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튜어트 피긴스 박사의 호주 복음주의 기독교의 역사(1)

창간 20주년 기획 연재

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0/06/28 [16:11]
크리스찬리뷰 창간 20주년 기획 『호주 복음주의 기독교의 역사』 연재에 앞서

호주 교민의 신앙교양잡지 크리스찬리뷰는 창간 20주년 기획으로 저명한 호주 교회사가인 스튜어트 피긴박사 (Dr. Stuart Piggin)의 '호주 복음주의 기독교의 역사'를 저자의 양해를 얻어 요약본으로 번역, 연재합니다. 스튜어트 피긴 박사는 울릉공대학 역사학 교수를 거쳐 현재 맥콰리대학 역사학부내 기독교영성과신학연구소 소장이며, 호주성공회의 주요 평신도 지도자이기도 합니다. 호주 복음주의 기독교의 역사는 옥스퍼드대학 출판부에 의해 출간되었고 복음주의 관점에서 호주 기독교의 발전과정을 '말씀운동, 사회정의운동, 성령운동'의 세 가지 흐름을 바탕으로 정리한 수작으로 평가받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의 여성안수찬성론과 이에 근거한 비판적 시각 때문에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시드니성공회측과 격렬한 논란을 빚기도 했습니다.

 
▲ 스튜어트 피긴박사 (Dr. Stuart Piggin)     ©크리스찬리뷰
 
이번 연재는 홍은희, 정의경 씨의 번역과 김석원, 이기선 목사의 감수 및 편집을 통해 이뤄집니다. 이 글을 통해 호주를 살아가는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떤 영적 유산으로 받고 있는지를 정확히 짚고, 이를 바탕으로 이민교회가 추구해야 할 영적 방향을 가늠하고, 도움을 드리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금번 연재를 통해 특히 다음 세대를 준비하기 원하는 성도와 교회에 큰 도전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 주>


 
제1장 열방을 향하여 <1788-1835>

호주에 기독교가 들어오게 된 것은 영국 복음주의의  1740년 선교부흥의 열매였다 .죤 뉴튼, 죤 벤, 토마스 하위스, 토마스 스코트, 찰스 시몬과 같은 영국성공회의 복음주의 지도자들은 세계적인 선교 전략을  가지고 움직였다.  그리고 1776년 미국독립은  이들 선교의 방향을 아프리카, 인디아, 중국, 호주로 돌리게 만들었다.

이렇게 등장한 선교사들은 사역보다 전통, 사람보다 신학, 역사보다 철학, 세계보다 자기동네에 더 관심이 많았던 이전 개신교도와는 달랐다. 초기 선교사들은 영성, 말씀, 사회참여를 통합시켜 움직였고, 호주 원주민을 포함한 지구 남반부 끝까지 선교의 소명을 느꼈다.  일부는  종말론에 영향을 받았다. 당시 부흥의 중심에 있었던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도 1724년초,  다가오는 새하늘과 새땅에서는 호주를 포함한 모든 이방에서  ‘세상 처음부터 조용히 군림하던’ 사탄의 영역을 복음이 정복할 것이라고 선포했다.

영국내 상황도 일조했다. 엘리자베스 1세(1558-1603)때 등장한 비성공회 개신교도들은 18세기에 선교부흥과 함께 현저히 세가 늘었다. 이들은 회중주의, 침례파, 웨슬리파 감리교, 칼빈파 감리교도들로 발전했고 이들을 신비국교파라고 불렀다. 이들은  영적 성장을 위해 성경공부운동을 펼치고, 교파에 상관없이 진정한 그리스도인끼리 협조할 수 있다고 믿었다. 

호주 정착 초기에는 칼빈파 감리교가 크게 활약했다. 조지 화이트필드, 토마스 하위스, 윌리엄 로메인, 존 뉴튼, 로울런드 힐 등의 지도자를 낳은 이 분파는,  런던 선교회를 중심으로 시드니를 본부로 하여 남태평양 선교에 큰 공헌을 했다.

그러나 성공회와 구비국교파(퀘커교도, 장로교, 연합교, 일반침례교)같은 주류는 이들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프랑스 혁명 때문에 이들의 동기에 대한 의심은 커져갔다. 초기 NSW주 총독들도 감리교에 대해 위협을 느끼고, 파송 선교사들을 ‘광신자’라고 불렀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분쟁보다 협조하는데 더 관심을 두었다. 성공회소속 토마스 기스본과 그의 친구 윌리엄 윌버포스는 당시 선교사들을 이렇게 묘사했다.

 “연합군은 일렬종대로 열을 맞추어 어깨를 나란히 해서 그들의 공동의 적을 진압하기 위해 앞으로 행진하였다.”

초기 선교사들은  말씀, 성령 그리고 세상이라는 요소를 모두 붙잡고 모든 이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절대적인 소명이 있었다. 호주 선교의 동기는 복음과 개혁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호주 보타니 베이에  영국이 첫 함대를 보냈던  이유를  ‘죄수 처리’나 대영제국의 미국을 대신한 군사전략, 혹은 태평양에 새로운 수출 산업에 필요한 노동기지 확보를 든다. 그러나 선교사들에게는 그들만의 거대한 계획이 있었다. 이들은 복음으로 호주가 복음적 사회개혁의  실험장이 되어야 한다고 믿은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사회 개혁을 염두에 두면서도 개인의 변화를 목표한 적극적인 행동파들이었다. 18세기 말 많은 선교단체가 자발적으로 형성되어 종교적, 사회적 개혁이 추진되었다. 호주 최초의 교목 리차드 존슨을 파송한 곳도 이랜드회와 에클레틱회 같은 선교단체였다. 이들 단체에  1786년 8월 18일 보타니베이 정착 ‘계획서’가 제출되었는데 여기에는 윌리엄 윌버포스가 제안한 교도소 교회설립 안건이 포함되었다. 그들은 복음 안에 사회와 개인의 개혁을 이루는 힘을 인식하여, 이를 열심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당시 가장 교육을 잘 받은 영국 선교사들은 인디아로 갔고 교육정도가 낮은 선교사들이 남태평양으로, 맨 마지막이 NSW주로 갔다. 그런데 나폴레옹 덕분에 변화가 일어났다. 나폴레옹 전쟁 동안 급격하게 성장한 감리교는 1816년에만 116명의 선교사를 파송했다.

그러나 NSW주 총독들은 낮은 신분출신이 많은 비성공회계 선교사들을 의심스러워 했고, 목적상의 갈등도 있었다. 사회지도층은 ‘도덕화’를 원했지만 선교사들은 ‘복음화’도 원했다. 선교사들은 죄수에 비해 절대적으로 적었고, 남태평양의 선교사역은 별로 여망이 보이지 않았다. 주둔군인들은 방탕했고 당시 유행하던 영국의 ‘불신앙철학’에 영향을 받았다. 애보리진은 더욱 어려운 시험이었다.

호주는 1827년부터 NSW주에 자유인이 죄수보다 많아졌지만, 그들의 반 이상이 과거 전과자들이었다.  이 때문에 호주인들은 종속적인 분위기를 갖게 된 것 같았다. 어쨌든 최초의 교목 리차드 존슨은 심판에 관한 설교를 많이 있지만, 병들어 죽어가는 초기 정착자들을 크게 도운 치유자이기도 했다.  그는 예민하고 자기비판적이기는 하지만 말씀, 성령 그리고 사회정의을 구현했고 죄수사역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인내했고  충실하였으며 책임을 다했다.

또 다른 중요한 호주 초기 선교사인 사무엘 마스든은 존슨보다 더 힘들게 시작했다. 행정관과의 갈등으로 해고된 그는 총독 헌터에 의해 재임명되었다. 그러나 그의 죄수들에 대한 가혹한 대응은 죄수간에 교회에 대한 반발감을  가져왔다. 당시 다른 선교사들은 호주사람들이 교리의 차이나 종교에 냉담하다는 소리를 자주했다. 그러나 이것도 영국산업혁명속에서 노동자계급출신으로 주로 이뤄진 죄수들의 고통스런 경험을 반영한 것 같다.

 
남태평양 선교

죄수 사역과는 대조적으로 태평양 사역은 성공적이었다. 런던 선교회 감독 토마드 하위스는 행정관들을 설득하여 타이티 정착 사역을 진행했다. 1806년 초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NSW에서 사역하였던 그는 피나는 노력 끝에 사역기반을 확립했다.  그의 묘비에는 이렇게 쓰여졌다.

"그는 남쪽 섬 미개인들을 불쌍히 여겨 그들의 길에 평화의 사자를 보내 열매도 없던 시간을 희망으로 인내했고 죽기 전에 주님이 약속하신 땅을  찾았다"

마스든은 죄수와 원주민 사역은 실패했지만  폴리네시안에게 했던 노력은 큰 열매를 맺었다. 그의 멘토였던 챨스 시몬즈의 영향으로 그는 남태평양의 기독교화에 비전이 있었다. 1804년 그는 남태평양  런던선교회를 담당하게 되었는데, 마오리족에 대한 상업행위를 지향하고 보다 문명화된 사역을 요구했다.

그는 배멀미 체질임에도 불구하고 뉴질랜드로 7번이나 선교여행을 했고, 마지막 여행은 70세의 나이로 한 쪽 발을 절었으며 거의 장님의 상황에서 이뤄졌다. 그는 선교사들로부터 존경 받고, 30년간 그의 이름은 선교회 회의록에서 가장 많이 등장했다.

호주 태생으로 첫 해외 선교사가 된 사람은 제임스 쉐퍼드였다. 1820년 기독교 선교회에서 뉴질랜드로 가던 마스든과 동행했다. 또 다른 호주출신 선교사  메리 하셀은 1819년 통가 선교사였던 월터 로우리와 결혼했다. 당시 유형수 한 사람이 통가로 도망가 문제를 일으켜, 통가인들은 기독교에도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메리의 활약으로 통가 사역은 큰 결실을 거두었다.

 
자유민 사역

1798년 런던선교회 선교사들이 도착했을 때, 이들은 기독교적 가정교육으로 유명한 마스든과 존슨가족들이 영접했다. 마스든은 런던선교회 선교사들과 권위문제를 놓고 다소 예민했었으나 그들의 후원자 역할로 남았다. 1804년 그는 런던선교회 지부를 담당하고  윌리암 파스토 쿠룩(1775-1846)을 목사로 임명하여 학교와 식민지를 돌보는 일을 하게 했다.

마스든의 장남인 토마스는 웨일즈에서 목사가 되어, 주일학교를 설립했고 ‘달리는 목사’로 알려졌다. 그의 교구는 ‘리버풀을 넘어서 모든 호주’로 정해졌다. 반면 감리교 역사가들은 NSW 감리교 선교는 실패작이라고 평가했다. NSW에 산만하게 분산되어 있는 인구분포로 사역이 어려웠고, 적당한 교회지도자와 설교자 배출에 실패했다.

한편 마스든은 해방된 죄수들을 기존 자유민과 떨어진 곳으로 보내는 편이었고, 반면 맥콰리는 복음주의자였던 부인 엘리자베스의 영향으로, 죄수들도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죄사함을 받았다면 온전한 제 2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스든의 의도역시 성령, 말씀 그리고 사회개혁을 통합시키려는 노력의 일부였다.

 
원주민 사역

원주민을 향한 정책은 좋은 뜻으로 시작됐다. 정착자, 선교사들은 원주민들이 영연방에 흡수될 수 있도록 애썼다. 예를 들어 1810년 포고령에서 ‘원주민은 유럽인과 같이 대우받아야 하며 원주민에게 상해를 입히면  법적으로 처벌 받을 것이다’라고 나온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

페터슨 소령은 파라마타에서부터 혹스베리 강 사이의 교수대에서 죽은 원주민 머리들을 자랑스럽게 전시했다. 교회가 손도 써보기 전에 불신자 백인들에 의해 원주민들은 큰 상처를 입었다. 원주민 대상의 첫 공식선교사는 윌리엄 워커였다. 그는 1821년 토마스 코크 베네롱이란 원주민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원주민들을 함의 자손으로 이해하고 저주의 대상으로 취급했다.

1825년부터 식민지 관리국은 흡수통합정책에서 분리정책으로 변경했다. 원주민은 보호구역에 정착하도록 유도되고, 선교사들은 농사와 제조기술 훈련을 도왔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큰 장애를 만난다. 그것은 비기독교 백인들이 원주민들을 학대하는 태도 때문이었다.

역사학자 존 하리스는 백인사회의 공격적이고 노골적인 부도덕성은  원주민 사역을 소멸시키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결론지었다.

그들은 백인이 옮긴 병으로 죽어 갔고 술이나 매춘에 유혹되었다. 19세기 중반무렵까지는 모든 사역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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