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팍한 정체성을 건강한 정체성으로

강승찬/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9/09/25 [17:34]

신앙생활을 잘 하다가 시험에 들고 사단의 공격 앞에서 쉽게 무너지는 성도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건강, 비자, 자녀, 사람들과의 관계 문제 등을 들지만 사실 대부분 자기 자신의 정체성이 더 문제인 경우가 많다.

 

만약 “나의 사명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 앞에 곧바로 답변 할 수 없다면, 아직 건강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진 것이 아닐 수 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창1:26-27)고 말한다. “인간이 무엇인가의 형상이다!” 라는 말은 인간이 ‘자기 맘대로’ 살아가도록 창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 즉 하나님의 이미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지 않을 때 항상 다른 것을 하나님으로 만들고, 그것을 우상으로 삼으며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스(스페인)로 배타고 도망가다가 큰 폭풍을 만난 요나에게 “당신은 누구인가?” 라고 뱃사람들이 질문한 것은 ‘당신은 누구의 것인가?’ ‘당신은 어떤 신에게 속한 존재인가?’라는 질문과 같은 것이다. 

 

폭풍 속에서 요나는 침묵하다가 “나는 히브리 사람입니다” 라고 입을 열었다. 이것이 가장 먼저 요나의 입에서 나온 대답이었다. 하나님의 선지자가 아니라, 자신의 민족을 자신의 정체성 가장  최우선 순위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요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고 있었지만, 그 믿음은 자신이 속한 국적보다 더 아래에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민족의 정체성에 자신의 종교를 덧붙이기를 좋아한다. 왜냐하면 민족의 정체성이 믿음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요나의 자아상에서 히브리 민족이 신앙보다 더 근본적이었다면, 큰 성 니느웨에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일을 거부한 요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신앙보다 민족을 우선순위에 두고 사역했던 얄팍한 영적 정체성을 가진 요나 선지자에게는 다른 민족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권면하는 일이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 당연했던 것이다.

 

요나 선지자는 민족에 대한 충성과 하나님에 대한 충성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갈등했다. 여기서 요나 선지자는 자신이 속한 민족의 편을 들었고, 결국 하나님의 사랑과 회개의 메세지를 전하는 일을 거부하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도 이런 불행을 반복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도 얄팍한 영적 정체성을 가지고 신앙고백을 하면서 일터에서 나쁜 물건을 좋은 물건이라고 남을 속이기도 하고, 작은 이익을 얻기 위해 양심을 팔기도 하며, 타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등한시 여기기도 한다.

 

그러면 우리 정체성의 뿌리를 어디에 두어야 건강한 정체성을 가질 수 있을까? 우리의 정체성의 뿌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어야 한다.  도망간 요나와 예수님을 3번 부인한 베드로는  종교적 헌신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종교적 헌신과 성취감 위에 자신의 자아상을 세웠다. 결국 이들은 자신의 연약함을 보지 못했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적으로 대할 수 밖에 없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의 영적 빈곤함에 대해 아무런 관심을 갖지 못했고, 베드로는 칼을 휘둘렀다.

 

우리의 정체성은 종교적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토양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 안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새롭게 가꾸어가야 한다. 그때에 우리의 얄팍한 영적 정체성은 사라지게 되고 건강하고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으로 회복될 것이다.〠


강승찬|시드니새생명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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