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병원은 정말 신기하다

여기저기서 스스로 필요한 사람들이 몰려들어

글|김명동,사진|권순형 | 입력 : 2019/11/25 [16:19]

 

▲ 무료진료를 받기 위해 새벽부터 헤브론병원을 찾아온 환자들. 요즈음에는 하루 전 밤에 와서 대기소에서 잠을 자고 다음 날 진료를 받는다. (2015. 2. 촬영)     © 크리스찬리뷰


2007년 9월 캄보디아에서 사역해온 한국인 의료선교사들이 연합해 헤브론병원을 세웠다. 말이 병원이지 온갖 잡동사니를 처박아 놓은 창고였다. 우선 창고를 진찰실과 약국으로 대충 구분지어 놓았다.
 
하루하루가 흐르면서 환자는 점점 늘기 시작했다. 온화하고 친절한 의사들이 진료하는데다 치료비까지 받지 않는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죽을 병에 걸려있다는 걸 직감하면서도 돈이 없어 참고 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웬만한 병은 병 취급도 하지 않는 바람에 더욱 병을 키우고, 그 병이 악화되어 결국 죽음까지 부르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던 시절.
 
그런 와중에 프놈펜 공항 근처에 웬 의사가 무료로 병을 고쳐준다니 얼마나 고마운 일이었겠는가. 환자들은 ‘무료’라는 말을 반신반의 하면서 쭈뼛쭈뼛하다가 선교사들의 온화한 미소와 부드러운 말투에 마음을 놓았다.
 
“저 진료비가 없는데 들어가도 됩니까.”
 
“어서 오세요. 아 그리 서있지 마시고 이리로 와요. 아파서 왔으니까 치료받아야지요.”
 
그러다가 진료를 마치고 돌아가는 순간에는 왠지 뒷골이 당기는 어색한 표정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약은 받아 가셔야지요

 
그럴 때면 환자들은 “약까지 받아가도 돼요?”는 쑥스러운 얼굴로 뒤통수를 긁곤 했다.  처음에 몇 십 명이던 환자는 입소문이 퍼지는 바람에 날로 늘어 100명을 훌쩍 넘어서는 날이 많아졌다. 헤브론병원은 그야말로 그들의 영혼을 닦고 조이고 기름 치는 곳이었다.
 
때 구정물이 흐르는 옷, 그리고 온갖 악취를 흠씬 풍기는 온 몸을 내보이는 환자들은 청진기를 대려고 웃옷을 들쳐 보이라고 하면 부끄러워 어쩔 줄 몰랐다. 오래된 병을 그냥 방치한 탓에 즉시 수술해야 할 환자들도 넘쳐났다. 환자들의 숫자가 늘어나 모금한 운영비는 이미 눈 녹듯 사라진지 오래됐다. 무료병원이니 수입이 있을 턱이 없었다.
 
김우정 원장은 하나님께 매달렸다. 그는 요한복음에서도 나타나 있듯이 ‘너희가 내 안에서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러면 이루리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믿고 늘 기도를 드렸다.
 
어느 날이었다. 캄보디아 장신대 교수인 어느 목사님이 창고 병원으로 김 원장을 찾아왔다.
 
“원장님, 병원 초창기라 힘드시죠?”
“목사님 어쩐 일이십니까?”
“하나님이 가라해서 왔습니다.”
 
그는 대뜸 흰 봉투를 김 원장 앞에 놓았다.
 
“웬 봉투입니까?”
“선 십일조입니다.”
“아니, 선 십일조도 다 있습니까?”
“제가 지금 미국으로 집회를 인도하러 가는데 이 액수만큼 사례비가 나올 것 같아 미리 십일조를 바치는 겁니다.”
 
그가 돌아간 뒤 김 원장은 봉투를 열어보았다. 봉투 안에는 6천 불이 들어있었다. 목사는 미국 집회를 마치고 돌아와서 놀랍게도 선 십일조라면서 또 한 번 6천 불을 김 원장에게 건넸다.
 
병원 초창기였기에 가뭄에 단비를 맞은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어찌 보면 미안하기도 했다. 그때 목사는 껄껄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 뜻인 걸 어쩝니까?”
 
돌이켜보면 하나님은 병원이 어려울 때마다 한 사람씩 의인을 보내 슬쩍 도와주고는 가셨다.
 
또 한 가지 고민은 의료진이 부족했다는 것. 정말 단내가 나도록 환자를 보아도 티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1분 1초가 아까워 점심 먹는 것은 아예 꿈도 꾸지 못했다. 병원을 그런대로 굴러가게 하기위해서는 최소한의 식구가 필요했다. 무슨 수를 써야지 늘어나는 환자를 감당하기는 애당초 무리였다. 여기에 생활비는 고사하고 숙식도 자비량으로 해결해야 되니 누구보고 오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막다른 골목까지 몰리는 모습을 보시고는 그냥 두지 않으셨다. 헤브론병원으로 단기봉사 하러 온 봉사자들이 돌아가서는 스스로 도움의 손길을 뻗는 것이었다.
 
“원장님, 일전에 그곳에서 단기봉사했던 의사입니다. 그곳에서 섬기고 싶습니다.”
 
“친구로부터 그곳에 급한 수술환자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제가 가서 수술해도 되겠습니까?”
 
어쨌든 헤브론병원으로서는 천군마마를 얻는 격이 됐다. 가뜩이나 의료진이 부족하여 늘 허덕허덕 됐는데 단기의료봉사자들이 와서 웬만한 환자들을 돌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장수술도 이렇게 시작됐다.
 
병원건물 건축도 반응이 빨랐다.
 
“주님의 길을 쫒아가는 원장님이 너무도 자랑스럽습니다.”
 
김 원장의 손을 꼭 잡고 눈물을 흘리며 ‘우리 원장님’ 하면서 평생을 간직해온 옥가락지와 금반지를 내놓은 할머니서부터 결혼을 위해 어렵게 만들어 놓았던 돈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선뜻 내놓은 젊은이.
 
테이프를 끊던 날 김우정 원장은 감회어린 눈으로 제법 현대식 건물을 갖춘 병원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새로운 병원은 캄보디아인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주었다.

 

▲ 크리스찬리뷰가 주선하여 헤브론병원에서 공연을 가진 CCM 듀오 ‘사랑이야기’ 김현중과 김재중 형제가 김우정 원장과 기념촬영을 했다.(오른쪽부터) ©크리스찬리뷰D5-03: CCM 듀오 ‘사랑이야기’는 헤브론병원 선교사들과 현지 의료진 및 직원들을 위한 콘서트를 갖는 한편 환자들에게도 음악을 통해 복음을 전했다. 또한 캄보디아장로교신학교에서도 신학생들을 대상으로 공연을 펼쳤다. CCM 듀오 ‘사랑이야기’는 헤브론병원 선교사들과 현지 의료진 및 직원들을 위한 콘서트를 갖는 한편 환자들에게도 음악을 통해 복음을 전했다. 또한 캄보디아장로교신학교에서도 신학생들을 대상으로 공연을 펼쳤다.     © 크리스찬리뷰

 

헤브론병원을 거쳐 간 수많은 섬김의 천사들!
 
헤브론가족으로 살아가고 있는 많은 헌신된 선교사들! 그들의 이름이 김우정 원장과 어울러 빛을 발한다.

 
기이한 힘에 이끌려 온 CCM 듀오‘사랑이야기’

 

“참 신기하네요. 우리가 헤브론병원에 와 있네요.”
 
CCM 듀오 ‘사랑이야기’가 헤브론병원 가족 및 환자들을 위로하는 찬양콘서트를 개최해 잔잔한 감동을 줬다. 재능기부 콘서트다.
 
‘주님의 숲’ ‘욥 이야기’ ‘나사렛 예수’ 등으로 유명한 ‘사랑이야기’는 김현중(53), 김재중(50) 형제로 구성된 CCM 듀오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찬양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순회선교사다.
 
이날 이들은 ‘주님의 숲’ ‘사랑합니다’ ‘그 사랑’ 등을 불러 헤브론병원의 모든 이들을 위로했다. 김재중 선교사는 “주님의 숲으로 들어오신 여러분들을 환영한다”면서 “아파하고 힘든 사람들과 서로 다독이고 상처를 싸매주고 이끌어주는 우리가 되었으면 소원한다”고 했다.

 

▲ 사랑이야기는 헤브론병원 콘서트를 마친 후 청소년들과 기념촬영을 가졌다.     © 크리스찬리뷰


“너무 가슴이 벅찼어요. 눈물이 막 났습니다. 이곳에 오기 전 2박 3일로 중국 코스타 강사로 갔었는데 도전을 주러 갔다고 말하지만 저희들이 오히려 도전을 많이 받았어요. ‘이렇게 뜨거울 수가 있을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느꼈는데 이번에 헤브론병원에서도 그렇고 캄보디아 신학교 방문 때도 똑같았어요.
 
97%가 불교인 이 나라에서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잖아요. 이 나라를 책임질 수 있는 미래의 젊은이들이 '아멘' 하며 두 손 높이 들고 찬양하는 모습을 보고 너무 도전을 받았어요.
 
음향도 시스템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였는데도 감격하는 걸 보면서 매번 가슴이 뭉클하고 눈물 닦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다음에 올 땐 이분들이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도 준비해 오려고 해요.”(재중)
 
“찬양을 통해서 위로를 주지만 메시지를 통해 새로운 세상, 새로운 삶을 찾아가기를 바라는 거죠. 영혼을 깨워 자신을 다시 세워나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늘 기도하면서 준비하고 있습니다.” (현중)
 
치열한 경쟁과 바쁜 일상 속에서 그들이 주는 음악은 참으로 편안하다. 자연스럽지만 절제된 어쿠스틱 기타소리와 두 형제가 표현하는 아름다운 화음을 듣고 있자니 세상의 근심과 걱정은 어느 새 사라진다. 무엇보다 그들의 음악에 주님을 향한 사랑의 이야기가 담겨 있기에 잔잔한 감동이 더해진다.
 
두 형제는 눈빛만 봐도 서로 통할 것 같았다. 역시나 호흡이 척척 맞는다. 서로의 장점을 이야기해보라 했더니 술술 말이 나온다.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아 보조기가 있어야 걸을 수 있는 우리 형은 성격이 너무 좋아요. 그리고 음유시인의 감성을 갖고 있어,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을 세심하게 잘 표현한답니다.” (재중)
 
“동생은 참 정이 많은 사람이에요. 정이 많다는 건 눈물과 사랑이 많다는 뜻이죠. 누가 힘들다 하면 간과 쓸개까지 내어주려고 할 정도로 헌신적입니다. 한편으론 진취적인 성격을 갖고 있기도 해요.” (현중)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들은 친형제 사이다. 형인 김현중은 작사, 동생 김재중은 작
곡과 프로듀싱을 한다. 노래를 할 때도 동생은 메인 파트, 형은 화음을 담당한다.
 
재중 씨의 아내는 CCM 여성듀오 ‘아침’의 신현진 씨다. 팀명처럼 서로를 아끼고 존중하며 진행한 작업은 명곡들을 탄생시켰다. 그렇게 29년간 아름다운 찬양을 만들어 온 형제듀오 사랑이야기. 80-90년대 한국 CCM 중흥기를 거쳤던 많은 가수들이 하나 둘 자취를 감추는 현실 속에서 사랑이야기는 긴 시간 한결같이 함께 길을 걸어왔다.
 
“형 덕분입니다.”
"동생이 다 해줬어요.“
 
사랑이야기는 연신 서로를 추켜세우기 바빴다. 오랫동안 팀이 깨지지 않고 이어올 수 있었던 비결을 알 수 있었다. 
 
이들은 최근 중국에 있는 ‘탈북자 비보호 자녀’들의 쉼터 마련을 위한 프로젝트 앨범 ‘더 브레드워십’을 제작하고 앨범과 공연을 통해 발생한 수익금 전액을 기부했다. 앨범에 수록된 ‘오소서 마라나타’‘성령이여 들으소서’‘할렐루야 주의 거룩한 집에’ 등 전곡은 사랑이야기의 창작곡이다. 송정미, 강찬, 남궁송옥 등 11명의 국내 대표적인 CCM 아티스트와 예배 인도자들이 참여했다.
 
“탈북여성과 중국인 남성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보호받지 못하고 방치된 탈북자 자녀들입니다. 허기를 달래주고 따듯한 보금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었으면 하고 시작했는데 작년 6월 6만 5천 달러를 들여 집을 샀어요. 아직 가보지는 못했지만 그동안 버려진 아이들이 집세 때문에 정착을 못하고 이리저리 옮겨 다녔는데 이 집에서 잘 자라났으면 좋겠어요.”
 
현재 이들은 필리핀 ‘파세코’ 지역 어린이들도 후원하고 있다.
 
필리핀 수도 마닐라에는 화려한 빌딩 숲에 가려진 ‘파세코’라는 지역이 있다. 바닷가 쓰레기 더미 위에 지어진 낡은 판잣집이 즐비해 있는 곳이다. 오래된 가난 속에 하루 한 끼도 해결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마약과 매춘, 인신매매, 장기매매 등의 위험한 환경에 노출된 아이들에게는 따뜻한 밥 한 끼와 매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키워 나갈 수 있는 교육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
 
“이곳 어린이들은 쓰레기더미에서 철근 등 쇠붙이를 모아 하루 500원을 법니다. 이곳은 한국 돈 11만 원이면 하루 250명을 먹일 수 있어요. 오후 3시부터 밥을 배식하는데 큰 아이가 작은 아이를 안고 1시부터 기다립니다.”
 
사랑이야기는 “우리가 부르는 노래로 누군가 먹고 배부를 수 있는 따뜻한 빵이 되길 바란다.”며 “우리의 앨범으로 소외되고 도움이 필요한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역들을 본격적으로 펼쳐나갈 것”이라고 했다.
 
재중 씨는 “우리 형제는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서 기타를 치며 곡을 만들어 불렀는데 재능 알아본 주위 분들이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가보라고 권해서 가요제에 출전해 금상을 받았다”며 “거기서부터 우리가 CCM 사역자의 길을 가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사랑이야기는 1989년 전국가요제에서 금상을 수상, 94년 환경음악제 대상을 수상했으며 2천여 회의 초청공연을 했다.
 

사랑이야기는 처음부터 음악으로 명예를 얻기보다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집중해 왔다. 높은 출연료와 화려한 무대에 빠질 법도 했지만 형제는 자신들이 하고 싶은 ‘하나님의 노래’가 이곳에 없음을 일찍 깨달았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형제는 ‘빛과 소금’이라는 크리스찬 음반을 발표하며 CCM 가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 헤브론병원 군기반장으로 불리는 정형외과 전문의 박종후 선교사.     © 크리스찬리뷰


이들은 재중 씨가 군 제대 후인 96년 ‘사랑이야기’로 옷을 갈아입고 ‘사랑과 평화’를 발표했다. 대표곡 ‘주님의 숲’은 2001년 발표했지만 여전히 CCM 방송 차트에서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어려운 노래였기 때문에 이렇게 많이 알려질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이 찬양으로 많은 이들이 쉼과 평안을 얻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이 곡은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하나님이 쓰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한다.
 
그 하나님을 세계 곳곳에 전하기기 위해 사랑이야기는 20여 개국을 다니면서 공연으로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있다. 어려운 나라든 잘사는 나라든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 선교지라고 생각하며 다니는 해외공연이다.
 
기회만 주어지면 계속 새로운 곡을 내고 그것을 나눠주고 싶다는 사랑이야기. 다가올 20년도 그들의 찬양은 더 낮고 소외된 곳에 울릴 것이다.


지금이 너무 행복한 시간입니다”
 군기반장 박종후 선교사

 
박종후 선교사(63. 정형외과 전문의)가 해맑은 미소로 취재진을 맞았다. 그는 헤브론병원에서 싫어할 소리만 골라서 하고 다닌다는 선교사다. 그래서 헤브론병원 ‘군기반장’으로 통한다. 쓴 소리 선교사라면 다혈질인 인물이 아닐까. 그런데 그는 놀라울 만큼 논리적이었다. 담담했지만 단호했다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나를 선교사라 부르지 말라, 봉사라는 말을 쓰는 것도 거북하다”고 했다. 일단 개인적인 마음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예?”
 
기자가 어리둥절 하자, 그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할 말은 해야 하는 성격이다”면서 “그런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격의 사람이 아니다”라고 했다. 이곳 현지인들도 ‘박 선교사님’하고 부른다고 하자, 그 제서야 그가 호탕하게 웃으니 기자도 따라 웃었다.
 
그나저나 그는 기독교에 대해 심기가 불편한 듯 보였다. 그러면서 그는 잠시 말문을 닫았다. 당시 상황을 떠올리는 것 같았다.

 

▲ 헤브론병원에서 사역 중인 선교사들이 한자리에 모여 피자를 나누며 단합대회를 가졌다. 왼쪽 앞 자리에 박종후 선교사가 앉아 있다.     © 크리스찬리뷰


박 선교사는 인공관절 수술 분야에서 이미 정평이 나 있는 정형외과 전문의다. 특히 800-900차례의 슬관절 인공관절 치환술 실적을 인정받아 동아일보사, 신동아가 선정한 50인의 명단에 오른 그는 현재까지 2천 건이 넘는 인공관절 치환술 시술을 해 인공관절 수술 분야에서 대가로 통한다.
 
그는 영국 월트셔주 솔즈베리평원에 있는 고대의 거석기념물인 스톤헨지처럼 마모된 뼈에 인공관절을 거석 세우듯 박는 닥터 캐블리시의 시술을 직접 보고 싶어 어렵사리 비행기 티켓을 구해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알렌타운 병원으로 향했다.

 

▲ 점심식사 후 외래진료를 의해 병원으로 가던 중 다리가 불편한 환자를 발견하고 즉석에서 진찰하며 지팡이 짚고 걷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는 박종후 선교사     © 크리스찬리뷰
▲ 점심식사 후 외래진료를 의해 병원으로 가던 중 다리가 불편한 환자를 발견하고 즉석에서 진찰하며 지팡이 짚고 걷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는 박종후 선교사     © 크리스찬리뷰


그의 노력에 감동한 걸까? 닥터 캐블리시는 박 선교사에게 실제 시술 과정을 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고 시술에 대한 설명까지 해주었다. 그리고 이듬해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자 다시 찾은 그를 ‘진생(인삼) 줬던 의사!’라며 반갑게 맞아 그동안 시술했던 비밀 노트를 보여주며 조목조목 설명해준 닥터 캐블리시가 있었기 때문에 그 많은 수술을 성공할 수 있었단다.
 
그런 명성에 현재의 삶이 썩 어울리는 것 같지는 않다. 이제는 편안하게 노후를 즐길 수 있는 그가 질병과 빈곤으로 고통받는 척박한 캄보디아를 찾아오게 된 사연은 무엇일까. 도대체 어떤 힘이 그를 이곳으로 오게 했을까.

 

▲ 박종후 선교사(왼쪽)가 회진을 돌며 캄보디아 의사들과 수술환자상태를 살펴보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순천하나병원 대표원장으로 있으면서 올 2월에 은퇴를 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세상의 빚이 있었습니다. 그 마음의 빚이 있었기 때문에 다리에 힘이 있을 때 짧은 기간이라도 봉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하던 중 우연히 부산에 있는 친구와 연락이 되어 그 친구가 베트남 양승봉 선교사님을 소개했어요.
 
양 선교사님께 연락을 드렸더니 네팔 몇 군데를 소개해 주셨는데 의사면허증이 그곳에서는 몇 개월 이상 있어야지 수술하고 치료할 수 있는 면허가 나온다는 거예요. 몇 개월을 그냥 소비하는 거잖아요. 안되겠다, 생각하고 다시 양 선교사님에게 연락을 했더니 헤브론병원 김우정 선교사님과 카톡을 만들어 주셨어요.
 
김우정 선교사님과 카톡으로 연락했죠. 그런 후 작년 5월인가요, 몸이 아프셔서 검사받으러 서울에 오신다는 거예요. 그때 만났어요. 솔직하게 말씀드렸죠.”
 
박 선교사는 그날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원장님, 저는 교회에 상처를 너무 많이 받아서 그때부터 마음이 안 풀립니다. 교회하고 연관을 짓지 말아 주세요. 두 번째는 병원 안에 방 하나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두 가지만 해결해 주신다면 병원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박 선생님, 정형외과가 너무너무 필요합니다. 한국에서 오시는 선생님들은 며칠 오셨다 가시고, 어느 선생님은 일 년에 두 번씩 오시는데 그것도 일 주일씩만 도와주고 가십니다. 박 선생님, 정말로 많이 필요합니다. 당장 오세요.” 
 
박 선교사는 김우정 원장 말에 가슴이 저려왔다고 실토했다.

 

▲ 외래를 찾아 온 환자를 진찰 후 기념촬영.     © 크리스찬리뷰


 
“불러주신 감사한 마음으로 작년 아내(서혜숙)와 함께 헤브론병원으로 정찰을 왔어요. 은퇴하기 전에 와서 보고 결정을 하려고요. 그런데 와서 보니까 수술환자가 너무 많은 거예요. 그걸 보고 안 되겠다 싶어 대 여섯 분 수술을 했어요. 그런데 수술기구가 없어서 힘은 들었죠. 어떤 상태인가 보러 빈 몸으로 왔잖아요. 한국으로 돌아가서 결정을 했죠.”
 
박 선교사는 ‘봉사론’을 다시 꺼내들었다.
 
“저는 나한테만큼은 봉사라는 말을 쓰고 싶지 않아요. 왜냐하면 이 일은 내 행복을 위해 하는 거지 봉사가 아니다. 내가 마음속에 큰 빚이 있는데 그 빚을 갚아 행복을 얻으려고 하는 거지, 캄보디아 사람들을 위한 ‘거룩한 봉사’를 한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또 다른 선교사님들은 오랫동안 계시기 때문에 봉사라는 말을 쓸 수가 있어요. 그렇지만 저는 6개월 있겠다고 온 사람이 감히 봉사라는 말을 할 수가 있나요?”
 
“선교사님, 그 마음의 빚이라는 게 뭡니까?”
 
다시 입을 연 그의 목소리가 차분해졌다.
 
“사실 제가 순천애양병원에서 12년간 근무했어요. 애양원병원에 들어갈 때 아들이 아파 같이 들어가게 된 건데 악성빈혈로 거의 사망 직전까지 갔어요. 그때는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됐죠. 무슨 병인지 아니까요. 혹시나 주위에 안 좋은 이야기가 들릴까봐 조마조마하면서 서울대학병원에 다녔어요.
 
서울대학병원 소아과 혈액암 담당 교수한테 약물치료를 받으면서 혹시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다행히 우리 아들이 치료가 잘 되어 카이스트 기계공학과를 졸업했어요. 이 분야 교수가 되고 싶어했지요. 그런데 카톨릭의대에 진학해 현재 4년차 눈 망막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 아들이 살아난 것에 대한 마음의 빚이 있었던 거죠.”
 
그는 그때부터 빚을 갚는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했다고 한다.
 
"순천하나병원 있을 때 62세 정년을 제가 정했어요. 62세 되면 미련 없이 병원에서 나부터 나와야 된다. 62세로 정한 이유가 나이가 들수록 행동이 느려지고 두 번째는 어른 취급만하고 그러니까 불필요한 의사가 되는 거예요. 또 나이가 들면 하고 싶은 것도 더 못할 것 같고요. 마음의 빚이 있었기 때문에 다리에 힘이 있을 때 짧은 기간이라도 봉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거죠.”

 

▲ 오전, 오후 일과를 마친 후 헤브론병원 선교사와 직원들은 로비에서 기도회를 가진다.     © 크리스찬리뷰


“교회에 등을 돌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고 싶던 말을 오랫동안 가슴에 담고 살았기 때문일까. 그의 눈자위가 붉어지면서 잠시 눈을 감았다.
 
“어렸을 때 정형외과 의사가 꿈이었어요. 보니까 정형외과 의사가 돈을 많이 벌더라고요. 정형외과 의사가 되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했죠. 그런데 사람의 욕심이란 게, 대학교 다닐 때 어떤 분야에 대가가 되고 싶은 욕심이 생겨났어요. 꿈이 중간에 대학교수로 바뀌었어요.
 
그리고 어떤 의무감 때문에 순천애양병원으로 가게 됐어요. 다른 수술은 누구나 할 수 있어요. 내가 독특하고 유일하게 배운 수술 너무 아까운겁니다. 가서 보니까 한센병도 치료하면서 정형외과 의사로서 할 일이 아주 많더라고요. 정말 12년 동안 학생들 교육도 시키고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소아마비 환자를 수술했는데 이 환자가 사망을 했어요. 자기가 집에서 술 먹고 쇠로 깁스를 자른 거예요. 간도 안 좋은 사람인데요. 쇠로 인해 균이 들어간 것 같아요. 순식간에 썩어 들어가서 사망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원장님과의 갈등이 좀 있었어요.
 
저에게 취한 부당한 조처를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순간 ‘아, 이제는 애양병원을 떠날 수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만약 그 사건이 없었더라면 지금도 애양병원에 있겠지요.”
 
그 후로 교회를 멀리하게 됐다는 박 선교사.
 
순천애양병원은 한국최초의 한센병 치료병원으로 기독교 성지이다.
 
“아버지가 장로였고 어머니는 권사였죠.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이제 교회 좀 나가라 그게 유언이었는데 그 약속을 못 지키고 있습니다. 마음속에 상처가 너무 커가지고요.”
 
“헤브론병원 군기반장으로 소문이 났던데요?”
 
“허허, 이곳에 올 때 김 원장님이 레지던트 교육을 부탁하셨어요. 환자 진료, 수술, 레지던트 교육 이 세 가지를 부탁하셨는데 정형외과 레지던트뿐만 아니라 다른 스텝들한테도 훈련을 시키고 있어요. 현지 스텝들이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야지요. 교육을 철저하게 시키고 있어요.”
 
박 선교사는 “이곳 의료 현실들, 시스템이나 장비, 인적 자원들이 없다보니까 손을 쓸 수 없는 환자들이 너무 많다”며 “그런 환자들을 그냥 돌려보낼 때는 많이 의기소침이 되고 내내 마음이 무겁다”고 심정을 토로했다. 그렇지만 보람도 많다. 
 
“병원장비 가지고 수술할 수 있는 한계가 있어요. 장비를 사려면 엄청 비싸거든요. 나중에 경제사정이 좋아지고 의료보험 시스템이 되면 그땐 나아지지 않을까. 지금은 하고 싶어도 못해요. 100% 수술해야 되는데 안 하면 생명이 위험한데도 못해요. 그래도 우리 병원에 오면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까 소문 때문에 몰려와요. 하루에 진료환자가 60-80명 될 겁니다.”
 
박 선교사는 지금 이 시간이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 핸드폰으로 사진 찍기를 즐기는 박종후 선교사.     ©크리스찬리뷰


“선교사님들과 교제가 너무너무 좋아요. 그분들 때문에 힐링이 돼요. 돈 벌려고 신경 쓸 일이 없고 환자들 치료 잘하고 최근 선교사님들 탁구클럽도 만들었어요.”
 
“한국에 계시는 아내 분이 가끔 선교사님들 필요한 음식 등을 장만하여 오신다면서요?”
 
“3- 4주 간격으로 옵니다. 고맙죠.”
 
“줄지어 기다리고 있는 환자분들 보고 떠날 생각이 드세요?”
 
“저도 마음이 아파요. 그나저나 이 병원에 마취통증의학과 선생님이 꼭 필요한데... ”
 
그는 헤브론병원을 무척이나 걱정하고 있었다.
  “
교회는 언제 나갈 겁니까?”
 
“허허, 이곳에서 일요일은 예배에 꼭 참석합니다. 마음이 편안하고 마음의 치유가 돼요.”
 
박 선교사는 11월 말 한국으로 돌아간다.
 
기자는 기독교에 대한 불신이 마음속에 진하게 새겨져 있는 것 같아서 가슴이 쓰리고 아팠다. 하나님이 인도해 주실 것을 믿으며 무거운 마음으로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 박 선교사의 인생에 개입해 주세요.” (계속)


글/김명동|크리스찬리뷰 편집인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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