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5 총선이 주는 교훈
 
주경식/크리스찬리뷰

 

▲ 제21대 국회의원 개표 현장.  ©국민일보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들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다.

<플라톤 국가 중>

 

정치는 불과 같다.

화상을 입지 않으려면 가까이해서는 안되고

동상을 입지 않으려면 멀리해서도 안된다.

<안티스테네스>

 

뜨거운 감자

 

4.15 총선을 며칠 앞두고 몇 명의 목사들과 사람들로부터 긴 문장의 카톡 메시지를 받았다. 모두 비슷한 내용의 메시지였다. 이번 4.15총선은 체제를 선택하는 선거라는 것이다. 만약 민주당을 찍으면 한국이 주사파 공산국가가 될 것이고, 앞으로 한국 교회는 중국이나 북한처럼 탄압받는 교회가 될 것이라는 탄식조의 긴 내용의 문자였다.

 

아마도 한국교회 안에서 널리 퍼져 돌아다녔던 문자로 짐작된다. 실은 이런 비슷한 내용은 김대중 씨가 대통령으로 나왔던 때부터 노무현, 문재인 때까지 꾸준히 회자되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정치’라는 이슈는 한국교회 안에서 뜨거운 감자이다. 어떤 교회에서는 구역예배를 드리는 중 정치이야기를 꺼내 놓았다가 대판 싸움이 벌어져 곤혹을 치루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래서 대다수의 한국교회에서는 교회 안에서 되도록이면 정치 이야기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회에서 정치 이야기를 꺼냈다가는 본전도 못 찾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들은 가능한 설교 시간에 정치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특별한 배짱이 있거나, 후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국교회 안에서 목사들은 정치적 이슈를 감히 꺼내 놓지 못한다.

 

그런데도 4.15 총선을 앞두고 교계의 몇몇 원로들이 “이번 선거는 체제를 선택하는 선거다”등등의 이야기를 꺼내 놓아 사회적 이슈가 되기도 했다. 앞으로 이분들의 선언대로 대한민국이 주사파 공산국가 되고 교회가 탄압을 받게 될 것인지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어쨌든, 교회는 세상 정치에 정말 관심을 두지 말아야 하는가? 신앙인은 오직 신앙과 하나님나라에만 집중하고 세상 정치에 관심을 두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인가? 하는 진지한 질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교회는 세상 정치에 정말 관심을 두지 말아야 하는가? 신앙과 정치는 상관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신앙인은 세속 정치에 관심을 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도 정치에 관심을 갖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곧잘 꺼내 오는 인용이 있다. 바로 초대 교부 터툴리안의 말이다.

 

“예루살렘과 아테네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다시 말해 신앙을 대변하는 예루살렘과 철학을 대변하는 아테네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는 말이다. 얼핏 들으면 세속일에는 일체 관심을 끊고 신앙만 지키라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말은 그 당시 클레멘스가 철학을 통하여 기독교 신앙을 변증하려고 하는 것에 반대한 터툴리안이 “나는 스토아주의나 플라톤주의나 변증론에 근거한 그리스도교를 싫어한다"며 자신의 입장을 밝힐 때 사용했던 말이다.

 

클레멘스는 철학과 세상학문이 기독교를 변증하는데 유용한 도구라고 생각한 반면 터툴리안은 오직 진리는 하나님의 계시로만 가능하다는 입장이었다.

 

▲ 선거 유세 중인 더불어민주당 고민정 후보(서울 광진을)   ©국민일보     

 

▲ 선거 유세 중인 미래통합당 주호영 후보(대구 수성구갑). ©국민일보   


그러나 초대 교부 터툴리안의 이 말은 오랫동안 기독교 신앙에 이원론을 조장하는 말로 이용당해 왔다. 기독교 신앙은 진공 속에서 존재하는 삶과 유리된 진리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매일 숨쉬고, 만지고, 먹고 만나고, 부딪히고, 지지고, 볶는 현실과 마주하는 진리이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지만, 우리가 현재 잇대어 살고 있는 이 땅을 외면한 신앙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현실을 부정한다면 초대교회의 영지주의 이단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을 교회와 세상, 현세와 내세, 하늘과 땅, 성과 속, 영혼과 육신 등 이원론적 이분법으로 나누는 것은 성경적 사상이 아니다. 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이상 우리는 세상을 부정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는 우리의 신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의 정치학

 

우리가 숨쉬고 이 땅에 발을 딛고 집단을 이루며 살고 있는 이상, 정치와 분리되어 살 수 있는 곳은 없다. 실상 정치라는 용어가 국가라는 단어와 일차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선입견 때문에 정치하면 국가정치를 연상하지만 정치는 두 명 이상의 공동체가 존재하는 곳에는 어디든지 존재한다.

 

정치는 모든 사회집단의 활동에서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가장 작게는 가족 안에도 정치가 존재한다. 가족 간에도 서로 헤게모니를 잡기 위한 정치가 있다. 교회 안에는 정치가 없는가? 오죽하면 신학교의 커리큘럼에 ‘교회 정치’라는 과목이 존재한다. 사회집단이 존재하는 모든 곳에는 정치 현상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정치는 부, 권력, 명예 등의 사회적 희소가치를 권위적으로 배분하는 활동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특성상 어느 집단에서든 정치 행위를 안하고 살 수는 없다. 그런데도 ‘교회는 정치에 관심을 가져서는 안된다.’ ‘기독교신앙은 정치와 상관없다’ 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현실을 부정하는 영지주의적 발상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은 어떻게 정치에 참여해야 하는가?

 

재세레파 신학자인 존 하워드 요더는 ‘예수의 정치학’이라는 유명한 책을 썼다. 20세기의 고전이라 불리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는 책이다. 이 책에서 요더는 누가복음을 신학적으로 해석하면서 예수의 삶과 가르침이 하나님 나라 백성다운 삶의 모델과 규범임을 천명하고 있다.

 

이곳에서 예수의 정치학을 다 논할 수는 없지만 요더는 예수는 예수 나름의 정치적 입장(평화주의, 사랑, 연민, 용서, 약자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사셨으며 우리도 예수의 정치적 입장을 따를 때 하나님께서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도래하게 하신다는 내용이다.

 

신앙인은 어떻게 정치에 참여할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정치를 멀리하거나 현실 정치를 외면하는 것은 하나님나라를 오직 영적인 세계에서만 찾겠다는 영지주의적 발상이 될 수밖에 없다. 예수는 하나님나라가 여기 오늘 너희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다. 여기 오늘 현재를 부인하는 삶은 진정한 신앙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이미 우리는 이 땅에서 여러 차원의 정치적 행위들을 하고 있고 정치 속에서 살아왔다. 가장 작게는 가정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정치행위를 하고 있다. 그동안 가정에서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순종하며 예수의 정치적 입장을 따라왔는가? 교회에서는 어떠한가?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가? 섬기려고 하는가? 약한 자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보이고 있는가? 부자와 강한 자들에만 아첨과 관심을 보이고 있지는 않았는가?

 

▲ 제21대 국회의원 선거는 300명의 국회의원을 1인 2표제 방식으로 선출했다. 한 유권자가 기표를 한 뒤 기표소를 나서고 있다.  ©국민일보     

 

이외에도 우리가 속해 있는 사회의 여러 집단 안에서도 우리는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우리의 정치적 입장을 시험해 볼 수 있다.

 

이미 우리는 우리가 속해 있는 다양한 공동체의 삶속에서 숱한 정치적 행위들을 해왔다. 그리고 우리의 정치적 행위들은 이미 예수의 가르침과 삶에 비추어 보면 아름답고 선한 정치적 삶을 살았는지 그렇지 않았는지 스스로들 평가가 될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형식적으로는 전혀 정치적이지 않지만 내용적으로는 철저하게 정치적 행위들을 요구한다. 우리가 속해 있는 모든 집단과 공동체 속에서 우리는 예수의 삶과 가르침- 이것은 위에서 보았듯이 이 땅에서 사셨던 예수의 정치적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을 따르며 살아야 할지 아니면 거슬리며 살아야 할지를 요구받는다.

 

국가 정치에 참여하기

 

국가라는 공동체는 규모가 크기 때문에 모든 국민이 직접 정치에 간섭하거나 통치에 참여할 수 없다. 대신 국가의 정치에 참여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대의 민주주의 방식으로 국민(자신)의 의견을 반영할 정치인을 세워 간접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방식이다.

 

다른 하나는 시민운동단체들을 조직하여 정부를 견제하고 비판하는 일들을 통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현대 시민의 의무이자 권리이다.

 

먼저 대의민주주의 방식에서 예수의 정치적 입장을 어떻게 따를 수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투표를 하는 일이다.

 

그리고 신앙인이 투표를 할 때 정치가의 종교를 보고 투표를 하기보다는 그동안 그가 살아온 삶의 족적과 태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떤 정치가의 입장이 가장 예수의 정치적 입장에 가까운가? 어떤 정치가가 가장 예수의 가르침을 대변하고 있는가? 숙고하고 자신의 귀중한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일 것이다.

 

투표를 행사하기 위해 정치가를 선택할 때 지역이나, 당이나, 종교 등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사적 이익이 아니라 철저히 공적 목적 혹은 공공선을 지향하고 헌신하려는 자인가? 후보자의 마음 등을 살펴보며 내건 공약(막말 공약이나 지킬수 없는 공약이 아니라)이나 아니면 그동안 그가 국민에게 보여주었던 삶의 진실한 모습들을 보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는 시민.  ©국민일보     

 

4.15 총선이 한국교회에 주는 교훈

 

지난 4월 15일 치러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과 더불어시민당은 전체 국회의석 300석 가운데 과반이 넘는 180석을 차지해 압승을 거두었다. 지역구에서만 따지더라도 더불어 민주당은 163석으로 미래통합당 84석보다 거의 두 배 가까운 차이로 승리했다.

 

이번 민주당이 지역구에서 얻은 득표율 49.91%는 지난 1967년 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이 득표한 50.62% 이후 53년 만의 최고기록으로 전해진다.

 

이번 선거에서 야당인 미래통합당이 참패한 원인으로 매스컴마다 여러 가지 요인들을 들고 있다. 그중 공통적인 것 가운데 첫 번째는 바로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낡은 인식에 젖어 있는 것을 꼽았다.

 

▲ 당선증 받은 이낙연 후보(위 오른쪽부터 시계방향)와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가 총선 참패의 책임을 지고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정의당 심상정 상임선대위원장이 해단식에서 인사말을 하던 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동작을에서 당선된 이수진 후보. 제21대 국회의원 당선인 초청 토론회. 개표 장면.  ©국민일보 

 

세상은 빠르게 변해가는데 한국의 수구 보수층은 여전히 낡은 인식과 이념에 머물러 있다. 그저 “북한을 때려잡자 공산당”식으로 인식하고 통일 한국의 비전을 전혀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의식이 성숙된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선거 때마다 ‘간첩조작사건’등과 ‘반공’을 위협으로 한 여론몰이가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된 것이다.

 

게다가 임시정부의 건국을 부정하고 이승만을 국부로 여기며 일본이 경제침략을 해와도 일본편을 들고 있는 이상 국민들의 외면은 당연한 것이다.

 

두 번째는 공감 능력의 부족이다. 이번 총선의 막바지에서 미래통합당의 후보들 가운데 노인 비하와 세월호 막말 등으로 제명당한 후보들도 있다. 이것은 미통당이 평상시 어떤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지 그들의 품격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국민들은 정치가들에게 소시민들의 애환과 눈물을 닦아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그런데 자식을 잃고 슬퍼하는 부모들 앞에서 폭식투쟁을 하며 비웃고, 세월호로 찜져먹고 회쳐먹는다는 사람을 후보로 내보내고, 5.18은 세금 잡아먹는 도적이라고 5.18유가족들의 가슴에 못을 박는 사람들이 미통당 내에는 수두룩하다.

 

소시민들의 눈물과 애환에 공감하지 못하는 자들은 자신의 이익과 명예를 위해서 정치를 하는 것이지 국민의 대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세 번째는 대안없이 무조건 반대만을 외치는 행보이다. 정치는 공공선을 지향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당의 사적인 이익을 위해서 대안없이 무조건 반대만 외쳤던 지난 행보에 국민들이 실망했다. 오죽하면 식물국회라 하지 않았나? 국회의원이 국회에서 활동해야 하는데 태극기 부대와 어울려 심지어 전광훈 같은 자들과 함께 투사라도 된 것처럼 문재인 타도만 외치다 지난 4년의 국회 일정을 소진해 버렸다.

 

▲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상임공동선대위원장이 15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 마련된 당 선거상황실에서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종합상황판에 이낙연 후보의 당선 스티커를 붙이고 있다.  ©국민일보  

 

한국교회는 이번 선거를 통해 깨달아야 한다. 교회도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낡은 인식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면 쇠락할 수밖에 없다. 세상은 무섭게 변화하고 있다. 이 빠른 변화 속에서 새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담으려고 하면 터질 수밖에 없다.

 

4차 산업혁명시대에 걸 맞는 옷을 입고 준비를 해야 한다. 앞으로 세계는 COVID 19 전의 세계와 COVID 19후의 세계로 나누어 질 것이다. 이러한 때 교회가 준비하지 못하고 낡은 관습에만 목매고 있다면 중세의 기독교처럼 매몰되고 말것이다.

 

네 번째 교회는 우는 자들과 함께 울어주는 교회여야 한다.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 소망하는 가장 큰 기대가 무엇일까? 그것은 공감능력이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억눌리고, 배고프고, 소외되고, 착취당하는 자들의 편에 서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 한국교회의 행보는 이와는 다른 길을 걸어왔다. 힘있는 자들(독재와 군부세력)과 재벌과 부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과 같이 되기를 원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세월호로 자식을 잃고 무너진 가슴을 억누르는 부모들의 편에 서서 선지자의 소리를 내었던 적이 있던가?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라느니,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소리로 무너진 부모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지 그들을 진심으로 공감하지 못했다. 아직도 한국에는 철탑 안에 갖혀 생존권을 위협받고 절규하는 노동자들이 있다. 그러나 어느 한국교회가 그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있는가?

 

눈물 흘리며 슬퍼하는자들, 억울하여 절규하는 자들의 편에 서지 못하고 그들의 아픔을 공감하지 못한다면 교회의 공적기능은 무너진 것이다.

 

교회는 더 이상 신앙을 발품삼아 중산층이 자신들의 부를 이룬 것에 만족하여 우리끼리만 좋은 신앙 안에 머물러서는 안될 것이다. 아직도 세상에는 가난하고, 힘들고, 어렵고, 억울한 사람들이 많다. 누가 이들을 위로할 것인가? 5G 테크놀로지가 일상화되고 아무리 세계가 급변한다 하더라도 교회가 이들의 소망이 되어야 할 것이다.<사진제공= 국민일보>

 

주경식|본지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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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4/27 [15:46]  최종편집: ⓒ christian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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