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좌천동... 골목길마다 얽힌 아름다운 흔적들

선교사 후손들, 선조들의 땀과 눈물을 밟으며 ‘감동’

글|김명동,사진|권순형 | 입력 : 2020/01/29 [16:43]
▲ 호주 선교사와 후손들이 부산진교회를 방문, 부산진교회 성도들과 기념촬영을 가졌다.     © 크리스찬리뷰
▲ 방문단을 대표해 인사하는 크리스토퍼 씨.     © 크리스찬리뷰


창원시청을 떠나 길을 달리고 달린지 1시간 30여 분. 부산 좌천동에 있는 부산진교회 앞에 이르렀다. 이때 그지없이 순하고 착하기만 한 얼굴의  크리스트퍼(60.  한국명 서형일. 서두화 선교사 장남) 씨는 들뜨고 흥분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나, 여기 부산에서 태어났어요.”
 
우리말이었다. 모두들 휘파람을 불며 환호했다.
 
선교사 후손 일행은 버스에서 내려 야트막한 언덕길을 오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뿌리고 있었고.


부산진교회

 
부산 좌천동 골목길은 복음의 황무지였던 이 땅에 첫 발을 내디뎠던 호주 선교사들의 애환이 물씬 서려있는 곳이다. 그래서 이 동네에 사는 사람이나 잠시 이곳을 지나가는 나그네들이 가파른 골목길을 오를 때면 한 번쯤 초기 선교사들이 이곳에 뿌렸던 땀과 눈물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짚어보게 만든다.
 
우리 일행을 기다리던 부산진교회 신충우 목사와 교인들은 여유있는 박수와 웃음으로 내방객을 맞아주었다. 교회홀로 안내된 일행은 ‘부산진교회 뿌리를 찾아서’ 호주 방문 영상을 관람했다.

▲ 부산진교회를 방문한 호주 선교사와 후손들에게 신충우 목사가 동교회 성도들을 소개하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신충우 목사는 “호주에 가보니 호주 선교사들의 희생을 통해 우리가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며 “좋은 선교사들을 한국으로 보내준 호주교회의 희생이 한국교회의 씨앗이 되고 열매가 되었다. 부산진교회를 대표해 감사를 드린다”고 인사했다.
 
이어 방문단 일행을 대표해 서형일 씨가 인사를 했다. 그는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진교회 유치원을 다녔다. 교회가 생각했던 것보다 커져 감동을 받았다”며 “제일 기억나는 것은 여러분들의 얼굴이다”고 하자 박수와 웃음이 터져 나왔다.
 
부산진교회를 세운 이는 미국북장로교선교부 소속 윌리엄 베어드(한국명 배위량)이다. 그는 1890년 부산진에 한옥 한 채를 짓고, 그해 11월 부인과 함께 당시 공관에서 일하던 미국인 가족들과 자기 집에서 일하던 한국인 몇 사람과 예배드린 것이 부산교회(부산진교회 전신)이다.

 

▲ 부산진교회 최초 교인 가족. 심인택 부부(앞줄), 아들 심상현 부부, 아들 심취명(뒷줄 오른쪽). 심취명은 부산진교회 초대장로, 제2대 담임목사를 지냈다.(1894, 부산) ©크리스찬리뷰 DB    


이듬해 정식으로 교회를 창립한다. 이후 1900년 10월 엥겔(Rev. Gelson Engel 한국명 왕길지. 부산1900-1919 평양 1919-1937) 선교사가 초대 당회장으로 부임하면서 교회의 모습을 갖췄다.
 
1904년 5월 27일 부산 최초의 세례자였던 심상현의 동생 심취명이 장로로 장립됐다. 부산진교회의 당회가 조직된 날이다. 3.1 독립운동만세 때는 교회의 자매학교라고 할 수 있는 일신여학교 교사였던 박시연 등 7명이 부산진교회에 출석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많은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밀려들었고 교회가 위치한 좌천동 지역에만 2만 채의 판잣집이 들어섰다. 53년 11월에는 큰 화재가 발생해 3천 채의 판잣집이 잿더미로 변했다. 교회는 화재지역에 위문금 2만 5천 환을 보내 재건에 동참했다. 81년에는 현재의 건물인 새 성전 기공식을 갖고 파이프오르간을 설치했다. 2007년에는 1904년 당회가 구성된 이래 1000회 정기당회를 맞아 감사예배를 드렸다. 2010년에는 왕길지 기념관을 개관하였다.

▲ 2010년에 개관한 부산진교회 왕길지 기념관 입구.     © 크리스찬리뷰


이번에 동행한 헬렌(Mrs. Helen Ford 한국명 민혜란 부산, 1964-1969) 선교사는 부산진교회 손명암 장로 부부를 보자 반색하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헬렌 선교사는 1964년 7월 초 한국에 도착했다. 서울로 올라가 한국어 학당에서 공부를 마친 후 부산으로 내려와 동래여자중고등학교(옛 일신여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그녀의 두 딸 바바라(Barbara)와 콜린(Colin)은 부산의 일신병원에서 태어났다.
 

▲ 손명암 장로(오른쪽)와 서두화 목사가 오랜만에 반가운 만남을 가졌다     © 크리스찬리뷰


손명암 장로는 호주 선교부에서 운영하는 부산일신기독병원 행정부장으로 일한 적이 있고, 6.25사변 이후에는 호주 선교사들의 출입국 관리는 물론, 호주 선교부의 재산관리를 담당했다. 20년 전에는 ‘호주선교사들이 뿌린 복음의 열매를 찾아서’ 취재를 갔을 때 우리 취재진을 도와 안내를 해주기도 했다. 
 

일신여학교

 
부산진교회 건너편, 비탈지고 매우 굽은 골목길 옆에 옛 모습 그대로인  붉은 서양식 벽돌건물이 들어서 있다. 1905년 지어진 일신여학교 건물이다. 때를 벗겨내서 누렇게 변색이 되기는 하였으나 풍상을 안고 있는 늙은 모습이 오히려 다정한 그런 건물이다.

▲ 철거 위기에 있던 일신여학교 건물이 2003년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5호로 지정됐으며, 10년 후인 2010년 4월 5일 역사기념관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 크리스찬리뷰


부산 최초의 근대 여성교육기관일 뿐 아니라 3.1 독립운동의 진원지인 일신여학교 건물은 부산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벽돌 건물로 그 아름다운 자태를 과시한다.
 
그러나 사실 이 건물이 매각위기에 처했었다. 기자는 2000년 3월 일신여학교를 취재했던 수첩을 꺼내 펼쳤다.
 
<잘 알려진 대로 부산 동구 좌천동은 호주 선교부의 못자리이다. 특히 좌천 1동 768번지에 있는 일신여학교 건물은 부산에 단 하나밖에 없는 구한말의 현대적 건물이다. 1905년 호주 선교사들이 건립한 서양식 건축물로 전국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그런데 곧 매각되어 모든 이의 기억으로부터 사라질 운명에 놓여있으니 안타깝다. 안내하는 부산진교회 손명암 장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부산진교회에서 이 건물을 사면 어떻습니까?”
 
“사실 노회에서는 돈이 필요하지 건물이 보존되든 안 되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우리 부산진교회가 호주 선교부 첫 열매로서 호주 선교회 재산을 우리가 사야지 않겠느냐며 여러 번 논의를 했지만 너무 부담이 크니까요.”
 
취재팀은 부산을 떠나면서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것은 역시 우리가 성금을 모아서라도 일신여학교 건물을 지키자는 생각이었다.
 
권순형 발행인과 기자는 자리를 박차고 달려갔다. 일신여학교 건물이 매각된다니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부산일보 감상훈 사장과 부산기독교방송국 임현모 총무팀장을 만나 우리의 취지를 설명했고, 그들은 흔쾌히 서둘러 도와줄 것을 약속했다.>
 
그로부터 3년 후인 2003년, 일신여학교 건물은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5호로 지정됐고, 10년 후인 2010년 4월 5일 역사기념관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호주 여선교사 멘지스(Miss Belle Menzies 한국명 민지사. 부산 1891-1924)와 페리(Miss Jean Perry 부산 1891-1895) 선교사는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1893년 부산 최초의 고아원 '미오라‘를 지었다. 이후 아이들이 모여들자 1895년 10월15일 주간학교를 세운 것이 일신여학교의 시작이다. 학교의 이름은 ‘날마다 새롭다’는 뜻의 일신(Daily New)이라고 지었다.

 

▲ 1891년 부산에 온 이자벨라 맨지스 선교사는 30여 년간 부산, 경남지역에서 사역하며 부산지방 최초의 고아원(미오라)를 설립하기도 했다. ©크리스찬리뷰 DB   


멘지스 선교사는 일신여학교뿐만 아니라 기독교로 개종한 첫 한국어 교사 심상현의 도움을 받아 남학생반도 만들어 교육을 하였는데, 1900년 왕길지(Rev. Gelson Engel 부산 1900-1919. 평양 1919-1937) 선교사 부부의 파송으로 남학생 교육은 왕길지 선교사가 맡았다. 이 학교가 지금의 부산장로교신학대학교의 전신이다.
 
일신여학교 기념관은 총 2층 건물에 4개의 전시관으로 구성됐다. 제1전시관은 ‘일신여학교의 설립배경’과 ‘기념관의 건축사적 의의’, 제2전시관은 ‘일신여학교 교실 체험관’이 배치됐다. 부산에 선교사들의 발길이 처음 닿았다는 사실과 함께 호주 선교사 헨리 데이비스의 조선 선교로 인해 일신여학교가 시작됐다는 내용이 당시의 교실과 함께 소개된다.

 

▲ 일신여학교 기념관은 2층 건물에 4개의 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방문단 일행이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제3전시관은 ‘일신여학교의 근대여성교육’, 제4전시관은 ‘일신여학교의 3.1운동’이 들어섰다. 초대 교장인 멘지스 선교사 이후 헌신한 호주 선교사들과 조선인교사, 학생들에 관한 내용은 물론 만세 시위를 준비하던 긴박한 상황 등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전시자료에는 호주선교사 맥케이(Rev. James H. Mackay 한국명 맥목사. 부산 1891-1993) 목사의 선교활동을 보여주는 ‘예수교 장로회 사기 상권 원본’과 초창기 교회자료도 있다.
 
호주장로교회는 데이비스가 한국에 도착한 지 불과 6개월 만에 순직하자 맥케이 선교사 부부와 3명의 미혼 여선교사, 곧 멘지스, 페리(Jean Perry), 퍼셋(Mary Fawcett) 등 5명의 2진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하지만 3개월 후인 1892년 1월 맥케이 선교사의 부인 사라(Sara)가 폐렴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호주장로교회의 두 번째 희생이었다. 사라의 유해는 부산 앞바다가 굽이보이는 복병산 데이비스 무덤 옆에 안장되었다. 맥케이 목사는 호주장로교 선교부를 최초로 개설하고 부산에 선교기반을 구축하는데 공헌했다.
 
맥케이 선교사 손자 앤드류 레이(75) 씨는 “저희 할아버지는 붉은 머리카락에 키가 크신 분이셨다”며 “100년 전(1919. 9.14)에 62세의 나이에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를 본 적은 없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할아버지가 직접 사역했던 부산에 와서 할아버지에 대한 사료를 보게 되니 큰 감동을 받았다. 할아버지가 자랑스럽다”고 덧붙였다.

 

▲ 부산에서 사역했던 헬렌(민혜란, 왼쪽 2번째) 선교사와 선교사 자녀들이 해설사(왼쪽)와 함께 산토끼 노래를 부르며 율동을 따라 하는 등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 크리스찬리뷰


선교사 후손 일행은 전시관을 돌아보며 “역사를 알게 되어 가슴 뭉클하고 한편으로는 마음이 기뻤다”고 말했다. 교실에 놓인 풍금을 보고는 “어릴 적 교회에서 보던 풍금 같아서 옛 생각이 난다”고도 했다. 부산에서 태어난 지닌(51. Jeannine Seaby. Rev. John Row 노승배의 넷째 딸)과 바바라(54. Barbara Caruana. Ford Mckinnon의 둘째 딸)는 그 심각하던 표정을 거두고 목청을 가다듬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산 토끼 토끼야 어디를 가느냐. 깡충깡충 뛰면서 어디로 가느냐.”
 
두 팔을 벌려 토끼가 달아나는 시늉으로 더덩실 춤을 추어가며 우렁찬 목소리로 산토끼를 외쳐댔다. 노래하는 그들이나 둘러서있는 사람들이나 모두 흥분하여 박장대소를 했지만 그 웃음의 여운에는 묘한 쓰라림 같은 것이 깃들어 있었다.
 
관람을 끝내고 밖으로 나왔을 때 사방은 어두워져 있었다. 부산진교회의 불빛은 은은했으며 밤기운을 타고 마음을 설레게 했다. 선교사 후손들은 부산진교회 홀에서 만찬과 담소를 나누며 교제하는 시간을 가졌다.
 

 

▲ 유엔기념공원을 찾은 방문단 일행의 기념촬영.     © 크리스찬리뷰

 

▲ 한국전에서 사망한 호주 육군 제3대대(가평대대) 찰스 그린 중령의 묘를 찾은 방문단 일행에게 정지수 목사가 그린 중령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유엔기념공원
                                    
 
다음 날 선교사 후손 일행은 유엔기념공원을 찾았다. 유엔기념공원은 6.25전쟁 당시 참전한 21개국(전투지원국 16개국, 의료지원국 5개국) 전사자의 유해를 모시려고 1951년 1월 유엔군사령부가 조성했다.
 
휴전한 뒤 1955년 11월 국회가 유엔군의 희생에 보답하고자 유엔기념공원 토지를 유엔에 영구기증하고 묘지를 성지로 조성할 것을 결의한 것이다.
 
당초 이곳에는 6.25전쟁에 참전한 21개국 유엔군 가운데 전사한 1만 1천여 명의 유해가 안장됐으나 벨기에 등 7개국이 유해를 본국으로 이장하고 지금은 유엔군에 파견됐던 한국군(KATUSA) 전사자 36명을 포함해 11개국 2천300명이 영원한 안식을 취하고 있다. 호주군은 한국전에서 8,407명이 참가해 339명이 전사했다. 부상자는 1,216명, 포로는 29명으로 현재 281명의 유해가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됐다.
 
유엔기념공원은 직사각형 형태로 위쪽에서 아래까지 약간의 경사지로 조성돼 있는데 가장 위쪽에 자리한 ‘상징구역’에는 6.25전쟁 참전국과 우리나라 국기, 유엔기가 연중 계양된다.

 

▲ ‘돈트 수로’(Daunt Waterway).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된 유해 중 최연소자(당시 17세)인 호주병사 돈트(J. P Daunt)상병의 성을 따서 지었다.     © 크리스찬리뷰


상징구역 아래 ‘주 묘역’에는 영연방 위령탑과 영국, 프랑스, 호주, 터키, 기념비 및 전몰용사의 유해가 안장돼 있다. 공원 맨 아래에는 ‘녹지지역’이 조성돼 있는데 주 묘역과 녹지지대 사이엔 작은 수로가 흐르며 이들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 수로는 일명 ‘돈트 수로’(Daunt Waterway)로 불리는데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된 유해 중 최연소자(당시 17세)인 호주병사 돈트(J. P Daunt)상병의 성을 따서 지었다.
 
1934년 7월 호주에서 태어난 돈트 상병은 유엔군으로 6.25전쟁에 참전했으며 1951년 11월 6일 17세의 젊은 나이에 경기도 연천 전투에서 숨졌다.
 
일행은 발걸음을 옮겨 호주의 찰스 그린 육군중령(훗날 대령으로 추서) 묘 앞으로 갔다. 그린 중령은 6.25전쟁에 참전한 육군 정규군의 첫 지휘관이었다. 그가 이끈 호주 육군 제3연대 3대대는 38선 돌파 후 20여 일 만에 의주까지 진격하는 등 짧은 기간에 여러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린 중령은 1950년 10월 29일 정주에서 치열한 전투 끝에 승전고를 울린 다음 날 달천강 근처에서 진지를 구축하던 중 북한군이 쏜 포탄파편에 다쳐 병원으로 후송됐지만 11월 1일 31살 나이로 숨졌다. 전사 후 1951년 미국정부의 은성훈장을 받았고 2019년 한국정부로부터 을지무공훈장을 추서받았다.
 
그의 아내 올윈 그린(Olwyn Green) 여사가 그린 중령의 전사 당시 3살밖에 안된 딸을 키우며 남편을 잊지 않고자 쓴 책 ‘아직도 그대 이름은 찰리’는 호주의 빼어난 전쟁문학작품으로 꼽힌다. 
 
그런데 올윈 그린 여사가 지난해 11월 27일 96세의 일기로 멜본에서 별세했다. 전쟁 미망인이 된 그린 여사는 세 살 난 외동딸 앤시아(Anthea)를 키우며 평생 재혼하지 않은 채 독신으로 지냈다. 1958년 학사학위(심리학)를 취득했고 교사로 근무했다.
 
그린 여사는 참전용사 연구 등의 공로로 2006년 호주국민훈장(OAM)을 수훈했다. 호주 한국참전협회 고문으로 활동했고 시드니 메도우뱅크 칼리지에서 이민자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2018년 멜본의 양로원으로 이주했고 가족과 친지들 곁에서 평안하게 눈을 감았다.
 
한편 그린 여사의 시드니 추모식이 지난 1월 20일 NSW 주립미술관(Art Gallery)에서 열렸다.

 

▲ 멜번 양로원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가졌던 올윈 그린 여사.(2019. 8)     © 크리스찬리뷰


 
일행은 두어 시간 동안 유엔기념공원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잘 단장된 조경에 감탄했고, 한국전쟁에 함께 했을 많은 전사자들을 추모했다. 그리고 일행은 돈트 이름이 붙은 수로 앞과 한국전 영웅 찰스 그린 중령 묘 곁에서 한참 동안 떠나지를 못했다.〠 (계속)


김명동|본지 편집인
권순형|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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