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론(人間論), 인간이란 무엇인가? IV

주경식/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0/03/31 [15:30]

 종교개혁자들의 하나님의 형상 이해

 

종교개혁자들이 이해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 본성 안에 있는 어떤 구조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지위(standing)로 이해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형상은 창조주 하나님이 하나님을 대신해서 아담에게 모든 피조물을 관리하게 하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창 1:28)”
 
즉 다른 피조물 들과는 구별된 지위 (standing)와 특별히 창조주 하나님과 가질 수 있는 인격적인 관계로 이해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피조물위에 군림하라고 특별한 지위를 주신 것이 아니다. 다른 피조물과는 다르게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을 하나님을 대신해 관리하는, 하나님을 대변하는 관계로 부르신 것이며 또한 하나님은 아담에게 자신과 자유롭게 교제할 수 있는 인격적인 존재로 부르신 것이다.
 
이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지만 종교개혁자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주와의 특별한 관계가 회복된 것으로 본다. 20세기의 신정통주의 신학자들 속에서도 이 견해는 많은 지지를 얻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신 정통주의 신학자들뿐만 아니라 많은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주로 하나님과의 “관계”속에 있는 우리의 지위(standing)로 이해한다. 

 
하나님 형상의 신학적 종합

 
하나님의 형상은 분명히 다른 피조물들과 구별되게 하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들은 분명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수혜자들이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특별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신을 대신해 모든 피조물을 관리하도록 특별한 지위(standing)를 주셨다.
 
그러나 우리의 관리는 지배와 착취가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피조물들에게 사랑으로 나타내 보여주어야 한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반사(reflect)하는 거울로서 피조세계를 관리해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하여 부름을 받은 자들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형상으로 만드신 의도는 우리와 인격적이면서도 자유로운 교제를 하기 위해 만드셨다.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었던 근거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 안에 구조적이든 아니면 우리의 지위에서든, 하나님과 교제하고 공유할 수 있는 그 무엇인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과 하나님과의 교제하는 존재로 규명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 사이의 교제와 사랑을 위해 부름 받은 존재의 의미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태초에 삼위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하고 계셨을까? 삼위 하나님께서는 사랑으로 교제를 하고 계셨다고 신학자들은 확신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는 인간 공동체 안에서 삼위 하나님께서 교제와 사랑으로 하나 되셨듯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며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부르신 중요한 목적 중 하나인 것이다.
 
그래서 호주의 유명한 성서신학자인 그레엄 골드워디는 그의 책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참 형상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참 형상이라는 것의 요점은 “1) 인간이 피조물의 정상이며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인간의 독특성과 2) 자신의 존재를 위해서는 전적으로 창조주께 의존해야만 하는 인간의 피조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라고 피력한다.
 
이것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새로운 인류의 창시자 (Head)라는 사실과 그분에게 연합되는 자는 모두 이 새로운 인류의 일원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긍극적으로 인간이 닮아야 할 인간 모범의 극치이고 예수의 존재는 바로 하나님과 인간이 가장 완전하게 조화된 존재임을 보여주는 하나님 형상의 실재(reality)이기도 하다.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

 

성경은 분명히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듯, 인간도 남자와 여자로 지음 받았으나 한 몸이 된다.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다양성(삼위) 안에서의 일치성(일체)을 계시하시듯, 인간도 남자와 여자라는 복수성과 동시에 남편과 아내가 합하여 하나가 된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예수님이 인용하셨던 창세기의 구절을 인용하며 남자와 여자의 한 몸됨, 이 얼마나 신비한 것인가? 놀라운 이야기를 제시한다.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엡 5:32,33)
 
남자와 여자, 부부의 결합의 비밀은 그리고 결코 나누어질 수 없는 비밀은 교회의 비밀이며 신랑 예수님과 신부 성도 사이에 있는 비밀로까지 승화시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을 볼 때 우리는 우리를 디자인하신 분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속에서 더 완전한 인간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인간–타자와의 관계성 속에서


20세기의 위대한 철학자 마틴 부버(Martin Buber)도 인간의 가장 큰 특징을 ‘나와 너’ 라는 관계성과 인격성에 있음을 발견하고 100페이지 정도의 작은 분량의 책을 썼지만 그 영향력은 유럽을 흔들 정도로 실로 대단하였다. 그렇다면 ’나와 너’ 라는 관계가 강조하는 것은 무엇일까?

 

부버는 인간은 ‘나와 너(I and Thou)’의 관계가 있고 ‘나와 그것(I and it)’의 관계가 있다고 분석한다. 물질에 대한 탐심을 가지고 타자를 바라보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격체가 아닌 수단과 탐욕의 대상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런 관계성은 결국 ‘나와 너’의 관계성에서 ‘나와 그것(I and it)’의 관계성으로 전락된 것이다. 그러므로 부버는 인간이 자신의 참다운 정체성을 발견하고 인간이 인간으로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나와 너’의 관계를 맺을 때라고 말한다. 그것은 인간은 관계 속에서 진정한 인간 본연의 자아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부버는 ‘인간의 모든 진정한 삶은 만남과 관계’라고 생각하고 인간은 ‘나와 너’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음으로 나와 더불어 인간 현실에 참여하고, 나는 인격적인 너와 더불어 현실을 나눠 가짐으로 말미암아 현재적 존재가 되므로 인간은 홀로 존재하는 존재가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인간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계속>


주경식|본지 편집국장, 호주비전국제 대학 Director, 전 시드니신학대학, 웨슬리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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