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년의 시간 속을 걷다

금포교회, 창신고등학교 등 차례대로 방문

글|김명동,사진|권순형 | 입력 : 2019/12/23 [11:31]
▲ 변조은 목사가 한국 농촌을 돕기 위해 화물선에 염소를 싣는 장면이 멜본의 일간지 디 에이지(The Age)에 보도되었다.(1996년)     © 크리스찬리뷰



호주 선교사와 후손 일행은 거제도의 금포교회, 고현교회를 방문했다. 금포교회는 1909년 호주 선교사 아담슨(Rev. Andrew Adamson. 한국명 손안로)이 설립한 교회이다.
 
방문단 일행을 맞은 금포교회 김종훈 목사는 “호주 선교사님들이 헌신해 주신 덕분에 우리들이 예수를 믿을 수 있었고, 오늘의 이 교회가 있다”면서 “특별히 이 자리에 계신 변조은 목사님은 호주에서 염소와 흰 돼지를 가져와 이 지역 농민들 가정에 무상으로 분양했다”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변조은 선교사(86. Rev. John Brown)는 1960년 한국으로 파송된 후 경남 일대를 순회 목회하면서 궁핍한 한국 사람들을 보며 어떻게 도울까 고민에 잠겼다.  

 

▲ 호주에서 갖고 온 염소를 변조은 목사로부터 기증받은 거제도 주민이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가축이었다. 농부 출신의 부모 밑에서 자란 그는 호주의 가축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렸고 우유가 많이 나오고 고기가 많은 품종의 가축에 관심을 가졌다.
 
결국 그는 1966년도 휴가로 호주에 갔던 차에 흰 돼지와 염소를 한국으로 들여가게 된다. 당시 지역신문인 ‘Gippsland Times'는 33세의 변조은 목사를 소개하며 한국의 가축개량을 위하여 9마리의 우량 염소와 5마리의 돼지를 배에 싣고 본인이 직접 6주 동안 배에서 가축들에게 꼴을 먹이고 배설물을 치우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이 신문은 “변조은 목사가 한국 농촌의 가난함과 원시적인 농경법을 보고 이 일을 시작하였다”며 “한 마리 염소가 한 가정에 많은 영양을 보충해 줄 것이다”라는 변조은 목사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 거제도에 있는 금포교회 본당에서 방문단의 기념촬영     © 크리스찬리뷰

 

▲ 방문단을 환영하는 고현교회 박정곤 목사(오른쪽 2번째)와 성도들.     © 크리스찬리뷰


‘우성‘이라는 화물선에 가축들을 실은 비용은 700불이었다는 내용까지 포함하고 있다. 멜본의 일간지 ‘The Age’ 신문도 변조은 목사가 염소를 배에 싣는 사진을 보도하여 지금까지 흥미있는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한국의 농촌 구조는 호주 돼지와 염소 몇 마리로 쉽게 개선될 수 없었다. 분양받은 돼지를 채무로 인하여 빼앗기는 가정도 있었고, 관리를 잘못하여 죽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도 자신의 부모가 당시 돼지를 받아왔거나 그 염소의 젖을 먹고 자랐다고 회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업은 비록 크게 성공적이지는 못하였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아직도 감동적 이야기로 남아있다.
 
후손들은 머나먼 한국 땅의 작은 농촌교회가 자신들의 조상을 기리기 위해 이루어 놓은 성과물에 감동하는 한편, 조상들에 대한 긍지를 되새겼다.
 
금포교회를 설립한 아담슨 선교사는 1894년 한국으로 파송됐다. 아담슨 선교사는 그의 전임자인 맥케이(Rev. James H. Mackay 부산 1891- 1893)선교사가 부산 초량에 땅을 구입하여 임시로 집을 짓고 살았던 방 네 칸의 작은 목조 건물에 거처하면서 초량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 한국에 파송된 초기 호주 선교사와 자녀들. 뒷줄 왼쪽부터 데이비드 라이얼, 엘리자베스 베시 무어, 제임스 노블 맥켄지, 엘리스 니븐, 휴 커를, 클라라 엥겔, 겔슨 엥겔, 앤드류 아담슨, 카밀라 아담슨, 에델 커를 선교사와 자녀들(1910. 3월.부산)     © 크리스찬리뷰


1894년 7월 15일 부산 최초의 세례식이 있었는데 이 세례식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인 베어드(William M. Baird, 배위량) 선교사가 집례를 담당했다. 이 역사적인 현장에서 아담슨 선교사는 성경봉독(히 12:1-2)과 설교를 담당했다.
 
아담슨 선교사는 1889년 안식년을 맞아 호주로 건너가 건축기금을 모금하여 1900년 6월 초량에 목조 예배당을 신축하였는데 이것이 지금의 부산 초량교회이다. 1896년 6월 10일에는 부산 최초의 기독교식 결혼식(심취명, 김봉숙) 주례를 담당했다.

 

▲ 거제도에 있는 고현교회에서 방문단의 기념촬영.     © 크리스찬리뷰


그는 20년간(1894-1914) 부산, 진주, 마산, 통영, 거제, 함안, 의령 등지에 매년 1개 이상의 교회를 설립하므로 부산 경남지역에서 그가 설립한 교회는 20여 개에 달한다. 특히 수많은 섬들이 있는 통영과 거제지역에 대한 선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개인이 마련한 발동선(통통배)을 타고 순회선교사역을 했다.
 
고현교회 박정곤 목사는 “우리나라가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있을 때 선교사님들이 오셔서 교회를 세워 복음을 전했고, 병원을 세워 아픈 자를 무료로 치료해주며, 학교를 세워 문명 퇴치에 힘썼다”며 “선교사님들이 오늘의 한국을 만들었다”고 인사했다.
 
고현교회는 고신교단 소속으로 호주 선교사가 세운 교회는 아니지만 박정곤 목사가 경남기독교총연합회 수석부회장으로 특별히 호주 선교사 후손들을 교회로 초청했다.
 

거제 ‘바람의 언덕’

 

▲ 바람의 언덕에서 바라 본 도장포 마을과 해금강교회. 종탑 오른쪽 지붕에는 노란색 바탕에 빨간색으로 칠해진 ‘그냥 감사해요!’라는 문구가 관광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 크리스찬리뷰


선교사 후손들을 태운 버스가 ‘바람의 언덕’에 다다르자 미리 나와 있던 해금강교회 이종진 목사가 손을 흔들며 반갑게 일행을 맞이했다. 누가 이곳을 바람의 언덕으로 불렀을까?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항시 바람이 센 탓에 나무는 잘 자랄 수 없고 풀마저도 낮게 자란다. 산책길을 따라 바닷가 쪽으로 내려가니 제법 수령이 오래된 동백나무의 울창한 숲이 나타났다. 동백꽃이 절정으로 피어나는 시기에 이곳을 찾아온다면 얼마나 멋질까 생각해본다.
 
외도와 해금강을 돌아 도장포마을로 씩씩거리며 들어오는 유람선들이 부산하다. 일행들은 바람의 언덕에서 유람선 뱃머리에 두 갈래로 갈라지는 하얀 포말을 바라보며 일제히 카메라를 꺼내 사진촬영을 하며 추억을 쌓았다.
 
원래 염소를 방목하던 황무지였는데 한 거제시청 공무원의 혜안으로 ‘바람의 언덕’이 탄생했단다. 그는 남부면사무소에 근무할 때 염소들이 한가히 풀을 뜯고 있는 것을 보고 이 이름을 착안했다고 한다.
 
기자는 염소라는 말에 혹시 선교사가 데려온 그 염소의 후손들인가? 하며 혼자 웃었다. 어쨌거나 이 ‘바람의 언덕’이란 멋진 이름을 얻으면서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단다.

 

▲ 거제도의 ‘바람의 언덕’ 정상에는 커다란 풍차가 세워져 있다.     © 크리스찬리뷰


좁은 언덕배기 비탈진 곳에 세워진 커다란 풍차는 바람의 언덕이란 이름에 걸맞았다. 바람의 언덕 끄트머리에는 무덤이 하나 있단다. 어느 집안 누구의 무덤인지 알 필요는 없었다.
 
기자는 숨이 차 풍차 옆에 있는 벤치에 앉았는데 일행 중 93세 최고령인 서두화 선교사는 바람의 언덕 끄트머리를 향하여 바람처럼 걸어갔다. 이 풍차 앞에 서면 도장포마을이 한 눈에 들어온다. 초록색, 주황색, 빨강색의 크고 작은 지붕들, 그 사이로 우뚝 솟은 종탑이 보이는데 바로 해금강교회이다. 종탑 오른쪽으로 노란색 바탕에 빨간색으로 칠해진 문구가 시선을 잡았다.
 
“그냥 감사해요”
 
교회 지붕이 대형 메시지 판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종진 목사는 “바람의 언덕을 찾는 여행객 대부분이 커다란 풍차 옆 벤치에 앉아 기념사진을 찍는데 사진배경에 교회지붕이 어김없이 등장한다”며 이곳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저 아름다운 풍경만 눈에 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삶에 감사하는 마음을 새기고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산책로 입구에 가로 3m 세로 2m 높이 2m의 작은 배 한척이 놓여있다. 배의 이름은 ‘후에버(WHOEVER)'호.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공간이란 의미를 담은 1평짜리 예배당이다. 노란색 작은 창문들이 달린 선체엔 배이름과 함께 ’누군가 널 위해‘란 문구가 새겨져 있다.

 

▲ ‘바람의 언덕’을 찾는 여행자들을 위로해 줄 수 있는 작은 공간 ‘후에버’는 사람을 낚고 영혼을 살리는 베드로와 같은 배가 되어주길 소망하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이종진 목사는 “바람의 언덕을 찾는 수백만 명 중엔 마음에 상처를 입은 여행자도 있을 것”이라며 “그들을 위로해 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자살을 결심하고 이곳을 찾는 사람도 더러 있는데 그들에게 희망을 주는 결정적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24시간 내내 찬양이 흘러나오는 후에버의 내부는 실제 조타실의 모습과 동일하게 꾸며졌다. 안으로 들어서면 한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의자와 한 권의 성경책이 눈에 뛴다. 천장 벽면에 부착된 LED패널에선 ‘당신은 소중한 사람입니다’ 등 삶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성경구절이 흐른다.
 
“사람들이 놀이기구나 전시물인 줄 알고 들어왔다가 잠시 묵상을 하곤 하는데 ‘마음의 평화를 얻고 간다’는 말을 들을 때면 큰 보람을 느낍니다. 후에버가 사람을 낚고 영혼을 살리는 베드로와 같은 배가 돼주길 소망합니다.”

 

 

▲ 항일독립운동가 주기철 목사.     © 크리스찬리뷰



주기철 목사 기념관

 
다음날 선교사들과 후손들은 주기철 목사 기념관을 찾았다. 기념관은 1층 전시실과 영상실, 2층 전시실과 소양홀을 갖추고 있었다. 일행들은 주기철 목사의 일대기를 그린 다큐멘터리 일부(5분 분량)와 주 목사 막내 아들 고 주광조 장로의 간증 집회 영상(3분 분량)을 보고 전시관을 둘러봤다.
 
1층 전시실(면류관)에는 주기철 목사의 ‘일사각오’ 설교내용과 독립운동당시의 현장 모형, 건국훈장과 친필편지, 서명 등이 전시돼 있었다. 1981년 웅천 기독교회 교인들의 헌금내역을 기록한 주기철 집사(재정담당)의 친필 연보록도 보였다.
 
2층으로 올라가자 당시 모습을 재현한 주기철 목사의 방이 일행을 맞았다. 현관 벽에는 지역으로 구분한 대한민국 순교자들의 사진과 이름도 전시돼 있었다. 감사함과 아픈 역사를 보는 듯해 마음이 무거웠다.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로에 위치한 주기철 목사 기념관을 찾아 전시장을 관심있게 둘러보는 방문단 일행.     © 크리스찬리뷰


 
주기철 목사의 항일독립운동으로 인한 투옥과 순교와 관련한 자료, 주 목사의 기도처였던 무학산 십자바위도 모형으로 전시돼 있었고 주 목사가 사용하던 강대상, 교회당회록 등도 눈에 들어왔다.
 
주기철 기념관 관계자가 “주기철 목사가 호주 선교사가 세운 문창교회 8대 담임목사였다”고 말하자 모두들 탄성을 터뜨렸다.
 
기념관 관계자는 “주기철 목사의 편지, 평양신학교 졸업사진, 가족. 교회 신도들과 찍은 사진 등 가족들이 보관하던 유품 100점 가량을 전시하고 있다”며 “1897년 11월 25일 경남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에서 태어난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 반대운동과 신앙수호운동을 펼쳐오다 1944년 4월21일 숱한 고문 끝에 평양형무소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소개했다.
 

호주 선교사들은 1936년 일제가 전 국민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 다른 지역 선교사들은 침묵했으나 호주 선교사들은 강력하게 반대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일제는 호주 선교사들을 감금 투옥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1942년 전원 추방했다.
 
그러나 호주 선교사들의 신앙을 교육받은 경남의 교회들은 일제에 단호하게 대항하며 산사참배를 거부하다가 1938년 6월 제41회 경남노회는 당시 전국 23개 노회 중 유일하게 해운대교회에서 신사참배 반대결의를 했다. 그리하여 주기철 목사를 비롯하여 수많은 분들이 혹독한 탄압 속에 순교했다.
 
기념관 측은 방문단에게 십자바위 모형을 선물했다.
 
기자는 2000년 3월 ‘호주 선교사들이 뿌린 복음의 열매를 찾아서’ 취재를 하면서 권순형 발행인과 함께 무학산 정상에 있는 십자바위까지 올라가 본 적이 있다.  
 
그날 날짜 수첩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 주기철 목사가 항상 기도하러 올라갔던 마산 무학산 정상에 있는 십자바위.     © 크리스찬리뷰


<무학산은 진해만 푸른 물에 산자락을 적시면서 마산시 뒤편을 병풍처럼 막고 서 있다. 마치 학이 춤추듯 날개를 펴고 마악 날아오르는 자세 같다고 해 무학산이란 이름을 얻었다.
 
진달래 나무가 유난히 많은 데다가 키가 큰 나무가 적어 봄이 되면 빨간 물감을 뒤짚어쓴 것처럼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학의 머리에 해당하는 학봉을 바라보며 산길을 지그재그로 거슬러 올라간다.
 
학봉 정상까지는 1.8km. 같이 자고 같이 먹고 같이 굶었지만 권순형 발행인의 걸음은 가볍다. 양어깨에 멘 두 대의 카메라와 망원렌즈의 무게가 보통이 아닐 텐데 솜이나 되는 듯 사뿐사뿐 잘도 간다. 사실 권 발행인은 발 수술을 앞두고 있다. (후에 이 십자바위를 다녀온 뒤 다리가  거짓말처럼 깨끗이 나았다고 실토했다) 안내를 맡은 창신대학교 유병식 씨의 걸음도 만만치 않다.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기자는 산정상의 싱그러운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여 마시고 유병식 씨가 가리키고 있는 십자바위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기도를 드렸다.
 
그때 이곳을 찾아온 또 다른 일행을 만났다. 마산에 살고 있는 장로라고 소개한 그는 가끔 십자바위를 찾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산 아래 보이는 문창교회와 제일문창교회를 번갈아 손으로 가리키면서 뼈있는 말을 했다.
 
“문창교회가 두 곳입니다. 문창교회는 통합 측이고 제일문창교회는 고신 측인데 설립일이 1901년 3월 19일 똑같아요. 원래 한 교회였는데 분리되면서 서로 자기교회가 원조라고, 진짜라고 싸움들하고 있죠. 글쎄 주기철 목사님 유품만 해도 그래요. 자기들 교회가 더 많다고 서로 다투는 거에요. 허허.”
 
기자는 십자바위를 다시 바라보았다.
 
“주님, 주기철 목사님의 신앙을 기억하며 본받는 기념관이 필요합니다.”>
 
 
창신중·고등학교

 

▲ 창신고 강병도 이사장이 방문단에게 학교 현황을 소개하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창신고등학교 교내로 들어서는 호주선교사 후손들의 표정엔 호기심과 긴장감이 교차했다.
 
“어서들 오세요. 반갑고 환영합니다.”
 
창신고등학교 이사장 강병도 장로(83)와 교사들이 가지런히 두 손을 모으며 인사를 한다. 선교사 후손들도 허리를 굽혀 한국식으로 인사를 했다. 창신중·고교는 호주 선교사 아담슨(한국명 손안로)과 마산지역 기독교인들이 세웠다. 영남지역 최초사립학교다.
 
교내 홀로 안내된 일행은 ‘창신학교 역사’ 홍보영상을 관람한 후 벽에 걸린 선조들의 사진을 일일이 둘러보며 감동에 젖은 얼굴들이었다.
 
강병도 장로는 “경남지역에 호주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가 부산에 둘, 마산에 둘, 진주에 둘, 거창에 하나, 통영에 하나 총 8개의 학교를 세웠는데 지금 유일하게 남아있는 학교가 우리 창신학교뿐이다”라고 소개하자 일제히 탄성을 터뜨렸다.
 
이어 창신고등학교 합창단이 호주 국가 '전진하라 아름다운 오스트렐리아(Advance Australia Fair)'를 부르자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하고 모두들 휘파람을 불며 환호성을 질렀다.
 
강병도 장로는 “선교사는 떠나도 흔적과 정신은 남는 것”이라며 “한국의 발전은 선교사님들의 희생과 헌신 덕분이며 오늘 여러분과의 만남은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인연으로 여기고 늘 추억으로 간직하겠다”고 감사인사를 했다.
 
마이크를 건네받은 바바라 마틴(86. 한국명 민보은) 선교사는 “다시 만나 반가웠다. 64년도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시골이고 조그만 마을이었는데 이렇게 발전된 모습에 감격했다”며 “여러분의 친절에 다시 오고 싶다”고 하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 창신고등학교 합창단이 호주 국가를 부르며 방문단을 위해 작은 음악회를 열었다.     © 크리스찬리뷰


이어 마틴 선교사는 앤드루 레이(Andrew Ray 75)씨를 제임스 맥케이(Rev. James H. Mackay 맥 목사. 부산 1891- 1893) 선교사 손자라고 소개했고, 앤드루 레이 씨는 방문단 일행을 대표해 기념품을 전달했다.
 
이어 식당으로 자리를 옮긴 일행은 점심식사를 하면서 교제하는 시간을 가졌다.
 
창신중·고교는 구한말 1908년 9월 15일 순종 황제의 인가로 호주 아담슨 선교사와 마산지역 기독교인들이 마산포교회(상남동)에 세운 초등과정이 모태다. 초등과정으로 문을 연 창신학교는 1911년 3월, 21명의 첫 졸업생을 내고, 이듬해 4월 고등 보통학교과정(3년제)를 개교한다.
 
개교 당시 교사들은 한글과 한국사 위주의 민족교육을 펼쳤고 당시로는 희귀했던 축구, 야구 같은 구기 운동을 집중적으로 가르쳤다. 1915년 고등 보통과정 1회 졸업생을 배출, 기반을 다지기 시작하다 3.1운동 때 교사와 학생들이 항일 투쟁에 나서면서 일제의 탄압을 받게 된다. 
 

3.1운동 이틀 뒤인 3월 3일 마산지역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은 창신학교가 주도했다. 교사들이 일제히 사표를 제출하고 만세운동에 참가할 정도였다. 그 후에도 신사참배 강요나 성경교육 금지 등에 저항하다 5회 졸업생을 내고 1930년 문을 닫았다. 초등과정도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다 신입생 모집 중지를 받고 어려움을 겪다 1939년 7월 문을 닫게 된다.
 
광복과 함께 창신학교 재건 움직임이 일기 시작해 경남노회 기독교교육학원 이사회가 1948년 9월 초급 및 중학과정을 설립하고 1951년 창신농업학교를 개교한다. 1960년 인문계 창신고로 바뀌었다가 5.16 후 공업화 물결에 따라 68년 공고로 전환한다.
 
1983년 9월 다시 인문계로 바뀌었고 90년 회원동을 떠나 봉암동 새 교사로 옮기면서 명문고를 향한 재단의 지원이 본격화된다.
 
‘성실’과 ‘봉사’라는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교육으로 사립학교로는 최초로 교육과학기술부의 시책사업인 ‘개방형 자율학교’로 선정돼 전인적인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이은상 시인(창신 5회) 연변과기대 김진경 총장(창신중 1회)등 지금까지 배출된 동문은 5만여 명.
 
방문단 일행은 곧바로 창원시청으로 향했다. 시청 홀로 안내된 일행은 ‘창원시’ 홍보영상을 관람한 후 준비된 다과를 들면서 담소를 나누었다.

 

▲ 창원시청을 방문, 허성무 시장(앞줄 가운데)과 기념촬영을 가진 방문단 일행.     © 크리스찬리뷰


허성무(56) 시장은 “당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이 땅에 사랑과 복음을 전하러 오신 호주 선교사님들의 숭고한 정신을 오늘 여러분들을 만나 다시금 되새겨 보는 뜻 깊은 자리가 되는 것 같다”며 “우리 창원시도 이러한 사랑과 헌신적인 자세로 시민중심 행정을 성심껏 수행할 것”이라고 인사했다. 이어 허 시장은 방문단 일행에게 기념품을 전달했다.

이로써 선교사 후손들은 경남지역 방문 일정을 마무리하고 부산으로 향했다.〠 (계속)
  
                                 
글/김명동|크리스찬리뷰 편집인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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