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다른 물방울이 모여서 하나로 흐르네

서로 다른 물방울이 모여서 하나로 흐르네

글|김명동,사진|권순형·박태연 | 입력 : 2020/01/29 [11:59]

 

▲ 하루 3백 명 이상의 환자들이 진찰을 받기 위해 헤브론병원 로비를 하루 종일 가득 메우고 있다.     ©크리스찬리뷰

 

헤브론병원은 2007년 9월 6일 김우정 원장을 비롯해 캄보디아에서 사역해 온 4명의 의료선교사들이 연합해 세웠다. 각기 다른 곳에서 파송을 받은 선교사들이 힘을 합쳐 결실을 맺은 것은 캄보디아는 물론 세계 어디서도 보기 힘든 사례다.
 
헤브론병원은 ‘연합’과 ‘사람을 길러 세우는 것’에 맞춰져 있다. 김 원장은 “헤브론을 직역하면 ‘친구들의 마을’이며 의역을 하면 ‘연합’ ‘협력’이라는 뜻이다”라며 “헤브론병원은 처음부터 연합을 하고 협력을 해서 세워진 병원으로 캄보디아 사람들과 친구가 돼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병원을 개원한지 7년째 되는 2014년도 일이다.
 
무료로 치료해줄 수 있는 환자가 늘어난다는 것은 더할 수 없는 기쁨이고 보람이자 다행스런 일이었다. 하지만 환자가 늘수록 병원의 운영상태는 그만큼 악화되고 있었다. 김우정 원장을 비롯한 직원들이 아무리 주판알을 튕겨 보아도 이대로는 운영이 힘들었다. 더군다나 훗날 이 병원의 운영을 현지인들에게 넘겨줘야 하는데 그때도 현지인들이 후원비와 자원봉사자들로만 운영이 가능할까? 
 
김 원장은 결국 병원 식구들과 함께 이른바 대책회의라는 걸 열어 뾰족한 수를 찾아볼 요량이었다. 하지만 갑론을박만 할 뿐 도리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할 수 없이 치료비를 낼 수 있는 환자들에게만 돈을 받는 것이 어떠냐는 말이 나왔다.
 
“할 수 없는 일이죠. 그렇게라도 해야.”
 
김 원장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러나 그 또한 말도 안 되는 의견임이 금방 드러났다.
 
“그런데 누구한테 돈을 받아야 되죠? 돈 받을 이를 어떻게 구별하나요?”
 
그 또한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결론 없는 회의가 계속되었다. 그 후에도 몇 차례나 회의를 열었으나 허울 좋은 말잔치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접수할 때 유료진료비와 무료진료비 라인을 두어 선택적으로 접수하면 어떨까요?”
 
대책회의가 다시 열린 다음날 기상천외한 제안 하나가 나왔다. 직원들의 눈이 빛났다.
 
“환자들에게 괜히 눈치 주는 게 아닐까. 반드시 돈을 내야 한다는 인식을 하면 좋지 않은데.”
 
“그러나 할 수 없잖아요. 그 방법밖에는 뾰족한 수가 없어요.” 
 
물론 100퍼센트 바람직한 방법은 아니었다. 우선은 어떤 형식이든 돈을 받는다는 자체가 내키지 않았다.
 
“진료비를 낼 수 있는 환자도 형편이 되는 대로 받으면 마음이라도 편할 것 같은데요.”
 
좀 찝찝한 방법이었으나 더 깊이 생각해보면 최선은 아니더라도 차선책은 되었다. 일단은 일률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받는다는 죄책감은 들지 않았다. 돈이 없으면 안 내면 그만이니까. 결론은 끊임없는 토론 끝에 치료비를 낼 수 있는 환자에게만 돈을 받는 것으로 모아졌고 김 원장은 회의 내내 골똘히 생각하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할 수 없지요. 캄보디아 정부의 허가를 받아 한 번 해봅시다. 해봤다가 부작용이 생기면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해 봅시다.”

 

▲ 야간에 입원실을 찾은 헤브론병원 김우정 원장이 환자들의 상태를 점검하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우여곡절 끝에 결론이 났지만 직원들은 거의 기대를 걸지 않았다. 원래 병원을 찾는 환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이었기에 애초부터 기대를 걸 형편은 못되었다. 하지만 역시 캄보디아 사람들의 인간미는 살아있었다. 비록 살기는 어렵고 제 앞길조차 가름할 수 없는 입장이었으나 병원이 어렵다는 소문을 듣고는 단돈 몇 달러라도 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결과 비율은 대략 환자의 30% 정도는 저렴한 진료비를 받고, 환자의 70% 정도는 진료비를 받지 않고 외부의 모금액으로 충당하게 됐다. 2007년 병원 개원시 100% 무료병원으로 시작하였다가 2014년에 와서야 약간의 진료비를 받는 병원으로 전환한 것이다. 

 
원장님, 입원비가 없는데요?

 
문밖에서 누군가가 살짝 인기척을 내더니 들릴 듯 말 듯 노크를 했다.
 
“들어오세요.”
 
문밖 환자의 몸놀림은 매우 조심스러웠다. 문을 살짝 열고는 머리만 내밀며 눈치를 살폈다.
 
“저, 원장님 할 말이 있어서요.”
 
“어서 들어오세요.”

겨우 들어와 어쩔 줄 몰라 엉거주춤 서 있는 환자에게 그는 앉으라고 의자를 건넸다.
 
“앉아서 말씀하시죠. 환자가 궁금한 게 있으면 안 되죠.”
 
이 병원 입원 환자가 대부분 그렇듯이 가난과 병마에 찌든 얼굴엔 깊은 주름살이 패어 있었다. 남자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쉽게 말문을 열지 못했다.
 
“괜찮습니다. 마음 편히 말씀하세요.”
 
남자는 그제서야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병에 대해 말하려 온 게 아니라는 것, 내일 모레 퇴원하게 된다는 것. 김 원장은 이제 짐작이 갔다. 남자가 병원비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무엇 때문에 그러세요. 혹시 퇴원하는데 돈이 없어서 그러세요?”
 
남자는 얼굴을 들지 못한 채 말을 이어갔다. 입원비가 없다는 것이었다. 어젯밤 뜬눈으로 달리 해결 방법을 도저히 찾지 못해 생각다 못해 원장님을 찾아왔다는 말이었다. 김 원장은 남자의 말을 끝까지 듣고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헤브론병원 로비에는 연합과 협력의 헤브론정신을 기록해 놓은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 크리스찬리뷰


“돈이 없으면 할 수 없지요. 퇴원은 해야 하잖아요.”
 
남자가 뛸 듯 진료실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김 원장은 깊은 상념에 빠졌다. 돈이란 게 뭔가. 돈이 결코 사람을 지배할 수 없는데 사람은 돈의 위세에 눌려 돈 때문에 죽고 산다.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이라는 귀한 존재가 그깟 돈 몇 푼 없어서 충분히 살 수 있는 사람도 죽어가는 현실이 아닌가.
 
진료실을 휘휘 오가며 답답한 가슴을 풀려고 하는 순간 차승연 선교사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아차, 저 친구가 또 화를 내겠군.”
 
김 원장은 짜증을 가득 담은 차 선교사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며 빙긋 웃었다.
 
“무슨 말을 할지 압니다.”
 
“원장님, 또 입니까? 큰일입니다. 이래서는 도저히 안됩니다. 병원 운영이 안됩니다. 원장님이 자꾸 그러시니까 돈 있는 사람들까지 없는 척하며 그냥 퇴원하려고 하잖습니까?”

 

▲ 헤브론병원의 살림을 맡아 항상 분주한 차승연 선교사가 행정사무실 직원들과 미팅 중에 있다.     © 크리스찬리뷰


김 원장은 차 선교사의 항의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다른 병원과는 입원비나 수술비가 비교도 안 되게 싼 데, 거의 무상인데 여기서 그냥 보내면 병원 운영을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는 말이었다. 그러나 차 선교사 역시 원장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의 불평이라도 해서 통제하지 않으면 끝도 한도 없다는 걸 알기에.
 
차승연 선교사의 존재는 정말 김 원장에게는 빛이었다. 병원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피곤해서 파김치가 되어있다가도 새로운 생명을 얻은 듯 생기를 되찾았다.
 
차승연이 서울 충무교회 청년부 교사시절, 김우정 장로는 청년부 부장이었다. 김 장로가 캄보디아에 단기의료선교를 다녀 온 후 아예 캄보디아로 건너가 헤브론병원을 개원했을 때 그녀는 해마다 청년부 학생들을 데리고 헤브론병원을 찾았었다.
 
그때마다 그녀는 병원에서 눈코 뜰 새 없이 환자들과 씨름하는 김 원장을 보고는 진한 감동은 느꼈다. 가난한 자들과 평생을 함께 하고자 하는 그를 그냥 못 본 체 할 수 없었다. 그녀는 고교시절 평생 봉사자가 되어 살겠노라는 서원을 떠올리며 김우정 원장을 찾았다
 
“원장님, 제가 원장님과 함께 일하겠습니다.”
 
“아, 그래요? 하지만 그 좋은 직장을 버리고?”
 
그러고 보니 차승연은 한국에서 잘 나가는 베테랑 디자이너였다. 그녀는 대학졸업 후 KT(KT Corpration)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면서도 대학원을 마치며 대학에서 강의도 하고 이른 나이에 팀장이 되어 바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건 괜찮습니다.”
 
김 원장은 전신이 짜릿해졌다. 이기주의시대에 이처럼 아름다운 사람과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게 정말 감격스러웠다.
 
차 선교사는 협상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원장님, 다만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십시오. 환자들이 너도나도 원장님 방에 와서 눈물로 호소할 때는 어쩌시겠어요. 그러니까 이 순간부터 제발 제도에 따라 주세요.”
 
“네, 그리하지요.”
 
다짐을 받은 차 선교사가 물러나자 김 원장은 긴 한숨을 쉬었다. 수십 년간 병을 고치는 의사로 살아왔지만 여전히 풀 수 없는 안타까운 문제였다.


선교사는 자기희생이 있어야
부원장 이영돈 선교사

 
이영돈(65. 외과 전문의) 선교사를 만나기 위해 한창 전 직원 월요예배가 진행되고 있는 예배실로 들어가 조용히 앉았다. 예배가 끝나자마자 붙들고 시간 약속을 해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직원의 귀띔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배가 끝나자마자 입원환자들의 상태를 영상으로 확인한 후 곧바로 병실로 회진에 나서지 않는가? 기자는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부원장님, 시간 좀 내주세요.”
 
“아, 지금은 안 되고요. 제 방으로 가셔서 좀 기다리시지요. 곧 가겠습니다.”
 
이 선교사는 찾아오는 손님들에 대한 접대와 환자들의 진료, 상담, 전반적인 병원 운영 등으로 쉴새없이 복도를 오가며 그를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사랑, 신앙을 전파해 주고 있었다. 
 
헤브론 식구들은 큐티와 예배에 참석하는 것부터 진료의 시작으로 삼는다. 빡빡한 일정에 큐티는 굉장한 헌신을 필요로 한다. 의료진들에겐 쉼 없이 수술과 진료를 수행하는 고된 작업장이다. 그러기에 영적 충전은 필수적이다.
 
큐티는 매일 아침 7시 30분에 시작한다. 환자 대기실에서는 같은 시간 3백여 명의 대기환자들이 예배를 드린다. 말씀을 전하고 기도를 하며 자연스럽게 전도한다. 월요일에는 전 직원 예배가 있다.
 
“이 병원은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납니다. 한국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이지요. 기도로 시작하는 병원이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병실을 회진할 때도 환자들을 위해 기도해 주고 중환자가 있으면 의사들이 다 들어가서 환자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해줍니다.
 
특별히 캄보디아 의사들에게 기도를 시켜요.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자기네 민족을 위해 기도해 주는 것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이들을 크리스찬 리더로 키우는 게 목적이기 때문에 기도를 가르치고 있어요.”
 
이영돈 선교사는 “사실 많은 선교병원들이 초기에는 선교병원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여 의료선교기관으로서 많은 업적들을 남겼다”면서 “그러나 시간 이 흐르면서 그 설립 목적이 점차 불분명해지기 시작했고 결국은 병원이 영리사업으로 전락했다”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이 선교사는 예배와 기도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모든 일의 중심에 말씀이 놓여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말씀 읽기와 기도를 통해 여기까지 왔듯이 헤브론병원의 사역도 예배와 기도를 통해 계속적으로 전개돼 나가야함을 그는 믿고 있었다.
 
“기도를 통해서 자기 자신이 좀 더 겸손해지고요, 우리 캄보디아 의사들이 하나님께 의지하는 방법을 배우는 기회가 될 수 있어 좋습니다. 언젠가 캄보디아인들에게 이 병원을 이양할 수 있도록 전략을 세우고 있는데 이양을 할 때는 좋은 크리스찬 리더들을 길러 세워놓아야 되고 재정적으로는 어려움이 없을 정도가 돼야 되니까요. 그런 것들이 준비가 안 되면 일대 혼란이 올 겁니다.”
 
이 선교사는 “현지인 닥터들을 이 나라 크리스찬 리더로 키우는 게 큰 목적”이라며 “그것이 내가 여기 온 목적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곳의 의료 현실들, 시스템이나 장비, 인적자원들이 부족하다보니까 손을 쓸 수 없는 환자들이 너무 많다”며 “그런 환자들을 그냥 돌려보낼 때는 많이 의기소침이 되고 내내 마음이 무겁다”고 심정을 토로했다.
 
“많은 일을 해야 될 30대 나이의 엄마가 암에 걸려서 온 분들이 그렇게 많아요. 암 사망률이 높은데 특별히 간암 유방암 자궁암 환자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암의 위험성을 몰라요. 살을 뚫고 피가 철철 흘러서 와요. 지금도 30대 환자가 3명이나 입원해 항암제를 맞고 있는데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수술과 항암제까지입니다.
 
암 환자 치료에서 가장 필요한 게 방사선 치료입니다. 그런데 캄보디아에서 방사선 치료를 할 수 있는 병원이 딱 두 군데 밖에 없어요. 칼멧병원과 러시아친선병원입니다. 둘 다 정부병원인데 거기도 한 대씩밖에 없어요. 그래서 저희가 칼멧병원과 러시아친선병원으로 환자들을 보내려 해도 6개월 기다려야 해요. 그런데 6개월이면 암이 퍼졌을 때니까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거지요.”

 

▲ 헤브론병원 선교사들은 매일 아침 QT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 크리스찬리뷰


이 선교사는 “이것이 국가차원 문제인데 제대로 된 방사선치료를 못 받고 죽는다는 게 너무 안타깝다”며 “이 나라에 방사선 치료할 수 있는 병원이 한 군데 더 있었으면 좋겠고, 그것이 헤브론이었으면 정말 좋겠다”고 덧붙였다.

 

▲ 매주 월요일 전 직원 예배에서 특별찬양하는 선교사들. 오른쪽 앞줄 끝에 이영돈 선교사가 보인다.     © 크리스찬리뷰


“그런데 방사선치료기라는 것이 고가이다 보니까 여러 군데 알아보고는 있지만 쉽게 안 되더라고요. 수십억 되거든요. 그렇지만 이 나라에 방사선치료기가 가장 필요하다, 꼭 있어야 되겠다, 그래서 치료 못 받고 죽는 환자들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제목이지요.”
 
이영돈 선교사가 아내 김혜경 선교사(63)와 헤브론병원에 온 것은 2017년 12월 중순이다. 아내 김혜경 선교사는 현재 경리회계, 심사, 숙소 관리 등을 맡고 있다.

 

▲ 예배와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부원장 이영돈 선교사.     © 크리스찬리뷰


“아내가 가자고 오히려 서둘렀어요. 여기에서도 아내가 더 적극적입니다. 간호대학을 졸업했어요. 그래서 의학용어도 잘 알고 전반적으로 병원에 대해서 잘 아니까 이곳에서 회계, 숙소 관리 일 외에 심사 업무도 맡아 섬기고 있습니다. 환자가 최종적으로 돈을 지불하기 전에 누락된 부분은 없는지, 타당한지, 더 받은 것은 돌려주기도 하고요. 사실 그동안 부모님을 모시느라 일을 못했는데 그래서 일에 대한 갈증이 있었어요. 물 만난 고기처럼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자나 깨나 아내 말을 잘 들어야 합니다. 허허.”
 
이 선교사는 선비의 나라 한국의 자손답게 차분한 인상이었다. 그는 진지한 표정에다 눈빛을 빛내며 말을 이어갔다.
 
“사실은 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형편이기 때문에 이곳에 어머니를 모시고 와서 1년간 함께 살았어요. 그런데 90세이셨기 때문에 집이 3층이라 도저히 오르락내리락 하실 수가 없고 날씨도 덥고 해충도 많아 안 되겠다싶어 한국으로 가셨는데 지금은 실버타운에서 혼자 살고 계세요.”
 
왜 헤브론일까?
 
“친숙했던 병원이었어요. 매체를 통해 헤브론병원을 알고 난 후 가천의대 길병원 신우회에서 매년 의료봉사를 왔었어요. 김우정 원장님도 한국에 나오시면 몇 번 뵙기도 하고요. 요즘 젊은 사람들이 하는 말로 도전을 많이 받았습니다.”
 
하지만 늘 하나님의 부르심에 목말라 하던 그에게 우연한 기회에 찾아온 헤브론병원의 단기선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고, 퇴임 2년을 앞두고  헤브론병원 선교사로 첫 발을 내딛는다.

 

▲ 정형외과 전문의 박종후 선교사와 수술 일정을 협의하는 이영돈 부원장.     © 크리스찬리뷰


“사실 좋지 않은 사정에서 왔어요. 가정적으로도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너무 늦기 전에 오자. 원칙적으로 선교사로 간다는 것은 자기 희생이 있어야 된다는 생각은 옛날부터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재산을 한국에다 이만큼 놓고 와서 일한다는 것은 가식이고 위선인 것 같아서 집도 팔고 살림도 다 없애고 왔습니다. 한국에 재산이라곤 2011년식 자동차 한 대 뿐인데 그것도 제 사위가 쓰고 있고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 털고 오니까 마음이 한결 가볍습니다.”
 
이영돈 선교사는 서울대학교의과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가천의대 교수로 길병원 진료부 원장과 대한갑상선내분비외과학회 회장을 역임한 그는 갑상선암 집도 건수가 8천여 건에 달하는 명의다. 2013년에는 갑상선 수술관련 논문이 최우수논문으로 선정되어 수상했다.
 
이제는 편안하게 노후를 즐길 수 있는 이들이 질병과 빈곤으로 고통 받는 척박한 이 나라를 찾아오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젊을 때부터 국내와 해외로 의료봉사를 다니면서 선교사의 꿈을 갖고 있었는데 결정적인 때가 있었어요. 2007년도일 겁니다. 갑자기 몸이 마비가 와서 잠도 못자고 먹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고 꼬박 두 달 동안 꼼짝을 못했어요. 이때 하나님께서 부르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고 하나님이 고쳐주셨습니다. 빨리 떠나야겠다. 하나님의 사인이구나, 생각했죠. 그런데요, 몸이 좋아지니까 사람이 화장실 갈 때 말하고 나올 때 말하고 다르다고 조금 더 조금 더 그래지더라고요.”

 

▲ 간호사 출신의 이영돈 선교사의 아내 김혜경 선교사는 헤브론병원의 재무와 심사, 숙소 관리 등 병원의 전반적인 살림을 총괄하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이 선교사에게 일어난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영민하고 자랑스러운 딸, 남들이 보기에도 탄탄대로를 걷고 있던 딸이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응급실로 실려 간 것이다.
 
“딸이 임신한 걸 몰랐는데 폐기흉(폐에 구멍이 생겨 공기가 새고 이로 인해 늑막강 내에 공기가 차는 것) 증상으로 폐가 찌그러들고 숨을 못 쉬니까 고통이 심한 거에요. 그런데 병원 응급실로 실려가 확인하는 과정에서 임신한 걸 알았어요. 임신초기였는데 튜브를 꼽고 공기를 바깥으로 빼내고 시험을 쳤어요.
 
보통 일주일이면 낫는데 일주일이 넘어도 안 낫는 거에요. 큰 튜브를 넣으니까 폐를 찌르고 아프니까 잠을 못자고 많은 의사들이 아이를 유산시키고 수술을 하자고 권유를 했어요. 그랬는데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 같더라고요. 뱃속에 있는 생명도 귀한 것이니까 기도해보자. 그러고 나서 저는 3개월 되면 수술하자고 그랬죠. 3개월 전에는 아기가 위험하니까요.
 
그래서 두 달간은 고난의 기간을 보냈죠. 항생제, 진통제 다 맞고 할 수 있는 것은 다했습니다. 제일 큰 문제가 임신 초기때는 감기약도 안 먹잖아요. 그런데 제 딸은 항생제, 진통제 다 맞았으니까요. 3개월이 넘었을 때 수술을 했어요. 폐 일부를 잘라내고 제일 걱정되는 것이 아기잖아요.

 

▲ 캄보디아인 여의사와 환자의 건강 상태를 체크하고 있는 이영돈 부원장.     © 크리스찬리뷰


나쁜 약을 쓰고 수술까지 했으니 과연 아기가 온전할 것인가? 주위 사람들은 아기를 지워라. 저는 아내하고 딸을 잘 설득하고 사돈한테도 설득해서 이것은 기도할 문제다라면서 기도를 많이 했죠. 10개월이 굉장히 길더라고요. 과연 어떤 아기가 탄생할까. 그런데요, 다행히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났어요. 약간의 피부에 문제는 있었지만 정신 상태나 발달상태는 괜찮았어요.”
 
이 선교사도 역시 한 명의 나약한 인간, 그는 무릎을 꿇었다. 왜 내 딸입니까? 그러나 거기에 답이 있었다.
 
“제가 그동안 환자를 많이 만났는데 그중에 두 환자가 젊은 나이에 임신 중에 암을 심하게 앓았어요. 담대하게 양 부모에게 배속에 있는 생명은 건들 수 없다. 그러니 아이를 출산하고 수술하든가, 6개월 지나서 암수술을 하고 아이를 출산하시라 권유를 했죠. 그랬더니 처음에는 당신이 책임질 거냐고 항의하다가 다행히 내 말을 잘 따라 줘서 건강하게 아이를 출산했거든요. 현대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것 같아요. 너무 쉽게들 낙태를 시키고 유산을 시키니까 하나님이 그걸 통해서 알려주시는 것 같아요.”
 
딸 아이의 출산 소식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고 넘치는 감격이었지만 그 와중에 그의 가슴 한구석이 켕겼다. 이제는 꼼짝없이 하나님께 한 약속은 지켜야할 판이었다. 선교사의 문, 그 앞에서 서성거린 지는 오래되었지만 문지방을 넘기는 무척 어려웠는데 결단의 시간이 온 것이다. 이들 부부는 긴 망설임과 주저의 시간에 마침표를 찍고 헤브론병원에 와있다.
 
이 선교사는 불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교회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에 2년간 다녔어요. 그 영향으로 중학교 때 본격적으로 집 가까이에 있는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주일학교 선생님이 했던 말씀이 기억이 나는 것 같아요.

 

▲ 최근 헤브론병원에 설치된 혈액투석 장비들.     © 크리스찬리뷰


믿는 가정이 아니었으니까 주일학교를 자주 빠지게 되잖아요. 선생님이 따뜻하게 맞아주고 힘을 줘야하는데 ‘너 저번 주에 왜 안 나왔어?’하며 야단치고 그랬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선생님이 나를 위해서 그러셨겠지만 지금도 기억이 생생해요. 잘 나오는 아이들은 앞에 앉히고 나 같은 아이는 야단치고 뒤편으로 밀려나는 거에요. 그렇지만 하나님이 꾸준히 불러주셔서 그때부터 말씀을 듣고 중학교 때 예수님을 만났죠.”
 
이 선교사는 전도와 관련된 일화를 소개했다.
 
“처음에는 우리 집도 딸의 시댁도 누구하나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없었어요. 제 딸이 둘 있는데 결혼시킬 때 사돈들도 사위들도 크리스찬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전도하기 어려운 세상에 좋은 기회다 생각하고 전도를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사돈들도 사위들도 다 크리스찬이 되어 열심히 교회에 다닙니다. 사위들은 저보다 더 신앙이 좋습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들은 결혼시킬 때 믿지 않는 가정과 결혼시키지 말라고 말씀하시는데 저는 반대로 생각하거든요.
 
큰딸 시할머니가 병원에서 돌아가시기 직전이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얼굴도 본 적이 없는데 그냥 두 번 병원으로 찾아갔어요. 지옥에 가실 것 같아서요. 가서 복음을 전했지요. ‘예수 믿겠느냐, 천국 갈 준비되셨느냐’ 하니까 그렇다고 대답하시는데 감격했어요.”
 
이 선교사는 “솔직히 복음을 전하는데 창피할 때도 있고  쑥스러울 때도 있지만 철판 깔고 전한다”며 “여기서도 그렇게 하고 있다”고 강단있는 어조로 말했다.
 
“복음전할 기회가 주어지면 그냥 ‘예수 믿으세요’가 아니라 ‘예수 안 믿으면 지옥갑니다’ 이렇게 분명하게 전합니다. 그렇게 전하는 사람이 많지 않거든요.”
 
이 선교사는 “가장 시급한 문제가 ‘혈액투석센터를 정상화해서 운영하는 것”이라며 “신부전증 환자가 10만여 명 정도가 있다. 그분들을 치료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투석치료가 가능한 병원은 1일 투석하는데 50불 받고 있어요. 그러니까 일주일에 두세 번 받으면 한 달이면 거의 500, 600불이 되잖아요. 그래서 돈 있는 사람만 투석할 수가 있어서 저희가 투석이 필요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지금 투석센터를 만들었습니다.
 

▲ 지난해 10월 헤브론병원 신장투석센터 준공식에 참석한 임 차일리 캄보디아 부총리가 신장 투석 장비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그런데 워낙 이것도 돈이 많이 들어가니까 무료로 해줄 수는 없고 시중에서 받는 원가 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을 꾸준하게 치료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기도제목이고요. 또 현지인 레지던트들을 가르칠 수 있는 각과 전문의가 필요합니다. 헌신된 선교사들이 오셔서 지도해줬으면 좋겠습니다.”
 
걸으며 건강관리를 하고 있다는 이 선교사는 “평생에 처음으로 월급이 없는 일을 하게 되니 이곳 사람들과 비슷한 삶을 살아야 한다”면서 “한국에서 누릴 것 다 누리고 왔으니까 마음이 편하다”고 처음으로 호탕하게 웃었다.〠


글/김명동|크리스찬리뷰 편집인 사진/권순형 크리스찬리뷰 발행인, 박태연 크리스찬리뷰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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