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정의의 사도
한·호 선교 130주년 기념 특집
 
글|주경식,사진|권순형
▲ 1989년 4월, 호주연합교회 선교사로 파송받아 일신기독병원에서 치과의사로 일했던 김진엽 선교사. 그는 임수경을 북한 평양 축전에 보내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로 지목되어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루고 호주로 강제 추방당했다.     ©크리스찬리뷰

 

 한국인 호주 선교사


2019년 10월은 한·호 선교 130주년이 되는 해이다.
 

지난 9월 호에 보도한 엘리슨 크로프트(Mrs. Alison Croft, 한국명 이애선) 선교사에 이어 이번 10월 호도 한·호 선교 130주년을 맞아 한국으로 파송받아 사역한 호주 선교사를 특집으로 잡았다.
 
그런데 이번에 인터뷰한 선교사는 호주 선교사였지만 한국인이다.
 
김진엽 선교사. 그는 한국인이었지만 1989년 4월 호주 연합교회(The Uniting Church in Australia, UCA) 선교사로 파송 받아 일신기독병원에서 치과 의료 선교사로 사역했다. 호주 시민권자였던 김진엽 선교사는 1976년 시드니한인연합교회 초대목사인 김상우 목사의 아들이다. 그는 하이스쿨(High School)과 대학을 호주에서 공부한 후 23세에 치과의사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1987년 10월에 한·호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호주연합교회의 친선방문단의 일원(호주연합교회 청년 대표 및 통역 담당)으로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것이 후일에 그가 호주 선교사로 한국으로 파송 받아 사역하게 된 의미있는 사건이 되었다(이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뒤에 다시 이어진다).

 

▲ 미국 LA에서 치과를 개원하고 있는 김진엽 선교사(오른쪽)를 지난 6월 시드니에서 극적으로 만나 본지와 2차례에 걸쳐 단독 인터뷰를 가졌다.     ©크리스찬리뷰


 
그를 만나게 된 것도 극적이었다. 김진엽 선교사는 현재 호주에 살고 있지 않다. 미국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만 풍문으로 듣고 있었는데, 지난 7월에 강병조 대표를 인터뷰하면서 혹시 하며 김진엽 선생의 근황에 대해 물었다.
 
강병조 대표가 나이가 많긴 하지만 그들은 재호한인기독청년회(KCYF) 때부터 알고 지낸 오래된 친구 사이이다.
 
“진엽이 지금 시드니에 있어요!”
 
“네? 지금 시드니에요?”
 
권 발행인과 기자는 그에 대해 궁금해왔다. 한국인이었지만 호주 선교사로,  호주연합교회(호주장로교회 포함)가 파송한 126명의 선교사 가운데 그는 어엿한 122번째 선교사로 등장한다. 지체할 것 없이 연락했다. 그리고 그를 만나 인터뷰하게 된 것이다.

 
내 조국의 철장에 갇혀

 

▲ 김진엽 선교사가 옥중에서 기록한 ‘내 조국의 철창에 갇혀’ 책자 표지.    

 
김진엽 선교사. 그는 1989년 4월 호주연합교회(UCA)소속으로 부산에 있는 일신기독병원 치과 의료 선교사로 파송 받아 한국으로 갔다. 그러나 채 다섯 달이 못되어서 그는 임수경을 북한 평양 축전에 보내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로 지목되어 1989년 9월 2일 체포되었다. 그리고 1년 6개월을 조국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 당시 무시무시한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것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 그가 감옥에서 지내면서 지은책이 바로 ‘내 조국의 철장에 갇혀’이다. 그는 서울구치소와 춘천교도소에 갇혀 지내면서 많은 인생공부를 했었다고 회고했다.
 
“객관적으로 보면 황당하고 힘들었던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기가 저에게는 인생에 대해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25세의 젊은 치과의사가 평신도 의료 선교사로 파송 받아 한국에 갔습니다. 그동안 제가 인생을 겪어봤자 얼마나 알겠습니까?
 
제 전공인 의학관련 공부한 것과 수박 겉핥기식 사회정의에 대한 공부를 한 게 전부였습니다. 정치에 대해서도 정치가 왜 그런가? 이런 고민들을 해보았지만 아마추어 수준의 지식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감옥에 있으면서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1년 6개월 동안 있으면서 사회, 정치, 역사들과 관련된 상당한 분량의 책들을 읽으면서 제가 많이 깨졌고 인생과 사회에 대한 깊은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명색이 선교사로서 신앙과 신학에 대해서도 재정립이 되었고, 역사적인 기독교와 기독교가 사회에 대해 가져야 할 책임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돌이켜 보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제가 갇혀 있었던 방은 이해찬 의원(현 더불어민주당 당대표)이 저보다 먼저 구금되어 있었던 방이었습니다. 그것으로도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 서울 구치소 있으면서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사건으로 구속된 노회찬 의원도 만나며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아마 역사적으로 제가 수감생활 할 때 그때 서울구치소가 가장 정치범이 많이 있을 때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 대학생 청년 시절의 김진엽. ©KCC    


“감옥은 사람을 성숙하게 만든다”고 했던가? 백범 김구 선생이 그러했고, 김대중 전 대통령도 감옥 기간 동안 무려 2천 권 이상의 책을 읽으면서 그의 사고와 인생의 깊이가 더해졌다고 고백했다.

 

▲ 1987년 캠시에 위치한 민족교육자료실 앞에서 김진엽(왼쪽)과 강병조(가운데) ©KCC  

 

기자가 존경하는 신영복 선생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도 밝히고 있지만 20년을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했지만 감옥은 그에게 인생의 경륜과 감히 우러르지 못할 인간에 대한 깊이를 갖게 했다.
 
1989년 10월, 부산에서 한·호 선교 1백주년을 기념하는 각종 행사들이 열렸다. 이 기쁜 시기에 한국인 호주 선교사, 그것도 초대 시드니한인연합교회 목사 아들이 호주 선교사가 되어 조국의 선교현장으로 돌아왔음을 한국교회 관계자들은 큰 의미로 여겼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 화제의 선교사는 그 행사에 참석하지 못했다. 김진엽 선교사는 그때 경기도 의왕시의 차가운 서울 구치소 감방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 재호한인기독청년회(KCYK)가 발행한 정기 간행물 10호 (1985. 5.24) ©KCC         


 
실제 그는 도망갈 기회도 있었다. 임수경 사건이 터지고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된 것을 보며 마음을 졸일 무렵 마침 누님의 결혼식이 있어 미국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아직 수사망이 자신에게까지 좁혀오지 않아서인지 다행히 미국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결혼식이 끝나고 어떻게 해야 하나 동생과 고민을 나누었다. 동생이 자신을 한국으로 돌아가지 말고 미국에서 같이 살자고 해주길 기대했다. 
 
“그런데 이 녀석이 그러는 거예요, 형 한국으로 돌아가. 그리고 형이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으니까 형이 진상을 밝혀야 해. 피하지마!
 
사실 위험하니까 미국에서 같이 살자든지 아니면 호주로 가던지, 한국에는 돌아가지 말라고 해줄 것을 내심 기대했는데, 형이 가서 진상을 밝히라고 하는 거예요. 허 참”
 
실제 그는 한국으로 돌아갔을 때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동생은 한국에 돌아가서 사건의 진상을 밝혀야 한다고 강력히 권고했다. 동생의 매몰찬 권고로 인해 두려웠지만 그는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싣게 된 것이다. 
 
그 형에 그 동생이랄까? 두 살 어린 동생 김선엽(52. Mark Keam)은 미국에서 정치학과 법률을 공부한 후 변호사이자 미국 버지니아 주 민주당 4선 하원의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임수경 방북 사건

 
기자는 그를 만나기 전, 지난 번 강병조(KCC 대표, 본지 2019년 8월 호 커버스토리) 씨를 통해서 어느 정도 임수경 평양축전 참석과 관련한 스토리를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호주 선교사로 파송 받아 일신기독병원에서 사역하던 치과 의료 선교사가 임수경 양을 평양에 보내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죄명을 받아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 1989년 7월 평양에서 열린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전대협 대표로 참석한 임수경 씨가 북한 여자 대학생들이 즐겨입는 ‘조선옷’을 입고 북한 소년단원들과 어울려 춤을 추고 있다.  ©국민일보


 
1989년 임수경의 방북사건은 한국사회에 폭탄을 터트린 것과 같은 사건이었다. 당시 한국에 있었던 기자의 기억에도 여리여리한 여자 대학생이 릉라도 평양체육관에 등장하며 ‘하나의 조국’을 외치며 보였던 거침없는 그녀의 행보가 인상적이었다.
 
그당시 조선일보가 대서특필한 보도를 빌자면 “국가안전기획부는 1989년 9월 4일 임수경 양의 평양 입국을 돕기 위해 전대협(전국대학생협의회)과 서독내 반한단체인 서독 ‘민협’을 연결시켜 준 김진엽(25·부산일신기독병원 치과과장) 씨를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로 구속했다.”라고 보도하고 있다.
 
그리고 안기부에 따르면 김진엽은 호주에 살면서 반한적 성격의 교민 모임인 ‘한국민족자료실’(KRC) 대표간사로 있다가 지난 4월 귀국했고 김 씨는 지난 5월 22일 입국한 KRC 운영위원 김승일(24·여)과 함께 6월 13일 낮 12시쯤 전대협 정책위원장 정은철(23·연세대 정외과 4년 가명 장보고, 영석, 이명섭)과 만나 전대협 대표의 평축 참가를 협의했다는 것이다.
 
당시 모든 주요 일간지는 안기부에 의해 조작된 내용을 여과없이 “호주에 사는 교민이 북한의 지령을 받아 전대협을 도와 임수경을 북한에 보내게 했다”고 대서특필했다.
 
그들의 보도에 의하면 김진엽은 영락없는 빨갱이다. 25세의 호주 시민권자인 젊은 치과 의료 선교사가 북한에 동조하고 남한을 위협하기 위해 해외에서 남파된 간첩의 조직원으로 변형되었다.
 
그런데 그의 자전적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찾아볼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김진엽의 아버지는 시드니한인연합교회 초대목사인 김상우 목사이다. 김상우 목사가 베트남의 사이공에서 목회를 했던 관계로 그는 유년시절을 베트남에서 보냈다. 김상우 목사는 베트남이 패망할 무렵 가족들을 먼저 한국으로 돌려보내고 정부도 돌보지 않던 동포들을 끝까지 남아 돌보다 베트콩군에게 잡혀 억류되었다. 그때 베트남에 있던 동포들 중 상당수는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시드니로 와서 정착했다.
 
호주에 와서 정착했던 동포들은 그당시 호주장로교회와 국제적십자사, 그리고 호주정부를 통해 김상우 목사 구명운동을 하게 되었고, 사이공에서도 교인들이었던 동포들은 호주에 한인교회가 없으니 김상우 목사를 초빙하겠다는 보증과 함께 그가 미국의 간첩이 아니라는 탄원을 새베트남 정부에 넣어 마침내 구명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김상우 목사는 시드니한인연합교회로 먼저 부임해 오고 나머지 가족은 1976년 9월에 호주에 도착하게 되었다. 이때 김진엽은 남들보다 먼저 학교에 들어간 관계로 중학교 1학년 때였다.
 
호주에 도착하여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던 그는 어른들이 교회를 분열하여 자꾸 갈라지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김진엽뿐만 아니라 당시 젊은이들 또한 어른들이 자꾸 갈라져 새로 교회를 세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부모 때문에 친구들과 헤어져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싫었고 싸우는 어른들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어른들은 갈라져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우리들은 연합하여 같이 만나자는 취지에서 연합모임을 만들었다. 이 모임이 바로 KCYF(Korean Christian Youth Fellowship, 재호한인기독청년회)이다.
 
시드니에 오래 사신 분들은 그 당시 그 청년들의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최승일, 권기범, 박은덕, 강병조, 백시현, 양명득, 임경란 등 이들은 매주 모여 예배와 성경공부, 친목을 나누었다.

 

▲ 달링하버에서 본지와 2번째 인터뷰 진행 중인 김진엽 선교사.     ©크리스찬리뷰


 
김진엽도 대학에 입학하면서 이 모임에서 열심히 활동했다. 감정싸움으로 사분오열되는 어른들의 교회와 가식적 신앙에 회의를 느꼈던 젊은이들은 이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석하며 나름대로 역사의식을 고취하고 신앙을 성장시켜 나갔다.
 
강병조 대표와의 인터뷰에서도 언급했지만 KCYF(재호한인기독청년회)와 민족자료실(KRC, Korean Resource Centre)은 젊은이들이 하나님과 세계역사와 민족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지 고민하게 하였고, 그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모임이었다.
 
“어른들은 서로 싸우고 갈라져도 저희는 그러지 말고 서로 뭉치자, 그런 순수한 취지에서 처음에 만들어진 거죠. 그런데 그 당시 우리들은 시드니에서 대학을 다니던 청년들이었지만, 80년대 초반 한국 사회가 격동기를 겪고 있었고, 광주항쟁, 남북분단문제 같은 게 표면으로 나오는 걸 보면서 해외동포로서, 신앙인으로서 고민이 되었던 거죠.

 

▲ 재호한인기독청년회(KCYF) 야유회 (1984년) ©KCC    

 

▲ ‘들소’ 연극 공연 포스터 ©KCC    


조국 대한민국은 왜 저럴까? 해외에 살고 있지만 신앙인으로서 그런 부패하고 부도덕한 조국의 정치 사회문제의 이슈에 관심을 갖고 도울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이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하며 살았던 거죠.”
 
실제 이 젊은이들은 매년 종료주일 때마다 전국적으로 모이는 세계평화대행진에 참가하여 ‘우리 조국땅에 평화를’이라고 적힌 대형 플래카드를 들고 참가하기도 했다. 바로 한반도의 전쟁 위협을 제거하고 평화를 정착시키는 일에 온 세계평화애호가들에게 지지를 보내 달라고 호소하기 위해 참가했는데, 같이 참가한 다른 사람들로부터 큰 격려의 박수도 많이 받았다.
 
이처럼 젊은이들의 신앙은 교회 안에만 갇혀 있는 신앙이 아니었다. 당시 유명무실했던 각 대학의 한인학생회와 친교 중심의 각 교회의 청년회가 자기들끼리의 교제와 개인 구원에 함몰되어 있을 때 이들 젊은이들은 사회와 세상에 눈을 돌리고 실제 예수의 삶을 구현하기 위해 몸부림쳤다.
 
하루 24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열심히들 살았다. 이 젊은이들은 각기 속한 가정과 학교, 직장과 교회에서 모든 도리를 다했을 뿐만 아니라 동포사회에 어려움과 아픔이 있을 때마다 발벗고 앞장서서 도왔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라는 구호는 80년대 시드니 이민사회를 경험해 본 동포들이라면 모두가 아는 이 젊은이들이 벌인 캠페인이었고 실제 그 캠페인을 통해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조국 대한민국의 가슴 아픈 현실에 대해서도 침묵하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 조국의 역사, 문화, 사회, 정치, 경제에 대해서 공부하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 연극 ‘들소’공연에서 얘기꾼 역을 맡은 김진엽 (1985. 2.15~16) ©KCC    


그가 젊은 시절에 재호한인기독청년회(KCYF)에서 만난 친구들과 선배들은 그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김진엽은 재호한인기독청년회(KCYF)에서 활동하면서 바른 신앙이란 어떤 것이며 예수의 삶을 구현하기 위해 고민해왔던 것이다.

 
11년 만에 다시 찾은 조국

 
그는 대학을 졸업하던 해인 1987년 1월 조국 대한민국을 11년 만에 방문했다. 얼마나 그리워하던 조국인가? 그동안 그는 시드니에서 열심히 살았다. 치의대 학생으로 재호한인기독청년회 임원으로 1980년에 부모가 미국으로 모두 떠났기 때문에 자립해서 살아야 하는 어려움으로 그는 햄버거 가게에서, 식당에서, 칵테일 바텐더로 여러 가지 궂은 일을 마다 않고 일을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어려운 치의대 공부도 하고, 밤이 새도록 의기투합된 젊은이들끼리 고민하며 토론하고, 교민들을 돕기 위해 발벗고 나섰으며, 재호한인기독청년회를 이끌고 동포들을 계몽하며 그는 20대 초 젊은 시절을 아낌없이 헌신했다. 

 

▲ 변조은 목사(왼쪽)가 김진엽 선교사의 석방을 촉구하는 시위를 시드니총영사관 앞에서 가졌다. ©KCC

 

▲ 시드니총영사관 앞에서 김진엽 선교사의 석방을 촉구하는 시위 장면. ©KCC    


그가 대한민국을 방문했던 1987년 1월은 마침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터져 한국사회가 떠들썩했던 시절이었다. 본인과 나이가 비슷했던 한 젊은 대학생이 부당한 고문과 공권력에 의해 무참히 피살되었다는 사실을 접한 그는 조국의 암담한 현실에 착잡했다.
 
그는 조국을 떠나기 전날 교회에서 만난 대학생들과 밤을 꼬박 새워가며 조국의 현실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새벽에 뜨는 해를 바라보며 결심했다. “내가 반드시 조국땅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해 그는 시드니로 돌아와 친구들과 함께 1987년 6월 한국민족자료실(KRC)을 설립했다. 한국민족자료실을 설립한 배경에는 먹고 사는 것과 생존하는 것에 급급한 동포사회에 민족의식을 일깨워 주고, 이민사회에서 동포들의 권익을 향상시키며, 해외에 사는 동포지만 우리가 처해 있는 시대적 역사적 자리매김을 심어 주기 위해서였다.
 
호주로 돌아온 김진엽은 어엿한 사회인이자 잘나가는 치과의사였다. 거기에 대학원 연구생이자 대학의 조교수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도 조국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젊은이였다. 그리고 예수의 삶을 자신의 인생을 통해서 구현하고자 하는 진실한 신앙인이었다.

 
호주 선교사로 헌신하다

 
“실은 저는 어렸을 때 목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어머니의 고생을 보며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대신 의사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의술을 가지고 사랑과 정의의 실천자인 예수의 삶을 실천하며 살자고 결심한 것입니다.”
 
1987년 10월, 그는 마침 호주연합교회가 한·호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한국 친선 방문단을 조직하게 되었는데 호주교회 대표 23명 중 일원으로 호주교회 청년대표 및 통역자로 한국을 다시 한 번 방문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그가 호주선교사로 헌신하게 되었던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 권기범, 김승일, 김춘순 여사 등이 평축 관련, 안기부 압력을 폭로하는 기자회견을 호주 언론들과 가졌다. ©KCC    


호주연합교회의 총회장이 부산진교회에서 설교할 예정이었는데 일정의 차질 때문이었는지 한국의 한 장로가 통역을 맡은 것을 예배 직전에 알게 된 것이다. 그런데 통역 맡을 박경화 장로와 통성명을 하고 결국 김진엽 씨가 통역을 하게 되었다.
 
예배를 마친 후 박 장로는 “여지껏 통역하는 설교를 많이 들어 보았지만 이번처럼 멋진 통역은 처음이다”라며 김진엽을 반겨 주었다.
 
그리고 본인을 일신기독병원 원장이라고 소개했다. 김진엽 씨가 자신은 치과의사라고 소개하니까 마침 일신기독병원에 치과의사 자리가 비어 있다고 이곳으로 오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조국으로 돌아와 부산 일신기독병원에서 호주연합교단 파송 의료선교사로 일을 하게 된다고 생각하니 꿈만 같았다. 그는 이 일이 잘 성사되기를 위해 열심히 기도했다고 고백했다.

 

▲ 호주연합교회 총회 주최로 가졌던 귀국보고 및 환영예배에서 인사하는 김진엽 선교사. (1991. 3.5)     © 크리스찬리뷰


그리고 한국 친선 방문이 끝나고 호주로 돌아온 후, 대학원을 마치고 조교활동을 정리한 후 종합병원에 근무하며 임상경험을 늘리는데 힘썼다. 이때 그는 조국 대한민국으로 돌아가서 마음껏 사랑의 의술을 펼칠 것을 기대하며 마음이 한껏 부풀었다.

 
일신 기독병원 한국인 호주 선교사

 
드디어 김진엽은 1989년 4월 호주연합교회 세계선교부의 파송을 받아 호주선교사로 조국 대한민국에 도착했다. 사실 대한민국에 대한 사랑이 강렬했던 그였지만 조국에 오는 것이 녹녹하지만은 않았다. 그의 전력을 안 한국 정부가 비자를 내주지 않아 실갱이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전에도 인권과 평화와 관련하여 여러 진보적인 활동들을 했지만 그는 1987년 6월 민족자료실을 설립한 후 눈에 띄는 활동들이 많이 있었다.
 
1988년 11월 노태우 대통령이 호주 방문 시 한국민족자료실(KRC)이 주동이 되어 “전두환, 이순자 광주학살 책임자를 처벌하고 조국의 완전한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앞당기자”라고 노태우 대통령이 묵고 있던 인터콘티넨탈 호텔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 스트라스필드연합교회에서 열린 김진엽 선교사 귀국 환영회 전경     © 크리스찬리뷰
▲ 어머니와 함께 귀국 환영회에 참석한 김진엽 선교사     © 크리스찬리뷰


그리고 1989년 3월 시드니에서 열렸던 세계 남자 아이스 하키대회에서 민족 자료실(KRC)이 주동하여 남북분단 이후 최초 남북공동응원단을 구성하여 응원전을 펼쳤다. 이런 정황들을 시드니에 있는 안기부 직원들이 항시 감찰하고 있었고 한국민족자료실(KRC)의 운영위원인 김진엽을 곱게볼 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한국정부가 보기에 소위 요주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호주 선교사의 신분으로 한국으로 들어가는데도 비자를 쉽사리 내주지 않았다. 호주연합교회와 선교부에서 보증을 서고 해서 간신히 비자를 얻을 수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제가 호주선교사로 한국에 들어가는 데 비자를 안 내주는 거에요. 제가 소위 요주의 인물이었던 거죠. 한국 정부가 재호한인기독청년회(KCYF)나 한국민족자료실(KRC) 활동을 탐탁치 않게 봐왔던 거에요. 시드니에 있는 안기부 정보원들이 다 관찰하고 있었던 겁니다. 비자를 안 내주어서 소위 호주연합교회의 인사들이 보증을 서주어서 간신히 한국 비자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간신히 한국 비자를 받아 한국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그에게는 또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바로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미국에 가신 후 10년 이상 공장에서 일하시며 병도 얻었다. 그가 한국에 선교사로 올 무렵 유방암 수술로 인해 무척 힘들 때였다.

 

▲ 북한 여성들이 ‘통일의 꽃 임수경’을 자수를 놓아 액자를 만들고 있다. ©국민일보    


그는 이제 잘나가는 치과의사이다. 그가 돈을 벌고자 마음을 먹으면 얼마든지 그 길로 매진할 수도 있고, 미국으로 건너가 어머니를 모시고 편안하게 치과 의사 생활로 만족하며 살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눈에 밟히는 어머니를 뒤로하고 선교사의 신분으로 한국 땅을 밟게 된 것이다.

 
예수의 삶과 정신을 따라

 
일신기독병원으로 와서 그가 처음 받았던 충격은 어린 아이들의 건강 상태와 치아 상태를 보고 마음이 아팠다고 한다. 한국이 올림픽을 치루었다고 하지만 부산 땅의 많은 시민들은 가난한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맞벌이 부부들 밑에서 자란 아이들이 부모의 돌봄이 부족하여 치아 상태가 엉망이었다.
 
“제가 일신기독병원에서 처음했던 일 중의 하나는 병원 주변의 아동들에게 무료진단과 일차 처치를 해줬어요. 간호사와 함께 꼬박 1주일 동안 초등학교 두 곳을 돌며 5백 명 정도의 학생들을 검사하고 치료해 주었는데 그렇게 해놓고도 좋은 일을 했다는 성취감과 만족감보다는 그애들을 보며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돈이 없어도 모두가 평등하게 대접 받고 치료받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면, 이것이 그가 그 당시 가지고 있었던 순진한(?) 생각이었다. 그는 이것을 “자본주의 사회에서 치과의사의 사명”으로 생각했다. 이것은 그가 나중에 미국에 가서 공중보건학 박사 과정 공부를 할 때 연구하고자 했던 주제이기도 하다.

 

▲ 임수경 방북 사건으로 구속된 전대협 의장 임종석(왼쪽)이 임수경의 손을 잡고 있다. ©국민일보  


그가 사정상 박사과정을 끝내지 못했지만 “자본주의 의료시스템과 사회주의 의료 시스템의 비교와 차이”를 연구하고 싶었다. 호주만 하더라도 돈이 없어도 위급한 환자는 먼저 생명을 살리는데 주력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자본주의 시스템에서는 돈이 없으면 병원에서 쫓겨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그는 이처럼 예수의 공평과 사랑의 정신을 그의 의술로 펼쳐 나가길 소원했다.

 
길을 묻는 사람에게 길을 가르쳐 준 죄

 
이것은 김진엽 선교사의 항소 이유서 중 “임수경 전대협 대표 평양축전 파견사건” 관련 부분을 인용한 것이다.
 
“길을 묻는 사람에게 길을 가르쳐 준 것도 죄가 되느냐?”는 논지다. 그가 일신기독병원에서 열심히 진료하며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면서도 한편으론 그는 민족통일과 사회 정의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았다. 88올림픽을 치루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아직도 요원해 보이는 시대였다. 그리고 정부는 정권유지를 위해 북한을 이용해 국민들을 위협했다.
 
그러나 세계사적으로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조짐이 일고 있었고 고르바초프의 등장으로 공산주의도 개혁의 바람을 일으킬 때였다. 한국에서도 문익환 목사를 기점으로 서경원 의원, 황석영 작가 등 북한을 방문하는 인사들로 떠들썩했다.

 

▲ 아들 3형제를 두고 있는 김진엽 선교사(2016년 성탄절 ) ©김진엽    


그는 이미 호주에 있을 때에도 북한과 민족통일에 대한 많은 공부와 고민을 하고 있었고 한국 정부가 자신들의 부당한 정권창출을 위해 간첩단이니 북한 만행이니 하는 것들을 통해 순진한 남한 국민들을 길들여 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마침 시드니 한국민족자료실(KRC)에서 같이 활동하던 김승일이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녀는 평양축전을 방문하려고 계획하던 중이었다. 그러나 호주 영주권자였던 그녀가 호주 시민권을 아직 받지 않았던 상태이기 때문에 혹시 북한을 방문하면 영영 한국 방문이 어려워질 것 같아 마지막으로 한국을 방문하던 중이었다.
 
김승일은 자신이 평축(평양축전)에 참가할 계획이기에 그 당시 한국 전대협이 평양축전을 참가하기 위해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가 해서 대학가를 방문하였다. 그리고 우연히 고대 영자 신문 편집장을 만나 호주에서의 동포청년들의 삶에 대해 나누고 평축 참가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또한 평축에 참가할 예정이면 전대협을 만나보라고 권면하는 그 편집장을 따라 함께 한양대에 가서 전대협 정책위원장을 만나게 된 것이다.
 
호주 시민권자들이 북한을 방문하는 것은 큰 문제와 어려움이 없지만 당시로서는 한국인이 해외에 나가는 것도 쉽지 않은 시대에 북한을 간다는 것은 어떤 루트(경로)를 이용해야 할지 막막한 때였다.
 
전대협 정책위원장은 자신들의 고민이 전대협 대표를 평양에 보내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는 고민을 하였고 이에 김승일은 자신보다 해외에서의 경험이 많은 김진엽을 소개해 준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여기에 다 기록하기는 어렵지만 김진엽선교사는 순수한 마음으로 평양가는 길을 묻는 사람에게 어떻게 갈 수 있는 가를 같이 고민하고 전대협 대표 임수경의 평축 파견 경로를 함께 협의한 것이 국가보안법 제9조 2항(편의 제공)에 걸린 것이다.
 
기억하는 독자들도 있겠지만, 당시 보도는 북한에게 직접 지령을 받은 간첩단처럼 대서특필하였고 임수경 평양방문은 한국사회에서 오랫동안 회자될 정도로 큰 사건이었다.

 

▲ 보이 스카우트 미국 최고상인 이글 스카우드를 받은 김진엽 가족(2014년) ©김진엽  


지금은 폐쇄되긴 했지만 개성공단도 세워져서 남과 북이 함께 일을 했었고, 금강산 관광도 한동안 이어졌었고, 바야흐로 문 대통령과 심지어 미국 대통령도 판문각을 넘어 함께 회담하는 화해의 무드가 조성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30년 전 이러한 노력들이 없었다면 작금의 화해무드는 요원했을 것이다.

 
에필로그

 
현재 김진엽 선교사는 부인과 세 아들이 미국 LA에 거주하고 있다. 그는 임플란트업계에서 알아주는 치과의사이자 국제치과학회 강사이다. 이번에 호주에 온 것도 호주 임플란트학회 초청으로 강연차 온 것이다.

 

▲ 국제 심포지엄에서 발표하는 김진엽 선교사 (2018) ©김진엽  


그의 친구들 말을 빌자면 김진엽은 젊어서도 똑똑했고 뭐든지 열심이었다. 18개월 옥살이 후에 그는 한국에서 추방되었다. 그리고 미국으로 간 것이다. 거기서도 그는 열심히 살았다. 그래서 현재 임플란트 부분에서는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나름 유명인사이다.
 
그러다 보니 신기술 보급을 위해 이곳저곳에서 와 달라는 요청을 자주 받는다고 한다. 가장 감명깊었던 때는 2002년에 평양으로부터 초청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생애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했다. 감회가 새로웠다고 한다.

 

▲ 김진엽 선교사의 치과 의료팀. ©김진엽    


“1989년 남한 정부의 조작된 보고서에 의하면 저는 이미 평양을 여러 번 방문한 사람이에요. 물론 나중에 그게 아닌 게 밝혀지긴 했지만. 그런데 2002년에 실제 북한의 치과의료회 초청을 받아 신기술 보급을 위해 평양에 처음 갔을 때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했었습니다.”
 
그는 지금도 제3세계의 개발도상국들이 자기를 초청하면 자비로 가서 그들을 도와주고 있다.
 
물론 선진국을 다니는 것이 개인적으로 물질적으로 편하고 좋지만 그렇다고 제3세계에서 요청하는 것을 무시하지 않는다고 한다. 아무래도 제3세계 개발도상국에 갈 때는 모든 경비를 자비를 들여 갈 때가 많은 봉사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가 재판을 받을 때 그가 작성한 재판 반박문 중 가슴에 와 닿는 구절을 인용해 본다.
 
“나는 1986년에 의사가 되면서 나아가 의사로서 사는 길은 상류사회의 대표적 화이트 칼라의 모습으로 자신의 지식을 파는 행위보다는 의료선교라는 방법을 통하여 사회가 내게 가르쳐준 지식을 사회로 되돌려주는 봉사로써 진정 모든 사람이 잘사는 사회를 만드는 데 있다고 믿게 되었다.
 
이러한 기본적 삶에 대한 신념과 앞서 여러 군데에 밝힌 나의 조국관 그리고 긴 타향생활 속의 향수가 나를 조국으로 돌아오게 한 것이다.”〠


글/주경식 |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사진/권순형 |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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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9/23 [17:53]  최종편집: ⓒ christian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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