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문명 일깨워준 선교사들 흔적 ‘곳곳에’

발전한 교회·병원 모습 보고 감격의 눈물

글|김명동,사진|권순형 | 입력 : 2020/03/31 [12:12]
▲ 양지재활원을 방문한 호주 선교사와 후손 일행은 양지비전센터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 크리스찬리뷰


호주선교사와 일행은 양지재활원을 방문했다. 부산 연제구 거제2동에 위치한 양지재활원은 한국 최초의 장애인직업재활시설로 1968년 11월 5일 호주 선교사 노승배 목사(Rev. Barry Rowe, 서울 1965-1966, 울산 1967-1977)와 신익균 장로에 의해 설립되어 신체장애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유용한 기술을 습득시켜 자립의 터전을 마련해 주고 있다.
 
양지직업훈련원, 양지직업재활원 및 부산곰두리스포츠센터 등을 운영하고 있는데 곰두리스포츠센터는 장애인의 재활과 체력단련 등을 주목적으로 지하 1층 지상4층 규모로 1999년 6월 개관했다.

 

부산 양지재활원

 

일행을 맞은 사람은 김희재(80) 원장이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전신으로 웃으며 더없이 반갑게 맞아주었고 우리를 안으로 안내했다. 잠시 담소를 나누며 교제하는 시간을 갖고 작업장과 재활센터, 스포츠센터 등을 일일이 둘러봤다.
 
모두들 감동에 젖은 얼굴들이었다. 특히 벽에 걸린 아버지 노승배 목사의 사진을 뚫어지게 보던 첫째 딸 쉐린(56. Sherrin Ford), 둘째 딸 앤드리아(55. Andrea Walter) 막내 딸 지닌(51. Jeannine Seaby)은 눈시울을 붉혔다.
 
“양지재활원 방문이 처음이 아니지만 이렇게 아버지의 사진을 다시 마주하니 감격스럽습니다. 아버지가 뿌린 씨앗이 열매를 맺었으니까요.”
 
노승배 선교사는 목사안수를 받은 다음 해인 1965년, 간호사였던 그의 아내 원혜숙(Joan Warren) 선교사와 함께 한국에 파송되었다. 노 선교사는 산업선교와 농촌선교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공단이 조성되고 있던 울산지역의 울산산업선교회에서 사역하였다.

▲ 경남선교 120주년 기념관 개관식 후 양지재활원을 방문한 노승배 목사부부와 장녀 쉐린 씨(오른쪽) 노승배 목사는 2016년 6월 별세했다.     © 크리스찬리뷰


그의 주된 사역은 울산지역에서 산업화. 도시화에 맞는 사역개발과 산업단지안의 외국인을 위한 영어예배인도, 그리고 지역의 교계 지도자들과 신체장애자를 위한 자활프로그램 운영 등이었다.
 
그는 1968년 당시 마산에서 선교사들과 오래 교제해오고 있던 신익균 청년을 만나 장애인들을 위해 자립훈련 프로그램을 개발하였다. 그들 대부분은 소아마비나 척추 결핵으로 육체적인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 젊은 시절 신익균(중간)과 노승배 목사(오른쪽)     © 크리스찬리뷰


이들의 노력으로 울산 신정동 공영주택 17호 신익균 집에서 ‘양지 불구자 기술원’이 설립되었고, 장애 젊은이들은 시계수리, 라디오 및 전자제품 수리, 금은세공, 자개상감제조, 기타 기술을 배웠다.
 
그 훈련생의 대부분은 직업을 구하거나 작은 전파상을 차렸고 경제적으로 자립하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 프로그램이 지금의 양지재활원이 된 것이다.

▲ 경남선교 120주년 기념관 개관식 참석 후 양지재활원을 방문한 노승배 목사 부부가 신익균 장로 부부와 자리를 함께 했다. (2010. 10)     © 크리스찬리뷰


 
그런데 신익균 장로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일까.
 
“이 근처 요양병원에 입원해 계세요.”
 
서두화 선교사와 함께 급히 요양병원으로 향했다. 신익균(84) 장로는 고아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마산 창신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하나님을 만났고 문창교회에 다니게 되면서 서두화(93. Rev. Alan Sturat) 선교사를 만났다.
 
서두화 선교사는 신익균을 양아들로 삼고 울산공단에서 산업선교를 하고 있던 노승배 선교사를 소개했다.
 
입원실로 들어섰다. 그러나 신익균 장로는 옛날의 그 강하고 꿈이 많던 개척자의 풍모는 간곳이 없는 여든넷의 조용한 할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게다가 알아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했다. 몸을 움직이는 일도 힘이 들어 옆에서 거들어 줘야 했다. 애처로웠다. 서두화 선교사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 요양병원에 입원 중인 신익균 장로를 문병간 서두화 목사와 아들 크리스토퍼.     © 크리스찬리뷰


기자는 10년 전 신익균 장로를 만났었다. 그때 한 말이 가슴을 울린다.
 
“제가 노래를 잘했어요. 서두화 목사님이 문창교회를 가끔 방문하셨는데 교회에서 독창하는 제 모습을 보셨나 봐요. 그때부터 저에게 관심을 보이시면서 신앙상담도 해주시고 대학교 입학하면서는 장학금을 마련해 주시고요. 대학교 다닐 때는 호주선교회에서 일할 수 있도록 주선도 해주셨어요.

▲ 양지재활원 직원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 서두회 목사.     © 크리스찬리뷰


그곳에서 풀도 뽑고 유리창도 닦고 화장실 청소도 하고 그때부터 서 목사님을 아버지라 불렀죠. 그런 후 대학교를 졸업하고 군복무를 마치면서 양아버지가 ‘울산으로 가서 직업을 가지면 어떠냐?’ 그러셔요.”
 
신 장로는 어려서부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살겠다고 늘 생각을 했다. 나라 전체가 먹고 사는 일에 매달리던 시절, 그는 울산공단으로 내려가 소외계층의 장애인들을 만난 것이다.

 

▲ 양지직업훈련원에서 작업 중인 장애인 훈련생들.     © 크리스찬리뷰


 
“그들을 차마 모른 체 할 수가 없었습니다. 방안에 갇혀서 온 종일을 보내는 장애인들, 당장 수술이 필요한데 돈이 없어 시름시름 죽어가는 장애인들, 사회에 나가 병신 소릴 들으며 때로는 폭행을 당하는가 하면 불구라고 일을 할 수가 없었죠. 물론 학교도 입학할 수가 없었고요. 학교에서 거부했죠.”

 

▲ 노승배 목사의 세 딸들(뒷줄)과 서두화 목사와 아들 크리스토퍼스 씨. 그리고 민보은 선교사(왼쪽 2번째)가 김희재 원장과 아들이 함께했다.     © 크리스찬리뷰


신 장로는 장애인들을 위해 넝마주이도 했다고 했다. 경찰서에 불려간 것은 수도 없었다.
 
“제 집은 비가 오면 지붕이 새는 집이었어요. 겨울엔 난방장치도 제대로 안되어 혹독한 추위를 이겨야 했고요. 노승배 선교사님과 사모님의 기도하는 모습이 지금도 선합니다.”

 

인생의 절정.
  하늘로부터 안고 왔던 사랑의 선물,
  신체장애인에게 아낌없이 털어주고
  이제 빛도 향기도 없는 인생의 뒤안길.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는 영혼.
  땅에다 주어야 할 것 다 주었기에 미련도 없고
  숨겨둔 것 없었기에 아낄 것도 없었던 사랑의 생애.

 

아, 장애인에게 폈던 열정과 추억과 갖가지 열매를 안고 있는 그의 84년의 가슴속의 것을 어찌 다 알 수 있으랴. 마음이 우우 흔들렸다.

 

일신기독병원

▲ 일신기독병원 역사관에 전시되어 있는 설립자 매혜란(Dr. Helen Mackenzie) 선교사(오른쪽)와 매혜영 선교사(Catherine Mackenzie)     © 크리스찬리뷰

 

일행이 다음으로 향한 곳은 일신기독병원이다. 일신부인병원(일신기독병원 전신)이 설립된 것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9월이다. 당시 한국으로 파송된 두 자매, 헬렌 맥켄지(Helen Mackenzie, 한국명 매혜란)와 동생 캐더린 맥켄지(Catherine Mackenzie, 한국명 매혜영)에 의해서였다. 언니 헬렌은 산부인과 의사였고 동생 캐더린은 간호사였다.
 
‘한국 나환자의 아버지’로 불렸던 제임스 노블 맥켄지(Rev. J. N. Mackenzie, 한국명 매견시, 부산 1910- 1939)의 장녀와 차녀인 두 남매가 가난하고 보호받지 못하는 여성을 위해 시작한 의료시설이 지금의 일신기독병원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아버지 맥켄지 선교사는 한국에서 사는 동안 네 아이를 얻었는데, 막내 제임스 아서 고든(James Arthur Gorden)은 두 살 때 디프테리아로 사망했고, 현재 부산진교회 묘지에 묻혀있다.
 
맥켄지 선교사는 1912년부터 27년 동안 나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과 함께했다. 1912년 감만동 한센병치료센터는 처음 20여 명에 불과했으나 1935년에는 600여명이 생활했다. 많은 환자들이 그를 찾아왔다. 손양원 목사는 한센병을 돌보던 상애원 전도사로 일했다.
 
“오늘 난 두 명의 남성과 한 여성 나환자의 수용을 거절해야 했다. 수용 인원이 넘쳐서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종일 내 마음이 아프다. 7명의 남자와 3명의 여자가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줄 물병을 들면서도 정말 큰 영광이라고 느꼈다.”

 

▲ 매견시 목사 한국 선교 25주년 기념문     © 크리스찬리뷰



“여자가 다리를 약간 절며 우리 집에 왔는데 달걀 꾸러미를 들고 있었다. 그건 우리 병원에서 나병을 치료받고 가져온 감사의 선물이었다. 우린 썩어가는 그녀의 다리 한쪽을 절단했고 의족을 만들어줬다. 18세 처녀였다.”
 
맥켄지 선교사 사역 초기 일기이다. 그의 나환자 사역은 1938년까지 계속됐다. 목사로서 1920년 중반까지 부산을 중심으로 13-15개 교회 순회 목회를 겸했다. 지금의 부산 창대교회(옛 상애원)는 나환자 선교에서 비롯됐다. 맥켄지는 나환자를 위해 의사면허도 취득했다. 그런 그가 은퇴해 1939년 호주로 돌아가자, 나환자들은 맥켄지를 기념해 ‘한국 나환자들의 아버지’라는 기념비를 세웠다.
 
본지 권순형 발행인도 맥켄지 선교사의 희생적 정신을 이어받아 지난 2011년 5월 호주맥켄지한센선교회를 설립했다. 호주맥켄지한센선교회는 사역의 범위를 확장하기 위해 2019년 5월 8일 호주맥켄지의료선교회(The Mackenzie Medical Mission in Australia)로 명칭을 바꾸고 새롭게 출발해 많은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병원 안으로 들어서는 선교사 후손들의 표정엔 호기심과 긴장감이 교차했다.
 
“어서들 오세요. 환영합니다.”
 
한호기독교선교회 이사장 인명진 목사와 서성숙 원장, 병원선교회 이정화 전도사가 가지런히 두 손을 모으며 반갑게 맞이했다. 방문 일행도 허리를 굽혀 한국식으로 인사를 했다.

 

▲ 일신기독병원 서성숙 원장이 방문객들에게 감사 인사와 함께 병원 현황을 설명하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본관 홀로 안내된 일행은 ‘일신기독병원 역사’ 홍보영상을 관람했고, 이정화 전도사가 병원을 소개했다. 인명진 목사는 인사말을 통해 “호주선교사들이 세운 기독교학교와 기관들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지는 아픔을 겪었지만 유일하게 남은 일신기독병원은 이사회와 병원 직원들이 한뜻이 되어 오늘의 발전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면서 “미얀마에도 병원을 세워 맥켄지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고 덧붙였다.

▲ 일신기독병원 서성숙 원장.     © 크리스찬리뷰


이어 일신기독병원 서성숙(55) 원장은 “1989년 이 병원에서 인턴으로 시작하여 레지던트 4년을 바바라 마틴 선교사님에게 배웠다."면서 “일신기독병원을 체계적인 시스템구축으로 인재를 키우는 병원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마이크를 건네받은 헬렌(80. Helen Mckinnon 한국명 민혜란) 선교사는 “1964년부터 1969년까지 부산에서 사역했다. 우리 둘째 딸 바바라(54. Barbara A. Caruana)는 이 병원에서 태어났고 이 병원 맥켄지 선교사는 내 맹장수술까지 해주셨다”고 인사하자 일제히 박수치며 탄성을 터뜨렸다.

 

▲ 일신기독병원의 과거와 현재.     © 크리스찬리뷰


이어 헬렌 선교사는 “이번에 와서 참 가르침을 많이 받았다. 특히 한국 분들이 역사를 기억하고 보존하고 교육하는 어마어마한 힘을 호주사람들이 전적으로 배워야 한다”면서 “많은 호주사람들이 한국선교에 대한 역사를 잘 모르고 있는데 돌아가면 우리 모두가 이야기를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일신기독병원방문 기념 촬영     © 크리스찬리뷰


민보은 선교사는 “매헤란, 매혜영 두 자매가 부산진교회의 유치원 건물에서 처음 병원 문을 열었는데 그때는 직원이 5명에서 시작했었다”라며 “지금은 4개의 병원과 1천여 명이 넘는 직원들이 함께하고, 산부인과 외에 내과, 외과, 소아과 등 여러 진료과목들이 생겨 많은 사람들을 치료해줄 수 있게 됐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어 “이만큼 성장한 것은 여러분이 함께 한마음으로 열심히 일하고 노력해준 결과”라며 “하나님의 뜻으로 세운 병원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환자를 잘 돌봐주시길 바란다”고 감사와 당부의 말을 전했다.
 
1993년 4월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아기에게 친근한 병원’으로 선정된 일신기독병원은 현재 부산에 화명일신기독병원, 맥켄지화명일신기독병원, 정관일신기독병원, 미얀마 일신배데스다병원 등 5개 지역에서 환자중심, 생명존중의 좋은 병원으로 성장하고 있다.

 

▲ 일신기독병원에서 32년간 헌신한 민보은 선교사의 업적을 기리는 ‘민보은 홀’(예배실)이 화명일신기독병원 6층에 자리 잡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일행은 병원을 둘러본 뒤 곧바로 ‘바바라 마틴 홀’이 있는 맥켄지화명일신기독병원으로 갔다. 부산시 덕천동에 위치한 맥켄지화명일신기독병원(장철원 원장)은 2015년 3월에 준공해 진료를 시작했다. 재활치료센터와 MRI하이프센터를 갖추고 재활의학과와 신경과, 소아청소년과 등의 진료과목을 운영하고 있으며 지하 1층, 지상 5층의 규모이다.
 
‘바바라 마틴 홀’은 산부인과 의사로 32년간 일신병원에서 헌신한 바바라 마틴(86. Dr. Barbara Martin) 선교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마련했다. 민보은 선교사는 “다른 곳에서 선교를 하기 위한 마지막 준비기간이라고 생각하고, 1964년 일신기독병원 매혜란 선교사님의 안식년 1년 동안 일하기 위해서 왔지만 점점 마음속에서 계속 이곳에서 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느껴졌다”며 “1995년까지 일을 했는데 정말 특별한 32년이었다. 제 삶이 풍성한 축복의 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민 선교사는 “힘든 점도 있었지만 한국에 와서 배운 것이 많다. 풍성한 문화를 이해하게 된 것, 좋은 친구를 만난 것, 아름다운 나라를 여행하게 된 것, 제가 가르친 이들이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게 되는 것을 보게 된 일 등 정말 소중한 시간이었다”며 “일신기독병원은 부산과 근방지역에서 그리스도의 신실한 종의 역할을 했고, 제가 그 증인의 일부가 되었던 것은 특권이었다.
 
한국교회와 관계를 맺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말했다.
 
민보은 선교사는 힘차게 사역을 하던 그때를 회상하는지 즐겁게 웃었다.
 
일행은 바바라 마틴 홀에서 만찬과 담소를 나누며 교제하는 시간을 갖고 방문행사를 마무리했다.
 

부산 수영로교회

▲ 수영로교회를 찾은 방문단이 교회 관계자로부터 안내를 받고 있다.     ©크리스찬리뷰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참 숨 가쁜 일주일이었다. 우리 일행은 서둘러 짐을 챙겨 호텔을 나섰다. 버스에 올라 향한 곳은 수영로교회이다. 감사하게도 이규현 목사가 우리 일행을 점심식사에 특별히 초대했기 때문이다.
 
교회는 장중했다. 건물의 크기는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 일행은 안내를 받아 교회 안으로 들어섰다. 꾸밈도 장식도 호들갑도 없었으나 주께서 즐거이 머물고 계신 교회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 이렇게 그윽할 수가. 사랑과 정성을 다해 가꾸고 지키는 흔적이 역력했다. 수요일인데도 교인들이 모여 일하고 있었다. 구석구석이 알뜰했고 사랑과 정성이 스며있었으며 신앙의 간증이 서려있었다.
 
성도들이 한창 기도하고 있는 대예배실로 들어갔다. 아늑하고 다정했다. 함께 기도를 하고 나오는데 누구인가 민보은 선교사의 팔을 잡았다.
 
“선교사님”
“이게 누구인가?”
“저에요. 인덕이요.”
“인덕이? 아, 김인덕.”
민보은 선교사는 김인덕(66) 씨의 두 손을 맞잡고 매혜란 선교사의 양녀라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그저 놀랍고 즐거워서 그 영혼이 더덩실 춤추듯 한 웃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민 선교사는 감회어린 표정으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인덕이가 어렸을 때 많이 아팠어요. 5살 때인가 그땐 너무 아파 내가 무척 돌봐줬는데.”
 
 “선교사님 기억나요. 어떻게 이런 곳에서 우연히 만날 수 있나요.”
 
“그러게. 참 인덕이도 점심 식사하러 같이 가자.”

▲ 수영로교회 수요예배를 마친 후매혜란 선교사의 양녀로 알려진 김인덕 씨가 민보은 선교사를 우연히 만나 반갑게 이야기 꽃을 피웠다.     © 크리스찬리뷰

 


안내를 받아 11층 비전센터 최상층에 자리한 스카이라운지로 올라가니 자그마한 체구의 이규현(64) 목사가 인심 좋은 머슴 같은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겸손과 자애가 주변의 공기까지 온통 따뜻하게 덥혀줄 것 같은 그런 모습이었다.
 
이 목사는 지난 2011년 10월부터 담임목사로 출석 신도 3만 명의 수영로교회를 이끌고 있다. 취임 당시 호주에서 오는 낯선 목사를 놓고 우려하던 시선은 이젠 사라졌다. 지금 신자들 사이엔 “정말 좋은 분을 모셨다”는 말이 끊이질 않는다.
 
이 목사의 열정적 목회와 검소한 삶이 우려를 믿음으로 돌려놓은 것이다. 부산 토박이인 이 목사는 독실한 불교 집안에 태어났지만 주일학교 때부터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서울 총신대 신학대학원에서 신학공부한 뒤 호주에서 시드니새순교회를 개척해 약 20년간 사역했다.

▲ 한호 선교 130주년 기념대회 공식 일정 마지막 날 수영로교회 담임 이규현 목사가 방문단을 초청, 비전센터 스카이라운지에서 환송 오찬을 베풀고 기념촬영을 가졌다.     © 크리스찬리뷰


음식이 자리한 스카이라운지는 부산 일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고 절경들이 통 유리창으로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그곳에는 세팅된 식탁 위에 크리스탈 유리잔과 꽃무늬의 티슈가 정성스런 모습으로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 환영인사를 전하는 이규현 목사(왼쪽)와 통역을 맡은 박웅걸 목사.     © 크리스찬리뷰


이규현 목사는 “부산에서 태어나 이 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했고 여기서 결혼도 했다”고 인사를 건네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어 그는 “호주로 유학을 갔으나 하지 못하고 교회를 개척하게 됐다. 20년 후 이 교회 2대 목사로 부르심을 받았다. 이 교회는 8년 전 원로목사가 된 정필도(80) 목사가 44년 전에 세워 불교세가 강한 항도 부산에서 큰 메가 처치로 건강한 교회로 키웠다는데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덧붙였다.
 
또 이 목사는 “이 모든 영적인 혜택은 호주 선교사들이 뿌린 복음의 열매라고 생각한다. 호주와 부산은 깊은 인연이 있다. 호주 선교사님들이 부산에 씨앗을 뿌렸고 저는 호주에서 목회를 했고 그래서 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 오늘 소박한 접대이지만 즐거운 시간되시길 바란다”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자, 이제 점심을 드시면서 이야기를 하실까요?”
  그러자 통역을 맡은 박웅걸(쏜리연합교회) 목사가 자랑스럽게 외쳤다.
  “서두화 목사님 식사 기도해 주세요.”
  “저요? 큰일 났습니다.”

 

▲ 유창한 한국말로 기도하는 서두화 목사(왼쪽)와 이규현 목사.     © 크리스찬리뷰


서두화 선교사는 “50년간 한국에서 생활했지만, 호주로 돌아간 뒤에는 사용을 안 하다 보니 한국말이 어색하다. 머리 안 좋아 죄송하다”고 연발하자 또다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익숙한 한국말로 기도를 했다. 누가 그를 구십삼 세라 하랴. 활기차고 애교도 넘쳐흘렀다.

▲ 수영로교회에서 모든 일정을 마친 후 축복송을 부르며 서로를 축복하며 귀국길에 올랐다.     © 크리스찬리뷰


 
“하나님 아버지 무한히 감사합니다. 우리를 잘 지도해 주시고, 잘 지켜주시고 사랑하시니 우리는 늘 감사하옵나이다. 또 부산까지 인도하시고 좋은 사람 만나게 하시니 하나님 감사한 마음 드리옵나이다. 이 음식을 먹고 건강한 몸을 주시고 하나님 뜻대로 생활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점심은 환송을 겸한 풍성한 뷔페였다. 처음 보는 요리도 있었다. 너무나 로맨틱한 분위기. 빨간 아름다운 식탁보, 그 위에 놓인 무지개색의 꽃꽂이, 먹음직스러운 갖가지 요리들. 화려하지 않지만 아기자기하고, 소박하나 품위 있는 식탁이었다. 모두들 좋아죽는 그런 미소를 내내 짓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는데 시각은 어느새 오후 1시쯤. 이제 작별의 시간이다. 이규현 목사는 “다음에 또 기회가 되면 제가 제대로 모시겠습니다”라고 작별인사를 건네자 모두 흥분하여 크게 몸을 흔들며 박장대소를 했다.
 
참으로 숨 가쁜 일주일이었다. 선교사 후손들은 한국교회의 환대에 거듭 감사의 뜻을 표시했다.
 
변조은 목사는 “이곳을 거쳐 간 호주 선교사들이 한국의 형제 자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면서 “호주선교의 역사를 이렇게 한눈에 볼 수 있게 만든 곳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다”며 감격스러워했다.
 
서두화 목사는 “헌신과 희생으로 선교활동 한 것이 이렇게 많은 열매를 맺게 되어 감격하다”며 “하나님께 감사드릴 뿐이다”라고 고백했다.
 
민보은 선교사는 “한국에서 일했던 이들은 한국을 잊을 수 없다. 마음속에 늘 한국이 남아있다. 호주 선교사들이 부산 경남지역 그리스도의 증인의 역할을 감당했는데 내가 그 증인의 한 명이 되어 영광이었다”면서 “한국교회가 세계에 계속해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축복이 계속되길 기도한다”고 말했다.

 

▲ 좋은 분위기 속에서 환송 오찬을 즐기는 호주선교사와 후손들.     © 크리스찬리뷰



선교사 후손 일행은 한호선교 130주년 축제의 대장정을 마무리 짓고, 일부는 김해공항으로 일부는 부산역을 향해 출발했다.
 
모두들 서운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금세 까르르 웃으면서. 〠 (끝)

 

김명동|본지 편집인
권순형|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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