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얄 플라잉 닥터 서비스 Royal Flying Doctor Service

세계 최초 항공 의료 서비스 단체를 설립한 존 플린 목사

정지수/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1/05/25 [15:26]
▲ 존 플린 목사가 세계 최초로 설립한 로열 플라잉 닥터 서비스는 의료 시설이 부족한 호주의 모든 지역에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RFDS     

 

▲ 호주 아웃백 지역에서 응급환자를 싣고 착륙한 비행기에서 앰뷸런스로 이동하여 병원으로 이송한다. ©RFDS


존 플린 목사(Rev. John Flynn, 1880 11.25~1951 5.5)는 호주장로교회가 설립한 호주내륙선교(Australian Inland Mission)의 담당 목사로 호주 내륙의 외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섬겼다.

 

그가 외딴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방문해 선교 사역을 펼치면서 그들에게 의료 서비스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존 플린 목사는 로열 플라잉 닥터 서비스 (Royal Flying Doctor Service)라는 의료 단체를 세계 최초로 만들었다.

 

이 의료 단체는 의사가 없는 외딴 지역에서 응급 환자가 발생하면 항공기를 띄워 환자를 신속히 수송하거나 의사를 보내주는 서비스를 제공했는데, 이러한 서비스는 세계 최초의 항공 의료 응급 서비스였다.

 

오늘날 로열 플라잉 닥터 서비스 (Royal Flying Doctor Service)는 의료 시설이 부족한 호주의 모든 지역에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처음 시작했을 때는 1대의 비행기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79대의 비행기와 180대의 자동차가 전국을 돌아다니며 환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지난 한 해 동안 총 32만 100명의 환자들이 로열 플라잉 닥터 서비스의 도움을 받았다. 이는 매일 평균 8백77명의 환자들이 도움을 받은 것이다.

 

▲ 아웃백 지역에서 응급환자를 이송하는 RFDS 의료진들.©RFDS   

 

▲ 비행기로 이송해 온 응급환자를 앱뷸런스에 실어 병원으로 향한다.©RFDS     


로열 플라잉 닥터 서비스 비행기로 이송한 환자는 지난 한 해 동안 3만 7천666명으로 매일 평균 103명의 환자들을 이송한 것이다. 차량으로는 6만 2천895명의 환자들을 이송했는데, 이는 매일 평균 172명을 이송한 것이다. 현재 1천473명의 풀타임 직원들이 로열 플라잉 닥터 서비스에서 일하고 있다.

 

지난 한 해 동안의 로열 플라잉 닥터 서비스의 운영비는 약 4억 3천3백 달러였다. 운영비의 약 12퍼센트는 개인 기부금이고, 나머지는 주 정부와 연방 정부의 예산 그리고 사업체들의 기부금이다.

 

호주 정부가 의료 서비스가 부족한 지역에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 로열 플라잉 닥터 서비스를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존 플린 목사가 비전을 따라 설립한 로열 플라잉 닥터 서비스가 그의 사후에도 계속적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해 주고 있다.

 

이제 로열 플라잉 닥터 서비스를 설립한 존 플린 목사에 대해 자세히 살펴 보자. 존 플린 목사는 1880년 11월 25일에 호주 빅토리아 주의 몰리아굴(Moliagul)이라는 작은 타운에서 토마스(Thomas)와 로세타(Rosetta)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어머니인 로세타는 그를 낳고서 사망했다.

 

▲ 존 플린 목사의 출생 기념비. 그가 태어난 빅토리아주 ‘몰리아굴’에 세워져 있다. 기념비는 지역 주민들, Bet Bet위원회 및 Australian Inland Mission이 세웠다. 12 피트 기둥의 벽돌 구조, 지역 돌담 및 프로펠러로 구성됐으며, 프 로펠러는 Australian National Airlines에서 공급했다.©RFDS     

 

그는 시드니에서 이모에 의해 양육되었고, 다섯 살이 되었을 때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 살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그는 학비가 부족해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쳤고, 사진 기술과 응급처치 기술을 배웠다.

 

또한 그는 자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목회자가 되는 것을 꿈꾸기 시작했다. 1903년부터 오몬드신학교(Ormond College)에서 평신도 사역자 훈련을 받았고, 버찬(Buchan) 지역을 포함해서 이제 막 개척이 시작된 새로운 지역에서 평신도 사역자로 섬기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4년 동안 멜번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그의 목회 비전은 호주 내륙 외딴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1910년에 외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위한 책인 ‘부쉬맨의 동반자’(The Bushman’s Companion)를 저술했다.

 

이 책에는 의사와 목사가 없는 외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응급처치 기술이 적혀있고, 여러 상황에서 사용 가능한 기도문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 책은 호주 내륙 외딴 지역에 무료로 보급되었다.

 

한편, 스코틀랜드 출신인 헨리에타 스미스(Henrietta Smith, 1782~1871) 여사가 남부 호주(South Australia) 장로교회에 많은 금액을 기부했는데, 남부 호주 장로교회는 이 기부금을 가지고 더네스크 스미스 선교회(The Smith of Dunesk Mission)를 설립했다.

 

이 선교회는 호주 원주민들을 돕는 사역을 했는데, 주로 아들레이드에서 약 50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마을인 벨타나(Beltana)를 중심으로 원주민들을 섬겼다.

 

존 플린은 이 사역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이 사역을 위해 1911년 1월 24일에 아들레이드에서 장로교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목사가 된 존 플린은 벨타나(Beltana)에서 사역하면서 주변 외딴 지역들도 자주 방문해 예배를 인도했고, 성도들을 심방했다. 또한 외딴 지역 주민들을 만나 그들의 어려운 상황들을 듣기도 했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위로하며 도왔다.

 

▲ 1928년에 세워진 항공의료서비스는 호주 외딴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많은 의료 헤택을 제공하고 있다. 사진은 초기 의료 서비스 장면.©RFDS    

 

▲ 젊은 시절 존 플린 목사  ©RFDS   


1912년에 존 플린 목사는 그가 속한 장로교회에 호주 내륙 선교 사역의 어려움을 보고 했다. 적은 수의 목회자로 광범위한 외딴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 쉬운 사역이 아님을 보고한 것이다. 그래서 남부 호주장로교회는 호주 내륙 선교회(Australian Inland Mission)를 설립하고 존 플린 목사를 대표로 임명했다.

 

호주 내륙 선교회의 대표로 사역하면서 존 플린 목사는 호주 내륙 외딴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영적인 돌봄과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는 모금된 선교비를 가지고 외딴 지역에 의료 진료소를 세웠다. 이 사역을 통해서 그는 외딴 지역에 사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의료 혜택을 받기 원했다. 그래서 그는 이 문제를 가지고 깊이 고민하며 하나님께 기도 드렸다.

 

그러던 중 1917년에 존 플린 목사는 공군 조종사인 클립포드 필(Clifford Peel) 중위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이 편지를 통해 필 중위는 존 플린 목사에게 항공 의료 서비스에 필요한 비행기와 운영 비용 등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이 편지 때문에 존 플린 목사는 항공 의료 서비스에 대한 구체적인 비전을 품을 수가 있었다.

 

한편, 안타깝게도 클립포드 필 중위는 프랑스에서 독일군과 교전하다 전사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24살이었다. 항공 의료 서비스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한 클립포드 필 중위가 항공 의료 서비스가 시작되는 것을 보지도 못하고 사망한 것이다.

 

▲ 호주 아웃백에 착륙한 로열 플라잉 닥터 서비스 의료팀 ©RFDS     

 

▲ 아웃백 커뮤니티를 통헤해 어린이들에게 1차 의료 진료를 실시하고 있다.©RFDS    

 

▲ 환자를 이송하는 항공기 내에서 어린이 환자를 돌보는 비행의사. ©RFDS     

 

▲ 로열 플라잉 닥터 서비스와 협력하는 랜트카 회사 Thrifty ©RFDS    


존 플린 목사는 선교 소식지에 자신이 그동안 꿈꾸어 왔던 항공 의료 서비스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는 글을 게재했고, 이 서비스를 위한 모금 운동을 본격적으로 펼쳤다. 많은 성도들이 이 사역을 귀하게 생각해 헌금했다.

 

특히 존 플린 목사의 오랜 지지자였던 맥케이(H V McKay)가 많은 금액을 기부했다. 또한 호주의 대표 항공사인 콴타스(QANTAS) 항공의 설립자인 허드슨 피쉬 (Hudson Fysh)도 항공 의료 서비스 사역을 도왔다. 10년 동안의 기도와 모금 운동 그리고 준비와 노력으로 1928년 5월 17일에 드디어 세계 최초로 항공 의료 서비스가 퀸스랜드 (Queensland) 주에서 시작되었다. 항공 의료 서비스는 이후에 로열 플라잉 닥터 서비스(Royal Flying Doctor Service)로 이름을 바꾸었다.

 

의사인 켄욘 웰치 (Kenyon Welch)와 비행기 조종사인 아더 어플렉(Arthur Affleck)이 항공 의료 서비스가 처음으로 시작될 때 함께 했다. 항공 의료 서비스를 처음 시작할 때는 자동 항법 장치가 발달하지 않아서 강이나 도로를 보며 목적지로 향해 비행기를 운전해야 했다. 비행은 주로 낮에 이루어졌으며 아주 응급한 경우가 아니면 밤에는 비행을 하지 않았다.

 

한편, 소형 비행기가 항공 의료 서비스에 사용되었기 때문에 먼 지역까지 날아가기 위해서는 곳곳에 비행기 연료 저장소가 필요했다. 항공 의료 서비스는 서비스를 시작한 후 1년 동안 50번의 비행을 통해 225명의 환자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존 플린 목사는 항공 의료 서비스를 운영하면서 한 가지 문제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일부 외딴 지역에는 전기가 없어서 사람들이 도와 달라고 무전을 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존 플린 목사가 이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있었는데 알프레드 트래이거(Alfred Traeger)라는 기술자가 이 문제를 해결했다. 그는 페달을 밟으면 전기가 생산되어 사용이 가능해지는 무전기를 개발했다. 전기가 없는 외딴 마을에 사는 사람들도 급한 환자가 생기면 페달을 밟아 무전을 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이 무전기를 통해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사는 사람들과도 소식을 전하며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었다.

 

또한 학교가 멀어서 집에서 가정 수업을 하는 학생들도 이 무전기를 통해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선생님들에게 질문을 할 수 있었고, 선생님들도 이 무전기를 사용해 학생들의 질문에 대답하며 학생들을 교육시킬 수 있었다.

 

▲ 아웃백에서 긴급한 환자가 발생하여 현장에서 응급처치하는 로열 플라잉 닥터 서비스 의료팀 ©RFDS     

 

▲ 페달을 밟으면 전기가 생산되어 사용이 가능해지는 무전기. 전기가 없는 외딴 마을에 사는 사람들도 급한 환자가 생기면 페달을 밟아 무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RFDS     


한편, 존 플린 목사는 51세가 되던 1932년 5월 7일에 호주 내륙 선교회 의장이었던 장 블란치 베어드 (Jean Blanch Baird)와 시드니에 위치한 에쉬필드 (Ashfield) 장로교회에서 결혼을 했다. 베어드 사모는 존 플린 목사의 아내로, 또한 동역자로 그의 사역을 도왔다.

 

존 플린 목사는 로열 플라잉 닥터 서비스(Royal Flying Doctor Service)의 대표로 섬겼고, 두 번이나 호주 장로교 총회장을 역임했다. 또한 그의 공로를 인정받아 대영제국 4등 훈장을 수훈 받았다. 그리고 그는 호주 20달러 지폐의 인물이 되었다.

 

호주 내륙 외진 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양질의 의료 서비스와 영적 돌봄을 제공해 주기 위한 비전을 품고, 한 평생 충성스럽게 사역한 존 플린 목사는 71세가 되던 해인 1951년 5월 5일, 암에 걸려 시드니에서 사망했다. 그의 시체는 화장되었고, 앨리스 스프링스 (Alice Springs)에 있는 존 플린 목사 기념관에 안치되었다.

 

▲ 퍼스에 있는 호주 내륙 미션 병원 박물관 ©RFDS     

 

▲ 로열 플라잉 닥터 서비스, 앨리스 스프링스 기지 ©RFDS     

 

▲ 리스 스프링스 근처에 있는 존 폴린의 무덤 ©RFDS     

 

▲ 리스 스프링스 근처에 있는 존 폴린의 무덤 ©RFDS     

 

▲ 호주 화폐 20달러의 인물이 된 존 플린 목사.©RFDS     

 

▲ 존 플린 목사의 초상화 ©RFDS     


그의 장례 예배는 무전기를 통해 호주 전역으로 생중계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그의 업적을 기렸다.

 

존 플린 목사는 종종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무엇인가 중요한 일을 시작했다면, 그것을 멈출 수 있는 것은 없다.”

한편, 호주 총독이었던 윌리엄 슬림(William Slim)은 존 플린 목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의 손은 온 땅을 축복하는 손으로 사용되었다.”〠

 

정지수|본지 영문편집위원

사진= RFDS

 
광고
광고

  • 포토
  • 포토
  • 포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