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던 비전의 사람

추모 고(故) 백합 김만영 목사(브리즈번한인장로교회)

글/김명동 사진/권순형 | 입력 : 2020/10/26 [16:14]

 

▲ 비전의 사람 김만영 목사가 지난 9월 향년 82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BKPC     


브리즈번한인장로교회 김만영 원로목사가 지난 9월 11일 향년 82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호주인교회인 The Gap장로교회 담임목사로 23년, 호주장로교신학대학교수로 28년, 퀸즐랜드장로교 주 총회장(1990-1991), 브리즈번한인장로교회를 설립하여 30년을 목회한 김 목사는 호주사회에서 인정받은 목회자이자 신학자였고 교수였다.

 

특히 이민자인 한국인이 호주장로교의 주 총회장으로 선출된 것은 호주교회에서 전례가 없는 특별한 일이다.

 

한편 본지 편집고문(1999. 8~2020. 9)을 역임한 김 목사는 은퇴한 후에도 교회와 노회, 그리고 총회의 제반 일에 대하여 자문하며 호주교계와 한인사회 지도자로 인정받는 어른이었다.

 

유족으로 호주인 아내 쥴리와 슬하에 3남 1녀(리차드, 다니엘, 크리스티나, 조수아)와 2명의 며느리와 1명의 사위, 6명의 손자녀가 있다.

 

영원한 안식에 들다

 

천국환송예배는 지난 9월 17일 오전 10시 30분 시티에 있는 Ann St. Church에서 현장예배와 함께 브리즈번한인장로교회 본당에서 실시간 화상 중계로 엄수됐다. 이날 천국환송예배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COVID-19)으로 인원이 제한되면서 규모를 100명 미만으로 축소하여 온라인과 함께 조용히 거행됐다.

 

▲ 천국환송예배에서 추도사를 전한 김만영 목사의 큰아들 리차드 씨     © 크리스찬리뷰

 

김영수 목사(브리즈번한인장로교회)가 고인의 아름다운 삶을 추모하며 간략한 인사말과 기도를 드린 후 시작된 천국환송예배는 경건하면서도 고인에 대한 사랑이 가득한 감동의 자리였다.

 

찬송가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를 부르면서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고, 리차드(큰아들)는 아버지의 아름다운 삶을 기억했다.

 

그는 “젊은 시절 아버지는 원래 은행가가 되고 싶었지만 주님께 당신의 삶을 바친 후 마태복음 6장 19절~21절 말씀을 가이드라인으로 삶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사치스럽거나 경박함 없는 희생의 삶을 사셨다. 자녀들과 사역은 아버지의 보물이자 투자였다”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이어 “아버지는 자녀들 중 한 명이 성장하여 의사 선교사가 되는 것이 오랜 꿈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누구도 의사 선교사가 되는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손자들의 미래에 무엇이 준비되어 있는지 아직은 아무도 모른다.

 

놀랍게도 아버지의 투병 기간은 서로 기도하며 많은 시간을 함께 할 수 있는, 우리 모두에게는 축복의 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이어 조수아(막내 아들)가 성경을 봉독했다.

 

▲ 위로사를 전하는 김영수 목사     © 크리스찬리뷰

 

시편 23편과 로마서 8장 31~39절을 본문으로 위로 메시지를 전한 김영수 목사(브리즈번한인장로교회)는 “선한 목자 되신 하나님은 다윗을 70 평생 인도하셨다. 그런 다윗을 인도하신 하나님은 김만영 목사님을 82세까지 부족함이 없이 인도하셨다.

 

▲ 조사를 전하는 필 케이스 목사(퀸즐랜드장로교회 총회장)     © 크리스찬리뷰

 

영혼을 소생케 하시고 의의 길로 인도해 주셨다. 지팡이와 막대기로 어려운 순간을 보호하시고 우리에게 소망을 주었다.”면서 “김 목사님은 실로 개척자였고 애국자였고 선교사였다.

 

동양인으로는 처음으로 퀸즐랜드장로교단 노회장을 거쳐 주 총회장을 역임하는 한편, 신학교수로 후배 양성에도 남다른 열정을 보였으며 호주 선교사들에게 받은 복음의 빚을 갚고자 호주에서 선교적인 삶을 사셨다.”고 애도했다.

 

필 케이스 목사(퀸즐랜드장로교회 총회장)는 위로 메시지에서 “다윗은 자신의 하나님을 목자로 알고 있었다. 다윗은 목자의 역할이 양을 돌보고 보호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장 암울한 시기,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에서도 악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김 목사님도 다윗의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에 다윗의 확신을 공유했다.”면서 “다윗은 주님의 집에 영원히 거할 것이라고 덧붙였는데 주님과의 개인적인 관계가 죽음을 초월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미 김 목사님에게 영원한 안식을 허락하신 줄 믿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서 모든 시련과 슬픔을 제거하지는 않으시지만 우리가 이 어려운 시간들을 겪을 때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는다.”고 말했다.

 

이날 천국환송예배는 시종일관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였지만 그 안에 서린 모두의 애통함과 아쉬움까지는 감출 수 없었다.

 

찬송가 ‘내 영혼이 은총 입어’가 울려 퍼지자 조수아는 어머니 쥴리를 껴안았다. 쥴리 사모의 표정은 담담했고 눈물 대신 눈인사로 조문객들에게 답례했다.

 

▲ 김만영 목사의 천국환송예배를 마친 후 가족들과 함께 운구하는 장례위원들.     © 크리스찬리뷰

 

이어 필 케이스 목사는 “전능하신 하나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당신은 부활에 대한 확실하고 확실한 희망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리고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떠난 모든 사람들을 지켜주신다. 이제 우리는 김만영 목사님의 몸을 하나님께 맡긴다.”고 축도를 전했다.

 

평소 고인의 말대로 시신은 화장해 센터네리 메모리얼 가든스(Centenary Memorial Gardens)에 안장했다.

 

담도암 진단받고 임종예배-완치판정-패혈증

 

2019년 10월, 담도암 진단을 받고 투병해온 김만영 목사는 2020년 3월 13일 주치의사로부터 치료불가라는 판정을 받았다. 의사는 가족들을 불러 병원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며 퇴원할 것을 권유했다.

 

장기가 헐고, 암이 퍼져나가기 때문에 도저히 수술을 할 수 없다고 했다. 3월 16일 저녁 가족들은 비상회의를 가진 후 교회 장로들과 함께 병원에서 김영수 목사 인도로 임종예배를 드리고 3월 17일 퇴원했다.

 

그런데 모든 교인들의 계속된 기도 속에 병세가 호전이 되었다. 병원을 찾아 두 차례나 검사를 진행했다. 기적이 일어났다. 암세포가 없어진 것이다. 주치의사는 완치판정을 내렸다.

 

이때 자녀들은 휴식을 권하며 ‘션샤인 코스트’에 호텔을 예약했다. 김 목사 부부는 10일간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그가 갑자기 쓰러진 것이다. 응급처치를 했지만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지난 9월 11일 새벽, 패혈증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 성역 50주년 감사예배 및 은퇴식에서 축하 케익을 자르는 김만영 목사와 쥴리 사모.(2014. 4.26)     © 크리스찬리뷰

 

마지막 순간을 함께했던 동료 목회자이자 오랜 지기인 지태영 목사는 “여행을 다녀오신 후 만났다. 김 목사님은 그렇게 한국 칼국수를 좋아하셨다.

 

어릴 때 어머니가 끓여주신 칼국수를 늘상 말하며 한국가면 꼭 칼국수를 먹자고 약속했다.”면서 “너무 슬프지만 참 행복하게 돌아가신 것 같다”고 그 당시를 떠올렸다.

 

지 목사는 “지난해 연말 쯤 김 목사님과 함께 공동묘지도 마련했다”며 “김 목사님은 평생 공부하고 평생 나눔을 통해서 온전한 지도자의 본을 보여주신 분이다.”이라고 평했다.

 

김만영 목사는 1938년 경남 울주군 언양면 구수리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불교가정에서 자라났지만 부산상고 재학시절 어느 날 우연히 교회에 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스스로 찾은 곳이 부산 부전교회였다.

 

평생 공부하고 평생 나누며

 

신앙생활을 시작하자마자 매일 새벽예배와 주일성수를 지키는 학생이었고, 성가대원으로 봉사하며, 지도 전도사를 따라 노방전도, 군 형무소 및 나병환자 촌을 찾아 찬양하며 큰 은혜를 경험했다.

 

장신대 본과 수석 졸업, 연세대학 연합신학대학을 마치고 1964년 3월 6일 경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서울 정신여고 교목으로 섬기면서 계속 공부할 꿈을 꾸고 있을 때 호주장로교 선교부에서 사역하고 있던 변조은 목사의 적극적인 주선으로 1964년 12월 첫 주일에 호주에 도착했다.

 

▲ 퀸즐랜드 장로교 총회장 취임 후 장인 장모와 가족    ©BKPC     

 

그는 브리즈번 퀸즐랜드대학교에서 신학과 사회학을 공부하여 호주장로교 목사로 인정받고,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다시 호주로 돌아왔다.

 

퀸즐랜드신학대학 교수로 30년을 가르쳤고, 퀸즐랜드장로교 주 총회장이 되었다. 이후 브리즈번한인장로교회를 개척하여 35년을 지나오면서 10여년 전 1만 평 부지를 구입하여 교회를 신축했다.

 

호주 정부로부터 이민봉사자상을 수상할 정도로 호주사회에도 기여했고, 동시에 한인사회를 위해 퀸즐랜드한인회 창설, 퀸즐랜드한글학교 설립을 주도하기도 했다.

 

산골짜기에 핀 한 송이의 백합화

 

고인은 그의 책 ‘주님이 인도하신 나의 여정’에서 자신의 인생을 ‘산골짜기에 핀 한 송이의 백합화’로 표현했다.

 

“어린 시절에는 일제 식민지 통치하에 참으로 어둡고 험한 산골짜기를 거쳐 왔고, 철이 들기 시작하면서 민족상잔의 6.25전쟁으로 인한 고통과 폐허의 암울한 골짜기를 지나왔다. 청년시절은 실로 뼈를 깎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고학의 골짜기를 보냈다.

 

▲ 김만영 목사는 브리즈번한인장로교회 개척하여 교회를 신축했다.김 목사는 호주 정부로부터 이민봉사자상을 수상할 정도로 호주사회에 기여했고, 한인사회를 위해 퀸즐랜드한인회와 퀸즐랜드한글학교 설립을 주도을 주도하기도 했다.  ©크리스찬리뷰   ©BKPC     

 

‘행운의 나라’인 호주에 와서는 언어와 사상과 문화 모두가 새롭고 낯선 상황에서 목회를 한다는 것은 감히 상상도 못한 길이었다. 그래서 한인 이민교회를 세워 목회를 하고 지금까지 부흥한 모습을 보게 된 것은 참으로 감격스러운 일이었지만 반면 피눈물 나는 고난의 길이었다.

 

그런데 내가 성경을 읽고 깨달은 사실이 있다. 즉 하나님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해서 위대한 민족으로 만드셨다는 것이다. 홍해를 건너 광야의 사막 길로 인도하셔서 이스라엘 민족이 종의 근성에서 해방되게 하셨고, 하나님이 전능하신 여호와임을 민족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한 훈련임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아상을 정립해 만인제사장으로 삼겠다는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알게 되었다.

 

이런 성경적인 문맥에 비춰 내 삶의 이야기를 조명해보니 그 의미가 새롭다. 내 삶의 골짜기를 지나오면서 때론 가시가 있는 밭길을 걸을 때도 있었지만 그로 인해 백합화의 가치를 더욱 빛나게 하라는 것임을, 또한 세찬 회오리바람이 불 때는 백합화의 향기가 더욱 사방으로 퍼지게 하려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나름대로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비결을 발견하게 되었다. 첫째, 확실하고 구체적인 희망을 가질 것. 둘째, 과거의 어려움이나 우울했던 일에 붙잡혀 있지 않을 것. 셋째,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할 것. 넷째, 자신의 사명과 인생의 목적을 구체적으로 세울 것. 다섯째,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낙관적으로 살 것이다.”

 

고인이 바로 그런 존재였다.

 

독일의 신학자 본 회퍼가 사형집행을 앞두고 쓴 편지의 구절이다.

 

“죽음은 내게 마지막이 아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김 목사는 떠났지만 그가 생전에 품었던 비전과 사역은 이제 브리즈번한인장로교회와 한국교회를 통해 실현될 것이다.

 

 

글/김명동|크리스찬리뷰 편집인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광고
광고

  • 포토
  • 포토
  • 포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