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전쟁, 잊혀지는 호주 참전용사들

글/주경식 사진/권순형 | 입력 : 2021/05/25 [14:44]
▲ 90세의 참전용사 레이 시버 씨가 본지와 단독 인터뷰를 그의 자택에서 가졌다. 그는 19살에 왕립호주공군에 입대, 2년여간의 훈련을 받은 후 한국전에 전투기 조종사(중사)로 참전했다.     © 크리스찬리뷰


지난 4월 21일 기자 일행은 시드니한국문화원(원장 김지희)에서 개최한 가평전투 70주년 기념전 오프닝 행사에 참석하였다. 가평전투는 6.25가 발발한 후 다음 해인 1951년 4월 23일, 유엔 연합군으로 참가한 호주군이 중공군의 공세에 맞서 가평에서 3일 동안 격렬히 맞붙은 전투였다.

 

특히 가평전투는 물밀듯이 내려오는 중공군의 공세를 저지하고 서울 탈환을 막은 호주군이 수행한 전투 중 가장 위대한 전투로 알려져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호주군은 그해 10월 첫째 주에 마량산에 벌어진 전투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유엔군 사령부가 중공군의 연속되는 반격으로 위기를 당할 때 임진강부터 마량산까지 이어지는 방어선을 구축하고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중공군의 대규모 공격을 막아냈다. 이 두 전투는 한국 전쟁 중 호주 육군이 보여준 가장 뛰어난 전투로 기억되고 있다.

 

주시드니총영사관은 가평전투와 마량산 전투 70주년을 맞아 6.25 전쟁에서 싸웠던 호주 군인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가평전투 70주년 기념전’(1951, the critical year of the Korean War)을 시드니한국문화원에서 개최하였고, 이 행사를 취재하기 위해 기자 일행이 참석, 행사에 참석한 6.25 때 공군 조종사(pilot)로 한국전에 참전한 레이 시버(Ray Seaver, 90) 씨를 만나게 되었다.

 

▲ 한국문화원에서 열린 가평전투 70주년 기념전에 참석한 참전용사들. 왼쪽부터 이안 크로프트 제독, 레이 시버, 조니 비네함군 씨     © 크리스찬리뷰

 

한국 전쟁이 레이의 인생을 바꾸다

 

‘가평전투 70주년 기념전’ 오프닝 행사에서 만난 레이 시버(Ray Seaver) 씨는 90세의 연세에도 정정하게 보였다. 이 행사에 세 명의 한국전 참전 호주 베테랑이 참석하였다. 왕립호주공군(Royal Australian Air Force, RAAF) 출신 레이 시버, 왕립호주연대 3대대 소속이었던 조니 비네함(Johny Bineham), 해군제독 이안 크로포드(Ian Crawford) 등이다. 이 세 분 중 해군제독 이안 크로포드 씨는 이미 크리스찬리뷰 2005년 6월 호에 소개했었다.

 

▲ 비행을 마치고 김포기지에 착륙한 호주왕립공군조종사들. 왼쪽이 레이 시버 씨이다. 왕립호주공군 77비행대대는 김포기지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 크리스찬리뷰 자료 사진

 

그래서 이번에는 왕립호주공군(RAAF) 소속 전투기 조종사였던 레이 시버 씨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는데 흔쾌히 수락을 해주어 만나게 되었다. 그는 고든(Gordon)에 살고 있었다.

 

레이는 1931년 시드니에서 서쪽으로 6시간 떨어져 있는 뉴사우스 웨일즈 주 포브스(Forbes)라고 하는 조그만 소도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미국인이었는데 그 당시 특이하게 호주로 이민을 온 케이스이다.

 

1930년대는 세계적으로 경제공황이 심했던 시기여서 호주도 살기가 넉넉치 않았다. 레이가 6살 때, 가족은 아버지의 직업을 찾기 위해 시드니로 이민을 오게 되었다. 그리고 1946년 제2세계대전이 막 끝난 즈음 그의 가족은 다시 블루 마운틴이 있는 카툼바로 이사를 했다. 레이는 카툼바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전기공 직업훈련을 받았다.

 

“제가 카툼바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바로 전기공 직업훈련과정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직업 때문에 그 과정에 들어갔지만 제 적성에도 안 맞고 너무 지루했어요. 그러던 중 한국전쟁이 터져 조종사들이 많이 부족하게 된 거에요. 호주 조종사들이 유엔 연합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되어 젊은 조종사들이 많이 필요하게 된 것이죠. 그 덕분에 제가 조종사 모집 광고를 보고 지원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 제 나이가 19살이었습니다. 만약 한국전쟁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저는 조종사의 길을 걷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전기기사 직업훈련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호주가 유엔 연합국의 일원으로 한국전쟁에 참가하게 되자 호주 공군 조종사들이 대거 한국전쟁에 투입되는 바람에 젊은 공군 조종사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19살 이른 나이에 호주 공군 모집에 지원하게 되었고 운 좋게 호주 공군 조종사 훈련과정에 합격하게 된 것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저는 공군 조종사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한국전쟁이 저의 인생을 바꾼 거죠.”

 

▲ 왕립호주공군77비행대대는 김포기지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 크리스찬리뷰 자료 사진

 

▲ 김포기지 미티어 전투기 앞에서 포즈를 취한 레이 시버 중사   ©크리스찬리뷰 자료사진  


미티어(Meteor) 전투기 조종사가 되다

 

레이에게는 한국전쟁이 그의 인생을 전투기 조종사로 바꾸게 한 운명적인 사건이 되었다. 레이는 1951년 2월 호주 공군 소속 조종사 훈련을 시작했다. 1년 6개월간의 고된 훈련을 거쳐 일반적인 공군 항공기 조종술을 배운 후 그가 희망했던 전투기 조종사가 되기 위해 또 다시 6개월간의 다른 종류의 거친 전투비행 훈련을 연마해야 했다.

 

그리고 드디어 1953년 1월에 한국전에 참가하기 위해 일본으로 파견되었다. 그때 일본에서 레이를 기다리고 있던 전투기는 미티어(Meteor)라는 전투기였다. 미티어는 영국이 만든 첫 번째 쌍발 제트엔진의 전투기였다.

 

미티어는 당시 미국의 전투기 머스탱(Mustang)과 함께 한국전의 주력 전투기였다. 레이는 일본에서 미티어 전투기 실전연습을 거친 후 1953년 2월 김포 공군 기지로 배속받았다. 레이중사(sergeant)는 왕립호주공군(RAAF) 77비행대대에 편성되었다. 당시 김포는 이미 전쟁으로 건물들이 파괴되고 반듯한 건물이 없을 때였다. 레이 중사는 임시 천막 막사에서 지내며 임무를 수행했다.

 

“제가 1953년 2월 김포에 도착했을 때는 겨울이었어요. 한국의 겨울은 특히 막사에서 보내는 겨울은 지독히 추웠습니다. 그래도 군인이기 때문에 불평할 수 없고, 전투를 수행했죠. 한국전 동안 101번의 미션을 수행했습니다.”

 

레이가 한국에 왔던 1953년 2월은 한국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였다. 그는 김포에 전투기 조종사들을 위해 특별히 조립된 임시 천막 막사에서 생활하며 전쟁을 수행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사람들을 개인적으로 만날 기회가 없었다고 고백한다. 레이는 2월부터 한국전쟁이 휴전되었던 7월 27일까지 하루걸러 비행을 나갔다.

 

▲ 김포기지에서 작전을 수행한 호주왕립공군 77비행대대와 레이 씨의 비행기록이 기재되어 있는 로고북.  ©크리스찬리뷰 자료사진     

 

“매일 눈을 뜨면 새로운 미션이 도착해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 미션들을 수행하기 위해 우리는 매일 작전 회의를 하고 비행준비를 하고 거의 하루걸러 비행을 나갔어요. 그래서 얼마나 세월이 빨리 지나갔는지도 몰랐죠. 그리고 저희 비행대대가 김포에 있었어요. 당시 김포는 북한쪽 경계선과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북한에 비교적 빠른 시간에 날라가서 목표물들을 공격하고 빨리 돌아올 수 있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레이는 그의 비행 로그북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그 비행 로그북 안에는 그가 한국전 동안 수행했던 작전수행 숫자들과 비행시간들이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로그북 안에는 인상적인 사진 한 장이 끼워 있었다. 바로 그가 한국전 당시 탔던 미티어 전투기 앞에서 찍은 21세 때의 사진이었다. 그 사진을 보니 그가 얼마나 젊은 날 한국전에 참전했었는지 실감나게 와닿았다.

 

왕립호주공군(RAAF) 77 대대

 

레이는 호주 공군 조종사 가운데 전투기 조종사가 되기를 희망했다. 공군에는 여러 조종사들이 있다. 수송기 조종사, 헬리콥터 조종사, 전투기 조종사 등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그는 가장 위험한 전투기 조종사가 되기를 희망했다.

 

한국전에 참전할 때 전투기 조종사로서 안 무서웠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레이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무섭지 않았습니다. 첫째는 보병부대 군인들에 비하면 저희가 훨씬 안전한 편이었고요. 그리고 그때는 제가 맡은 임무를 집중해서 생각하는 것이 급해서 그 목표에 집중하다 보니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었습니다. 그때 제가 속한 RAAF 77비행대대에는 30명의 조종사가 있었습니다.

 

제가 참전하는 기간 동안 제 동료 중 6명이 작전을 수행하다 전사했습니다. 그리고 비행기가 격추되어 한 명이 포로로 잡히기도 했습니다. 저는 다행히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죠.”

 

▲ 1953년 당시 김포기지에는 왕립호주공군 77비행대대 소속 조종사30명이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크리스찬리뷰 자료사진     

 

▲ 원산 근처에서 북한군 군수물자 트럭 1백여 대를 폭파시킨 공로로 미국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은 레이 시버 씨가 훈장을 가리키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1953년 한국전 당시 공군 전술 배치를 보면 김포비행장은 횡성 비행장과 함께 가장 전방에 배치된 유엔 연합군 비행부대였다. 이 김포 비행부대에 왕립호주공군(RAAF) 77비행대대가 편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특히 호주 비행대대가 조종하는 미티어 전투기는 고공비행보다는 저공비행에 유리해 낮게 날아가 적의 부대나 보급물자들을 찾아 폭격하는 임무를 주로 맡았는데 낮게 비행하다 보니 적의 포격에 맞아 격추될 위험이 컸었다. 그가 한국전에 참전한 7개월 동안 그는 동료 6명을 잃는 것을 가까이서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용감하게 전투에 임해 큰 공을 세웠다.

 

“저희의 임무는 적의 군기지를 찾아 폭격하기도 하고, 도로 정찰을 나가 적의 보급트럭들을 공격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북한군도 낮에는 저희 전투기들이 와서 공격하니까 들키지 않으려고 주로 밤에 이동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른 새벽에 출격하여 아직 숨지 못한 보급품 트럭들을 공격하거나 오후 늦게 나가 막 이동을 시작한 트럭들을 발견하여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한 번은 연락을 받고 출격했는데 원산 근처에서 1백 대쯤 되는 보급 트럭을 발견하여 그 군수물자 트럭 1백 대 가량을 거의 다 폭파시켰습니다. 지금 제가 달고 있는 이 공군훈장은 미국으로부터 받은 훈장인데 그때 세운 공으로 받은 훈장입니다.”

 

왕립호주공군(RAAF)에는 많은 비행대대가 편성되어 있다. 그중 레이가 속해 있는 왕립호주공군 77비행대대는 한국전쟁에 참전해서 혁혁한 공을 세웠던 호주공군으로 유명하다.

 

▲ 가평전투 70주년 기념전 행사에 참석한 한국전 참전용사와 관계자들의 기념촬영.  © 크리스찬리뷰     

 

▲ 호주 공군 미티어 조종사 존 알포드(John Alford)와 6살 한국 어린이   ©크리스찬리뷰 자료사진     

 

▲ 호주 공군 전투기 조종사로 한국전 참전한 레이 시버 씨.     © 크리스찬리뷰


한국전쟁은 1953년 7월 27일 정전이 되었다. 레이는 한국전쟁이 정전된 후 1953년 8월에 호주로 돌아왔다. 그리고 1954년 새해가 되자마자 남극으로 파견되어 남극에서 남극지형을 사진 촬영하고, 남극을 항해하는 배들을 인도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리고 남극에서 돌아온 후 왕립호주공군 항공교관으로 근무하다가 소위(pilot officer)로 제대한 후 1956년부터 1983년까지 콴타스 항공사에서 민간항공기 조종사로 27년간 근무를 했다.

 

“한국전쟁이 아니었으면 아마 저는 전기기사를 하거나 아니면 그것도 제가 좋아하는 일이 아니어서 무엇을 하며 지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한국전은 저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제 젊은 날 한국을 위해 싸웠다는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

 

▲ 6.25 참전 호주 공군을 기리는 동판 제막식. 이계훈 공군참모총장과 마크 빈스킨 호주 공군참모총장, 샘 게러비츠 주한 호주대사(왼쪽)이 참석했다.(용산전쟁기념관 2010. 4.13)   ©크리스찬리뷰 자료사진   

 

호주는 한국의 혈맹

 

호주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에 이어 영국과 함께 두 번째로 연합군을 보낸 한국의 혈맹이다. 1950년 6.25가 발발한지 이틀 후 6월 27일 곧바로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는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안이 결정되었다. 그 후 호주 정부는 한국과 수교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하게도 이 안건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고 곧바로 병력을 파견한다.

 

호주는 먼저 6월 30일 영연방 극동해군 사령부에 파견되어 있던 2척의 구축함을 파견하였고 그리고 뒤이어 7월 1일 왕립호주공군(RAAF)소속 제77전투비행대대를 미 극동공군 사령부로 급파하였다. 호주는 미국과 영국에 이어 가장 많은 병력을 한국에 파견한 한국으로서는 고마운 동맹국가라 할 수 있다.

 

육군, 해군, 공군 등 전군에 걸쳐 1만 7천여 명의 병력을 파병하였고, 한국전에서 3백40명의 병사들이 전사하고, 1천216명의 병사들이 부상을 당했다. 실종자 수도 상당하다. 그 당시 한국이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도 모르고 와서 젊은이들이 한국을 위해 피를 흘리고 한국을 도운 것이다.

 

레이는 가지고 있던 자료 가운데 10년도 넘는 신문 스크랩을 하나 보여주었다. 제목은 “실종된 공군 조종사의 마지막 출격”이었다. 이 신문 스크랩에는 실종된 조종사 피터 찰머스(Peter Chalmers)의 조카 잔 오스틴(Jan Austin)이 60년 전 한국전쟁 중 실종된 삼촌의 수수께끼가 마지막 출격기록을 통해 밝혀지게 될 것을 믿는다는 내용이 언급되고 있었다.

 

“피터는 저보다 연배가 다섯 살 많았지만 저랑 친한 77 비행대대 동료였어요. 그런데 1953년 3월 26일 출격을 나갔다가 원산 근처에서 적에게 격추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시체를 찾지 못했습니다.”

 

잊혀진 전쟁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은 6.25 한국전쟁을 일컫는 별칭이다. 2차대전이나 베트남전쟁에 비해 전쟁기간도 짧았고, 미디어들을 통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2차대전 이후 가장 많은 연합군이 참전했음에도 불구하고 6.25 한국전쟁은 세계에서 ‘잊혀진 전쟁’으로 불리우고 있다.

 

1950년 당시 호주에서도 많은 호주 국민들은 한국전쟁에 대해 알지 못했다. 한국을 돕기 위해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많은 병력을 보내고, 또 미국 다음으로 가장 빨리 군인들을 파견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호주 국민들은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 한국에 전쟁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했다.

 

아마도 지금처럼 미디어가 발달하지 못한 이유가 클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주의 많은 젊은이들은 전혀 관계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은둔의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쳐 한국을 구했다. 레이 시버 씨도 한국을 위해 열심히 싸운 숨은 용사 가운데 한 사람이다.

 

“제가 8개월 만에 호주로 다시 돌아오니 친구들이 그랬어요. 너 어디 갔다 왔니? 그동안 너 안 보이더라, 몇 개월 동안 뭐하느라 코빼기도 안보였니? 그래서 제가 한국전에 참전해서 열심히 싸우고 돌아왔다고 하니까 그런 일이 있었니? 하고 오히려 신기한 듯 쳐다보더라고요. 그럴 정도로 한국전쟁은 호주에서도 한마디로 ‘잊혀진 전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주는 한국에 세 번째로 많은 군인들을 파견한 혈맹의 국가이다. 당시 세계 각국 인구 비율로 따져볼 때 호주가 한국에 베푼 인도적 호의는 어느 나라보다 크다고 볼 수 있다.

 

2000년에 발표한 기록에 의하면, 한국전쟁에 참전한 호주군인 1만 7천 명 중 현재 2천5백 명 정도가 생존해 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젊은날 한국전쟁에 참전해 피를 흘리고, 기꺼이 한국을 도운 호주의 숨은 용사들이 이제 하나둘 지기 시작한다.

 

▲ 한국전 참전용사들. 우리는 목숨을 바쳐 한국을 구한 이들의 은혜를 잊어서는 결코 안될 것이다.    © 크리스찬리뷰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벌써 71주년이나 되었고 한국전에 참전한 그들의 나이가 평균 90세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6.25전쟁은 ‘잊혀진 전쟁’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지만 호주에 사는 동포들은 한국전 참전 용사들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다가오는 현충일(6월 6일)에 한국전 참전 호주 용사들에게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글/주경식|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광고
광고

  • 포토
  • 포토
  • 포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