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누구인가? 기독론(基督論) V

주경식/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0/09/28 [15:24]

 

예수에 대한 참된 이해

 

톰라이트는 예수에 대해 이렇게 묘사한다.

 

“당시에 그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요7:46)라고 말하곤 했다. 그의 능숙한 연설 말투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예수는 당시 사람들을 수수께기에 빠뜨렸고 지금도 우리를 수수께기에 빠뜨린다.”

 

예수는 신비로운 존재다.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예수만큼 인류의 역사에 영향을 끼친 인물은 없다. 그의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그와 인격적인 조우를 한 사람들은 변화를 가져왔다.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좆으니라(눅5:11, 베드로와 제자들). 이 사람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마 27:52, 백부장). 이러한 고백들 외에도 예수를 진정으로 만났던 사람들은 하나 같이 예수를 나의 주요,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다(요 20:28, 도마)

 

예수를 바로 만났던 사람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모두 변화의 삶을 살고 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기독교의 출발이고 기독교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위에 세워졌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어떤 분인지 그가 무슨 일을 하였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기독론(그리스도연구)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예수는 그리스도시다

 

그래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었던 질문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가 사실 기독론연구의 출발이다.

 

이때 사람들은 예수를 세례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선지자 중의 하나로 인식했었던 것에 반해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 16 :16)이라고 고백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성경이 진술하는 대로 예수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인간의 가르침이나 깨우침에서 온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온 계시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임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예수는 바로 고백한 베드로에게 이렇게 칭찬한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 16:17).

 

베드로의 예수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이 그가 예수를 따라 다니며 체험하고 깨달아졌던 지식에 의해서라기보다는 - 물론 이런 체험과 깨달음이 천상의 계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 천상의 계시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바울도 “성령이 아니고서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전 12:3)라고 피력한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 예수연구는 객관적 자료의 분석이나 고고학적 문화적 접근만으로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예수에 대해서는 밝힐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모습이나 본성에 도달할 수 없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가 누구인가를 밝히기 위하여 역사적 문헌적 접근도 중요하지만 예수와의 인격적이고 신앙적인 교감이 절대 필요하다.

 

사실 어거스틴의 고백처럼 “참된 신앙이 없이는 온전한 이해도 없다”라는 말이 맞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각자의 신앙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처음 예수가 세상에 왔을 때는 백성들은 예수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거부했었다.

 

오직 소수만이 예수를 받아들이고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을 목도하고 성령의 오심을 경험한 사람들은 예수가 진정한 그리스도(메시야)임을 깨닫게 되었고 박해 가운데서도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이해는 인간들의 지식과 삶의 전 영역에 영향을 끼친다. 바울이 고백하듯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이해는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 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 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4-10)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행위의 심각성

 

예수 그리스도는 ‘주’이시다. 또는 ‘예수는 그리스도시다’라는 고백은 기독교의 핵심적인 고백이다. 예수를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사람들의 한결같은 고백은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란 말인가?”였고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요 20:28)과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마 16:16)로 고백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순수한 가치 중립적인 묘사가 아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시다”라는 고백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만난 사람들의 실존적인 구원의 체험이 담겨있고 그것을 다른 사람과 공유해야 하는 신학적 해명의 책임이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진지한 성찰을 요구한다.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단순히 입술로 예수를 주요,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다시 말해 예수가 가신 길을 걸어가겠다는 고백이고 예수가 가르치고 사신 삶의 모범대로 살겠다는 고백이다.

 

더 심각하게 말해서는 예수를 위해 죽기까지 따르겠다는 고백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초대교회에서 예수를 나의 주요, 그리스도시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로마 황제외에 예수를 자신의 신으로 인정하겠다는 행동이고 고백이기 때문에 로마의 통치윤리에 어긋나는 행위이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많은 그리스도인들, 예수를 주로 고백한 것 때문에 사자밥이 되거나 화형을 당한 자들을 통해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했던 일임을 우리에게 깨우친다.

 

지금의 시대에 예수를 주로 고백한다고 화형을 당하거나 사자밥으로 죽음에 내몰리는 경우는 없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행위가 가지고 있는 심각성을 - 단순히 입술의 고백만의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 우리에게 일깨운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우리는 그동안 예수에 대해 살펴보았다. 역사적 예수도 살펴보았고, 신앙의 그리스도도 살펴보았다. 톰 라이트(N.T. Wright)는 그의 책 <예수>에서 역사적 예수를 진지하게 연구하면 신앙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고 역설한다.

 

단지 역사상에 실존했던 나사렛 예수만을 경험했던 자리로부터 그 너머에 살아계시며 그리고 지금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천 년 기독교 역사 가운데 예수와 인격적으로 조우한 사람들은 변화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지식은 바울뿐만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수십 억 인류의 인생도 바꾸어 놓았다.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지식은 인간의 삶과 지식에 빛을 비추어왔고 사람들을 깨우치고 변화시켰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비치자 어두운 곳이 밝혀졌고 굽은 것들이 펴졌으며 사람들에게 인생의 참 의미와 소망을 가져다주었고 그들의 인생과 세계관을 변화시켰다.

 

그러므로 바울의 고백처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야 말로 가장 고상할 뿐 아니라 모든 인간들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주경식|본지 편집국장, 호주비전국제 대학 Director. ACC(호주기독교대학) /ACT 교수

▲ 주경식     © 크리스찬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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