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신앙유산 앞에서 헌신과 희생을 묵상하다

선교사 후손들 유적지 방문 “선조들이 자랑스럽다

글|김명동,사진|권순형 | 입력 : 2019/11/25 [12:52]

 

▲ 진주교회는 지난 2011년 5월 23일 휴 커를 선교사 기념관을 세우고 세계에 복음을 전할 것을 기념비에 새겼다. 기념비 앞에서 방문단의 기념촬영.     © 크리스찬리뷰


호주 선교사 후손들은 경남성시화운동본부가 주최하는 각종 기념행사에 참석하며 바쁜 일정을 소화했다. 선조들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신앙 유적지를 방문하고 교계 관계자들을 만났다. 이들은 선조들의 정신이 서려있는 한국 땅을 밟으며 어떤 기분을 느끼고 있을까.

 
진주교회

 
선교사 후손들을 태운 버스가 진주교회당 앞에 다다르자 송영의 목사(56)와 성도들이 미리 나와 손을 흔들며 반갑게 일행을 맞이했다. 이 교회는 1905년 호주 의료선교사 휴 커를(Hugh Currell. 한국명 거열휴 1871- 1943) 의사가 설립했다. 진주 및 경남 서부 일원 첫 교회였다.

 

▲ 진주교회 교육관에서 교회의 역사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는 방문단.     © 크리스찬리뷰


 
교회 본당으로 안내된 일행은 ‘진주교회 역사’ 홍보영상을 관람했는데 이들의 표정에는 자랑스러운 선교사들의 후예라는 긍지가 엿보였다.
 
송영의 목사는 “선교사님들이 뿌렸던 씨앗들이 이제 열매를 맺어 저희들도 선교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면서 “항상 빚진 자로서 어떻게 하면 더 쓰임을 받을 수 있을까 노력을 많이 하고 있다”고 인사했다.
 
바바라 마틴(86. 한국명 민보은) 선교사는 기념품을 전달한 후 “한국교회의 따뜻한 환영에 감사한다”며 “한국의 모든 교회들이 발전하도록 계속 기도하겠다”고 말했다. 마틴 선교사는 산부인과 의사로 32년간 부산 일신기독병원에서 사역했다.

 

▲ 진주교회 호주 역사관을 둘러보는 방문단 일행.     © 크리스찬리뷰


이들 일행은 비전관(Currell Memorial Vision Center)안에 있는 ‘호주역사관’으로 이동하여 옛 사진과 당시의 유물들을 둘러보았다. 그때 한 장의 사진과 여권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휴 커를 선교사의 여권이다.
 
송 목사는 진주교회 창립 110주년 기념예배에 휴 커를 선교사의 외손자인 기드온 루더포드(Gideon Rutherford)씨 부부를 초청했는데 이때 기증받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연은 이렇다.
 
2015년 9월12일 기드온 루더포드 씨는 진주교회에 이메일을 보냈다.

 

▲ 기드온 루더포드 씨 부부.     © 크리스찬리뷰

 
친애하는 진주교회 성도님들께,
 

저의 어머니(Frances), 큰 어머니(Sarah Ethel), 외삼촌(Hugh Daniel)은 모두 한국에서 태어났습니다. 저의 할아버지인 휴 커를(Dr. Hugh Currell)과 아내였던 루시(Lucy)가 진주 선교병원(배돈병원)과 진주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그분들은 1902년에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진주를 몇 번 방문한 후에 병원과 교회를 세우고 1915년에 떠났지요.
 
저의 돌아가신 어머니는 자신이 태어난 곳을 방문해 어린 시절에 친절했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기를 항상 소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과 이후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인해 그러한 기회를 얻는 것이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 휴 커를 선교사가 경성(서울)에 있는 영국 총영사관에서 발급 받은 여권 (1915년).     © 크리스찬리뷰


노년에 어머니는 마침내 계획을 세우셨지만 심하게 넘어져 몇 주 동안 병원에 입원하시게 되어 좌절되었습니다. 결국 1988년에 돌아가셨습니다.
 
유일한 손자인 저는 가족들의 소원대로 진주를 방문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조사하면서, 진주교회가 저의 할아버지 유산만 간직한 것이 아니라, 그를 기억하기 위해 커를 기념건물(비전관)도 헌정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매우 기뻤습니다.
 
10월 22일이 진주교회 설립 110주년 기념일이어서 10월에 저와 아내인 아드리엔(Adrienne)이 한국을 방문하는 것은 안성맞춤인 것 같습니다. ....... 아내와 저는 진주교회 성도님들과 함께 2015년 10월 25일에 있을 110주년 기념 주일예배에 참석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2015. 9. 12 

기드온 루더포드

 
루더포드 씨가 진주교회에 기증한 외할아버지의 여권은 한국 사역을 시작한지 13년이 지난 후 귀국을 앞두고 1915년에 발급받은 것이다. 여권 내용은 커를 선교사 부부의 사진이 붙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얼굴형, 눈 모양, 키까지도 자세하게 기록되어있다. 여기에 따르면 커를 선교사는 약168cm 정도의 키에 넓고 긴 이마와 파란 눈과 밝은 고동색 머리 색깔을 가진 동그란 얼굴의 소유자였다. 이 여권을 통해 당시 좁은 한국가옥의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진주 주민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44세와 34세의 젊은 의료선교사 부부의 헌신이 더욱 생생하게 그려진다.
 
진주교회는 촉석루에서 1.5km 떨어진 비봉산 아래에 위치한다. 1928년 발행된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에 따르면 “선교사 거열휴와 조사 박성애가 전도하야 본군 북문 초가삼간을 예배처소로 정하고 회집 예배하였다”라고 기록됐다.

 

▲ 호주 최초의 의료 선교사 휴 커를 의사와 부인 에델 커를 선교사.(1929)     © 크리스찬리뷰


호주선교부는 선교사 커를을 진주에 파견했다. 호주 최초의 의료 선교사로 1902년 한국으로 파송된 후 부산에서 진료하다가 당시 서양식병원이 전혀 없던 진주 근무를 자원했다. 진주에 온 커를은 진주교회와 배돈병원을 시작했고, 그의 부인은 남녀학교를 시작했는데 후일 이 학교들은 시원여학교와 광림학교로 발전했다.
 
지금 진주교회가 있는 부근은 커를 선교사의 주도로 호주선교부가 조성한 진주 스테이션이 자리하고 있던 곳이다. 일제 강점기 때 인근에 배돈병원과 광림학교, 시원학교가 포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옛 모습을 발견할 수 없다. 1933년 지었던 벽돌 예배당은 6.25전쟁 때 폭격으로 부서졌다.
 
현재의 교회당은 1997년 건축된 현대식 건물이다. 또 교회 바로 옆의 배돈병원 자리에는 단독주택이 들어서 있고, 선교사 사택이 있었던 자리에는 아파트가 있다. 그리고 교회 뒤편 200m 부근의 광림학교 자리와 다시 교회에서 동남쪽으로 약 400m 떨어진 곳에 있었던 시원학교 자리 역시 지금은 단독주택가로 변했다. 그 옛날 진주스테이션의 흔적을 볼 수 없는 것이 유감이다.
 
그러나 진주교회 구내에는 역사적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몇몇 상징들이 있다. 먼저 ‘진주 기미독립만세 종’이다. 1919년 3월 18일 진주 장날, 주모자들이 진주교회당에서 알리는 정오 종소리에 맞추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도록 했는데 1만여 명이 모였다 한다. 그 기념 종을  역사관에 전시하고 있다.

▲ 봉래동 진주교회 전경     © 크리스찬리뷰


 
당시 그 의거에는 호주 선교사들이 경영하던 광림학교의 교사와 학생, 배돈병원의 의사와 간호사들도 적극 참여했다. 비전관은 교회 설립자인 커를 선교사를 기념해 지었다.
 
역사관을 둘러보는데 조헌국(72) 장로를 만났다. 기자와는 세 번째 만남이다. 그는 3대째 진주교회를 섬기는 가문의 사람이다. 
 
"진주교회가 신앙의 본모습을 보여준 엄청난 사건이 있는데 바로 백정 선교입니다. 천인인 백정을 입교시키고 하나님 앞에서 존비귀천의 차별을 없앤 거죠. 당시 진주 백정은 옥봉과 서장대 아래 350명 정도가 모여 살았거든요.
 
양반 교인 일부가 본당 합석예배를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안식년을 맞은 커를 선교사를 대신한 머리 라이얼(한국명 라대벽 1909- 1921) 선교사 등의 설득과 스콜스(시원학교 교장 1907- 1919), 켈리(매견시 목사 부인 1905-1910)라는 두 여선교사의 신앙적 권면으로 우여곡절 끝에 합석예배가 이뤄집니다.

 

▲ 진주에서 최초로 일반인들과 백정들이 함께 예배 드렸던 교회라고 새겨진 표지판이 진주교회 앞에 세워져 있다.     © 크리스찬리뷰
▲ 진주교회 옥상에서 바로 본 배돈병원, 광림교회, 시원여학교, 선교사 사택 등이 있던 호주선교부 옛 진주지부 자리는 현재 아파트와 단독주택가로 변했다     © 크리스찬리뷰


이것이 1923년 형평사운동의 배경이 됩니다. 성령님이 도운 인권운동이었죠.  이러한 흐름은 1938년 신사참배 거부로 이어졌고 교회당이 폐문됩니다. 우상숭배를 거부한 자랑스러운 폐문이었죠.”
 
조 장로는 진주교회 역사의 대언자 같은 분이다. 적어도 해방 이후 진주에서 일어난 일들은 사진 찍듯 기억해낸다.
 
진주교회당과 역사관을 둘러본 바바라 카루아나(54. Barbara Caruana) 씨는 “눈물과 기도로 선교의 열정을 불태운 호주 선교사들도 대단하시고, 그분들을 도와 함께 수고하신 한국 사역자들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믿음의 선배들의 수고와 노력이 아름다운 열매로 맺혀진 것을 볼 때 정말 감격했다“고 말했다.
 
바바라 씨는 헬렌 멕키논(Helen Mckinnon 민혜란 1964-1969) 선교사의 큰딸로 1965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헬렌 선교사는 동래 여자중고등학교 영어교사였다.

 
충무교회

 
비탈길이다. 한창 도로공사가 진행 중이라 교회당까지 걸어 올라갔다. 목표물을 눈앞에 둔 상태에서 마주치는 마지막 경사는 숨을 가쁘게 한다. 그런데 오르막 주변에서 뜻밖의 응원이 느껴진다. ‘충무교회 설립 및 호주 선교 100주년 기념탑’ 그것이었다. 구름같이 허다한 예수의 증인들이 믿음의 경주를 이어가는 방문단에게 환호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 충무교회를 방문한 호주 선교사와 가족(후손)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 크리스찬리뷰

 

▲ 충무교회 앞마당에 세워진 호주 선교 100주년 기념탑 앞에서 기념촬영하는 방문단 일행.     ©크리스찬리뷰


 
암울한 19세기 말 통영 복음화를 위해 설립된 충무교회는 3. 1독립만세와 독립운동을 이끌었고 ... 신앙훈련과 근대교육을 통해 종교 정치 문화 예술계의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했는데 그중에는 유치환, 박경리, 김춘수, 김상옥, 윤이상, 공덕귀 여사 등이 있다.
 
대한민국 제2대 윤보선 대통령 영부인 공덕귀는 태중에서부터 소천까지 교회 공동체를 반석으로 삼은 인물이다. 그가 남긴 생전 기록.
 
“주일이면 어머니는 절대 일을 안했다. 새벽기도에서부터 주일이 시작됐다. 어머니는 딸들을 곱게 단장시켜 앞세우고 교회로 갔다. 진명유치원에 도착하면 호주에서 온 신나 선교사가 풍금을 치면서 찬송과 성경반을 인도했다. 그 어릴 때 본 광경을 잊을 수 없다.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이런 어머니는 공덕귀를 부산 일신여학교(동래여고 전신)로 진학시켰다. 공덕귀는 이 학교에서 호주 선교사 들과 함께 경남, 진주, 거창 등지로 전도여행을 다녔다. 이때 거창교회 성탄절 이브행사에 이런 가사의 독창을 했다.
 
“무궁화 삼천리 내집인데 어디 어디를 가오/ 봄오면 무궁화 필터인데 어디 어디로 가오/ 현해탄 물결이 높다는데 어디 어디를 가오.”
 
그리고 며칠 지나 거창경찰서의 소환을 받아 유치장에 수감된다. 교회 독창곡 때문이었다.
 
교회 본당으로 이동한 방문단에게 장준환 목사는 “교회 부임 전까지 호주 선교사의 영향력에 대해 몰랐다. 역사의식이 약했다”면서 “앞으로 선교 역사, 국가에 대한 의식에 관심을 갖겠다. 호주로 돌아간 후에도 충무교회를 잊지 말고 기도해 달라”고 인사를 했다.
 
통영은 호주 선교사 아담슨의 선교 구역이었다. 그에 의해 1905년 대화정교회(충무교회 전신)가 설립됐고 이어서 교회 뒷산에 2층 붉은 벽돌 3개동과 학교 건물 1개동으로 선교 구내가 조성됐다.
 
1956년에 충무교회로 이름이 바뀌었고 1983년 현재의 예배당을 지었다. 특히 1910년 내한한 왓슨(Robert D. Watson) 선교사는 통영지방을 순회하던 중 이 지역에 교육기관이 전혀 없음을 알고 교육사업을 전개했다 특히 왓슨 부인은 이 지방 여성교육 기관인 진명유치원, 진명야학교, 진명강습소 설립에 크게 기여했다.

 

▲ 통영 지역의 모체교회인 충무교회를 방문한 호주 선교사와 후손들 일행이 교회 앞마당에 세워져 있는 충무교회 설립 및 호주 선교 100주년 기념탑을 둘러 보며 환담을 나누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충무교회는 통영지역에 첫 복음의 씨앗을 퍼트린 어머니교회이자 일제 강점기 때는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을 위해 애쓴 교회이다. 1919년 3월 1일 유치원교사들이 앞장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독립운동의 중심역할을 했고, 이 불씨가 확산되어 청년들이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일제 신사참배를 끝까지 반대한 교회이자 여성 최초 목회자 최덕지 목사와 순교자 최상림, 이정심 목사 등을 배출한 곳이다.
 
이날 구의두(Rev. James Andrew Croft 부산 1958- 1959. 마산 1960- 1963) 선교사의 부인 엘리슨(81. Mrs. Alison Croft)이 방문단 일행을 대표해 기념품을 전달했다. 엘리슨 선교사는 1960년 구의두 목사와 결혼했다. 같은 해 남편을 따라 한국으로 파송되어 마산에 정착해 순회선교사로  일했다. 그녀는 1960년과 1962년 첫째 아들 피터와 둘째 아들 데이비드를 부산 일신병원에서 출산했다.
 
구의두 목사 부부는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은퇴해서 블루 마운틴에 살고 있었다. 교회도 블루 마운틴에 있는 호주연합교회에 출석했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고 구의두 목사의 알츠하이머 증세가 심해져서 2년 전 아들들이 살고 있는 웨스트 페넌트 힐스로 이사를 왔다. 이사 후 이들 부부는 근처의 교회를 찾았고, 쏜리(Thornleigh) 연합교회의 목회자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 교회로 정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교회 목회자가 박웅걸 목사(Rev. Hugh Park)였고, 박 목사는 구의두 목사의 장례식을 치러주었다.
 
방문단 일행은 통영에서 바느질한 물건들을 호주 멜본으로 가져가서 판매해 진명여고 운영비로 사용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모두들 감동에 젖은 얼굴들이었다.
 
우리 일행을 태운 버스가 움직였을 때 장준환 목사와 성도들은 계속 손을 흔들었다. 달리는 차 속에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문창교회

 
흘러간 역사의 현장을 찾는 일은 우선 그 시대를 열심히 살다 간 선조들의 인품을 접할 수 있기에 흐뭇한 일이다. 특히 한국 교회사가 순교와 수난의 아픈 역사이니만큼 그 현장에는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죽음마저 마다하지 않은 선교사들의 고귀한 얼과 뜻이 한껏 담겨 있어 숙연한 마음을 갖게 한다. 그래서일까. 기자도 조심스럽게 옷깃 한 번을 더 여민다.
 
10월 6일(주일), 방문단 일행은 3개 교회(문창교회, 양곡교회, 가음정교회)로 나뉘어 주일예배에 참석했다.
 
본지 취재팀(권순형, 김명동)은 알란 스튜어트(서두화), 존 브라운(변조은), 엘리슨 크로프트(이애선), 크리스토퍼 스튜어트(서형일), 지태영, 박웅걸 등 8명이 문창교회 주일예배에 참석했다. 
 
"어서들 오세요. 반갑고 환영합니다."
 
문창교회 이형준 목사와 성도들이 가지런히 두 손을 모으며 인사를 한다. 선교사 후손들도 허리를 굽혀 한국식으로 인사를 했다. 
 
이형준 목사는 “여러분들이 감격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가슴 뭉클했다”며 “선교사님들의 사랑과 비전, 헌신을 기억하고 복음의 빚을 갚는데 더욱 힘을 쏟을 것”이라고 밝혔다.

 

▲ 문창교회 주일예배에서 방문단에게 선물을 증정하고 환영하는 시간을 가졌다.     © 크리스찬리뷰


방문단 중 93세 최고령인 서두화 선교사(Rev. Alan Stuart 마산 1957-1960. 부산 1960-1968)는 “이 교회는 옛날 사역할 때 함께 예배드렸던 교회여서 지금도 기쁨으로 기억하고 있다”며 “평범한 사람인데 귀빈처럼 환대해줘서 고맙다. 지금까지 한국 사람들과 교제하고 있어 행복하다”고 미소를 지었다.
 
서두화 선교사는 부산장신대 학장을 역임했으며 호주에서는 1973년 첫 한인교회인 멜본한인교회를 개척한 초대 목사이다.
 
이날 크리스토퍼(60. 한국이름 서형일) 씨는 방문단 일행을 대표해 기념품을 전달했다. 크리스토퍼 씨는 서두화 선교사의 큰아들로 부산일신병원에서 태어나 문창교회 김석찬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문창교회는 1901년 백도명의 전도로 김마리아, 김인모 등 여자 성도 7명이 모여 예배를 드린 것이 경남 마산지역의 기독교 뿌리가 됐다. 문창교회는 여성들이 창립을 주도한 점에서 매우 독특하다.
 
초대목사는 호주 선교사인 손안로(Rev. Andrew Adamson)였다. 한석진 목사(3대)는 우리나라 최초의 목사 7인 중 한 사람이다. 함태영(6대) 목사는 목회자이면서도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했으며 해방 후에는 부통령을 지냈다. 나라와 교회를 타락과 멸망의 불구덩이에서 건져내려다가 순교한 주기철 목사(8대)의 혼이 담긴 예배당이다.
 
또한 예장 고신 교단을 창설한 한상동 목사(9대), 만주 독립군 출신인 김석찬 목사(14대) 등 기라성과 같은 목회자들이 목숨을 걸고 지켰던 말씀의 성전, 눈물의 성전, 기도의 성전이었다. 창신학교를 세운 이승규 장로와 아들 시조시인 이은상도 문창교회 출신이다.

 

▲ 문창교회 주일예배에 참석한 방문단.     © 크리스찬리뷰


호주선교부는 1911년 상남동 노비산 언덕 위에 사택을 지었다. 마산포교회 역시 인근의 상남동으로 신축 이전했다. 아담슨은 마산포교회의 당회장이지만 창신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마산 기독교의 형성에 공헌했다. 그러다가 마산포교회는 길 건너편의 추산동에 석조 예배당을 지어 이전했다. 이때 교회 이름도 문창교회로 바꿨다.
 

▲ 문창교회에서 50여년 전 지인을 만난 엘리슨 선교사.     © 크리스찬리뷰


1931년 문창교회에 부임한 주기철 목사의 사역 장소는 바로 추신동 예배당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곳에 다른 시설이 들어서 있다. 마산포교회가 추신동으로 옮겨가면서 구 예배당은 1924년 창신학교의 교사로 사용됐다. 그리고 창신학교가 북쪽 회원동 신축 건물로 옮겨가자 다시 이곳은 선교부에 의해 의신유치원으로 사용됐다.
 
‘가고파’를 지은 노산 이은상은 마산포교회 설립자인 이승규의 아들로 창신학교를 졸업했다. 그가 동무들과 뛰어놀던 추억의 언덕이 바로 마산 선교사들의 주택이 자리하고 있던 노비산 자락이다.
 
마산은 민주화의 성지요, 저항의 도시로 불린다. 마산의 저항 정신은 일제의 조선 침탈 과정 속에서도 입증됐다. 근현대 정치사에서는 3.15 부정선거 항쟁과 부마항쟁으로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 문창교회 역사관에 걸려 있는 윤보선 대통령의 친필 휘호     © 크리스찬리뷰


김영삼(YS) 4대 대통령 가문과는 인연이 깊다. YS의 부인 손명순 여사가 어릴 적부터 믿음의 계단을 쌓은 곳이다. 손 여사의 신앙심은 대통령 선거 운동 때 주일성수를 위해 일요일 유세를 중단시킬 정도였다. 이화여대 재학 중 결혼한 손 여사는 51년 3월 6일 문창교회에서 예식을 올렸다. 결혼 전 서울대철학과 4학년이었던 YS는 ‘할아버지 위독'이라는 거짓 전보를 받고 급히 마산으로 향했다. 두 사람은 맞선을 본지 한 달 만에 결혼에 골인했다.

 

▲ 문창교회에서 열린 한호 선교 130주년 기념 주일예배 전경. 지태영 목사가 말씀을 전했다.     © 크리스찬리뷰


변조은 선교사는 “문창교회에서 고신파와 예장파가 예배 후 갈라진 문을 통해 나오던 모습을 보며 체험한 한국교회 분열의 아픔을 느끼며 한국을 알아갈 수 있었다”며 “이런 상황을 호주 본부에 보고함으로 호주의 교인들과 함께 기도할 수 있었다”고 오히려 감사의 뜻을 표했다.
 
변조은 선교사(86. Rev. John Brown 마산 1960- 1969. 서울 1969- 1972)는 장신대 교수로 활동했고 영등포 산업선교회를 도왔다. 1974년 호주에서 두 번째 한인교회인 시드니한인연합교회를 창립했다.〠 (계속)


글/김명동|크리스찬리뷰 편집인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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