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중계 | 예수마을 강연회

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0/06/28 [16:12]
이민교회의 성장, 부교역자의 역할이 좌우한다

예수마을(대표 장경순 목사)이 개최한 6월 강연회가 지난 6월 7일 저녁 시드니제일교회당에서 열렸다.

이민교회의 성장, 부교역자 역할이 좌우한다를 주제로 열린 강연회에 앞서 장경순 목사는 “21세기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교회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며 그 책임을 맡은 교역자들이 어떻게 서가야 하는지는 매우 중요하다”고 말하고 “그동안의 아픔과 고민을 나누며 이민교회가 잘 성장해 나갈 수 있는 꿈을 갖게 된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다”라고 말했다.

이날 주정오 목사는 담임목사 입장에서의 부교역자론을, 정지홍 목사는 부목사 입장에서 체득하고 생각해 왔던 내용들을 요약했다.<편집자 주>

 
부교역자도 팀목회로 부르셨다

왜 팀으로 해야만 하는가? 

 교회 성장 통계를 보면 카리스마가 있는 한 목회자를 통해서 이루어진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목회환경도 전문화, 분권화되어야 한다는 팀목회의 추세로 변하고 있다. 즉 팀목회는 시대의 요청이다. 그러면 성경은 무엇이라 얘기하고 있을까?

 
▲ 주정오 목사     ©크리스찬리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성삼위 사역이다. 창조사역은 하나님 혼자 하실 수 있는 일이지만 성자와 성령께서 함께 사역하셨다는 것, 구원사역도 역시 성부와 성자가 성령과 함께 동역해서 이루셨다. 심지어 하나님이 홀로 하실 수 있는 일조차도 아담과 함께 하셨다. 즉 성삼위 하나님도 함께 일하는 것을 즐기셨다.


구약의 모세와 아론은 형과 아우의 차원이 아니라 그 각자에게 주신 은사에 따라 동역했다. 모세와 여호수아도 동등한 차원의 동역은 아니지만 모세 이후에 제2의 모세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모세가 여호수아의 사역을 힘있게 뒷받침해 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왕과 선지자가 한 팀이 되는 경우도 있는데, 사무엘과 사울, 사무엘과 다윗, 다윗과 나단, 아합과 엘리야의 경우다. 좀더 확장하면 왕과 제사장, 선지자까지 다 함께 힘을 합해 각자 사역의 현장에서 사역을 했다.

신약에서도 베드로와 11사도들이 함께 일하는 이야기를 사도행전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안디옥교회 안에 있었던 5명의 지도자였던 바나바, 니게르, 루기오, 마나엔, 사울 등은 아주 균형있게 함께 초대교회를 이끌어갔다.

이렇듯 함께 일했다는 것은 성경에서 강력하게 뒷받침하고 있는 사역의 아름다운 모습이다. 특별히 신약의 특징을 살펴보면 우리가 원용할 수 있는 것들이 있어 생각해보고자 한다.

사도직을 제외한 직분들은 교회가 확장될 때마다 실제적 필요에 의해 생겨났다. 구약의 삼중직무와는 달리 다양한 직분들이 주어졌는데, 거의 사도, 선지자, 교사의 순서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다양한 직분들 사이에도 어떤 질서가 있었다. 이 직분들은 세습되지 않았고 그래서 평신도들이 직분에 참여하는 기회가 많아졌다.

80년대 한국 교회의 평신도 제자훈련은 담임목사 혼자 목회한다는 그림을 새롭게 만들어 주었다. 결국 팀목회는 담임목사와 부교역자로 국한하기보다는 평신도 사역자들 전체로 확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팀목회는 가능한가?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전문 목회가 필요하고 전문성은 수직적인 것이 아니라 수평적 관계에서 해결되야 한다. 목회자 개인의 한계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누군가 필요하다는 요청을 할 수 있다. 그것이 팀이다.

팀을 구성하는 목회자는 서로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인정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담임목사만 아니라 부교역자도 평신도 사역자들도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다는 것을 동일하게 인정하고 존경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팀목회는 목회를 수평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목회의 직무를 계급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기능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토양이 완전한 수평적 기능을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현대의 다양화된 교회에서는 팀 개념이 없이는 적절히 대응할 수 없다.

그래서 이성희 목사(연동교회)는 한국적 모델의 구조는, 서양의 수평적 구조와 동양의 수직적 구조가 만나는 십자가형을 제안하며 가로와 세로가 서로 만나는 지점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수평도 수직도 함께 이해하자는 것이다.

송정일 교수는 팀 목회를 정착시키려면 첫째는 목회자들이 갖고 있는 물량주의를 버려야 하고, 둘째는 교인은 나의 양이라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하며 셋째는 직분에 대한 계급의식을 버려야 하고 넷째는 목회자와 평신도에 대한 지나친 구분을 척결해야만 한다고 했다. 매우 호소력이 있고 가능성 있는 의견 제시라고 생각한다.

이성희 목사는 팀목회를 위한 헌법 개정을 논하면서 특별히 위임목사와 임시목사라는 제도가 있는한 팀을 정착할 수 없고 평신도를 목회의 팀으로 수용하기 위해서도 헌법이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이 목사에 따르면 팀사역은 은사를 발견하고 계발하는 일을 지속해서 전문 사역자가 되어야 가능하고 교역자 간 지나친 차등을 없애고 부목사라는 종속적인 명칭보다는 업무 중심의 명칭으로 부르고, 성별 출신 등의 차별을 없애며 분명한 업무분담을 이루어야 한다. 어느 것 하나도 쉽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결과는 효과적이고 고무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을 통해서 목회자의 사기가 진작되고 업무의 생산성이 높아지는 것이 분명하고 개인적 유익도 많아진다. 이것을 확신할 때 팀목회 앞에 놓인 장애들을 한가지 한가지 풀어가야는 것이 지금의 우리가 해야할 일이다.  

 
주정오/열린문교회 담임목사, 시드니한인교회 교역자협의회 회장

 

교회성장, 부교역자에게 달렸다!

-     동역의 관계, 멘토링의 관례, 소통의 관계 이뤄야

 
부교역자가 너무 자주 바뀐다. 한국도 마찬가지겠지만 이민교회의 상황은 더 심각해서 1년을 채우지 못하고 교역자가 바뀌는 경우도 잦고 2년 이상을 채우는 경우는 보기 어렵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 정지홍 목사     ©크리스찬리뷰
 
첫째는 우물을 파지 못한다. 신임 교역자가 1, 2미터 정도 파면 다음 교역자로 교체되고, 후임 교역자는 파던 곳이 아니라 또 다른 곳을 판다. 그렇게 10명의 교역자가 교체되면 10개의 구덩이만 패인다. 깊이 파고 들어가야 수맥을 찾고 물이 터져 나오는데, 여기 찔금 저기 찔금 삽질만 하다가 정작 중요한 우물은 경험하지 못한다.


부교역자들의 사역은 대부분 주일학교, 청년부, 찬양팀에 집중되어 있다. 주일학교는 교회의 미래로 그 중요성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더우기 이민자의 자녀들은 주중에는 외국학생들과 생활하다가 한국학생들과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 기회는 주일날 주일학교가 유일하다. 가정으로만 제한되어 있던 민족의 동질성이 확대되는 곳도 교회다. 이런 의미에서 이민교회의 주일학교는 더더욱 중요하다.

또 이민교회에서 청년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고 청년이 없이는 아예 불가능한 사역도 많다. 현대교회에서 찬양팀은 예배의 핵심 주체다. 특히 이민교회에서는 찬양팀을 중심으로 하는 주일예배가 많다. 이처럼 이민교회에서 주일학교, 중고등부, 청년, 찬양팀의 중요성은 매우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책임지고 있는 부교역자가 자주 교체되면서 교육의 질은 현저히 저하되고 있다.

이민교회에서 장년부의 부흥은 주일학교와 밀접하다. 처음에는 가까운 교회에 출석하다가도 나중에는 거리는 멀지만 주일학교가 체계적인 교회로 옮기게 된다. 그런데 담당 교역자가 자주 교체되면서 교육의 연계성을 잃고 장기적인 플랜도 상실한 주일학교를 부모들이 신뢰하겠는가? 결국 부교역자의 잦은 교체는 장년부가 교회 선택을 주저하는 이유가 된다.

둘째로, 예산 낭비가 심각하다. 몇 번 사용하지도 않은 교재와 시스템이 교역자가 바뀔 때마다 같이 바뀐다. 낭비도 이런 낭비가 없다. 그러면서도 교회는 매번 주일학교를 위해서 투자한다고 생각한다..

셋째로 교사 교육이 열악하다. 양질의 교육은 교사에게 달려 있지만 이민교회의 현실은 교사의 수급도 어렵다. 그래서 교사의 자질이 부족하더라도 교육하면서 하지라는 생각으로 교사로 세우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정작 이들을 가르쳐야할 교역자가 자주 교체되면서 서로 얼굴 익히기에도 급급하다보니 정상적인 교사교육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넷째로 교역자에 대한 불신이다. 아이들이나 부모들이 교역자를 ‘조금 있으면 또 떠날 사람’이라고 여기면서 교역자에 대한 불신이 가중된다. 서로의 신뢰는 단기간에 형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부교역자에 대한 불신은 ‘교회는 왜 이런 사람을 뽑았나’라며 교회 전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민교회는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도 성장이 쉽지 않은데 서로 불신한다면 교회성장은 남 얘기일 뿐이다.

다섯째로 교회가 불안하다. 영적인 지도자가 자주 바뀌면 영성도 불안하고 시스템도 불안하고 부서도 불안하다. 이민교회의 현실이 자주 예배당을 옮겨다니고 예배 시간이 바뀌질 않는가? 이것만 해도 불안하고 혼란스러운데 내부에도 적이 있는 셈이다.

특히 후임 교역자의 공백기는 불안을 더욱 증폭시킨다. 담임목사도 교회가 안정돼야 뭔가 앞장서서 진두지휘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여기 저기 물 새고 구멍나고 불안한데 교회 성장에 진력할 수 있겠나? 이상과 같은 이유로 이민교회의 성장은 부교역자에게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교역자의 잦은 교체 이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교역자가 자주 교체되는 이유는 비자, 경제, 자녀교육 등 여러가지 문제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담임목사와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담임목사와 관계가 틀어진다면 모든 게 일시에 끝이 난다. 둘 사이에 관계가 틀어지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목회자의 정체성을 잃어버린다. 담임목사와의 관계에서 자신이 목회자인지 담임목사 비서인지, 사무원인지, 전문기능인인지 분명치가 않다. 그렇지 않아도 생계를 위해 주중에는 일하고 주일이 되어야 겨우 목회자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데, 행정과 기능적인 일에만 몰리면서 정체성이 흔들린다. 이 경우 부교역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교회를 떠나게 된다.

둘째로 부교역자의 처우가 개선되지 않는다. 간혹 비자 문제로 부교역자를 인격적으로 무시하기도 하고, 부교역자와 교인 사이에 갈등이 생길 때도 담임목사가 부교역자를 감싸주지 못해서 사역을 그만두기도 한다. 이같은 문제를 누가 해결할 수 있는가? 담임목사다. 부교역자의 자존감을 살려주는 것도, 교인과의 갈등에서 보호해주는 것도 담임목사의 몫이다.

셋째로 홈 처치의 인식이 부족하다. 부교역자의 교체가 워낙 잦다보니까 담임목사도 부교역자를 볼 때 언젠가는 떠날 사람이니까 적당히 관계 맺고 적당히 대우한다. 그럴 경우 부교역자 역시 적당히 섬기다가 적당한 때가 되면 ‘여긴 내 교회가 아니야’라고 생각하고는 훌쩍 떠난다.

이상과 같이 담임목사와 부교역자의 관계가 틀어지거나 바르게 정립되지 않으면 부교역자의 잦은 교체를 막을 수가 없고 교회성장도 기대하기가 어렵다.

 
호칭과 처우 개선되어야

제도에도 문제가 많다. 각 교단의 헌법에는 부교역자와 관련하여 '부목사'로 호칭한다. 그런데 부목사라는 말은 신학적으로 모순이다. 부목사에 쓰는 한자어 ‘副’(부)는 ‘버금 부’를 쓴다. 그래서 부목사 그러면 목사에는 버금가지만 진짜 목사는 아닌 게 된다. 부사장이 사장이 아닌 것처럼, 부시장이 시장이 아닌 것처럼. 결국 副목사는 不목사다. 부목사는 그냥 목사로 부르고 부교역자도 그냥 교역자로 불러야 한다. 굳이 담임목사와 구분을 두어야 한다면 부담임목사, 부담임교역자로 부르면 된다. 한국의 많은 교회들에서는 이미 부목사, 부교역자라는 호칭을 버렸다(예: 100주년 기념교회, 분당우리교회, 삼일교회, 지구촌교회 등).

또 헌법에서 부담임목사(부목사)에 대해 이르기를 “부목사는 담임목사를 보좌하는… 임시 목사”라고 규정하고 있다. 부담임목사의 임기가 보통 1년이다 보니까 임시목사라는 것이다. 부담임목사 역시 교인을 양육하는 목자이고 그리스도께 봉사하는 종이다. 그런데 임시라니? ‘임시’자를 떼야 한다.

목사의 오랜 시무 공로를 인정하고 노후에 은급을 주는 제도가 원로목사, 공로목사 제도다. 그런데 이것도 오직 담임목사만이다. 이런 제도 속에서 부담임교역자로 은퇴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자신의 전문분야를 살려서 평생을 부담임교역자로 헌신한다면 높은 성취를 이룰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담임목사가 되려는 것은 제도적으로 전혀 보호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들도 어쩌지 못하는 법적인 문제를 이민교회가 해결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법과 제도에서 훨씬 자유로운게 이민교회 아닌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율법의 전통에 짓눌려 있던 예루살렘에서 보다 율법에서 자유로웠던 이방의 땅에서 더 빨리 더 자유롭게 확산되었던 것처럼, 법과 제도의 개 선 역시 이민교회에서 훨씬 수월할 수 있다.

 
동역의 관계를 이루라

담임목사와 부담임교역자의 관계를 푸는 열쇠는 무엇보다 동역의식이다. 바울에 따르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지체다(고전 12:12-13). 한 몸을 이루는 지체는 상하의 관계가 아니라 동역의 관계다. 이 관계의 원형이 하나님이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세 인격의 하나님이 한 몸으로 존재하신다. 이 삼위의 하나님은 창조 구속 보존의 사역을 하실 때 언제나 동등한 권위와 동등한 존중의 관계에서 동역하신다.

담임목사와 부담임교역자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있다면 서로 동등한 권위와 동등한 존중의 관계에서 동역해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고전 12:21)고 했다. 눈이나 손이나 머리나 발이나 모두가 동등하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다만 각각의 권위와 역할은 구별된다. 머리가 할 일을 손이나 발이 할 수 없듯이 담임목사가 할 일을 부담임교역자가 할 수 없다. 담임목사는 하나님이 지교회의 톱 리더십으로 세우신 구별된 권위와 역할이 있다. 이것은 어떤한 경우에도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부담임교역자의 동등하게 구별된 권위와 역할도 존중되어야 한다. 이것이 동역의 관계다.

바울이 에바브로디도를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빌 2:25)라고 불렀다. 사실 빌립보 교인이었던 에바브로디도는 사역의 무게감이나 질에 있어서 사도 바울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바울은 그를 향해 “나의 형제"라고 했다. 형제는 위 아래가 아니라 동열의 관계다. 또 바울은 “함께 수고하는 자" 그리고 “함께 군사된 자"라고 했다.

바울은 “함께”라는 단어를 반복하면서 에바브로디도는 그냥 수고하고 군사된 자가 아니라, 나와 “함께” 수고하고, 나와 “함께” 군사된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바울이 언급한 내용 어디에도 상하의 관계를 의미하는 단어는 없다. 오히려 “형제”와 “함께”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철저하게 동역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 동역은 누가 하는 것일까? 강한 자, 높은 자가 하는 것이 동역이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에 불과했던 에바브로디도의 동역자가 되어주었듯이, 담임목사가 부담임교역자의 동역자가 되어 줄 때, 비로소 동역의 관계를 이룰 수 있다. 힘있는 자가 양보하는 것이 진짜 양보다. 힘없는 자의 양보는 양보가 아니라 힘의 논리에 순응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롯에게 양보한 것도 아브라함이 족장이었고 삼촌이었기에 양보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주님의 친구가 될 수 있는 것도 주님이 먼저 우리에게 친구가 되어주셨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담임목사가 부담임교역자의 동역자가 되어줄 때에만 동역이 가능하다. 

 
멘토링의 관계를 이루라

멘토는 멘토리를 사랑하고 보호하고 성장시켜 주고, 멘토리는 멘토를 따르고 본받고 존경하는 관계다. 멘토링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미래의 지도자를 키워내는 것이다. 담임목사는 부담임교역자를 볼 때 자신의 동역자이지만 동시에 교회의 내일을 이끌어갈 지도자로 보아야 한다.

아무리 많은 지교회가 있다 하더라도 주님의 교회는 ‘하나의 교회’다. 지금의 부담임교역자는 ‘하나의 교회’를 위한 미래의 지도자가 분명하다. 모세가 여호수아를, 엘리야가 엘리사를, 바울이 디모데와 디도를 멘토하며 ‘하나의 교회’를 위해 미래의 지도자로 키워냈 듯이 담임목사도 부담임교역자를 키워내야 한다. 그것이 ‘하나의 교회’를 위한 멘토, 곧 담임목사의 의무다.

멘토는 멘토리를 보호해야 한다. 모세가 계명을 받으러 산에 올라갈 때 혼자 가지 않고 여호수아와 함께 갔다(출 24:12-13). 그때 산 아래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 송아지에게 절하며 광란의 축제를 벌였고 하나님이 진노하시면서 하루에만 3천 명이 죽었다. 여호수아가 모세와 함께 있었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우상의 현장에서, 죽음의 현장에서 피해 있었음을 의미한다. 여호수아는 모세에 의해 완벽하게 보호받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미래의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바울 역시 미래의 지도자인 디모데를 두려움과 멸시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고린도교인들에게 편지까지 썼다(고전 16:10-11).

멘토는 멘토리의 형편을 살펴야 한다. 먼저 사역의 형편을 살펴야 한다. 목회자에게 설교는 가장 중요한 사역이다. 그런데 부담임교역자라고 해서 설교할 기회가 없다면 목회자의 정체성을 잃어버린다. 바라건데 부담임교역자들에게 더 많은 설교의 기회를 주어서 목회자의 소명이 흔들리지 않도록 살펴달라.

경제적인 형편도 살펴야 한다. 물가와 렌트비는 오르는데 사례비만 요지부동이라면, 하는 수없이 주중에 일을 더 해야 하거나 살림은 더 어려워질 것이 뻔하다. 이 형편을 누가 해아릴 수 있겠나? 담임목사다. 무얼 해서 먹고 사는지, 형편이 더 나빠지지는 않았는지 살펴야 한다. 부담임교역자에 관한한 제직들에게만 맡겨놓지 말고 멘토인 담임목사가 직접 챙겨야 한다.

특히 교회가 교육부에 투자한다고 하면 담당 교역자에 대한 투자가 최우선이다. 왜 대기업들이 많은 돈을 들여서 CEO를 스카우트 하는가? 지도자에게 투자하는 것이 기업 성장의 지름길이란 것을 알기 때문이다.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이건 단지 멘토링의 차원이 아니라 교회성장을 위해 필수적인 투자다. 그런데 많은 교회들이 여기에서 주춤한다. 그러면서도 양질의 교육과 교회성장을 꿈꾼다면 그것은 욕심이다. 부담임교역자에게 더 많이 투자하라. 그것이 교회성장의 첫 걸음이다.

 
▲ 예수마을 6월 강연회를 마치고 기념촬영     ©크리스찬리뷰

소통의 관계를 이루라

여기에서 소통은 단지 업무를 보고하고 부서의 현황을 알아가는 수준이 아니다. 영원한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교역자들 사이의 소통은 정보 교환을 넘어 ‘삶’이 소통해야 한다. 삶이란 1초 1초의 생명으로 엮어진 것이다. 그래서 삶이란 생명이고 삶의 소통은 생명의 소통이다.

목회자의 사명이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면 담임목사와 부담임교역자의 소통도 마땅히 생명의 소통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생명의 소통에는 거짓이나 위선이 없으며 사랑과 존경으로 충만하다. 이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생명의 소통은 궁극적으로 나의 생명을 나누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손해보고 희생하더라도 상대의 생명을 힘차게 하는 것이 생명의 소통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도 생명이 소통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생명의 소통을 이루셨고, 십자가를 타고 흘러내린 주님의 생명의 소통은 제자들이 주님을 위해 생명을 나누는 또 다른 생명의 소통으로 이어졌다. 이같은 생명의 소통을 이룰 수만 있다면, 담임목사와 부담임교역자의 관계는 생명의 관계로 승화되고 나아가서 세상과도 생명이 소통하는 교회가 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담임목사와 부담임교역자가 사랑으로 엮어지는 동역의 관계가 되고, 보살피고 본받는 멘토링의 관계가 되고, 생명이 소통하는 관계가 된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며 건강한 교회 성장을 향해 ‘함께’ 믿음의 경주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강의는 6년간 샘물교회에서 받은 사랑과 은혜가 아니었다면 결코 할 수 없었다. 한없이 부족한 사람에게 6년간 동역해주신 김기완 담임목사님과 아낌없이 사랑해주신 샘물교회 가족에게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하며 글을 마친다.

 
정지홍|샘물장로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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