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느려도 좋다

묵상이 있는 만남

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0/05/31 [11:40]
                                                                                              글/이규현
 
현대과학이 준 선물 중 하나는 농경문화에서는 도무지 맛볼 수 없었던 광속의 짜릿함이다. 수백 년이 걸려도 불가능하게 보였던 상상 속의 세계가 현실로 어느 한순간 우리 곁에 다가왔다. 변화의 속도는 놀람을 넘어 충격과 경이로움 그 자체다.

현대문명은 속도를 낳았다. 아니 더 나아가 속도를 숭배하는 세상을 만들었다. 요즘 아이들은 컴퓨터 앞에서 속도게임을 하고 있다. 어른들 역시 속도게임의 연장이다. 만약 폴리스가 없고 속도제한법규만 조금 헐렁해 진다면 도시의 거리는 카레이스 현장이 될 지도 모른다.

인터넷에 연결된 컴퓨터는 속도에 불을 붙였다. 빌 게이츠는     생각의 속도라는 책에서 이미 디지털세계를 통한 정보의 신속함으로 이루어질 인류사회의 빠른 변화를 예고한 바 있다. 하지만 속도에 적응하지 못한 아날로그 세대들은 속도의 광기에 정신을 잃고 드러누워 버렸다. 속도전의 세상에서 느림은 마치 박물관에 박제된 미이라와 같은 신세로 전락되고 만다.

카 레이스에서 뿜어져 나오는 금속성 굉음, 마치 고막을 찢어버릴 것 같은 소리에 말할 수 없는 쾌감을 느낀다는 젊은이를 만난 적이 있다. 나는 그가 과속으로 낳은 아들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사람들은 속도의 광기에 떠밀려 살아가고 있다. 분주함은 속도에 유린 당한 삶이다.

패스트푸드에 익숙한 이 세대의 아이들은 정신없이 컴퓨터의 자판을 두드리며 지구촌을 들락거린다. 아날로그 세대는 그들의 채팅에 끼어들 수조차 없다. 그들의 언어는 문자라기보다 기호에 가까운 것이다. 속도 때문이다. 거대한 세대 간의 간격 역시 원인제공은 속도가 만든 셈이다.

빠른 결과는 이 시대의 신이다. 단 한 번의 클릭에 펼쳐진 환타지에 모두는 열광한다. 당장 손에 쥘 수 있게만 한다면 무엇이든 좋다. 늦은 응답은 노 땡큐다. "속성영어 완결", "당신도 당장부자가 될 수 있다" 벼락을 두 번 맞을 확률이라고 말하는 복권당첨으로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들은 기다림을 저주로 여긴다.

그것은 무당의 굿판과 같다. 한 판의 푸닥거리로 모든 문제는 사라질 것이라며 영혼을 유린하는 그 말도 안 되는 거짓에 속아 넘어가는 이유는 이 세대 사람들이 속도의 숭배자들이기 때문이다. 사단은 사람들에게 빠른 응답으로 미혹하고 사이비의 교주는 대박을 약속한다. 어디에서도 농익은 시간의 열매는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속도를 저항하는 몸부림은 기다림이다. 기다림이란 조급함이 아닌 느림을 전제로 한다. 속도가 비행기의 날개라면, 느림은 봄날의 한가로운 나비의 날개다. 기계문화는 상품을 만들지만 느림의 문화는 장인의 손을 통해 명품을 탄생시킨다. 속도는 경쟁을 만들고 느림은 함께 걷게 한다. 속도를 자랑하던 멋진 자동차는 세월이 흐르면 낡아 폐기처분된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속도가 아닌 기다림을 통해서 주어진다. 엄마의 사랑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자식에 대해 끝없이 기다려주는 기다림 때문이다.

세상에서 참으로 어려운 것은 기다림이다. 누군가 말했다. 목회가 어려운 것은 다름 아닌 기다림 때문이라고. 어디 목회뿐이겠는가? 기다림 없이 좋은 것을 기대하는 것은 신기루일 뿐이다. 세상에 감동을 주는 것들은 모두 세월을 곰삭인 기다림으로 만든 시간의 작품들이다. 좋은 것은 기다림을 통해서, 더 좋은 것은 더 긴 기다림을 통해서 오는 것이라고 말해도 틀림이 없다. "좀 더 빨리"의 유혹은 떨쳐 버리기 힘든 유혹이다. 사람들은 느림을 퇴보처럼 여긴다. 그러나 느림은 느린 것이 아니다.

속도의 욕망을 이겨내기 위해 자동차의 키를 강물에 던져버리고, 속도에 맞서 걷고 또 걷는 결단을 할 수만 있다면 내 안에 사유의 혁명이 시작될 것이다. 바로 그때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풍요롭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진보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믿음을 가져 본다.

 

이규현/시드니새순장로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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