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의 관문인 Q Station의 발자취를 찾아서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중반까지 152년 동안 검역소 운영
 
글/김환기 사진/권순형

 

▲   1/2021 커버 페이지  © 크리스찬리뷰

 

▲ Stone Cairn.검역소 내 감역 지역은 13개 원추모양의 케른에 의하여 구분되었는데 격리된 사람들은 돌 선을 넘어서는 안 되었다. 1830년대 후반에 지어진 이 케른은 유일하게 남아있는 이정표이며 격리와 방역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 크리스찬리뷰


시드니는 이탈리아의 ‘나폴리’, 브라질의 ‘리오데자이네루’와 함께 세계 3대 미항 중 하나이다. 푸른 바다와 어우러진 하얀 조가비 같은 오페라 하우스와 시드니의 남과 북을 연결하는 옷걸이 같은 하버브리지는 한 폭의 그림을 연상하게 한다.

 

시드니는 호주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이다. 1788년 1월 18일에 아서 필립 제독(Captain Arthur Philip)이 11척의 배에 죄수 788명을 포함한 1천500여 명과 함께 1770년에 '쿡 선장'(Captain Cook)이 다녀갔던 ‘보타니 만’에 도착했다. 그곳이 정착하기에 적합하지 않아 이동한 곳이 지금의 ‘록스’(Rocks) 지역이다.

 

아서 제독은 1월 26일 록스에 영국 국기를 높이 올리어 영국령임을 선포하고, 당시 '영국 내무부장관' (British Home Secretary)이었던 '로드 시드니'(Lord Sydney)의 이름을 기념하여 '시드니'(Sydney)로 명명하고 NSW 주 1대 총독이 되었다.

 

시드니 항으로 들어오는 모든 선박들은 노스 헤드(North Head)와 사우스 헤드(South Head) 사이를 지나야 한다. 시드니 항은 바다의 수심이 깊을 뿐 아니라, ‘노스헤드와 사우스헤드’가 천연의 방파제 역할을 해서 마치 거대한 호수와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노스 헤드 (North Head)

 

2020년 11월 17일 11시, 노스헤드 검역소를 찾았다. 가이드인 질(Jill)은 안내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땅의 주인인 에버리지니 조상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간단한 예식을 치렀다.

 

노스 헤드는 에버리지니의 성지와 같은 곳이다. 여자들은 이곳에 올 수가 없고, 부족의 치유 의식과 매장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 아서 필립 주지사. 그는 원주민들에게 괴롭힘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원주민들을 잘 대우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원주민들에 대한 관용 정책을 유지했다.  ©NPWS  

 

▲ 아서 필립 주지사는 1788년 시드니의 새로운 식민지에 영국 국기를 게양했다.©크리스찬리뷰   ©NPWS  


1788년 1월 29일 John Hunter 대위와 William Bradley 중위가 이곳을 처음으로 방문하여 조사하였다. 원주민 부족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쿠링가이 지역의 일부였다.

 

맨리(Manly)란 이름은 아서 필립 제독(Captain Arthur Phillip)에 의하여 지어졌다. 인근 지역을 조사하러 배를 타고, 1월 21일 맨리에도 갔다. 그곳에 그는 처음 접하게 되었다.

 

아서 제독은 "그들의 자신감과 남자다운 행동이 그곳을 '맨리 커브'라고 이름 짓게 하였다."(Their Confidence and Manly Behavior made me the name of Manly Cove to this place)라고 했다.

 

초대 총독이 된 아서는 에버리지니의 언어와 풍습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788년 12월 아서 총독은 맨리에 사는 Arabanoo라는 청년을 잡아와 시드니의 Lemsi에서 자유롭게 살게 하였다.

 

1789년 11월에는 같은 장소에서 Bennelong과 Colebee를 납치해왔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은 탈출했다. 다음 해에 아서 총독은 Bennelong의 친구인 Willemering을 만나, Bennelong에게 시드니에 와서 살 것을 권유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둘 사이는 가깝게 되었다. 아서 총독은 현재 오페라 하우스가 있는 지역의 이름을 Bennelong Point로 명명하였다. 1792년 베네롱은 아서 총독과 함께 영국을 방문하여, 1795년에 호주로 돌아와 1813년에 죽었다. 아서 총독은 에버리지니에 대하여 관대한 정책을 펼쳤다.

 

쿼런틴 (Quarantine)

 

▲ Q Station 입구. 이곳부터 걸어들어가야 한다.     © 크리스찬리뷰

 

시드니 항 입구의 오른쪽에 아름다운 해변의 도시인 맨리(Manly)가 있다. 맨리에서 가장 높은 지역인 노스헤드(North Head)로 올라가다 보면 중턱에 해변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차를 입구에 세우고 15분 정도 걸어가면 Q Station이 나온다.

 

▲ 19세기에 세워진 2등석 여객들이 머물던 숙박 시설. 현재 이곳은 호텔로 사용되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과거에는 검역소(Quarantine Station)였으나, 현재는 Q Station이라 부른다. 이곳은 1832년 8월 14일부터 1984년 2월 29일까지 시드니로 입항하는 선박들을 격리하고 검사했던 곳이다.

 

쿼런틴(Quarantine)이란 단어는 일반적으로 검역(檢疫)이란 의미로 사용되지만 차단 혹은 격리(隔離)라는 뜻이기도 하다. 방역이라고 할 때도 이 단어를 사용하고, 방역 기간도 쿼런틴이라고 한다.

 

▲ RMS 나이아가라호를 타고 온 승객들은 배 안에서 인플루엔자 전염병이 잘 통제되었기 때문에 그 배의 승객들은 검역소에서 약 일 주일을 지낸 후 목적지로 떠날 수 있었다. (1918년)  ©NPWS  

 

 

    © 크리스찬리뷰

 

 

이 단어는 40일을 뜻하는 라틴어 Quadraginta에서 유래되었다. 단어의 어원은 당시 해양 강국이었던 베네치아 공화국이 지배하였던 라구사의 항구 도시 두브로브니크에서 시작되었다.

 

1377년에 이탈리아의 라구사에서는 페스트 발생지역에서 오는 모든 선박과 여행자들을 항구 인근의 섬에서 30일 동안 격리시켰다.

 

1448년 유럽에 또 다시 페스트가 창궐하자, 베네치아 공화국은 페스트 확산을 막기 위해 베네치아 항구로 입항하는 무역선에 탑승한 선원들을 40일 동안 배에 격리(Quarantine)하였다.

 

40일의 격리 기간은 의학적인 숫자가 아니라 성경적인 숫자이다. 기독교가 국교였던 유럽에서 40은 의미있는 숫자이다. 노아의 대홍수에서 폭우는 40일 동안 비가 내렸고, 요나는 회개하지 않으면 40일 후에 니느웨 성이 멸망할 것이라고 했고, 모세는 시내산에서 40일을 지내고, 40년간 광야 생활을 했고, 엘리야는 40일을 걸어 호렙산에 올라갔고, 예수도 세례를 받은 후 40일을 광야에서 머물며 단식했고, 부활 후에도 40일간 세상에 머무른 후 승천하셨다.

 

당시에는 격리 기간이 무조건 40일이었지만, 현대는 전염병에 따라 격리 기간이 다르다. ‘코로나 19’의 경우는 2주(14일)이다.

 

▲ Q Station 부두 앞에 박물관이 있으며, 이곳에서 19세기부터 20세기까지 운영되던 검역소의 역사와 당시의 상황을 살펴볼 수 있다.     © 크리스찬리뷰

 

검역소 (Quarantine Station)

 

의학이 발달되기 전에는 전염병에 대처하는 최상의 방법은 환자를 격리시키는 것이었다. 1788년 1월 26일 영국의 식민지가 된 호주에는 계속해서 유럽 인구가 유입되었다. 오랜 항해 중 병든 사람들을 따로 격리할 시설이 필요하게 되었다.

 

1828년 Bussorah Merrchant호가 항해 중에 천연두가 발생하자 노스 헤드(North Head)에 정박하여 격리하였다. 5년이 지나고 1833년 2월, 노스 헤드는 공식적으로 검역 장소가 되었다.

 

이후로 항해 중 병이 발생된 선박은 이곳에 격리하여 조사하고, 의사의 완치 통보를 받기 전까지는 머물러 있어야 했다. 처음에는 무리없이 진행되었으나 상선이 늘어나면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상선은 시간이 곧 돈이다. 빠른 시간 내에 일을 마치고 돌아가야 하는데 만약 격리를 당하게 되면 재정적으로 엄청난 소실이 발생한다. 선장은 병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고하지 않고 바로 입항하기도 했다.

 

1832년

 

NSW 주 정부는 1832년에 검역법을 통과시켜 배의 책임자는 반드시 보고를 의무화하였다. 대부분 아일랜드 이민자를 탄 ‘Lady MacNaghten’호는 10주간 격리되었다. 1837년 2월 Lady MacNaghten 호는 항해 중 54명이 죽었고, 최소한 90명의 장티푸스 환자가 발생되었다.

 

병든 사람은 배에 남아 있고, 건강한 사람들은 육지에 올라와서 텐트에 머무르게 하였다.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은 3월 셋째 주가 되어서야 육지로 갈 수 있었다. 오랜 격리 기간으로 인해서 손해 배상을 해야 하는 일이 벌어지자, 1837년 10월 빠른 검역을 위하여 시설을 보완하고 확충하였고 다음 해 5월에 완공하였다.

 

▲ Q Station 박물관에 전시 중인 각종 의료욤품과 생활용품들     © 크리스찬리뷰

 

해변은 승객과 짐을 상륙하여 통과하는 곳, 산 쪽은 두 곳으로 분리하여 해변이 보이는 쪽은 건강한 사람, 반대쪽인 남쪽 비치가 가까운 언덕에는 환자를 배치하였다. 건강한 사람들을 위하여 4개의 목조 집이 있는데 한 집의 수용 능력은 25명이었다.

 

근처에 환자 32명을 수용할 수 있는 병원을 지었다. 감역 지역은 12 혹은 13개의 원추모양의 돌에 의하여 구분이 되었다. 두 지역 사이에는 군인들이 경비를 섰고, 격리된 사람들은 돌 선을 넘어서는 안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설은 턱없이 부족하였다. 1838년 한 해에만 이민선 5척이 격리되면서 수용 인원이 차고 넘치자 영국 정부는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였다.

 

1838년 말부터 모든 이민자들은 반드시 건강진단을 받고, 천연두 백신을 맞아야 한다는 법을 공포하였다. 법이 실행되고 검역소의 일은 현저하게 줄었다.

 

1840년

 

▲ 부두와 인접한 검역소에 도착한 승객들은 입소를 위해 건강 검진을 받고 소독(샤워) 과정을 거쳐야 한다.(왼쪽에서 오른쪽으로)  ©NPWS   

 

1840년 죄수 수송선이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식민지의 경제 불황은 1841년 말부터 1847년까지 이어졌다. 이 기간 동안 검역소는 거의 폐쇄된 상태였다. 1853년 1월 문제의 Beejapore호가 입항하면서 활동이 재개되었다.

 

2층인 배는 항해 중 홍역과 성홍열로 56명이 죽었고, 도착 후 검역소에서 62명이 죽었다. 1천여 명의 승객은 90여 개의 텐트에 나누어서 배치되었다. 숙식과 의료 시설이 턱없이 부족하자 검역소는 대대적으로 시설을 확충하게 되었다. 이때 제2의 묘지가 개발되었다.

 

증기선이 발명되어 호주까지의 항해 시간이 짧아지면서, 사회적으로 영향력있는 사람들이 호주로 이민 오게 되었다. 검역소에는 사회적 계급의 구분이 없었지만, 1등석 승객들의 항의로 정부에서는 1873년부터 1876년까지 1등석 승객을 위한 숙소를 따로 마련하였다.

 

1881-1882년 천연두가 성행할 때는 천연두에 걸린 시드니 주민 104명을 수용하기도 했다. 열악한 시설로 인하여 올바른 치료가 이루어지지 않자, 1882년 1월 보건당국에서는 ‘건강위원회’(The Board of Health)를 설치하여 격리를 포함한 다양한 책임을 맡게 하였다. 이때 1881년에 제3의 묘지가 개발되었다.

 

1901년

 

1901년 호주 연방정부가 탄생하면서 검역과 이민 등은 연방정부 소관으로 이관되었다. 1909년 7월이 되어서야 연방정부는 호주 전역의 검역소의 업무를 관할하게 되었다. 이유 중의 하나는 NSW 주 정부는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으로 검역을 연방정부로 이관하기를 꺼려했기 때문이다.

 

▲ 천연두 사망자를 위해 1881년에 세워진 노스 헤드 생츄어리의 제3 검역묘지는 1925년 묘지가 폐쇄 될 때까지 241명이 이곳에 묻혔다     © 크리스찬리뷰

 

연방정부의 ‘백호주의 정책’(White Australia Policy)은 검역소에서도 그대로 적용이 되었다. 중국인들은 인종차별을 당했을 뿐 아니라, 병의 원인을 중국인에게 돌렸다. 흑사병 때 유대인들이 희생양이 된 것처럼, 천연두(Smallpox)를 ‘Chines fox’라고 부르며 중국인에게 책임을 전가하였다.

 

필자가 어릴 때 초등학교에서 ‘공포의 불주사’를 맞은 경험이 있다. 어릴 때 맞은 불주사의 흔적이 어깨에 남아 있다. 불주사는 하나의 주사기로 여러 명을 접종하기 위해서 알코올 램프의 불로 대충 바늘을 소독하고 다시 접종해서 ‘불주사’가 된 것이다.

 

불주사는 천연두와 BCG라고 불리는 결핵 백신주사이다. 최근 코로나가 발생되면서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나왔다. BCG 결핵 백신 접종과 코로나19의 사망률과의 연관성을 검증하기 위해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일부 나라에서 연구가 진행 중이다.

 

연구 내용에 따르면, BCG 접종을 시행 중인 55개 국가는 100만 명당 사망자 수는 0.78명에 그친 반면, BCG 접종을 하지 않는 5개국(이탈리아, 미국, 레바논, 네덜란드, 벨기에)은 16.39명으로 상대적으로 무려 21배나 높게 나타났다.

 

검역소가 연방정부로 이관이 되고, 1913년 천연두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1914년 1월까지 1천42명이 검역소에 수용되었고, 1912년과 1920년 사이에 검역소는 세계적인 기준에 맞추어 시설 및 장비 그리고 숙박 시설들을 근대식을 바꾸었다. 검역소는 직원을 포함하여 1천208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로 거듭났다.

 

▲ Q Station 부두. 오른쪽에 박물관, 방문자 센터,카페 등이 있으며 산 위에 병원과 입원실이 있다.     © 크리스찬리뷰

 

▲ 부두 철길을 따라 1백여 미터 올라가면 오른쪽에 사암이 보이는데 격리자들이 돌 위해 영어를 비롯한 각종 언어와 그림을 새겨 놓았다. 이 글과 그림들은 다른 출처에서 얻을 수없는 다양한 정보, 특히 비영어권 이주민의 감정이 기록되어 있다.     © 크리스찬리뷰

 

1918년

 

1918년 스페인 독감이 세상을 흔들기 시작했다. 스페인 독감이 뉴질랜드에 상륙한 것을 알고 호주는 입항하는 모든 배는 반드시 검역소에서 7일간 격리해야 함을 공포하였다.

 

1918년 10월 RMS Niagara 호가 첫 번째로 격리되었다. 1918년 11월부터 1919년 3월까지 110척의 승객 1만 2천 명 이상이 노스 헤드 검역소에 격리되었다. 동시에 13척이 격리된 적도 있었다. 당시 15척의 배가 감염되었고, 70명이 죽었으며 이 중에 검역소 직원도 있었다.

 

▲ 현대 천연두 예방접종 키트. 희석액, 바키니아 왁친 병, 분지침 등의 구성 요소로 되어 있다.  ©NPWS     

 

▲ 분지침을 사용해 천연두 백신을 놓은 모습(2002년)   ©NPWS     


검역소에서 일하던 27세의 Annie Egan 간호사도 죽었다. 백신을 접종했음에도 불구하고 도착 다음 날 Medic호의 병사들을 돌보다가 1918년에 11월에 전염되었다. 그녀는 죽기 전에 가톨릭 신부에게 종부성사를 받기 원했지만 거절당했다.

 

연방정부는 감염 위험 가능성 때문에 신부가 검역소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 사실이 신문에 보도되고, 여론이 들끓기 시작하자 12월 10일에 허락을 하였다. 하지만 12월 3일, 그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1919년 1월 스페인 독감은 검역소를 넘어 시드니 지역 주민도 감염되었다. 가족들은 전쟁에서 돌아온 검역소에 있는 가족들을 만날 수 없게 되었고, 오직 신문을 통해서만 검역소의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1919년 1월 초 1차 대전 종전 후 귀국하는 병사들 중 2천500명이 격리되었다. 격리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자 검역소의 질서를 위해서 경찰은 물론이고 군대까지 동원하였다. 집으로 갈 수 없는 병사들은 답답한 하루하루를 그곳에서 보내야만 했다.

 

참고로, 스페인 독감은 스페인에서 발생하지 않았다. 교전국들은 병사들이 독감으로 죽어도 사기 저하가 될까 두려워 서로 침묵하고 있었다. 중립국이었던 스페인은 독감에 대하여 상세하게 보도하였다.

 

▲ 유럽에서 새로 도착한 이주 노동자들. 그들의 개인 수하물들은 엄격한 오염 제거 과정을 거쳐 구제역이 호주에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  ©NPWS     

 

독자들은 독감이 마치 스페인에서 시작된 것처럼 착각하여, 독감을 스페인 독감(Spanish flu)이라고 명명하게 되었다.

 

1920년

 

의학의 발전으로 1920년 이후로 검역소는 아주 다른 상황에 접하게 되었다. 스페인 독감을 마지막으로, 1921년부터 1975년까지 단지 55척만 격리되었고, 1925년에 결핵 걸린 선원 한 명과, 1962년간에 문제가 있었던 승객 한 명이 죽은 것이 전부였다. 검역소는 낚시, 수영, 레크리에이션 등을 하기에 아주 적합한 곳이다.

 

1930년 Aorangi호의 선원 한 사람이 천연두 증세로 배가 격리되었을 때 승객 중 Archibald Howie는 그때를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그곳은 정말 좋은 곳입니다. 우리가 격리되었다는 사실만 잊고 있다면, 휴가를 지내기에 딱 좋은 장소입니다.”

 

▲ Q Station은 결혼식을 비롯한 각종 이벤트와 다양한 볼거리들을 제공한다.  ©NPWS   

 

1935년 1월 Aorangi호가 다시 격리 당했을 때, 승객 중 Elaine Reid는 “우리는 매일 춤을 추고 테니스도 치고 비취에서 수영도 하고, 아들의 생일 잔치도 있었고 너무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고 했다.

 

2차 대전 동안 이곳은 군사적인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시간이 가면서 건물은 낡아지고 전쟁 동안 건물은 파괴되었지만, 물자가 부족했을 뿐 아니라 특별히 시설을 개선해야할 이유가 없었다.

 

▲ Q Station의 호텔급 각종 숙박 시설들     © 크리스찬리뷰

 

     © 크리스찬리뷰

 

▲  Q Station은 검역소의 시설물들내부를 현대식으로 개조하여 다양한 형태의 호텔로 사용하고 있다.   ©NPWS    


1950년부터 1973년까지 단지 12척의 배만 격리되었다. 예방 의학과 치료 의학이 급속도로 발전되면서 대부분의 승객들은 건강하게 시드니 항에 도착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시설은 낙후되어 가고 정부는 축소운영을 하게 되었다. 1970년 초기에 검역소 직원은 8명으로 감축되고, 격리된 사람도 한두 명뿐이었다.

 

정부는 엄청난 비용의 손실을 보게 되었다. 1974년 성탄절 때 다윈에 닥친 태풍으로 집을 잃은 213명의 피난처로 사용하였고, 1975년에는 3개월부터 10살까지의 베트남 고아 215명 중 115명의 피난처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1977년 정부는 멜번 페어필드에 전염병 전문 병동을 세울 것을 결정하고, 마침내 1984년 3월 16일 검역소를 폐쇄하고 검역소의 소유권은 연방에서 주 정부로 이전되어 시드니 하버 국립공원의 일부가 되어, 국립공원 및 야생동물서비스(NPWS)가 맡아 관리하게 되었다.

 

Q Station

 

1984년, 시드니 하버 국립공원으로서 이전되고 첫 10 년 동안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건물과 주변 문화 경관이 파손되었다. Q Station의 목조 건물들은 19세기, 벽돌 건물은 20세기에 지은 것이다.

 

1990년대에 NPWS는 쇠퇴를 막을 수 있는 충분한 자금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창의적으로 지역을 개발할 수 있는 민간 투자를 유치하였다.

 

2006년 ‘Mawland Group’은 NPWS와 임대계약을 체결했다. 마우랜드 그룹은 기존의 건물을 훼손하지 않고 개발하여 원래 건물을 현재 4.5 등급의 숙박시설로 개발하고, 5명에서 180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다목적 공간, Boilerhouse Restaurant & Bar의 고급 식당과 방문자 센터와 역사 전시관을 열었다.

 

드디어 2008년 4월 25일 Quarantine Station 대신 Q Station이란 이름으로 교육과 휴식의 장소로 거듭나 일반인에게 개방하였다.

 

글/김환기|크리스찬리뷰 영문편집위원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copyright ⓒ 크리스찬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입력: 2020/12/29 [14:15]  최종편집: ⓒ christianreview
 
 
배너
배너
배너
포토 포토 포토
더 록스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