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의 달동네 록스가 역사와 관광의 도시로
호주 최초의 정착지 더 록스(The Rocks)
 
글/김환기 사진/권순형
▲ 록스는 시드니의 교통 중심지인 서큘러 키를 중심으로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는 도시이다.     © 크리스찬리뷰


시드니의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록스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반에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은 사회, 경제, 정치 구조의 혁명적 변화를 가지고 왔다. 산업화로 인하여 농촌 인구의 대부분이 도시로 몰리면서 도시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공해 문제, 위생 문제, 주택 문제, 범죄 문제, 빈민가 문제 등 도시 문제가 발생하였다. 노동자들의 삶은 매우 비참하였다.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으며 작업 환경도 열악하였다. 자본가들은 임금이 비싼 숙련된 성인 노동자 대신 임금이 싼 부녀자나 아동을 고용하여 노동을 착취했다.

 

산업화의 부작용으로 도시 빈민, 실업자, 범죄자, 알코올 중독자, 여성과 아동의 노동력 착취, 환경오염 등의 예상치 못한 많은 사회문제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특히 죄수들이 차고 넘쳐 이들을 자체적으로 수용할 수 없게 되자 대안으로 해외에 ‘유형 식민지’(Penal Colony)를 개척하기로 결정한다. 초창기에는 미국으로 보냈으나, 1776년 미국이 독립을 하면서 더 이상 죄수들을 미국으로 보낼 수 없게 되었다.

 

Down Under로 향한 필립 총독

 

1787년 아더 필립(Arthur Philip) 총독의 지휘 하에 11척의 배에 778명의 죄수(192명 여자, 586명 남자)를 포함한 약 1천500명의 인원을 탑승한 첫 함대가 8개월의 항해 끝에 ‘보타니 베이’(Botany Bay)에 1788년 1월 18일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필립 총독은 ‘보타니 베이’가 정착하기에 적합한 곳이 아니어서 근처 지역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1788년 1월 21일, 필립 제독은 맨리(Manly)로 갔다. 그리고 그는 원주민을 만나게 된다. 그들의 자신감과 남자다운 행동으로 그곳 이름을 '맨리 코브'로 지었다.

 

“Their confidence and manly behavior made me the name of Manly Cove to this place” 맨리 선착장 바로 옆에 “1788년 1월 21일 맨리에 온 최초의 백인”이라고 새겨진 필립 총독의 기념비가 있다.

 

▲ 맨리 부두 건너편에 있는 아더 필립 총독의 기념비에는 “1788년 1월 21일 맨리에 온 최초의 백인” 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 크리스찬리뷰

 

1788년 1월 26일, ‘Jackson Port’ 지금의 'The Rocks' 에 영국 국기를 게양하고, 영국 땅임을 선포하였다. 그는 이곳을 '영국 내무부장관'(British Home Secretary)이었던 '로드 시드니'(Lord Sydney)의 이름을 기념하여 '시드니'(Sydney)로 명명하였다.

 

1788년과 1792년 사이에 3천546명 남자 죄수와 766명의 여자 죄수가 시드니 항에 도착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전문직 범죄자’(professional criminals)로 정착하는데 적합한 기술이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아팠고 일하기에 부적절했으며 심한 노동으로 죽어갔다. 1790년에는 음식 문제로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게 되고 그해 6월에 도착한 사람들은 ¼이 병들어 죽었다. 설상가상으로 보급함 ‘Guardian’은 식민지에 도착하기 전에 남아프리카에서 난파되었고, 해군 함정 ‘HMS Sirius’는 식량을 구하기 위해 중국으로 가는 도중에 노퍽 섬에서 난파되었다.

 

필립 선장은 식량 생산을 위하여 농장을 개간하고, 지역 경제를 살리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을 했다. 1791년부터는 조금씩 상황이 호전되기 시작하였다. 1793년 2월 16일에 최초로 죄수가 아닌 '자유 정착민'(free settlers)이 도착하였다.

 

1868년 마지막 죄수 호송선인 ‘Hougoumont’가 서호주(West Australia)에 도착할 때까지 80년 동안 약 16만 2천여 명의 죄수들이 오스트레일리아로 호송되었다.

 

록스 (The Rocks)

 

지난 1월 8일 목요일, 하늘이 잔뜩 찌푸리고 있는 날 ‘록스’(The Rocks)를 찾았다. 록스에는 하루에 두 번씩 'The Rocks Walking Tours'가 있다. 가격은 성인이 $32, 90분 동안 유서 깊은 거리를 걸으며 시드니의 살아 있는 역사를 가까이서 체험할 수 있는 관광코스이다.

 

▲ 본지 취재팀은 록스지역을 90분 동안 걸으면서 살아있는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관광 코스에 참가하여 록스 지역을      1차 취재했다.     © 크리스찬리뷰

 

우리는 브라이언(Brian) 부부와 함께 동행했다. 브라이언은 1977년 ‘리버플’에서 배를 타고 호주로 이민왔다. 영국에서 호주까지 배로 한 달 정도 걸리지만, 가격이 저렴해서 배를 탔다고 한다. 대부분의 죄수 호송선은 항구도시인 ‘리버플’에서 출발했다. 브라이언은 한 달 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당시 죄수 호송선은 약 8개월이 걸렸다.

 

가이드는 중년의 여성인 앤(Anne)이 담당했다. 그녀는 비가 올 것을 대비하여 우산을 가지고 갈 것을 권했지만 그냥 출발하였다. 그녀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으며 과거의 길을 걸으니,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 여행을 하는 기분이었다.

 

▲ 록스 광장 중앙에는 사암으로 만든 호주 초기 정착을 대표하는 세 종류의 사람, 죄수, 병사, 자유 정착민 가정의 형상이 새겨져 있다     © 크리스찬리뷰

 

▲ 1910년대 록스의 미확인 거리에 거주하는 주택가 사람들  © Archives office of NSW


록스 광장에는 사암(Sandstone)으로 만든 기념탑이 우뚝 서있다. 탑에는 초기 정착을 대표하는 세 종류의 사람이 그려져 있다. 첫 번째로 죄수들이다. 초기 죄수들은 마치 짐승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종일 노동을 하고, 특별한 잠자리도 없었다.

 

1820년에 주정부는 스탬프가 찍힌 노란색 옷을 지급해 주었다. 뉴질랜드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한다. “호주는 죄수가 개척하였고, 뉴질랜드는 간수가 개척하였다.”

 

그래서 호주를 ‘유형 식민지’(penal colony)라고 한다. 호주는 6개 주(state)와 2개의 준주(territory)로 구성되었다. 이중 남호주(South Australia)와 빅토리아(Victoria)는 자유 식민지(free colony)이다. 죄수가 아닌, 자유인이 개척했다고 해서 나름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다른 쪽은 병사이다. 첫 번째 함대는 211명의 해병대가 왔다. 이들의 의무는 정착을 도와주고 죄수들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었다. 영국은 상주하는 군대가 있어야 한다고 판단하여, 1790년 두 번째 함대에 강력한 군사 1백 명을 더 파견하였다.

 

당시 영국 식민지 중에 가장 큰 부대가 조지 스트리트에 있었다. 1793년, 장교들은 땅을 분할 받아 농지를 만들었다. 병사들은 정착민들과 같은 특혜를 누리게 되었다.

 

또 다른 한쪽은 정착민이다. 필립 총독은 계속해서 영국에 경험있는 농부와 기술자 그리고 감독관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드디어 1793년에 11명의 자유 정착민이 도착했다. 필립 총독은 해방된 죄수와 병사 그리고 정착민에게도 땅을 나누어 주었다.

 

1788년부터 1830년 사이에 6만 3천 명의 죄수와 1만 4천 명의 자유 정착민이 호주에 왔다. 죄수들도 정착민이나 병사들과 결혼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남녀의 비율은 약 8:2였다. 여자들은 금값이었다. 앤은 호주 지폐 20불짜리 두 장을 꺼내어 흥미로운 이야기를 시작했다.

 

호주는 1966년까지 화폐 단위가 ‘파운드’였으나 1966년 2월 14일에 파운드에서 ‘달러’로 바꾸었다. 1966년부터 1974년까지는 화폐에 ‘Commonwealth of Australia’로 사용하다, 1974년부터 1994년까지 점진적으로 ‘Australia’로 이름을 바꾸었다.

 

▲ 호주 달러 20불 지폐에 메리 레이비의 초상화. 그녀는 1790년 13세에 말을 훔친 혐의로 7년 형을 받고 호주로 이송되었으며, 17세 때 결혼했다. 그녀는 남편과 사별한 후 번 돈을 사회에 환원하여 존경을 받았다     © 크리스찬리뷰

 

▲ Mary Reibey호. 캡틴 쿡 크루즈 뱃머리에 새겨져 있다.     © 크리스찬리뷰


호주 지폐는 5불 지폐를 제외하고 양면 모두 인물이 있어 앞면과 뒷면을 구분하기가 어렵다. 특히 20달러 지폐는 더 그렇다.

 

20불의 앞면은 호주의 여성사업가인 메리 레이비(Mary Reibey: 1777~1855)이다. 메리는 13살 때 남장을 하고 말을 도둑질하다가 체포되어, 1792년 호주에 왔다. 17살 때 그녀는 준 장교(junior officer)와 결혼했다. 당시에 죄수와 자유인이 결혼할 수 있었다.

 

메리의 남편인 토마스는 무역으로 많은 돈을 벌었다. 1811년 그가 일찍 죽고 그녀는 사업을 이어받아 당시 가장 부자이고, 성공적인 사업가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녀는 자선사업가가 되어 번 돈을 사회에 환원해서 주민들의 존경을 받아 20달러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의 큰아들은 후에 목사로서 정치가가 되어 타스마니아 총독을 역임했다. 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국 이민사’의 ‘사진 신부’가 연상되었다.

 

사진 신부 (Picture Brides)

 

2014년 8월, 월미도에 있는 ‘한국 이민사 박물관’을 방문했다. '한국 이민사 박물관'은 미주 이민 100주년을 맞아 선조들의 해외 활약상과 개척자적인 삶을 기리고 그 발자취를 후손에게 전하기 위하여 인천광역시 시민들과 재외 동포들이 함께 뜻을 모아 2008년 6월 13일에 건립하였다.

 

대한민국 이민사는 1902년 12월 22일 월요일에 시작된다. 하와이 첫 이민단 121명은 인천 제물포에서 일본 우선회사 ‘현해환’에 승선하여 일본 나가사키 항에 도착했다.

 

이중 19명은 신체검사를 통과하지 못하고, 102명 만이 이민선 ‘갤릭호’(S.S. Gaelic)를 타고 하와이로 향하게 된다.

 

▲ 한국 이민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하와이 이민 사진 신부 관련 자료들.     © 크리스찬리뷰

 

공교롭게도 1620년 신앙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 (May Flower)호를 타고 미국으로 향한 102명의 청교도 숫자와 동일하다. 그들은 1903년 1월 13일, 갤릭호(S.S. Gaelic)로 하와이 호놀룰루 항에 도착했다. 당일 '하와이안 스타지'는 한국 이민 노동자들의 하와이 도착 기사를 크게 다루었다.

 

결혼은 초기 이민자의 가장 큰 문제 중에 하나였다. 남성의 수가 여성보다 10배나 많아 배우자를 구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이를 해소하기 위한 궁여지책이 '사진 결혼'이었다.

 

▲ 록스에 자리잡고 있는 시드니현대미술관(MCA). 원주민들은 이 지역을 ‘탈라울라다’라고 불렀다     © 크리스찬리뷰

 

▲ 탈라울라다 박물관     © 크리스찬리뷰


1910년부터 1924년까지 중매쟁이를 통해 약 700여 명의 ‘사진 신부’는 결혼을 위해 하와이로 건너갔다. 사진만 보고 결혼하다 보니 평균 나이 차이가 무려 15살이나 되었다.

 

사진 신부들이 하와이로 대거 입국한 동기는 다양했다.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여성들도 있었으며,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아 떠난 여성도 있었다.

 

신교육을 받은 여성들은 전통적인 인습에서 탈피하여 자신들의 꿈을 펼칠 새로운 지평을 찾고자 한 사람도 있었다. 다양한 이유로 ‘사진 신부’는 하와이행 배에 몸을 실었던 것이다.

 

록스의 역사

 

록스는 ‘시드니 코브’(Sydney Cove) 서쪽에 위치한 역사적인 동네이다. 조지 스트리트 (George Street)와 서큘러 키 (Circular Quay) 해안을 따라 천문대 언덕 높이까지 가파르게 솟아 있다. 1788년부터 그곳에 집을 지은 죄수들에 의해 ‘The Rocks’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 탈라울라다 표지석     © 크리스찬리뷰

 

호주 원주민인 에버리지니 Cadigal 부족은 이곳을 ‘탈라울라다(Tallawoladah)라고 불렀다. 삼 면이 물로 둘러싸인 록스는 항해, 해상 노동자 및 해양 무역과 관련이 있다. 더 넓은 세계, 새로운 아이디어, 바다의 사람과 물품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곳이다.

 

죄수들의 마을

 

1788년에 제1함대가 도착한 후 록스는 죄수들이 사는 지역이 되고, 정부 관리와 민간인 그리고 병사들은 주변환경이 좋은 동쪽 비탈에 살았다. 그들은 초가 지붕, 나중에는 목재 지붕널로 지붕을 덮고 주변의 잔해 돌로 전통적인 토착 주택을 지었다.

 

▲ 파운데이션 파크에 1874년에서 1878년 사이에 사암 절벽에 주택들이 세워졌다. 하지만 1938년에 붕괴되었으며, 현재 8채의 집터가 유적지로서 남아 있다.     © 크리스찬리뷰

 

▲ 록스에 180년 전인 1841년에 설립된 넬슨 호텔.   1874년에 촬영된 이 사진에서 호텔(중앙)을 볼 수 있으며 현재도 영업 중이다. © Archives office of NSW

 

정원과 마당을 만들고, 사업을 시작하고, 빵 오븐과 단조를 만들고, 상점과 술집을 열고, 가족을 키웠다. The Rocks의 험준한 지형에서 격자무늬의 거리는 불가능했고, 사람들은 주로 도보로 이동했고 도로도 나무 벽돌로 평평하게 만들었다.

 

이 지역에는 Church Hill (현재 Lang Park)의 남쪽 주변에 석조로 만든 성공회 최고(最古)의 교회인 세인트 필립스교회(St. Philip’s church)가 있다. 나중에 George Street가 된 The Rocks 기슭에는 벽으로 둘러싸인 감옥과 마을 최초의 병원이 있었다.

 

물가 맞은편에는 공공 및 개인 부두, 초기 시드니 상인의 창고와 저택이 밀집되어 점차 항구 도시로 발전하였다. 1792년 죄수로 도착한 역동적인 ‘Mary Reibey’는 록스의 작은 집에서 시작하여 무역과 해운으로 많은 돈을 모아 시드니에 멋진 집을 많이 지었고 대가족을 키웠다. 시드니 페리 중 그녀의 이름을 가진 배도 있다.

 

▲ 아가일 컷 유산으로 등재된 도로이며 1843년부터 1868년까지 죄수와 유급 노동력으로 지어졌다. (사진 상단 왼쪽부터 시계방향 1870년 경, 1900년대 경, 1931년, 현재.) © Archives office of NSW  © 크리스찬리뷰

 

록스의 확장 및 통합

 

▲ 아가일 계단으로 올라가면 하버브릿지와 연결된다. 아가일 다리는 2002년 5월 10일에 NSW 헤리티지로 등재되었다.   © 크리스찬리뷰

 

1823년까지 약 1천200명의 사람들이 록스에 살았는데, 대부분은 죄수와 조건부로 사면을 받은 사람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이었다.

 

1820년대와 1830년대는 상인과 선주들의 주택, 상점, 부두가 생겼다. 1840년 죄수 운송이 끝나고, 1851년에 금이 발견되자 이민자 수가 급격히 증가하여 주택 수요가 급증했다.

 

록스는 이민자들이 첫 번째 발판을 마련하는 곳이다. 개발자와 주민들은 오래된 마당에 작고 평범한 테라스 주택을 지었고, 마구간을 개조하여 집을 만들었다. 급격한 지역의 변화로 상수도, 쓰레기 및 하수 처리의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1843년에 죄수들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록스 중심부의 능선을 통과하는 절단 작업에 투입되어 시드니 코브와 달링하버 지역을 연결하기 위해 아가일 스트리트(Argyle Street)를 확장했다. 1840년 이후 더 이상 죄수 수송선이 오지 못하게 되어 노동력이 줄어들자 프로젝트가 중단되었으나, 1859년에 유급 노동력과 화약을 사용하여 결국에는 완성하였다.

 

시드니의 달동네 록스

 

록스는 산등성이에 있는 인상적인 주택의 부자에서부터 선장과 상점 주인, 노동자와 표류하는 가난한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19세기에 걸쳐 광범위하게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의 고향이다. 그러나 1870년 이후, 이곳에서 돈을 번 사람들은 새로운 지역으로 떠나기 시작했다.

 

록스는 점점 더 노동자들만이 사는 지역이 되었고, 외부인에게는 두려운 우범지역이 되었다. 록스는 시드니의 달동네였다. 록스에는 아일랜드인과 중국인을 포함하여 가난한 이민자들이 많이 살았던 곳이다.

 

▲ 근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록스의 건물들. 멀리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가 보인다.     © 크리스찬리뷰

 

▲ 시드니의 많은 도로들은 1900년대까지 목판으로 포장되었는데 매일 저녁 청소하는 일과 함께 겨울철에는 땔감으로 빼가기도 해서 처음 놓은지 115년 만에 목판를 철거했다. 록스에 있는 Rydges Hotel 앞 도로에 목판 도로가 전시되어 있다.     © 크리스찬리뷰


록스 기슭의 '조지 스트리트'는 시드니 최초의 ‘차이나 타운’이 형성된 곳이다. 이 지역에는 전 세계에서 선원들이 몰려왔고, 그 중에 일부는 이곳이 좋아 현지 여성과 결혼하여 정착했다.

 

록스는 독특한 바위와 가파른 지형과 뺨을 맞대고 있는 것과 같은 비좁은 집들은 지역 주민들에게는 친숙하고 편안했지만, 시드니가 발전하면 할수록 문제의 지역이 되었다.

 

전염병의 도래와 록스

 

1900년 시드니에서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모든 시선은 록스로 향했다. 전염병은 배를 타고 해안으로 온 쥐벼룩에 의해 전염되었기에 록스를 전염병의 근원지로 생각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전염병은 지역 발전의 촉매제가 되었다.

 

주정부는 1900년 달링하버 주변 지역 전체를 개선하였고, 주민들은 공공 세입자가 되었다. 이후 20년 동안 주정부는 해안가 전체를 철거하고 재건하였다. 주거 지역에서도 수백 채의 집이 철거되어 부두 근처에 거주해야 하는 물가 노동자 가족을 위한 숙소를 찾기가 어려워졌다.

 

주정부는 오래된 집과 거리를 쓸어버리고 새롭게 개발하려고 했다. 1920년대에 시드니 ‘하버브리지’(Harbor Bridge) 건설이 진행되면서 동부지역과 서부지역으로 나누어지고, 록스를 연결하는 거리가 사라지면서 평생 록스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해야만 했다. 1932년 ‘하버브리지’의 완성으로 교통의 흐름이 우회되면서 The Rocks는 잊혀진 지역이 되었다.

 

하버브리지를 건설할 당시 세계는 대공항의 늪에 빠져 있었다. 미국은 공공 사업 프로그램을 확장하는 뉴딜 정책으로 공항을 극복하였다. 미국의 랜드마크인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1931년), 후버댐(1935년), 금문교(1937년) 등은 뉴딜 정책의 산물이다.

 

▲ 록스 옵저버토리힐 공원에서 바라본 시드니 하버 브릿지. 오른쪽 검정색 지붕 건물은 1849~1846년 호주 식민지 시대에 지어진 최초의 군사교회이다.     © 크리스찬리뷰

 

▲ 하버브릿지 공사 장면(1929. 9)     © Archives office of NSW


사관학교 동기 중에 ‘Norman Grainger’ 사관이 있다. 그는 영국의 ‘Middlesbrough’ 출신이다. 그를 통해서 ‘하버브리지’의 철제 구조물이 그의 고향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버브리지는 대공황 시대의 승리로 간주되어 ‘철폐’(Iron Lung)라는 별명을 얻었다.

 

1960년에는 동부 지역의 전체 철거 계획이 나오면서, 록스 전체가 사라질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록스 지역의 존폐를 두고 지역 주민과 정부 간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주정부는 록스를 시드니의 자존심에 대한 얼룩이라 생각했고, 테라스 하우스는 슬럼 건물이라 낙인을 찍었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슬럼 거주자로 간주하였다. 1960년 12월에 주정부는 ‘뉴욕 타임즈’에서 록스 지역의 판매를 광고하였지만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록스의 전투 (The Battle of The Rocks)

 

1970년, 록스는 맥기(McGee) 대령이 이끄는 시드니 코브(Sydney Cove) 재개발 당국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맥기 대령은 주민들을 시드니 외곽 서부 지역으로 효율적으로 이전하고, 이 지역을 고층 상업 구역으로 재개발하는 책임을 맡았다.

 

그러나 록스 사람들은 이사를 원하지 않았고, 또한 록스가 파괴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주민들은 일치단결하여 ‘Rocks Residents Action Group’을 결성하였고, BLF (Builders Labourers Federation)의 도움으로 1971 년과 1974 년 사이에 ‘Green Bans’의 격렬한 저항운동으로 폭력 투쟁까지 불사했다.

 

후에 이를 ‘록스의 전투’(The Battle of The Rocks)로 알려지게 되었다. Green Bans 운동의 목적은 기존의 건물과 환경을 보존하는 것뿐만 아니라 도시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장소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들은 불도저로부터 역사적인 장소를 방어하는데는 성공했지만 그 대가는 지불해야 했다. 이제 록스는 노동자 계급이 사는 지역이 아닌, 역사와 관광의 도시로 거듭나게 되었다.

 

▲ 더 록스 © 크리스찬리뷰 © Archives office of NSW

 

▲ 활기가 넘쳐나는 록스의 밤 풍경. 록스는 특히 야경이 아름답다     © 크리스찬리뷰


록스 사람들이 고령화되어 사망함에 따라 주택은 상점, 카페 및 갤러리가 되었다. 오래된 ‘Argyle Bond Stores’는 이미 수제 가죽, 비누 및 양초의 향긋한 향기와 함께 ‘Argyle Arts Centre’로 전환되었다. 거의 2백 년 동안 무시당했던 록스는 1974년에야 지명위원회에 ‘The Rocks’로 등재되었다.

 

오늘날의 록스

 

록스는 국가유산이 되었다. 인근 지역사람들을 말할 것도 없고, 역사와 쇼핑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방문하고 싶어하는 지역이 되었다. 매년 9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한다. 대부분은 쇼핑, 식사, 산책을 하러 오는 관광객과 당일치기 여행자이지만 일부는 순례자이며 록스와 깊은 연관이 있는 사람들이다.

 

록스의 주요 활동은 상업 개발, 마케팅 및 관광이며, 가끔 비평가들은 의미없는 '유산 테마파크'로 조롱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재의 관리자인 ‘Sydney Harbour Foreshore Authority’는 유산 복원과 고고학 연구 및 역사적 해석 등의 중요한 작업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주택, 창고, 술집, 상점, 몇 개의 공장 등 남아있는 빅토리아 시대와 에드워드 시대의 건물과 가파른 계단과 좁은 길 등도 정비하고 있다. 록스는 시드니의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역사와 관광의 도시로 거듭나고 있다.〠

 

글/김환기|크리스찬리뷰 영문편집위원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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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01/27 [09:55]  최종편집: ⓒ christian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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