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의 스마트폰을 꺼보십시오

백종규/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1/03/29 [15:00]
     © 크리스찬리뷰


파스칼의 팡세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성주의 또는 과학주의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근 인간의 이성과 과학의 한계에 대한 이해가 많이 부각되기는 했지만,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은 자기의 판단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경향을 보이곤 합니다.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의 기적과 같은 사실들을 오늘날 증명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은 거짓이겠습니까? 이처럼 자기 기준으로 평가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향해, 인간 이성의 한계점을 지적한 사람이 있으니 바로 파스칼입니다.

 

파스칼은 인간의 이성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모순점들과 그것을 해결할 수 없는 인간 사회의 구조적인 단면들을 지적하면서,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문제의 해결자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파스칼은 당대의 천재였으며 수학자이며, 물리학자였습니다. 그러나 31세에 경험한 회심의 체험은, 이전의 파스칼과 이후의 파스칼의 삶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오만하며 자기중심적이었던 파스칼은 회심 이후에 모든 사교계로부터 발을 끊고 겸손함과 금욕적인 삶의 태도를 가지며 하나님을 향한 추구함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회심을 경험한 파스칼이 분명히 알았던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유한한 지혜와 한계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이 완전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회심 이후에 파스칼의 메모들을 모아 놓은 것이 바로 그 유명한 ‘팡세’입니다.

 

파스칼이 39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죽음으로 ‘팡세’는 미완성의 작품으로 세상에 공개되었지만, 그럼에도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의 인정과 사랑을 받는 작품이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에게도 큰 도전이 되었던 것은, 파스칼은 자신이 경험했던 하나님을 평생토록 기억하기 위해서, 그 내용을 자신의 옷자락에 꿰매어서 가지고 다녔다는 것입니다.

 

파스칼이 천재이기 이전에 하나님을 만난 경험을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이 이러한 작품을 쓸 수 있었던 이유일 것입니다. 또한 그 경험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했었는지 그가 죽기까지 그 메모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소중한 것은 함부로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그것이 인생의 삶과 죽음을 결정짓는 것이라면 말입니다.

 

이처럼 구원을 받는 것은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독생자를 주심으로 얻는 매우 귀하고 비싼 것입니다. 단지 우리에게 아무런 공로가 없기 때문에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인 것입니다. 파스칼이 구원받은 것을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하는 삶의 태도를 보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또한 파스칼처럼 나 자신을 신뢰하거나 이성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지혜를 의지하며, 그분의 능력을 신뢰하며, 충분히 사랑할 때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침묵의 시간

 

하지만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조차 파스칼 이전의 사람들이 경험했던 실패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비해 수많은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문명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수많은 문명의 이기들은 우리로 하여금 과거에 비해 시간을 절약하고, 간편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실상은 그렇지 못합니다.

 

우선 순위를 잃어버리고, 오히려 또 다른 일에 쫓기듯이 살아가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영적인 추구함을 갖지 못한 채 다른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가만히 앉아있는 것을 힘들어하고, 하다못해 스마트폰이라도 손에 붙잡고서는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것보다 오히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에게는 침묵과 고독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홀로 있는 것에 대해서 익숙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을 만나거나 또는 스마트폰을 붙잡고서는 고독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려고 합니다.

러나 이러한 외부적인 관심이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을 멀리하게 합니다. 침묵 속에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바로 관계의 핵심인데도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시간을 지키셨는데, 하물며 우리가 이를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당장 적용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여러분이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해 성경을 읽거나, 혹은 자연 속에서 산책을 할 때, 잠깐의 시간만이라도 여러분의 스마트폰을 꺼보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은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우리가 결코 타협해서는 안 될 중요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 중요한 시간을 다른 사람의 전화 한 통에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마치 하나님과의 만남을 어느 순간에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처럼 잘못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과정이 없다면, 우리를 지도해주는 사람이 없어졌을 때, 우리는 너무도 쉽게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영적인 성장의 책임은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처럼 깊은 침묵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시선을 고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Fix의 의미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의 시선을 고정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려주는 신약의 구절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를 바라보자’에서 사용된 영어단어 fix에 대해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Let us fix our eyes on Jesus)

 

fix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선반을 벽에 고정시킨다는 의미에서 ‘고정시키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고, 날짜와 시간 등을 정하고, ‘조정하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고장난 것에 대해서 “수리한다”는 의미도 있으며, 얼굴과 머리 등을 ‘준비하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fix가 이처럼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무척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예수님에게 fix한다고 했을 때, 위의 다양한 의미를 모두 실천하는 것이 매우 유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곧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예수님에게 fix한다는 것은, 우리는 우리의 불안정한 시야, 선천적인 산만한, 눈앞의 일만 생각하는 것을 교정(수리)하며, 이제 곧 만나게 될 예수님을 생각하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것이며, 눈에 보이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으로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로 우리의 시선을 조정해야 함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마치 사랑에 빠진 것처럼, 우리의 두 눈이 예수님께 단단히 고정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오늘 우리의 삶 속에 직면한 시련을 능히 견뎌내고, 위험에 직면했을 때에 용기를 낼 수 있을 것입니다. 눈앞에 닥친 현실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기다릴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되찾게 될 것입니다. 부디 예수님께 여러분의 마음을 쏟기 바랍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에 시선을 고정하기 바랍니다. 우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도록, 앞서 모든 것을 참고 걸어가신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 오늘 우리 삶의 현실을 뛰어넘어,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할 줄로 믿습니다.〠

 

백종규|히스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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