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늙은이들

배용찬/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1/07/26 [14:34]

나는 해방이 되기 몇 해 전에 태어나 이제 80을 바라보는 나이이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늙은이라고 자처하고 있었다.

 

그 나이에도 여전히 중늙은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사리판단이 그런대로 정상 쪽에 가까우리만치 정신이 멀쩡하고 잔잔한 병 말고는 치명적인 병이 없어 활동하는데 남 보기에 그럴듯하다고 자평하다보니 아주 늙은이로 치부되는 것이 싫어서 붙인 나대로의 고집에서 연유한 것이다.

 

그러나 요즘의 젊은이들에게 아니꼽고 불편한 마음이 미상불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들에게 ‘어떻게 이루어 놓은 조국인데...’라면서 억지 생색을 내는 편협한 또라이로 취급되는 것이 나에게는 견딜 수 없는 모욕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처절한 생존경쟁에서 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다보니 지금의 대한민국 터전이 된 것을 무슨 무공훈장처럼 ‘어떻게 이루어놓은...’운운하는 것은 정말 염치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핍절의 대동아전쟁 말기에 운명처럼 태어나 해방과 이념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유아기를 보내다보니 그때에는 세상의 되어가는 모습들이 우리에게는 전혀 관계가 없는 유희에 불과하였으며 이내 닥친 6.25전쟁은 한창 호기심이 많은 국민학교(초등학교) 학생에게는 별천지였다.

 

조금 철이 들 때쯤 해서는 4.19라든가 5.16이라고 하는 격변의 정치사를 겪으면서 사회 초년생이 겪어야 했던 고난을 힘들어 하지 않고 부딪쳐 갔다. 어렵게 얻은 직장에서는 휴식 없는 월화수목금금금으로 일을 했다.

 

대학에서 배운 전공을 살려 남들은 서울에서 직장을 얻으려고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할 때 나는 강원도 첩첩산중의 광산을 자원해 가서 20년 청춘을 땅 속 갱도에서 보냈다.

 

특별히 지하 600미터 밑에 있는 대규모 광물자원을 나의 과학적 판단으로 찾아냈을 때에는 대한민국의 원료자원을 확보했다는 자부심 하나로 세상을 호령했을 때도 있었다.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중화학공업 육성을 위한 기초자원의 확보라는 사명이 내 어깨에 지워졌을 때에는 세계 30여 개국의 정글과 사막 그리고 5천 미터가 넘는 고봉을 오르내리며 지하 자원 확보의 첨병으로 일할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는 세상을 넓게 볼 수 있는 큰 안목을 갖게 해 주었다. 그즈음 대한민국은 천운을 얻어 중동 진출, 월남 파병 그리고 새마을사업이라는 거국적 전환기를 거치면서 겨우 한 세대 만에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냈다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축복이 아니고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일일 것이다.

 

이것이 어찌 지금 70을 넘긴 우리 세대가 이루어 놓은 결과물이겠는가. 이것이 어찌 ‘어떻게 이뤄 낸 조국인데...’하면서 폼을 잡을 일이겠는가. 그때마다 있었던 우리들의 숙명이었고 절대자의 예정에 따라 이루어졌던 행운이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나라가 88올림픽을 치르고 난 후 나는 우리 세대가 더 이상 조국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이 많이 남아있지 않음을 깨닫고 좁은 대한민국의 영역을 넓히는 결단, 이민을 선택했던 것이다.

 

삶의 뿌리를 송두리째 옮기는 이 일에 나는 나의 마지막 명운을 걸었던 것이다. 작게는 우리 자식들의 미래를 위하여 그리고 더 크게는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이기 위하여 이민을 선택했던 것이다.

 

짝을 만나 50여 년을 동거하면서 둘이 넷이 되고 넷이 다시 여덟이 되더니 이제 나는 우리 부부로 인하여 16명의 피붙이가 생겨나 대한민국의 영역을 세계 속에 넓히고 있음을 자랑하고 싶다.

 

그런 내가 보는 조국을 안타까운 눈으로 보고 있다. 국민소득 3만 불이 넘었다고 으쓱하고 있는 모습이 적이 안쓰럽기 때문이다. 결코 버린 조국 대한민국이 아니기 때문이다.〠

 

▲ 미 마나구이 선교 여행에서 배용찬 장로 부부.  ©배용찬    

 

배용찬|멜본한인교회 은퇴장로

 
광고
광고

  • 포토
  • 포토
  • 포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