다. 가끔 한국전쟁에 대한 간증을 할 때면 그렇게 이성적이던 그도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아쉬운 작별의 시간 

- 혹시 한국 소식은 듣고 계세요?

“가끔 친구들을 통해 소식을 듣고 있습니다.”

- 그렇다면 최근 ‘천안함 사태’에 대해서도 알고 있나요?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이해하기에는 분명한 증거를 발견하기 전까지 아무도 여론화시키려 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확인되지 않지만 북한이 핵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기에 모두가 조심하는 것 같습니다.”

그녀는 천안함과 관련된 작금의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어쩌면 제 삼자의 입장에서 더 객관적으로 사태를 관조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했다.

▲ 김환기 사관이 본지 객원기자로 올윈 그린 여사와 인터뷰를 마친 후 그린 중령의 사진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했다.     © 크리스찬리뷰

 
- 마지막으로 호주에 살고 있는 교민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까?


 호주의 한인들은 오히려 호주인들보다 더 모범적으로 잘 살고 있습니다. 너무나 감사하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여러 방면에 기여해 줄 것을 부탁 드립니다.”  

아쉬운 작별의 시간이 되었다. 점심 식사를 초대하였으나 정중히 거절했다. 새벽 2시에 일어나 지금까지 잠을 자지 못했고, 저녁에 강의를 들으러 가야 하는 까닭에 조금 쉬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음에 초대하면 기꺼이 응하겠다고 했다.

혹시 6.25 60주년 기념행사에 초청을 받았느냐는 질문에, 아직 받지 못했으나 참석하고 싶다고 했다. 집에 돌아와 그녀가 준 책을 읽으며 몇 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특별히 편지 중에 “이곳이 너무 춥다”는 말이 나올 때마다 그녀에게 미안했다. 아무런 연고 없는 물 설고 낯선 땅에 남편을 보내고, “이곳이 너무 춥다”는 편지를 읽는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그녀가 ‘전사 통보’를 받는 장면에서는 차마 다음 페이지를 바로 넘기지 못했다.    


글/김환기(호주구세군 다문화 및 난민 조정관)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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