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윈 그린 여사(Olwyn Green, OAM) 남편 품으로

글|김환기,사진|권순형 | 입력 : 2020/01/28 [10:10]
▲    2/2020 커버 페이지 © 크리스찬리뷰

 

▲ 올윈 그린 여사는 멜번으로 이주하기 전 본지와 인터뷰를 가졌다. 당시 그린 여사는 94세로 건강미가 넘쳤다.(2017. 11.)     © 크리스찬리뷰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2000년 10월 30일. 남편인 ‘그린 중령의 50주기 추도식’ 때이다. 시드니한인회 회장을 역임한 최영길 씨의 주선으로 필자가 시무하던 구세군한인교회에서 있었다. 호주 측 귀빈 70여 명을 포함 한국 측 100여 명이 동석했다. 그린 여사(Olwyn Green)와 딸 ‘앤시아’(Anthea) 그리고 시드니 총영사가 앞자리에 앉았다. 

 

2010년 4월 24일, 호주 육군 제3대대 ‘가평의 날’ 그녀를 다시 만났다. 부대 중심부에 가평에서 가져온 '38선(38 Parallel) 기념비'가 있고 주위에는 호주기, 성조기, 캐나다기와 함께 태극기가 바람에 휘날렸다. 그녀와 함께 귀빈석에 앉아 사열을 받았다.

 

▲ 호주 육군 제3대대는 가평대대라고 불린다. 부대 중심부에는 가평에서 가져온 38선 가념비(아래 사진)가 세워져있다. ©크리스찬리뷰 DB    

 

▲  38선 기년비 주위에는 호주기, 성조기, 캐나다기와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다. 시드니 근교 홀스워디에 있던 가평대대는 2011년 4월 24일 가평전투 60주년 기념 퍼레이드를 펼쳤는데, 시드니에서 열린 마지막 가평의 날 행사였다. 가평대대는 타운즈빌로 이전했다.     © 크리스찬리뷰

 

제3대대는 부대명칭이 ‘가평대대’이고, 입구의 도로도 ‘가평로’(Kapyong Road)이다.  퍼레이드 사열 담당 장교는 6.25 참전국을 21개국으로 설명했다. 사열 후 “한국에서 16개국이라고 배웠다"는 필자의 질문에, 그는 "16개국은 ‘전투병력’을 파병했고 5개국은 ‘의료부대’를 보냈다"고 보충 설명을 했다. 

 

‘장교식당’ 입구에 ‘그린 중령’의 흉상이 있었다. 그는 제3대대의 전설적인 인물이다. 25세의 젊은 나이에 제2차 대전 때 지휘관으로 혁혁한 공로를 세웠고, 한국전쟁 중 1950년 11월 1일 안주에서 전사하였다. 당시 그린 중령은 30살, 그녀는 26살, 딸은 3살이었다.

 

▲ 한국 전쟁의 영웅으로 불리는 찰스 그린 중령 ©크리스찬리뷰 DB  

 

그린 중령 (Lt-Colonel Charlie Green)

 

찰스 그린은 1919년 12월 26일, 호주 NSW 그래프턴에서 태어나, 스완 크릭에서 자랐다. 그는 스완 크릭 공립학교와 그렉튼 고등학교에 다녔다. 1936년 10월 28일, 16세의 나이로 ‘민병대’ 부대인 41대대에 입대했다. 1938년까지 그는 병장으로 진급했고, 1939년 3월에 소위로 임관하였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그린은 해외복무를 자원했고, 1939년 10월 13일 2차 AIF(Australian Imperial Forces)의 장병이 되었다. 그는 해외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1942년 8월 호주로 돌아와 그해 9월에 소령으로 승진되어, 12월에 퀸즐랜드 사우스포트에 있는 제1군 주니어 전술학교의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943년 1월 30일 뉴사우스웨일스 울마르라 성 바울 성공회 교회에서 ‘올윈 워너’(Olwyn Warner)와 결혼했다.

 

그는 탁월한 지도력을 인정받아 중령으로 승진 후, 1945년 3월, 25세 나이로 호주군 최연소 제11연대 제2보병대대의 대대장이 되었다.

 

1945년 11월 23일 제대 후 그래프턴으로 돌아와 생산자 조합 유통 협회에서 일했다. 이 기간 동안 아내는 딸 ‘앤시아’(Anthea)를 낳았다. 1948년 4월 민병대가 ‘정규군’(Regular Army)으로 재조정되면서, 그린 중령은 1949년 1월 6일 현역으로 복귀했다.

 

▲ 17세에 찰스를 만나 19세 되던 1943년 1월 30일에 결혼한 올윈은 7년간의 결혼생활이었지만 실제로 함께한 날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크리스찬리뷰 DB    

 

‘한국전쟁은’ 호주가 ‘정규군’으로 참전한 첫 번째 전쟁이다. 호주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4일 후인 1950년 6월 29일, 두 번째로 한국전 참전을 결정했다. 9월 28일,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호주 육군 제3대대가 그린 중령의 지휘 하에 부산항에 입항하여, 영연방 제27연대에 소속되어 ‘연천전투’, ‘박천전투’에서 승리를 거듭하며 북진을 계속했다.

  

1950년 10월 29일 ‘정주’에서 치열한 전투 끝에 또 한 번의 승전보를 울렸다. 다음 날 ‘달천강’ 근처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을 때 북한군의 쏜 포탄이 그린 중령의 텐트 근처에서 터지며 날카로운 파편이 그린 중령의 복부를 관통했다.

 

▲ 시드니 모닝 헤럴드가 보도한 한국전에서 사망한 그린 중령의 장례식(1950년 11월 11일자) ©크리스찬리뷰 DB    
▲ 시드니 모닝 헤럴드에 보도된 사진을 수채화로 표현한 그린 중령의 장례식. ©크리스찬리뷰 DB    



즉각 20마일 떨어진 ‘안주’의 ‘미군 이동병원(Mobile Hospital)’으로 후송하여 수술을 받았으나, 11월 1일 오후 8시 그린 중령은 사망했다.

 

그린 여사 (Olwyn Green, OAM) 

 

당시의 상황을 그린 여사는 ‘그대 이름은 아직도 찰리’(The name’s still Charlie)에 이렇게 기록했다.

  

“10월 30일, 멀리서 전보를 전하는 소년이 자전거를 타고 온다. 소년은 우리 집 앞에서 나에게 핑크 빛 봉투를 전해준다.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열어 보았다. ‘이런 소식을 전하게 되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2/37504 그린 중령은 한국전쟁에서 심하게 부상당했습니다. 추후 소식 받는 대로 연락해 드리겠습니다.’

 

11월 1일, 나는 일찍 잠을 청했다. 지치기도 했지만 혼자 있고 싶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창문 넘어 보니 손전등을 들고 두 사람이 집으로 오고 있었다. 해리 반크로프트(Harry Bancroft)와 가정 주치의(Family Doctor)였다. 표정을 보고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전사하셨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그 중 한 사람이 이야기했다. 그리고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2010년 5월 13일, 그녀의 집에서 인터뷰를 했다. 60년 전의 일을 마치 어제 있었던 일같이 생생하게 기억하며, 차분하게 이야기해 주는 그녀를 보며 한없이 죄송하고 미안했다.

 

그린 여사는 1923년 9월 21일 시드니에서 태어났다. 시드니 북쪽 해변의 울마라(Ulmarra)에서 자랐다. 1943년 1월 ‘찰리 그린’과 결혼했다. 

 

“17살 때 처음 찰리를 만났습니다. 저는 울마라에서 아버지가 운영하는 ‘News Agency’에서 일을 했습니다. 키가 훤칠하고 잘생긴 장교가 들어와 만년필을 샀습니다. 저는 그렇게 키 크고 멋지게 생긴 남자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가슴이 많이 뛰었습니다.

  

1939년 이차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참전했습니다. 2년 후 그에게 편지를 받았습니다. 저를 기억하고 있다며 그때 산 만년필로 편지를 쓴다고 했습니다.”

 

“제가 19살 생일이 되는 9월이었습니다. 그가 우리 집에 와서 식사를 하고, 외식도 함께했습니다. 일주일 후에 약혼을 했습니다. 정말 모든 것이 빨리 진행되었습니다. 다시 그는 전쟁터로 갔고, 수많은 편지가 오갔습니다. 뉴기니아의 ‘코코다 여정’(Kokoda Track)에서 발가락이 부러져 군화를 신을 수 없게 되어 호주로 돌아와 정보 장교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사랑의 결실을 맺을 좋은 기회를 얻게 된 것이죠. 돌아온 지 3개월 만인 1943년 1월에 결혼하였습니다. 그는 다시 뉴기니아로 명령을 받고 저는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25살에 2/11 대대를 지휘하게 되어, 최연소 대대장이 되었습니다.

 

저는 시골 처녀로서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몰랐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그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의 꿈은 농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 행복해하지 않았습니다.

 

이 무렵 ‘정규군’(Regular Army)으로 복귀해 달라는 요청이 왔습니다. 그는 저에게 재 입대하겠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정말 충격적이었죠. 딸 앤시아(Anthea)가 3살 때입니다. 모든 것이 혼돈이었습니다. 저에게 실망을 했든지, 아니면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고 했던 것 같았습니다.

 

입대 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제3대대 대대장으로 임명을 받고 한국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축하를 한다고 하는데, 정말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전쟁 나가는 것을 축하하다니, 말도 되지 않았죠. 저는 어머니가 계신 ‘그래프톤’으로 돌아갔고, 그는 한국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6주도 지나지 않아 전사 통보를 받게 되었습니다.”    

 

▲ 올윈 그린 여사가 ‘그대 이름은 아직도 찰리’(The Name's Still Charlie)라는 제목으로 그린 중령의 남은 이야기를 자서전 형식으로 발간했다. 올윈 그린 여사가 집필한 ‘그대 이름은 아직도 찰리’ 책자 표지. ©크리스찬리뷰 DB    

 

 

그 후 그녀는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시드니로 이사했다. 그녀는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심리학을 전공했으나 전공과 관련된 직업을 찾을 수 없었다. 1년간 ‘어린이복지부’에서 근무하며 아이들을 돌보고, 입양하기 원하는 여성들을 상담하고, 입양한 부모의 집 조사하는 일들로 힘든 날들을 보냈다. 

 

때마침 매도뱅크 테입(TAFE)의 영어교사에 응시하여 합격, 은퇴할 때까지 그곳에서 교사로 일했다. 은퇴 후 유럽에서 불어도 공부하고 요리도 공부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55세였다. 1980년 호주로 돌아와 웨스트 시드니 대학에서 공부하던 중, 학교의 추천을 받아 1993년에 책을 발간하게 되었다.

 

▲ 그린 중령(왼쪽)의 생애 마지막 사진. 전사하기 이틀 전에 촬영됐으며, ‘그대 이름은 찰리’ 책자 증보판 뒷표지에 실려 있다. ©크리스찬리뷰 DB    

 

‘그대 이름은 아직도 찰리’(The Name's Still Charlie) 그린 중령의 남은 이야기를 자서전 형식으로 기록하였다. 책을 쓰면서 한국전쟁에 대하여 너무 무지함을 깨닫고 한국전쟁에 대해서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2010년 그녀는 증보판을 발간했다. 호주정부는 그녀의 공로를 인정하여 'OAM’(Medal of Order of Australia) 훈장을 수여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그녀는 책에 사인을 하고 선물로 주었다. 아쉽게도 그녀는 암으로 박사학위 공부를 이어가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녀의 손에는 언제나 책이 떠나지 않았다. 2019년 11월 27일, 멜번 병원에서 평화롭게 하늘나라로 떠났다.(1923. 9.21-2019 11.27)

 

최영길 회장

  

그린 중령과 그린 여사를 한인동포사회에 알린 사람이 있다. 전 한인회장을 역임한 최영길 씨이다. 

 

“그는 1935년, 평안도 박천에서 태어난 고인은 아버지가 서울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린 나이에 서울로 와서 공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고향으로 피난을 갔으나 할아버지가 중공군이나 북한군에 의해 징집 당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곧바로 남쪽으로 내려가라고 했다. 그 당시는 UN군이 북진을 하는 상황이라 패주하는 북한군을 피해서 산 속으로 이동하느라 굶주린 상태로 먹을 것을 찾아다니다가 호주군 첨병에게 발견됐다.

 

▲ 16세 소년 최영길(가운데)은 6. 25전쟁 중 그린 중령을 만나 소년병으로 호주군 제3대대에 입대하여 종군했다. ©크리스찬리뷰 DB    

 

그게 인연이 되어 최영길 씨는 한국전쟁이 휴전될 때까지 16살의 어린 나이였음에도 호주 군인이 되어 전쟁을 치렀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청운중학교와 경기상업고등학교를 거쳐 1957년 연세대 고등상과에 입학, 1963년 졸업하고 한국철강협회 사무총장으로 일하던 중 호주대사관을 찾아가 호주군 제3대대 전우들을 찾은 것이 계기가 되어, 1968년 제3대대 도움을 받아 호주로 이민 왔다.

 

당시 호주는 ‘백호주의’(White Australia Policy) 나라였기에 이민이 쉽지 않았다. 그는 1968년 초대 한인회 총무를 거쳐 1970년부터 1974년까지 제2, 3, 4대 및 6대 회장을 역임하면서 한인회의 기반을 다졌다. 그는 2007년 암 진단을 받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까지 40년간 한인사회 발전을 위해 헌신했을 뿐 아니라, 호주와 한인사회의 가교역할을 했다.

 

호주 정부는 전쟁 중 최영길 씨의 공적을 인정하여 ‘OAM(Medal of Order of Australia)’ 훈장을 수여했다. 훈장을 받는 과정에서 그린 여사는 지대한 공헌을 했다. “만약 남편이 살았다면 정확하게 모든 이야기를 해 줄 터인데 그럴 사람이 특별히 없어 내가 그 일을 대신했습니다. 그에 관한 모든 자료는 ‘캔버라 전쟁기념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2007년 4월 7일 최영길 회장의 ‘천국입성예배’에서 그린 여사는 눈물로 조사를 읽었다. “그는 정말 훌륭한(Wonderful) 사람이었고, 사려 깊은(Sensible)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최영길 씨는 언제나 의로운 편에 서서 일을 했습니다.  호주와 한국 사이에서,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 않고 훌륭한 가교 역할을 했던 사람입니다. 이제 그가 세상을 떠나서 아쉽지만 아직도 가족들과 긴밀한 연락을 하고 있습니다.”

 

최 회장은 구세군교회 교인이었다. 가끔 한국전쟁에 대한 간증을 할 때면 그렇게 이성적이던 그도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그는 지금 ‘룩우드 공동묘지’(Rookwood)의 ‘구세군 Memorial Wall’에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

 

▲ 생전의 최영길 회장. 최 회장은 2007년 4월 사망했다. ©크리스찬리뷰  

 

추모식을 앞둔 좌담회

 

2020년 1월 9일 시드니 주안교회에서 좌담회가 열렸다. 그린 여사를 어머니와 같이 모시던 김기덕 중령, 그린 중령을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2015년 11월 달력의 표지모델과 을지무공훈장을 받을 수 있도록 힘을 썼던 황명하 광복회 호주지회 회장, 2019년 8월에 그린 여사를 마지막으로 인터뷰한 정지수 목사 그리고 사진을 통하여 그린 여사를 세상에 알린 크리스찬리뷰 권순형 발행인이 함께 좌담회를 가졌다.

 

김기덕 중령

 

저는 1992년에 이민을 왔습니다. 어느 날 호주동아일보에서 전쟁 미망인 그린 여사가 한국전쟁을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라고 언급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당시 제가 ROTC 회장을 맡고 있었을 때입니다. 

 

저는 ROTC 선후배들과 함께 그린 여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때의 심정은 재혼도 하지 않고 딸과 함께 살아온 그녀를 조금이라도 위로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그린 여사의 첫 번째 만남입니다.

▲ 올윈 그린 여사(가운데)가 멜번으로 떠나기 전 양아들 김기덕 중령(왼쪽)과 본지 영문편집위원 김환기 사관과 자택에서 기념촬영을 가졌다.(2017.11.27)     ©크리스찬리뷰

 

그후에도 계속하여 찾아 뵙고 돌보아 드리자, 사람들은 저를 양아들이라고 부릅니다. 생신 때는 물론이고 특별한 행사 때 저는 그린 여사를 초청하였습니다. 저는 호주와 한국은 관계는 지탱하는 두 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1889년 호주 데이비스 선교사가 복음의 씨를 뿌린 후, 130여 명의 선교사들이 파송되어 많은 학교, 병원 그리고 교회를 세웠던 것입니다.

 

다른 축은 한국 전쟁에 미국에 이어서 호주가 두 번째로 참전한 국가입니다. 두 축을 바탕으로 지금까지 호주와 한국은 혈맹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황명하 회장

 

저는 1988년 이민을 온 후에 교민 신문을 통해서 그린 여사를 대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2009년 호주 광복회가 조직되면서 교민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지요. 광복회는 국가보훈처 산하에 있기에 자연스럽게 보훈처와 많은 접촉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국 전쟁 달력의 표지 모델로 외국참전용사들도 선정되었는데, 호주 참전용사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호주에 돌아와 군 관계 단체들과 의논한 후 그린 중령을 추천하였습니다. 보통 추천 후 심사기간이 오래 걸리는데, 감사하게도 그린 중령은 다음 해인 2015년 11월의 전쟁영웅으로 선정되었습니다.

 

그린 중령은 1951년 미국에서 ‘은성훈장’을 받은 분입니다. 이때부터 저는 한국에서도 그린 중령에게 훈장을 수여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무공훈장에는 5 종류가 있습니다. 1 태극, 2 을지, 3 충무, 4 화랑, 5 인헌입니다. 미국이 은성훈장을 수여했으니 그에 걸맞은 무공훈장을 수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 본지가 주관한 올윈 그린 여사를 추모하는 좌담회가 시드니주안교회 사무실에서 열렸다. 황명하 회장, 김기덕 중령, 김환기 사관, 정지수 목사, 권순형 발행인이 자리를 함께 했다.(오른쪽부터)     © 크리스찬리뷰

 

현실적으로 그런 훈장은 큰 공적을 세우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정부에서는 그린 중령의 공적을 충무나 화랑 정도의 공적으로 인정하고 있었는데, 마지막 순간에 ‘을지무공훈장’을 수여하기로 했습니다. 그 소식을 저는 한국에서 들었습니다.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 올윈 그린 여사 추모식에서 환담을 나누는 호주 광복회 황명하 지회장과 앤시아 여사.     © 크리스찬리뷰

 

정지수 목사

 

작년 8월에 멜본에서, 요양원에 계신 그린 여사를 인터뷰했습니다. 저는 그린 여사에 관해서 자세히 알지 못했습니다. 인터뷰를 하면서 그린 중령도 대단한 분이지만, 그린 여사도 대단한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한국전쟁에서 전사를 했지만, 한국과 한국전쟁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어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96세 나이에도 책을 읽고 계셨습니다. 인터뷰할 때도 건강하셨는데, 3개월 후에 돌아가셨다고 하니 깜짝 놀랐습니다.

 

▲ 멜번에 있는 올윈 그린 여사가 거주하고 있는 양로원에 바바라 마틴(한국명 민보은) 선교사와 본지 취재진이 방문했다.(2019. 8)     © 크리스찬리뷰

 

 

권순형 발행인

 

매년 한국전쟁에 관련된 여러 모임들이 있을 때마다 어느 할머니가 제일 앞좌석에 앉아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연세가 드셨음도 불구하고 곱게 늙었습니다. 후에 그린 중령의 미망인이라는 것을 알고, 김환기 사관님과 같이 2010년 5월에 그린여사의 집으로 취재를 갔습니다. 6월호 표지 글로 ‘그대 이름은 아직도 찰리’ 제목으로 그녀에 대한 글과 사진을 실었습니다. ‘그대 이름은 아직도 찰리’는 그녀가 1993년에 썼던 책의 증보판이었습니다.

 

- 그린 여사와 관련된 말씀 하나씩만 해 주시죠

 

김기덕 중령

 

언젠가 그린여사를 모시고 ‘칸토포유’(CANTO4U) 음악회에 참석했습니다. 음악회를 마치고 그린 여사는 한국 음악에 한없는 찬사를 보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을 왜 호주 사회에 소개하지 않느냐”며 안타까워했습니다.

 

교민사회에는 음악적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한인동포들이 음악을 통해서 호주사회에 기여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 멜번에서 만난 올윈 그린 여사는 96세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건강과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2019. 8)     © 크리스찬리뷰

 

 

황명하 회장

 

2019년 7월 27일 동대문 디자인플라자(DDP) 알림1관에서 '6·25전쟁 유엔군 참전의 날' 기념식이 있었습니다. 보훈처는 이날 국내외 6·25전쟁 참전용사, 참전국 주한 외교사절, 정부 주요인사, 각계대표, 시민, 군장병 등 2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을 거행했습니다.

 

당일 이낙연 국무총리는 그린 중령에게 ‘을지무공훈장’을 수여하였습니다. 그린 여사와 딸이 건강상 참석을 하지 못하고 큰 손자인 ‘알렉산더’가 대신 받았습니다. 저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아내가 저에게 그린 여사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기 나라도 아닌 타국에서 남편을 잃었으니 한국에 대하여 많이 원망할 수도 있는 상황인데, 오히려 열린 마음으로 한국과 한국전쟁에 대하여 배우고 사랑하는 것을 보고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정말 마음이 깊고 넓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 NSW주립 미술관(Art Gallery)에서 열린 올윈 그린 여사의 추모식에 참전용사를 비롯한 한호양국 지인들 1백50여 명이 참석했다.     © 크리스찬리뷰

 

정지수 목사

 

그녀는 인터뷰 중에 ‘을지’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습니다. 한국전쟁과 관련된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역사적인 인물까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에 대하여 잠시 설명을 했습니다. 그분의 이름을 기리기 위하여 그분의 이름을 사용하였고, 두 번째로 높은 무공훈장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권순형 발행인

 

저는 ‘유엔기념공원’을 방문할 때마다 그린 중령의 묘를 찾아가 참배합니다. 그린 중령 묘비 옆 길가에 ‘도은트 수로’가 있습니다. 수로 이름은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된 전사자 중 최연소자(17세, 1951.11.6)로 전사한 호주 병사 ‘JP Daunt’의 성을 따서 지은 것입니다.  그곳을 방문할 때마다,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 어머니 올윈 그린을 회고하는 무남독녀 앤시아 그린 여사.     © 크리스찬리뷰

 

 

그린 여사의 추모식

(Olwyn Green, OAM Memorial) 

 

2020년 1월 20일 오후 4시, 시드니 시내에 있는 ‘NSW 주립미술관’(The Art Galley of NSW)에서 그린 여사의 추모식이 열렸다. 100여 명의 호주인들과 50여 명의 한인들이 추모식에 참석했다. 호주 육군 제3대대 대대장인 ‘Ged Kearns’ 중령이 추모식의 막을 올렸다. 이어서 그린 여사와 오랜 친구인 ‘Peter Blayney’ 목사의 말씀이 있었다.

 

“제가 오늘 집례하게 된 것은 그린 여사께서 생전에 저에게 추모식을 인도해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입니다”라는 말을 필두로 그린 여사와 함께 했던 아름다운 이야기를 나누었다.

 

현 한국 주재 호주대사인 최웅(James Choi)의 메시지를 전 한국 주재 호주대사였던 ‘Mack Williams’씨가 대신 낭독하였고, 그린 여사의 12년 아래 동생인 ‘Robert Warner’ 박사는 어릴 때 누나와 함께 했던 아름다운 시간들을 회상했다. 그린 여사의 딸인 앤시아는 어머니의 이력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차분하고, 지적이며 흔들림 없는 어머니를 추억했고, 손자인 알렉산더는 가족과 함께 할머니의 사랑을 그리워했다. 1부 마지막 순서는 소프라노 이승윤 씨가 이태리 가곡 ‘나를 잊지 말아요’(Non ti scordar di me)를 연주했다.

 

15분의 휴식 후 열린 2부 순서는 호주 보훈처 장관을 대행한 Geoff Lee 박사와 홍상우 시드니 총영사가 메시지를 전했으며, ‘백파이프’의 연주가 울려 퍼지고 이어  소프라노 이승윤 씨가 ‘청산에 살으리라’를 열창하며 모든 순서를 마쳤다. 

 

추모식을 마친 후 ‘앤시아’와 인터뷰를 가졌다.

 

- 그녀(올윈 그린)의 마지막 순간을 알고 싶습니다. 혹시 유언한 내용은 없나요? 시드니에 계실 때 유골을 남편과 함께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묻어 해달라고 했는데 어떻게 되었나요?

  

“어머니는 멜번으로 오신 후에 ‘Blue Cross 요양원’에서 친구들과 함께 잘 지냈습니다. 저는 11월 중순에 뉴질랜드로 여행을 갔었습니다. 어머니도 건강하시고 오래 전부터 계획되었던 여행이었습니다. 뉴질랜드에 도착하고 며칠 안돼서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급하게 멜번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머니는 의식이 없었고, 요양원 직원들은 어떻게 조치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병원으로 옮기는 도중에 사망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앰뷸런스를 불러 병원으로 옮겼습니다. 별다른 문제없이 병원에 도착하였습니다. 그 다음 날 어머니는 의식을 되찾고 물을 마시고 싶다고 하시더군요. 물을 마시고 혈색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며칠 후 어머니는 ‘이제 이만하면 됐다’ 하시며 가족들이 보는 가운데 평안하게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앤시아를 만나려는 사람들이 긴 줄을 이루고 있었지만, 마지막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유언을 남긴 것은 없나요?

 

“어머니는 임종 전에 두 가지 유언을 했습니다. 시드니에는 어머니와 가깝게 지내던 많은 사람들이 있으니, 꼭 시드니에서 추모식을 드리고, 자신의 유해를 남편과 함께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묻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렇게 추모식을 열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어머니의 첫째 소원은 이루어 드렸습니다. 둘째 소원은 현 한국 주재 호주 대사인 ‘최웅(James Choi)’씨의 도움으로 잘 해결되었습니다. 올해 11월 1일이 아버지가 전사한 지 7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그날 가족 모두가 초청을 받아, 유골을 아버지와 합장하기로 했습니다. 현재 유골은 제가 보관하고 있습니다.” 

 

▲ 올윈 그린 여사의 추모식에서 외손자 알렉산더 찰스 노먼 박사가 가족들과 인사를 전하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 추모식장에서 만난 외손자 알렉산더 찰스 노먼 박사와 할머니 앤시아 여사.     ©크리스찬리뷰

 

큰 손자인 알렉산더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을지무공훈장’을 받으러 동생 필립과 함께 한국을 일주일간 방문했다. 한국에 대한 인상이 너무 좋았다고 한다. 그는 11월 1일 할머니의 유골을 모시고 갈 날을 벌써부터 기다리고 있다.

 

“한국에 다녀와서 할아버지가 흘린 피가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알고 무척 기뻤습니다. 한국 사람들의 친절함과 부지런함은 정말 본받을 만합니다. 국무총리에게 ‘을지무공훈장’을 받았습니다.”

 

- 서울에만 있었습니까?

  

“네, 서울에만 있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곳을 다녔습니다. 심지어 찜질방에도 갔습니다. 김치도 좋아해요. 아주 색다른 경험을 했고, 너무 좋았습니다.”

 

알렉스는 ‘종교학’(Religious Study)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지금은 ‘웨스턴 시드니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 올윈 그린 여사의 추모식 장면들. 아래 왼쪽 사진은 지난해 7월 27일 6.25전쟁 유엔군 참전의 날 기념식에서 찰스 그린 중령이 을지무궁훈장을 추서받았다. ©국민일보    

 

모든 순서를 마치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지난주부터 내린 비로 호주의 산불이 많이 수그러졌다.  비가 오고 가듯 인생도 한번 왔으면 언젠가는 다시 돌아간다. 돌아갈 집을 알고 이곳에서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글/김환기|크리스찬리뷰 영문편집위원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광고
광고

  • 포토
  • 포토
  • 포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