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파라과이 그리고 호주와 한국
 
글|김환기,사진|권순형

 

▲ 본지와 인터뷰중인 박혜진 박사.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이 자연과학도였던 그녀를 남미이민사를 연구하는 인문학자로 변신케했다.     © 크리스찬리뷰


한국에서는 '문화차별', 일본에서는 '인종차별'을 겪으며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의문이 그녀를 새로운 학문의 세계로 인도하였다.
 
박혜진 박사는 1973년 김해에서 태어나서, 9살까지 부산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생물 교사로 자연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1982년, 아버지는 청운의 꿈을 품고 파라과이로 이민을 갔다.
 
당시 정부는 농업이민 정책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였다. 남미에 농지를 마련하고, 농업 이민자에게 3년간 무상으로 개간하여, 3년 후부터 천천히 상환하는 방식으로 농업 이민을 권장하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자신의 땅을 가지고 농경업을 하는 것이 꿈이었다.
 
자식들도 경쟁이 치열하지 않은 곳에서 살게 하고 싶었다. 어머니는 어린 딸 세 명과 함께 조국을 떠나 미지의 세계로 간다는 두려움이 있었지만, 아버지는 단호했다. 그렇게 그녀는 파라과이로 이민을 갔다.
 
그녀는 공부를 참 잘했다. 공부를 잘하면 당연히 의대를 가야 하는 줄 알고, 별다른 생각 없이 적성에도 맞지 않는 의대에 입학하여 의사가 되었다. 막상 의사로 일을 하다 보니 자신의 성격과 너무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누구인가?

 

▲ 아버지 박영수 씨(당시 45세)와 남미로 이민을 떠나는 가족들  ©박혜진    


마침 한국재외동포재단에서 해외동포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이 있어서 지원하여 합격하였다. 1996년 그녀는 한국에서 언어 연수를 받다가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호주국립대학(ANU)에서 한국학을 전공하고, 박사학위 취득을 위해 'Course Work'을 받고 있었다. 공부하는 동안 두 사람은 가깝게 지내게 되어 2002년 호주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녀는 연세대학교에서 미생물학 석사를 받았고, 남편은 서울대와 동경대에서 공부를 계속하게 되었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일본에 2002-2005년까지 살았다. 이 무렵 그녀에게 한 가지 질문이 생겼다. 그녀는 한국에서 공부할 때는 '문화차이'로 따돌림을 받았고, 일본에 있을 때는 한국인이기에 '인종차별'을 당했다. 이때 그녀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그녀는 남미 이민사에 관한 책자를 찾아 읽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자료가 많이 없었고, 그나마 찾은 몇 권의 책도 남미 이민은 실패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이민자의 문제라고 했다. 분명히 아빠는 실패하지 않고 성공적으로 정착했는데, 그런 기록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기록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고민 끝에 그녀는 직접 연구해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 호주국립대학에서 부부가 박사 학위를 받았다. 남편 Alston 박사와(오른쪽)와 박혜진 박사가 두 아들과 함께 했다. Dion(첫째), Nestor. ©박혜진   

 
2006년, 그녀는 호주국립대학(ANU) 박사 코스에 등록하여 본격적으로 남미 이민사 연구를 착수하게 되었다. 남편도 공부하고 있었으며, 공부 도중 아이도 둘이나 낳았다. 연구 기간은 조금 길었지만 드디어 2015년 대망의 박사학위를 받게 되었다.
 
당일 남편도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녀에게 2015년은 결코 잊을 수 없는 해이다. 그녀는 논문을 일반 독자들을 읽을 수 있는 책으로 출판 준비를 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경험하고 연구한 남미 이민사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하여 주었다. 
 

남미 이민사

 
남미 이민 역사는 1905년에 시작된다. 1903년 처음에는 하와이로 갔지만, 1905년 외교권을 일제에 빼앗기면서 더 이상 갈 수 없었다. 조선 노동자들이 하와이로 가면 일본 노동자들의 자리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1905년 대부분의 사람들은 멕시코에서 3년간 일을 하고 돌아올 생각으로 떠났다. 하지만 3년이 지난 1908년은 조선이 거의 일제의 식민지로 되어 가는 시점이어서 돌아올 수가 없었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멕시코에서 쿠바, 미국 등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1910년 경술국치로 조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고, 이민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 박혜진은 살레시오 재단의 카톨릭고등학교를 졸업했다.(1992). ©박혜진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포로들은 자신의 의사에 따라 북과 남으로 선택할 수 있었다. 양측 다 합쳐서 수십 만의 포로 가운데 남도 북도 또는 중국도 대만도 아닌 중립국을 택한 것은 총 88명이었다.
 
그 가운데 열두 명의 중국 사람을 제외한 ‘코리안”(Korean)들은 76명이었다. 이중 인민군 출신은 74명, 한국군 출신은 두 명이었다. 76명 중 상당수가 ‘미국’을 희망했지만 미국은 참전국이어서 갈 수 없었다. 그들을 일시적으로나마 수용한 나라가 인도였다. 2년의 거주 조건으로 인도에 체류하다가 사람 중에 브라질에 50명, 아르헨티나로 12명이 갔다.
 

박혜진 박사는 아르헨티나를 선택한 사람과 인터뷰하며 "왜 아르헨티나를 선택했는가"에 대하여 물었다. "아르헨티나는 땅도 넓고 소도 많아서 소고기를 실컷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들은 한국 전쟁의 트라우마로 한국과 단절하며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미 이민에는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62년에 한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이민정책을 펼쳤다. 처음에는 브라질에서 시작하여, 1965년부터는 미국으로도 갈 수 있었다. 농업 이민이지만 정작 농민들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이 돈과 배경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1974년부터는 정부 주도의 농업이민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브라질, 아르헨티나 그리고 파라과이 등으로 가다, 농업이민 프로그램은 1985년에 끝났다. 남미에 갔던 사람 중 호주로 재이민 온 사람들도 많이 있다.

 
부산 일신기독병원

 
그녀는 1980년 8월 부산 일신병원에서 태어난 여동생이 있다. 아기는 5kg이었다. 어머니는 동생의 이야기를 할 때마다 일신병원에 감사했다. 만약 일신병원이 없었다면 어머니와 아이는 죽었을지도 몰랐다고 한다.

 

▲ 부산 동아대 잠사과 출신의 박혜진 박사의 부친 박영순 씨는 파라과이로 농업 이민을 가서 부부가 땅을 개간하여 목화, 뽕나무, 참깨 등을 재배했다. ©박혜진  


 
어느 날 한국 선교사에 대하여 연구하는 한국학 교수와 이야기 하던 중에, 갑자기 일신병원이 떠올라서 일신병원에 대하여 연구할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녀는 일신병원에서 땀과 눈물을 흘리며 봉사했던 호주 의료선교사들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올해 중순 그녀는 호한재단(Australia-Korea Foundation)의 지원을 받아 연구를 시작했다. 그녀의 연구 대상은 일신병원을 창설한 'Dr Helen Mackenzie(한국명 매혜란), Catherine Mackenzie'(한국명 매혜영)와 그곳에서 32년 동안 헌신한 'Dr Barbara Martin'이다.
 
영문 자료 중심으로 연구하던 중 '크리스찬리뷰'에 호주 선교사에 대한 많은 자료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Dr Barbara Marin 선교사'가 멜번에 생존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크리스찬리뷰가 연결, 그녀는 한걸음에 멜번으로 달려가 바바라 마틴 선교사(한국명 민보은)를 만나 이틀 동안 인터뷰를 했다. 그녀는 정말 궁금한 게 한 가지 있었다. “잘사는 호주에서 왜 못사는 한국으로 갔는지?”
 
“그것이 바로 Christian Life입니다." 마틴 선교사의 말에 그녀는 많은 감동을 받았다.
 
11월 11일에는  본지 권순형 발행인과 NSW주립 도서관에서 만나 인터뷰를 했다. 12월 초에는 한국학 학회 발표를 위하여 '퍼스'에 간다. 그곳에서 헬렌 선교사의 여동생 루시의 딸과 아들을 만나 자신이 하는 연구에 대하여 설명할 예정이다.

 

▲ : 박혜진 박사의 두 번째 프로젝트는 호한재단의 후원으로 일신기독병원을 설립한 매혜란, 매혜영 선교사 자매와 민보은 선교사를 연구하여 호주 선교사들의 희생과 헌신을 호주인들에게 알리는 것이 목표이다.     © 크리스찬리뷰


내년 2월에는 부산 일신기독병원을 방문하여 '헬렌과 캐서린'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과 인터뷰할 예정이다. 그녀의 연구 목적은 호주 선교사의 희생과 헌신을 호주인에게 알리는 것이다.
 
살면서 잊을 수 없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고,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이야기들도 있다. 물설고 낯선 땅에서 삶 전체를 희생한 선교사들의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


글/김환기|크리스찬리뷰 영문편집위원, 구세군라이드교회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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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11/25 [15:45]  최종편집: ⓒ christian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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