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 끝끝내 지켜온 작은 아름다움들(2)

현장취재/호주 선교사들이 뿌린 복음의 열매를 찾아서

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0/05/31 [11:28]
(2)부산 - 「끝끝내 지켜온 작은 아름다움들」
 
                                                                        글/김명동,사진/권순형

 선교사들의 신앙 유적지를 찾아가는 일은 그곳에서 그들이 살았던 삶의 발자취를 더듬어 그들의 고귀한 얼과 뜻이 어디에 담겨져 있는 가를 살펴보고, 오늘의 나 자신의 믿음을 되짚으면서 신심을 더욱 두텁게 쌓는 일이다.

 
▲ 부산진일신여학교 제1회 졸업사진(1911년 3월)     © 크리스찬리뷰
 
하지만 호주 선교사들의 발자취는 대부분 사라졌거나 훼손돼 그들의 사역 흔적을 기리기조차 어려운 딱한 형편이다. 금성고교 뒷산에 있었다는 초대 데이비스 선교사의 묘는 간 데 없고, 일신기독병원에서 치료받은 한센병 환자들이 헬렌 맥켄지 병원장의 숙소 앞 골목길을 무딘 손으로 시멘트 포장해드렸다는 일화가 담긴 좌천동 달동네 현장도 묘연한가 하면, 통영에 있는 호주 선교사관은 퇴락한 채 잡초사이에서 쓰러져가고 있다. 나라의 안위가 백척간두에 있던 구한말로부터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을 거쳐 중진국 대열에 들어서기까지 우리나라에 와서 헌신의 삶을 살았던 호주 선교사들의 궤적이 주는 감동의 깊이에 비례해 부끄러움 또한 크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계제에 대한제국 말기인 1905년에 준공돼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식 건축물로 지정된 부산진일신여학교 건물이 기념전시관으로 새롭게 태어나, 그분들의 숭고한 사역을 조금이라도 기릴 수 있게 돼 조금은 다행이다.

기자는 10년 전 일신여학교를 취재했던 수첩을 꺼내 펼쳤다. 그 날 날짜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 부산광역시 지정기념물 제55호로 지정된 부산진일신여학교     © 크리스찬리뷰
 
『잘 알려 진대로 부산 동구 좌천동은 호주 선교부의 복음의 못자리이다. 특히 좌천 1동 768번지에 있는 장로교 부산신학교의 건물은 옛 '부산진일신여학교'로 부산에 단 하나 밖에 없는 구한말의 현대적 건물이다. 1905년 호주 선교사들이 건립한 서양식 건축물로 전국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그런데 곧 매각되어 모든 이의 기억으로부터 사라질 운명에 놓여있으니 안타깝다.


또 다시 안내하는 손명암 장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 부산진교회에서 이 건물을 사면 어떻습니까?

"사실 노회에서는 돈이 필요하지 건물이 보존되든 안 되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우리 부산진교회가 호주 선교부 첫 열매로서 호주 선교회 재산을 우리가 사야지 않겠느냐며 여러 번 논의를 했지만 너무 부담이 크니까요"

취재팀은 부산을 떠나면서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것은 역시 우리가 성금을 모아서라도 호주 선교사들의 한국사역을 기념하는 기념비라도 마땅한 장소에 세워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부산 곳곳에는 호주 선교사들의 감동적인 눈물이 배어있다. 눈물이라는 감성적 표현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은 호주 선교사들의 피와 흔적이 곳곳에 서려있기 때문이다. 돌멩이 하나, 풀 한 포기에도 서려 있어서 선교사들의 체취가 우리의 영혼을 감동시키고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부족한 가를 깨닫게 해준다.

기념비! 바로 이것이다. 이것으로 오늘날 우리들이 잃어버리고 있는 역사와 신앙을 되살려 산업화 사회가 진행될수록 더욱 소중하게 다가오는 111년 전의 기억들을 다시금 되새겨 보면 어떨까 싶다.

권순형 발행인과 기자는 자리를 박차고 달려갔다. 일신여학교 건물도 매각된다니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부산일보 김상훈 사장과 부산 기독교방송국 임현모 총무팀장을 만나 우리의 취지를 설명했고 그들은 흔쾌히 서둘러 도와줄 것을 약속했다.』

그로부터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부산진일신여학교 건물이 역사기념관으로 다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 10년 전 매각 위기에 처했던 부산진일신여학교 건물(왼쪽)이 원형을 복구(오른쪽), 지난 4월 기념관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 크리스찬리뷰

일신여학교 기념관 문 열어

2010년 4월 5일 오전 10시 30분. 예장통합 부산노회(회장 김성득 목사)는 부산진교회(이종윤 목사)에서 부산진일신여학교 기념관개관 기념예배와 기념식을 가졌다. 이날 예배는 부산노회 역사위원장 김운성(영도중앙교회)목사의 사회로 양한석 장로의 기도, 김성득 목사의 설교, 탁지일(부산장신대) 교수의 '일신여학교 기념관의 역사적의의' 발표, 안대영(기독교선교박물관 관장) 장로의 기증사, 이상규(고신대) 교수의 축사, 최병주(전 노회장) 목사의 축도 등으로 진행됐다.

'옛적 일을 잊지 말라' (신명기 32:7)를 본문으로 설교를 시작한 김성득 목사는 '일하시는 하나님을 찬양 한다' 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호주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일신여학교를 우리는 잊을 뻔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깨닫게 해주셔서 기념관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어 김 목사는 " 이 기념관을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기를 소망하며 새로운 역사를 창출하길 바란다"고 역설했다.

 
▲ 탁지일 교수(부산장신대)가 ‘일신여학교 기념관 역사적 의의’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탁지일 교수는 '일신여학교 기념관의 역사적 의의' 발표에서 "일신여학교는 부산시 지정 기념물로 시와 동구가 7억 5000여 만 원을 들여 원형 복원한 뒤 기념관으로 새롭게 단장했다"며 부산 경남지역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이었던 일신여학교는 이 지역 3.1운동의 깃발을 올린 곳으로 유명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탁 교수는 "부산지역의 개신교 유적지 및 박물관을 네트워킹 하는 '부산지역 개신교 유적지 관광벨트'의 형성을 고려해야 할 때"라고 제안하며 "테마관광 및 개신교 역사기행의 중심지가 될 수 있도록 구체적인 방안을 부산교계가 초교파적으로 마련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사료 기증자 안대영 장로(75)는 "영남지역 선교거점인 좌천동 언덕에 기독교 역사관을 꼭 만들겠다는 꿈을 가지고 유물과 사료가 있는 곳이면 해외든 어느 곳이든 달려가 구입했다"며 "이번 개관하는 기념관에 내 몸의 분신과도 같은 소장품 100점을 기증해 기쁘면서도 만감이 교차한다"고 말했다.

또 안 장로는 "초창기 선교사들이 순회 전도할 때 사용한 풍금은 일본 야마하 회사에서 만든 100년이 넘은 것이다"고 말하고 "기증하는 유물 하나하나마다 얽힌 수많은 사연들이 있어 앞으로 '유물 사냥 발자취' 를 한 권의 책으로 엮어내겠다"고 말했다. 이어 안 장로는 "그 어떤 내색도 하지 않고 끈질긴 인내심으로 협조한 아내 강정희 권사께 감사한다"고 말했다.

▲ 복원된 부산진일신여학교 건물이 기념관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 크리스찬리뷰
 
이상규 교수는 "이 기념관은 부산지방 최초 기독교 관련 역사관일 뿐만 아니라 호주 선교사들이 사역했던 터 위에 세워져 역사적 위치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또 이 교수는 "지금까지 126명의 호주 선교사들이 이곳에 와서 사역을 했는데 그동안 호주 선교사 기념관이 없었다"면서 "건물 운명은 후손들에 의해 결정되는데 지혜롭고 슬기 있는 분들이 위기에 처해있었던 이 건물을 지키고 보수하여 기념관으로 개관하게 된 것을 축하하며 부산노회의 어르신들이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라고 평가했다.


이날 예장 통합 부산노회는 기념관 개관에 기여한 부산진교회 이상화 장로와 김경석 장로, 탁지일 교수, 안대영 장로, 김운성 목사 등에게 공로패를 증정했다.

사실 부산진일신여학교 기념관이 건립되기까지는 독립운동 역사 이외에 선교 역사가 전시되는 문제를 두고 부산노회와 시 당국 사이에 의견이 좁혀지지 않아 원래 지원하기로 한 금액이 다시 시의회를 거쳐 시로 환원되는 등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이 때 이상화 장로가 나서 시와 구청에 선교역사를 함께 전시해야 하는 당위성을 설명하고 중재해 결국 지난해 시비 6억 원을 들여 원형 복원 공사를 마치고 올해 추가로 1억 5천만 원을 확보해 기념전시관으로 새롭게 탄생할 수 있었다.


▲ 안대영 장로 부부(왼쪽)는 복원된 부산진일신여학교 기념관에 100여 점의 유물을 기증했으며, 김경석 장로는 각종 사료들을 기증했다.     © 크리스찬리뷰
 
이상화 장로는 "문화재는 돈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의 문제이기 때문에 성도들의 많은 기도가 아니었다면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고 말했다. 또 이 장로는 "이 기념관은 부산 기독교인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줄 수 역사관"이라면서 "역사는 과거 현재 미래를 하나로 연결시켜 줄 수 있는 끈인 만큼 더욱 가치가 있다"고 설명했다.


예배에 이어 참석자들은 부산진교회 옆에 위치한 부산진일신여학교 기념관으로 자리를 옮겨 리본테이프를 끊어 개관의 시작을 알렸다. 기념관은 2층 건물에 4개 전시관으로 구성됐다. 제1전시관은 일신여학교 건물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도록 꾸며져 있고 제2전시관은 당시 여학교 모습을 재현했다. 부산에 선교사들의 발길이 처음 닿았다는 사실과 함께 호주 선교사 조셉 헨리 데이비스의 조선 선교로 인해 일신여학교가 시작됐다는 내용이 당시의 교실과 함께 소개된다.

제3전시관은 당시 신여성 교육 자료를 제4전시관에는 일신여학교의 3.1운동이 소개된다. 초대교장인 멘지스 선교사 이후 헌신한 호주 선교사들과 조선인 교사, 학생들에 관한 내용은 물론 만세 시위를 준비하던 긴박한 상황 등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 제3전시실 – 사립일신학교 설립인가 지령서 – 부산진일신여학교 고등과 제1회 졸업증서(1913년) - 부산진교회에서 열린 멘지스 선교사 조선선교 25주년 기념예식(1916. 10.25) <사진 위부터 아래로>     © 크리스찬리뷰
 
주요 전시 자료로는 학교 설립자인 호주 선교사 맥케이 목사의 구한말 선교활동을 보여주는 '예수교 장로회사기 상권 원본'과 초창기 교회자료, 정치인 박순천 여사 소장품인 재봉틀과 재봉함, 부산. 경남 3.1운동사가 있다. 또 당시 교과서와 책, 걸상, 성경책 등 일신여학교의 설립 초기 모습을 볼 수 있는 사진들도 선보인다.  부산진일신여고 기념관 건물은 2003년 부산광역시 지정기념물 제55호로 지정됐다.


김운성 목사는 "복음화율이 저조한 부산 경남 지역 꿈나무들이  이 기념관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긍심을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소망한다"고 말했다.

이날 개관예배엔 일신여학교 마지막 졸업생인 전원순 권사(87. 서울영락교회), 정보애 권사(86. 부산진교회), 이명자 권사(85. 충현교회), 정태숙 권사(85. 부산동상교회) 등이 참석해 꿈 많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감회에 젖어들었다. 이 네 명의 노 권사들은 "똑같네. 똑같아. 우리 배울 때도 바로 이 책상에 앉았었지"하며 바로 어제 일 같던 먼 옛날의 기억을 되살리며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 부산진교회 묘지에 묻혀있는 양한나 선생     © 크리스찬리뷰
 
부산진일신여학교는  1895년 10월 15일 여선교사 멘지스에 의해 세워진 3년 과정의 서울 이남 최초의 근대 여성교육기관이었다. '일신' 이란 이름은 날마다 새롭다는 뜻으로 여선교사들은 여성교육을 중시했다. 국가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부인들과 어머니들이 반드시 교육되어야 한다는 신념에서였다. 이 같은 노력으로 일신여학교는 복음전파에 큰 공헌을 했다. 이 학교 출신 정치인 박순천, 김차숙은 부산지역 3.1만세운동을 이끌었고, 소설가 김말봉, 독립운동가 박차정도 일신여학교 출신이다.


이들 외에, 일신여학교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인물이 또 한 사람이 있다. 1976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한 양한나(1893. 3. 3.- 1976. 6. 26) 이다. 양한나는 1911년 일신여학교의 1회 졸업생이다.  마산 의신여학교에서 7년간 교사로 근무하였으며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였다. 1935년에는 호주를 다녀간 후 부산 YWCA를 창설하였고 초량동에서 3.1 유치원을 설립한 것을 비롯하여 통영에서 유치원을 운영하였다. 이처럼 사회복지사업 일선에서 활동하던 중 해방을 맞았으며, 해방 후 한국 최초의 여성 경찰서장을 역임하였다.

▲ 동래일신여학교 교지     © 크리스찬리뷰
 
1950년 전쟁고아들을 부민동에 있던 마구간을 빌려 수용, '자매여숙'을 창립하였다. 원생들이 점차 늘어나자 사하구 괴정동 428번지 일대 국유지를 불하받은 후 1957년 고아원과 겸하여 정신요양원을 설립했다. 특히 가족과 사회에서 버림받은 정신이상 여성들을 수용 보호하여 세상에 새 출발을 시켰다. 4개 국어를 구사했던 양한나는 45세에 김우영과 만혼을 하였으나 7년 만에 사별하여 부산진교회 묘지에 묻혔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다. 고려신학대학이다. 고려신학대학교는 일제 치하에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투옥됐던 주남선 목사와 한상동 목사 주도로 1946년 9월 20일 바로 이 일신여학교 교실을 빌려 개교했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일신여학교 건물은 호주 선교사들의 복음의 못자리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다른 유적지와 달리 기자는 건물로 들어서는 순간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하나님, 이렇게 작은 곳에서 그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건가요?"


▲ 동래여고 일신관(왼쪽)안에 설치되어 있는 역사관 내부     © 크리스찬리뷰
 
형용 못할 감동을 비집고 어떤 말씀 하나가 떠올랐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 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미가서 5:2 )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리던 이 어둔 세상을 회복할 메시아가 크고 화려한 예루살렘이 아니라 작고 외진 베들레헴이라는 동네에서 탄생하실 것이라는 유명한 예언이다. 왜 이 말씀이 떠오른 것일까?  건물 내부를 돌아보며 곰곰이 생각했다. 예전에도 에브라다가 어떤 의미인지 궁금했던 적이 있다. 학자들도 여러 가지 의견으로 분분했다.


▲ 동래여고 1회 졸업사진(위)과 졸업기념식수한 나무가 크게 자라났다.     © 크리스찬리뷰
 
'에브라다'는 베들레헴'의 옛 지명이라는 주장도 있고 그곳에 속한 지역의 이름이라는 견해도 있다. 지명이 아니라 그 땅에 정착한 에브랏 사람들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어떤 해석이든지 동일하게 작고, 보잘것 없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바로 '지극히 작은 자' 인 것이다.


"이스라엘이 대망하던 그리스도가 보잘것 없는 곳에 오셨듯이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도 그렇게 시작된다."

그런 감격과 울림이 있었다.


▲ 일신여고 전신인 동래여고로 이전한 부산일신여학교 만세운동기념비     © 크리스찬리뷰
 
"이렇게 작은 곳에서 그렇게 소박한 영혼들을 통해 복음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니"


눈물이 날 것 같은 벅찬 감격이 일었다.

"이것이 아버지의 역사다"

기자는 교실 책상을 쓰다듬으며 떨리는 영혼으로 그렇게 외쳤다. 

 
일신여학교 후신 - 동래여고

우리 일행은 동래여고로 향했다. 여기에는 김경석 장로와 최병윤 안수집사가 동행해 주었는데 최병윤 집사는 선비의 나라 한국의 자손답게 차분한 인상이었다. 기독교 역사에 관심이 많아 유적지 답사를 하면서 책을 집필하기도 했던 그는 '부산·경남 기독교역사연구회'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9월 17일 일신부인병원(현 일신기독병원)을 세운 헬렌 맥켄지(왼쪽)와 동생 캐더린 맥켄지     © 크리스찬리뷰.
 
'부산·경남기독교역사연구회'는 부산·경남지역 기독교역사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 모여 함께 연구하고, 연구 성과를 공표함으로 이 지역 교회를 섬겨보자는 뜻에서 2006년 1월 21일 창립되었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 우리가 신앙 선배들의 생생한 선교역사를 알고 그 정신을 이어 받을 수 있는 것은 이들의 노력이 가져다주는 결실인 셈이 아닐까?


1905년 설립된 일신여학교는 그 이후 러·일 전쟁, 을사조약 등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착실하게 발전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1910년 일제강점이라는 역사적 치욕을 맞이하게 되었고 세계적으로는 제1차 세계대전을 겪게 되었다. 또한 1919년에는 일제의 탄압에 견디다 못해 기미독립운동의 횃불을 높이 들었던 일신여학교 학생의거라는 민족의 저력을 떨치기도 했다.  그 후 일신여학교는 1925년 6월 동래 복천동 신축교사로 이전하였는데 1940년 3월 30일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되고 말았다. 이런 와중에 호주 선교사들이 세운 일신여학교는 비그리스도인에게 넘어가고 만다.

여기에서 기자는 10년 전 취재한 수첩을 꺼내 다시 펼쳤다.


▲ 일신기독병원 개원 50주년(2002년 9월 17일) 희년둥이(왼쪽)와 28만 5천 번째로 태어난 아기와 산모(2010년 1월 8일)     © 크리스찬리뷰
 
『동래여고를 떠나며 기자는 손명암 장로에게 넌지시 물었다. 지난 일이며 피차간 상처가 깊었던 일을 들추어내는 것이 괴롭기는 할지라도.


- 호주 선교사가 왜 학교를 팔았습니까? 그것도 비그리스도인에게요?"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어느 원로 장로님께서 내 사무실에 찾아오셔서 알려주셨습니다. 일제시대 신사참배문제로 호주 선교사들이 추방당하게 생겼어요. 그런데 당시 경남 노회장, 부회장, 실권자들이 신사참배해도 상관없다며 결의하고 돌아다니면서 독려까지 했다는 겁니다. 그때 호주 선교사들은 어떻게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독려하는 사람들과 노회에 하나님의 복음사업을 위한 고귀한 재산을 넘길 수 있겠느냐며 급하게 팔고 갔다는 거에요. 물론 팔은 돈은 해방 이후 선교 사업으로 다 썼지요"

손 장로는 흥분한 탓인지 목소리는 한 옥타브 높았다.

"그러나 호주 선교사들이 세운 금성중·고등학교는 관리를 잘못해서 비그리스도인에게 넘어 간 겁니다. 교계 재산은 주인 없는 재산이라 생각하니까 돈을 빼먹을 생각만 했지 학교를 발전시킬 생각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의 말은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그는 1954년부터 1973년까지 호주 선교사들과 함께 일했다. 더구나 6.25사변 이후 호주 선교사들의 입출국과 재산관리를 총괄했다지 않는가.

▲ 부산진 좌천동에 자리잡고 있는 일신기독병원 전경     © 크리스찬리뷰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저려왔었다.


보존하지 못했으니 과연 우리 후손들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다행스러운 것은 동래여고는 역사관을 만들어 호주 선교사들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었다. 역사관은 도톰한 언덕 빼기에 자라잡고 있는데 1895년 개교 당시부터 100년간의 사진자료, 중요문서, 교기와 교표, 3.1운동 관련자료 등 100년간의 긴 학교 역사에서 호주 선교사와 설립자, 그리고 교직원 학생들의 얼이 깃든 유물들을 모아 동래학원 100년의 역사를 볼 수 있게 시설하였다.  역사관은 산하 각 급 학교의 교육의 장으로서 활용하고, 대외적으로도 공개하여 관람하게 하고 있다.

역사관 옆에는 '부산일신여학교 만세운동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1919년 부산 일신여학교 학생들이 전개한 3.1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한 비이다. 일신여학교에 재학 중이던 고등과 학생 김응수(일명 김수) 등 11명의 학생과 주경애, 박시영 등 2명의 선생이 1919년 3월 11일 좌천동 거리를 누비며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의 항일운동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84년 11월 당시 일신여학교 자리인 부산시 동구 좌천 1동 768번지에 만세운동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그 후 1992년 5월 19일 일신여학교의 후신인 동래여고로 이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동래여고는 '5년간 수능 분석'에서 부산 일반계 중에서 2위를 차지할 정도로 명문학교로 성장했다.

 
▲ 제8대 일신기독병원 김정혜 원장     © 크리스찬리뷰

일신기독병원. 호주 선교부의 얼굴

일신기독병원으로 향하는 기자의 마음은 숙연해진다. 바로 좌천동 이 길을 수없이 오가며 복음 사역을 펼쳤을 선교사들, 가던 길을 멈추고 잠시 묵상에 잠겨본다. 이 길을 오가던 선교사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모르긴 해도 그들은 스스로 '영광의 길'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생각해보자. 이름을 다 기록할 수 없이 많은 예수의 사람들이 한국 땅을 찾아갈 무렵은 이 땅 끝과 저 땅 끝이 너무도 아득한 시절이었다. 서양인 선교사가 아주 낯설기만한 존재는 아니었으나 조선 사람들의 마음의 문에는 아직도 쇠 빗장이 탄탄히 가로질려 있는 상태였다.

"눈 파랗고 코가 큰 양의가 이 땅에 들어온 이유가 무어냐?"

선교사의 의중을 단단히 의심할 뿐, 서양 선교사들이 하는 이야기를 굳이 들으려 하지 않던 때였다. 선심을 들이대면 들이댈수록, 그것이 선심이기 때문에 더 의심스러웠고, "너희가 왜 까닭 없이 우리네한테 선심을 쓰느냐?" 생각으로 마음을 놓지 못할 때였다.  그때까지 기나긴 세월을 두고 밀고 당기며 시달렸다 하여도 몽골이요 한나라요 왜이였고 그들이 어떤 행패를 부렸다 하여도, 같은 색깔의 동양인끼리의 이야기였다.

 
▲ 일신기독병원 신생아실     © 크리스찬리뷰
 
그러다가 난데없이 비집고 들어온 서양 사람들이 병 고쳐 주고 글 가르치고 그 위에 서양 신과 맺어 준다니 갖가지로 수상쩍은 일일 수밖에 없었다. 생김새가 깜짝  놀랄 만큼 생판 달라, 말이 전혀 틀려, 입는 옷이 고약해, 하는 짓, 먹는 것, 모든 것이 상스럽고 이상스럽기만 한 사람들인데 생뚱하게 나타나서는 자꾸만 무엇을 주겠다고 하니 수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내어미는 것을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하는 일  중에 단 한 가지라도 이쪽 뜻에 어긋나는 것이 있어서도 안 될 판이었다.


참고 견디었다. 그들은 놀림을 받으며 던지는 돌에 맞아가면서도 생명마저 내던지며 자신 있고 당당하게 주저함이 없이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고난의 길'이 아니라 영광의 길을.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결코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그들의 깊은 신심이야말로 오늘을 사는 우리들로 하여금 무엇을 위해 기도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음이 분명하다.

병원 문을 밀치고 들어서니 마음이 숙연해진다.

잘 알려진 대로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9월 17일    '일신부인병원'으로 출발한 일신기독병원은 헬렌 맥켄지(한국명 : 매혜란)와 그의 여동생인 간호사 캐더린 맥켄지(한국명 : 매혜영)에 의해 설립되어 58년간 부산에서 신생아 탄생의 산실이 돼 왔다.

병원 설립 10년 만인 1961년에 1만 번째 아기가 태어난 데 이어 1975년 5만 번째 아기, 1982년 10만 번째 아기, 1994년 20만 번째 아기가 태어났으며 2010년 1월 8일 오후 6시 26분에는 무려 28만 5천 번째 아기가 태어나 주목을 받았다. 이는 국내 단일 병원사상 최다 분만기록이고, 세계적으로도 드문 수치다. 28만5천 번째 태어난 아기는 부산시 남구 문현 4동에 사는 아버지 전정훈 씨(34)와 어머니 조남희 씨(32) 사이에서 첫째 아들로, 몸무게 3,510gm, 키 50cm의 건강한 아기로 정상 분만으로 태어났다.

일신병원은 이 아기를 위하여 일금 50만 원의 장학증서, 30%의 진료 할인, 제대혈  무료보관(약 130만원 상당, 보령 제대혈 협찬), 분유 2박스(매일, 남양 협찬), 하기스 기저귀, 아기 기념사진 촬영권(베이비안 협찬), 성경과 꽃다발 선물을 증정했다.

그동안 이 병원에서 태어난 쌍둥이만 4천103쌍이었고 , 세쌍둥이도 51쌍에 달했으며 1980년에는 네쌍둥이가 탄생해 축복을 받았다. 에피소드도 많았다. 5만 번째 태어난 아기의 이름은 '오만'이가 됐고, 10만 번째 태어난 여아는 2009년 12월 22일 이 병원에서 한 아이의 엄마가 됐다.

일신기독병원은 또 2008년까지 조산사 양성에 주력, 국내 조산사의 3분의 1가량인 2천599명을 배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성기 때 하루 30-40명, 연간 1만여 명의 신생아를 받았고 정상 분만이 가능하다고 판단되는 산모는 다른 병원으로 보내야 했던 일신기독병원도 최근 저출산 문제로 상당한 어려움에 처해있다.

김정혜 원장(58)은 "최근에는 많아야 하루 5-6명이 태어나는 수준이어서 지난해 말 사상 처음으로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해야 했다"고 밝혔다. 김 원장은 "선교사들과 선배들의 터 위에서 세워진 병원인 만큼  기독교정신을 모토로 예수사랑을 실천하는 병원의 바람직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며 "저출산과 여러 사회적 환경의 변화로 인해 병원경영에도 경제적 어려움은 많지만 체계적 시스템관리와 서비스의 질적 향상으로 시민에게 친근한 병원으로 거듭나겠다"고 말했다.

 “한 때 무료진료환자가 절반에 이를 만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언제나 따뜻한 손을 내밀던, 서민에게 더 없이 친근한 병원이었습니다. 전 국민 의료보험제도가 실시되면서 이제 누구나 의료시혜를 받을 수 있는 환경으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어렵고 가난한 자들에게 문턱이 낮은 병원이길 원합니다."

2009년 7월 16일 제8대 병원장으로 취임한 김 원장은 이윤을 내는 방법에는 약하지만 시대에 쫓아가는 정신은 필요하다고 강조하며  새로운 비전을 설정, 재도약을 꿈꾸고 있다.

"출산전후관리부터 시작되는 산과 - 소아과 - 부인과 - 건강검진 - 호스피스병동에 이르기까지 요람에서 무덤까지 여성의 전 생애 건강을 책임지는 병원으로서 그 기능과 역할을 다하는 병원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김 원장은 반세기 넘도록 여성관련 의술을 펴온 전문병원의 강점을 살려 여성 암센터를 특성화하고, 호스피스병동을 마련 변화된 환경에 대처하겠다고 말했다. 실제 일산기독병원의 경우 출산율이 낮아지면서 산과보다 부인과 환자가 더 많은 곳, 여성관련 유방암, 갑상선암, 자궁암 등 부인과 수술분야에서 경쟁력이 높은 병원이기도 하다. 일찍이 호주와 영국의 유럽식 첨단 의술과 간호 및 조산교육 조기 도입으로 국내 산부인과 및 조산, 간호학과 인턴병원으로도 유명한 일신은 국내 성교육의 시발점인 곳이기도 하다.

김 원장은 "많은 병원들이 인공중절수술로 수익을 낼 때도 생명사랑정신을 강조해온 일신은 애초부터 임신중절수술 만큼은 절대 금해왔기에 수익구조가 늘 열악했지만 정확한 진단과 높은 의술로 신뢰도가 높아지면서 요즘은 건강검진의 수요가 증가추세에 있다"고 밝혔다.

또 김 원장은 "소외되고 어려운 환자들을 사랑으로 보듬었던 설립자의 정신과 뜻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도록 병원경영에 힘쓸 것"이며 "다시  전 국민에게 사랑받는 병원으로 명성을 회복하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지난 30여 년을 일신기독병원과 함께해온 김정혜 원장은 이화여고, 이화여대 의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1977년 일신부인병원 인턴으로 첫 발을 디뎠다. 이 후 산부인과 과장을 역임하다 영국 버밍햄 산과 부인과 병원 연수를 마치고 방글라데시 단기선교사로 병원 밖을 잠시 나섰지만 1999년 산부인과 주임과장으로 복귀 교육수련부장, 모자보건센터소장, 기획실장, 진료부장, 화명일신기독병원장을 거쳤다.

전 직원은 요즘도 매일 아침 경건회 시간을 통해 하루의 일과를 주님께 의탁하는 한편, 목요일에는 전 직원이 예배를 드린다. 또한 화, 수, 금, 토요일에는 각 병실을 돌며 예배를 인도하며 목요일 오후에는 병원 선교중창단이 각 병실을 돌면서 찬양을 한다.

제3대 원목실장 정인규 목사는 "병원선교회가 있어 대내외적으로 영세민들에게 의료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며 동문 선교사 후원은 물론 해외에 선교사도 파견하고  단기의료선교도 활발하다"고 말했다.

"3년 전에는 '맥켄지 의료선교 사업본부'를 발족했습니다. 이 사업은 국내에 체류 중에 있는 외국인, 주로 불법체류자들 중 몸이 불편한 분들을 의료사업본부에서 의료비 전체를 부담하고 보살피는 사역입니다."

정 목사는 "병원의 모든 행사는 기독교식으로 하고 있다"며 "병원을 설립한 맥켄지 두 자매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해 그늘진 곳에서 소외받고 있는 이웃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베품의 정신을 실천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한편 부산일신기독병원의 설립자인 매혜란(헬렌 맥켄지) 선교사가 지난 2009년 9월 18일 오후 6시 35분(한국시간) 향년 96세를 일기로 멜본 카라나 양로원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바라는 것은 ... 앞으로도 계속 돈 없이 병원에 들어오는 환자가 있다면 도와주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사랑 정신으로 이 사업(의료선교)을 계속하시기를 바랍니다."

유족들은 매혜란 선교사가 유언을 남기면서 한국에서의 사역을 회상하며 눈시울을 붉혔다고 전했다.

매혜란 선교사는 한국에서 나환자들을 보살피고 수많은 교회를 개척했던 아버지 매견시(Rev. James Nobel Mackenzie) 목사의 대를 이어 동생 매혜영(캐서린 맥켄지. 2005년 별세) 선교사와 함께 한국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을 돌봐왔다. 호주인이지만 부산 출생인 매혜란 선교사는 평양외고 졸업 후 호주로 건너와 의과대학(산부인과)을 수료하고 다시 한국으로 갔다. 

1950년대 초 당시 의료 환경이 열악했던 한국에서 의료선교를 펼치려는 생각이었다. 동생 매혜영 선교사도 조산 간호사로 의료선교에 동참했다. 1952년 9월 17일이었다. 부산진교회 유치원 건물에 침대 10개를 설치하고 병원 문을 열었다. 그 시작은 미약했으나 전쟁 통에 변변한 치료도 받지 못하던 수많은 전쟁고아와 산모들은 새 삶을 살게 되었고, 병원은 이후 발전을 거듭하며 국내 최고의 산부인과 전문병원으로 발돋움 하는 등 창대한 결과를 낳았다.

매혜란 선교사는 '돈 없는 사람을 우선 돌봐야 한다'와 '돈이 많거나 지인들의 소개라 해서 특혜를 주지는 않을 것'이라는 선교 철학을 가졌던 것으로 지인들은 전하고 있다. 특히 검소한 생활이 몸에 배인 것은 유명하다. 더운 여름은 부채질로 참아내고, 변변한 나들이옷조차 없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호주 귀국 무렵 병원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모아 전해 준 위로금은 일생 유일의 목돈이었지만 이마저도 전액 병원 발전 기금으로 내놨다.

매혜란 선교사는 1972년 병원 설립 20주년을 맞아 운영권을 한국인에게 모두 일임하고 호주로 귀국한 후 신학을 공부하며 소박하게 남은 여생을 보냈다. 호주로 귀국할 때도 조그만 가방 하나가 20여 년 한국 생활을 정리하는 짐의 전부였다고 유족들은 전했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매혜란 선교사는 한국에서의 사역을 물어보는 이들에게 늘 한결같은 답을 했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가장을 잃고 눈물을 흘리던 산모들이 생각납니다. 그들이 아기 잘 낳고 안 죽고 살아나니 얼마나 감사했는지요. 저는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봉사와 박애의 정신을 전하며 만족감을 얻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답니다."

마음이 우우 흔들렸다.

참으로 오랜만에 다시 만져지는 전율이었다. (계속)

 

글/김명동(크리스찬리뷰 편집인)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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