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론 V

하나님은 선하시고, 하나님은 전능하신데 세상에는 악이 존재한다?

주경식/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9/09/26 [17:36]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전통적으로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의 섭리와 악의 실제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왔다.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강조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의 실재를 부인하지 않고 그 둘 사이에서 해결점을 찾으려고 노력한 것이다.
 
어거스틴은 그가 쓴 ‘하나님의 도성’에서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개인의 삶과 역사 안에서 분명히 존재해 왔다고 피력하고 있다. 그는 로마제국의 붕괴 과정 안에서도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적 손길을 기술한다.
 
인간의 불의와 전제주의, 전쟁과 탐욕 등으로 붕괴되는 악한 사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건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자유를 오용함으로 일어나는 사건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건들이 일어나도록 허용하는 가운데 그것들을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데에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칼빈은 어거스틴보다 더욱 강력하게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강조한다. 칼빈은 하나님의 예정과 예지를 강조할 뿐 아니라 인간의 일을 포함하여 자연과 역사의 미세한 부분까지도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고 강조한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어떤 사건도 행운, 우연, 변덕에 의해 일어나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알아서 의지적으로 결정한 것을 제외한 그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알고 의지로 작정한 것이 아니면 어떤 일도 이 세상에 일어나지 않는다.”(기독교강요 1.16.3)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연과 역사의 모든 과정을 세세한 것에 이르기까지 다 다스린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칼빈은 섭리론을 운명론과 구별하여 하나님이 모든 것의 제1원인이지만 이성과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 우리는 또한 그에 걸맞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가르친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위험을 미리 내다보고 분별력을 사용하도록 이성을 주셨다. 만약 위험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면, 우리는 무작정 그곳으로 달려가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무시하고 하나님에게 모든 잘못을 다 돌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어거스틴과 칼빈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생각이라 할 수 있다.

 
여전히 만족스럽지 못한 답변들

 
이러한 전통적인 섭리론의 틀 안에서 기독교 신학은 신정론에 대하여 세 가지 답변들 사이를 오고 갔다.
 
첫 번째는 악의 경험을 역경을 당한 자들에게 주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성경에 이러한 주장들을 뒷받침해 주는 부분들이 보이는 것 같지만 (모세오경, 욥기) 예수는 분명히 이러한 주장에 대해 일침을 가한다. “소경 된 것은 본인의 죄와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다(요9:1-3).” “실로암의 탑이 무너진 것은 실로암 사람들이 악해서가 아니다(눅13:4).” 
 
그렇기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함부로 판단해서도 안 될 것이며 모든 고통이 심판 때문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져서도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인도네시아의 쓰나미를 보며, 네팔의 지진을 보며 우상을 섬겨서 그렇다느니 막말을 해대는 목사들을 보면 신학적 소양이 의심스럽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인생 채찍과 사람 막대기로 인간들을 훈련하실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 함부로 입을 여는 것은 위험하다.
 
두 번째는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고난과 악의 경험을 하나님의 교육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한다. 하지만 이러한 이해는 이 세상의 고난과 고통이 다 좋은 경험만이 아닌 것이 분명하며 인간의 재앙과 고난이 하나님의 교육을 위한 일반적인 진리로 변질되어서도 안 된다.
 
여기에도 다른 사람이 당하는 고통과 고난에 대해 주의 깊은 태도가 필요하다. 욥을 찾아온 세 친구처럼 함부로 정죄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세 번째는 하나님은 인간의 지혜로 측량하기 어려운 분이라는 것이다. 세상에 도처하는 수많은 악들, 불공평하게 돌아가는 악의 구조와 악의 현실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믿으며 인내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성서가 지지하는 태도라는 것이다. 까닭모를 고통과 불행에 처했었던 욥은 하나님에게 질문을 퍼부었지만 결국 하나님의 길은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는 측량하기 어렵고 인간의 유한성과 제한성만 깨닫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유한한 인간의 지혜로 위대하고 무한하신 하나님의 세계를 다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악한 현실과 까닭 모를 고통에 처할 때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충격적인 세월호의 총체적인 악 앞에서

 
생짜배기 같은 자식을 차가운 물 속에서 생매장시키는 광경을 팽목항에서 보고 있는 부모들의 심정을 무엇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재난구조 시스템은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선장과 선원들은 지들 살 궁리로 도망가기 바쁘고, 정부는 전원 구출되었다는 거짓뉴스를 내보내고, 구조선을 보낸다고 해도 거부했던 이 총체적 악의 한 가운데서 생짜배기 자식들을 차가운 물과 가슴에 묻은 그 부모들에게 사랑하는 하나님의 교육이라느니, 그래도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라느니 이런 말들을 할 수 있을까?
 
그냥 곁에서 같이 울어주는 것이 그들을 진정으로 위로해 주는 것일 것이다. 또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이러한 악이 발생하게 된 시스템을 고치고, 왜 이런 잘못된 일이 벌어지게 되었는지 진상을 규명하고, 그때 잘못을 저지른 자들에게 적절한 처벌을 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 주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자식을 차디찬 물에 묻고 가슴이 찢어지는 그들에게 위로는 못해줄 망정 “보상금을 넉넉히 받지 않았느냐?” “자식팔아 팔자 고친다!”는 등 그들 가슴에 쇠 못을 박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총체적 악한 일이 왜 벌어지게 되었는지 진상을 규명을 해주라는 데 정부가 묵묵부답이라 단식하는 부모들 옆에 피자파티를 벌이는 금수만도 못한 자들은 도대체 어떤 자들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 세상에는 지금도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숱한 악한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영문을 모르는 고난과 고통이 삶 속에 불쑥불쑥 찾아오기도 한다. 수많은 전쟁의 현장에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원인 모를 지진과 쓰나미 현장에서, 불의한 공권력에 의해서 사랑하는 가족이 죽고 인간의 생명이 내팽개친다.
 
이러한 불의한 일이 벌어질 때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시는가?  신정론에 대한 어떠한 대답도 완벽하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계속>


주경식|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호주비전국제 대학 Director, 전 시드니신학대학, 웨슬리대학 교수

 

 
광고
광고

  • 포토
  • 포토
  • 포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