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란 무엇인가?

양지연/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0/12/29 [15:27]

인간은 생물학적인 존재인 동시에 영적인 존재이다. 그렇다면 과학과 신학은 서로 대립적이며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가, 아니면 각기 독립된 영역이 있다고 보는가? 신학과 과학은 대화가 가능하며 두 학문은 통합될 수 있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해 분자생물학자인 양지연 박사가 2021년 1월 호부터 본지에 ‘인간 탐구’를 주제로 칼럼을 연재한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기대한다.<편집자>

 

▲ ©James Wainscoat     ©크리스찬리뷰

 

- 인간은 동물이면서 동물이라고 불리우기를 주저한다. 왜냐하면 스스로 다른 동물과는 다른 고귀한 특성을 지닌 존재로 믿고 있기 때문이다. -

 

'나는 누구인가'를 말해 주는 것은 혼자 있을 때나 무심코 드러내는 나의 습관적 행동 및 행위뿐만 아니라 의지, 사상, 주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담론’의 저자 신영복 선생은 “생각은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의 결론이다”라면서 “생각은 그 만큼 완고해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말했다.

 

인간: 관찰하고 경험하고 기억하는 주체 (I am consciousness)

 

나는 나에 대한 기억이다. 한때 나였던 것들은 지금 어디에도 없다. 눈 내리던 겨울 불안함과 초조함 속에 엄마 손에 이끌려 가던 초등학교 첫 입학식에서의 나,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오줌을 저리며 가슴에 뛰어들어 얼굴을 핱아주고 반기던 강아지의 죽음을 괴로워하던 나, 첫 사랑의 열병을 앓던 나. 그리고 30대, 40대의 나도 이젠 더 이상 없다. 오직 그것들에 대한 기억만이 나를 나라고 느끼게 한다.

 

기억은 삶을 비가역적인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갈수 없는) 무엇으로 만든다. 사랑이 불가역적인 반응인 이유도 기억 때문이다. 사랑과 이별이 남긴 기억 때문에 우리는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어른이 된다는 것, 늙어간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처음’에 대한 수많은 기억이 우리를 늙게 한다.

 

첫 사랑을 다시 할 수 없고, 첫 키스를 새로 할 수 없는 이유는 이미 그것을 해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시간은 기억을 풍화시키고, 죽음은 마침내 기억을 소멸시킨다. 나는 한 존재가 죽음 이후에도 살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타자의 기억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그런 기억이 있다면 그것은 생명이다.

 

생명체는 사건을 끊임없이 재현한다. 세포가 분열하여 똑같은 세포가 나오고, 그 세포들이 분열하여 다시 똑같은 세포를 만든다. 아버지가 딸에게 특정한 유전적 기질을 물려주고, 그 딸이 어머니가 되어 다시 그것을 아들에게 물려준다. 손자는 흔히 할아버지의 기질을 기억하는 듯 유사한 행동 패턴을 보이기도 한다.

 

최초의 생명은 그 탄생 이후 단 한순간도 재현을 멈추지 않았고, 38억 년 동안 지구 위에서 끊임없이 재현되는 기억, 생명은 바로 그 영속하는 기억이며, 인간은 그 기억 안에 있다고 생각된다.

 

인간: 생물학적 기계일까?

 

1. 인간은 동물이다 (다윈)

우리는 종의 기원을 읽지 않아도 ‘인간은 동물이다’라는 다윈의 가정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연장물(延長物)로서의 ’동물은 기계이다’라는 데카르트의 가정을 이해한다

 

2. 동물은 기계이다 (데카르트)

데카르트는(Descartes) 동물의 인지적 기능을 기계적인 것이라고 하면서 인간에게 있어서만은 육체와 정신을 구분하여 각각 연장과 사유의 속성을 가진 것이라 했다. 곧이어, 사유하는 정신도 결국은 두뇌의 기능일 뿐이라는 기계론의 주장이 나왔다.

 

3. 그러므로, 인간은 기계이다 (라 메트리)

그러나 ‘그러므로, 인간은 기계이다’라는 결론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받아들이기를 꺼려 할 것이다. 즉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도덕적이며 정신적 가치를 가지며, 물질 세계와 독립되어 다른 차원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유의지에 관한 철학적 논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해묵은 것이고, 인공지능을 장착한 기계라면 앞으로 도덕적인 규율의 적용을 받게 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렇다면 정신적 가치는 무엇인가?

 

인간의 특유한 위치와 인간의 존엄성을 믿어왔던 대다수의 사람들은 마음을 기계로 간주하는 것에 대해 다윈(Darwin)이 진화론을 발표했을 때, 동물에 대한 선입관과 마찬가지로 기계에 대한 선입관 또한 쉽게 떨쳐 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우리 삶에 자리잡은 인공지능은 더 이상 단순한 기계가 아니다. 그것은 과거의 기계 개념으로는 절대 알 수 없는 `영리한 기계'(smart machine)다.

 

우리는 이미 ‘컴퓨터 문화’나 ‘기계 문명’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으며 인공지능은 일상의 삶에 이미 참여하고 있다. 기계가 사람처럼 생각하고, 정서를 경험하며, 의식을 가질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이 독립적 학문으로 연구되기 시작한 것은 1956년이다.

 

맥카시 (J.McCarthy), 민스키 (M. Minsky), 사이먼 (H. Simon), 뉴웰 (A. Newell) 등이 인간처럼 지능적으로 사고 할 수 있는 컴퓨터 프로그램 개발 가능성을 검토하는 모임에서 ‘인공지능 (Artificial Intelligence)’이란 말을 처음 사용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드레퓌스(H.L. Dreyfus)는 인공지능 구성 철학은 “지능은 어떤 원리에 의존한다”라고 본 소크라테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이후 플라톤, 홉스, 데카르트, 라이프니쯔 등을 거쳐 사이먼과 뉴웰로 이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최근,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해결해야 할 난제에 대한 해답은 오히려 인간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한다. 과학자들은 사람이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며, 의식(Consciousness)을 갖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아내지 않으면 기술적인 발전만으로는 인공지능이란 목표를 달성하는데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토로한다.

 

따라서, 과학자들은 그들이 넘어야 될 첫 번째 장벽으로 ‘마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않으면 안되었다.

 

과연 인간은 특별한 존재인가?

 

데카르트는 동물의 인지적 기능을 기계적인 것이라고 하면서 인간에게 있어서만은 육체와 정신을 구분하여 각각 연장과 사유의 속성을 가진 것이라고 했다. 지금까지 현대 과학은 동물들이 신나는 일이 생기면 기뻐하고, 위협당하면 두려워하고, 어미 곁에서 떨어지면 애타게 우는 행위를 하는 것을 단순히 ‘반응’이라 생각했고, 다만 인간이 그 반응 행동에 인간의 감정을 투사해 감정 언어로 해석하는 것일 뿐이라고 여겼다.

 

인간이 아닌 다른 포유동물에게도 감정이 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은 1990년대 말 에스토니아 출신 미국의 신경 생물학자 야크 팬크세프(Jaak Panksepp)였다. 팬크세프는 기쁨과 슬픔 등 원초적 감정은 대뇌 피질이 아니라 뇌의 하부(혹은 심부)에서 작동하며, 인간의 뇌는 750만 년 전 파충류에서 포유류가 진화한 이래 모든 포유동물이 그 원시 뇌를 공유하고 있다고 밝히면서, 인간은 다른 포유동물과 비교하여 그렇게 특별한 존재가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불과 5만 년 전만 해도 동물세계에서 별 볼 일 없던 호모 사피엔스는 어떻게 지구라는 행성의 절대 강자가 되었을까?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본질’은 무엇일까?

 

인간과 동물 사이에는 정도의 차이가 아닌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성’이야말로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되게 하는 ‘본질적 특성’이라고 주장하는데, 바로 여기에서 ‘이성적 인간학’이 태동한다.

 

이성이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라는 점은 부인하긴 힘들지만, 문제는 “인간은 항상 이성적 존재가 아니며, 이성적 사고와 행위를 시도할 때도 확증 편향적이며 비이성적 요소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데 있다.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물리학자 슈뢰딩거(Erwin Schrödinger)는 단도직입적으로 자문한다.

 

생명은 물리학 법칙들에 기반을 두는가? 그의 대답은 간결하다. “그렇다”라고. 여기서 슈뢰딩거는 ‘안다’는 말 대신 ‘믿는다’는 말을 쓰면서 “그것은 경이로운 생명 현상에 대한 직감이며 느낌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믿음은 신앙인들의 전유물인 것만은 아니다.〠 <계속>

 

양지연|분자생물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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