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민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김성두/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1/07/26 [14:55]
▲ 앨리스 스프링스 공항.     


필자는 호주 원주민에 대하여 늘 미안하고 빚진 느낌을 가지고 지난 30여 년을 살아왔다. 호주의 백인들처럼 그들의 땅을 빼앗은 것도 아니고, 그들을 직접 죽인 것도 아니고, 원주민을 아예 말살하려고 원주민의 아이들을 강제로 그들의 부모로부터 격리시키는 일에 동참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조그만 이유이고 또 하나는 큰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34년 전 유학생 시절에 잠깐 레드펀(Redfern)에서 산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원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레드펀 기차역에서 아침마다 마주치는 원주민 아이들은 늘 돈 좀 달라고 했고 가난한 유학생이었던 필자는 어떤 때는 1불을 주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50센트짜리 동전을 주기도 하면서 그 원주민들에게 보다 더 많은 도움을 주지 못해서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 필자가 목사가 되어서 어떻게 하면 원주민들을 도울 수가 있을까를 생각하다가 라 페루즈(La Perouse)에 최초로 세워진 원주민 교회가 있다고 해서 무조건 찾아가게 되었는데 그 교회에서 당시 담임 목회를 하던 케빈 메이(Rev. Kevin May)목사를 만나게 되었고 그 후 우리 교회는 3년여 동안 그 원주민 교회와 함께 연합하여 예배도 드리고, 그 원주민 교회를 위해 조금의 물질도 나눌 수가 있었다.

 

당시 ‘크리스찬리뷰’에서도 두 교회가 연합 예배를 드렸을 때 케빈 메이 목사의 설교 전문을 싣기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케빈 메이 목사가 퍼스(Perth) 지역으로 목회지를 옮기는 바람에 라 페루즈에 있는 원주민교회와의 관계가 멀어지고 말았다.

 

그 이후로 필자는 원주민 선교에 대하여 늘 큰 죄책감을 안고 살게 되었는데, 이번에 시드니신학대학(Sydney College of Divinity, 이하 SCD) 한국 신학부에서 호주 원주민 선교 학술 탐사(2021. 6.15~-6.24)를 간다고 하기에 기쁨으로 동참하게 되었다.

 

필자의 마음에는 도대체 원주민 선교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물질을 나누는 것이 원주민 선교인지에 대하여 항상 의문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원주민 선교의 현장을 볼 수 있겠다는 큰 기대감으로 호주 원주민 선교 학술 탐사팀(인솔 교수: 정기옥, 인용태)에 합류하게 되었다.

 

시드니에서 비행기를 타고 약 3시간이 지난 후 내린 곳은 앨리스 스프링스(Alice Springs) 공항이었다. 까다로운 입국 절차를 거친 후 함께 모인 일행은 24명이었다. 멜번과 브리즈번에서 공부하고 있는 SCD 학생들도 함께 참여하게 되었음을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앨리스 스프링스에 있는 조그만 모텔(Elkira Court Motel)에 짐을 풀고 원주민 선교 학술 탐사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조그만 버스를 타고 원주민 선교의 현장을 둘러볼 것이라는 인솔 교수의 말을 들으면서 이번 기회에 원주민 선교에 대하여 확실한 것을 배울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살짝 마음이 들떠있었다.

 

원주민 선교의 중심 도시 엘리스 스프링스

 

우리가 베이스 캠프로 사용할 앨리스 스프링스(Alice Springs)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노던 테리토리에 속하는 도시이다. 인구는 2만 8천178명 (2001년 국세조사)으로, 노던 테리토리에서는 다윈 다음으로 두 번째로 크다.

 

예부터 이 땅에 거주하는 애보리진, 아렌티(Arrente) 족은 이 땅을 Mparntwe라고 부르고 있다. 원래는 이 곳은 스튜어트(Stuart) 라고 불리어졌고, 아웃백의 남북 교통의 거점으로써 건설되었다.

 

스튜어트에는 아웃백 최대의 전보국이 설치되어 런던에서 시드니까지 잇는 원대한 전보망의 중요한 기지가 되고 있었다. 이 전보국의 바로 옆에 샘이 있어, 사우스 오스트레일리아주(당시 노턴 테리토리는 사우스 오스트레일리아 주가 관할하고 있었다)의 전보 국장인 찰스 토드 (Charles Todd)의 아내 앨리스 토드(Alice Todd)를 기념하여 이 샘을 앨리스 스프링스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전보국도 앨리스 스프링스를 자칭했기 때문에, 점차 스튜어트라는 이름보다 앨리스 스프링스가 보편적으로 불려졌다.

 

마침내 1933년에는 정식으로 스튜어트라는 명칭이 앨리스 스프링스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애들레이드로부터 앨리스 스프링스를 지나 다윈에 이르는 도로는 현재도 스튜어트 하이웨이로 불리고 있다는 정기옥 교수의 설명을 들으면서 엘리스 스프링스가 참으로 중요한 도시이고 원주민 선교를 하는데 중심 도시가 되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Tennant Creek AIM Church에서 현지 원주민들과의 연합 예배

 

우리 일행은 앨리스 스프링스에서 하룻 밤을 보내고 그 다음 날 테넌트 크릭(Tennant Creek)으로 향했다. 테넌트 크릭은 노던 테리토리를 가로지르는 두 개의 하이웨이인 스튜어트 하이웨이(The Sturt Highway)와 바클리 하이웨이(The Barkly Highway)의 교차점에 위치해 있는데, 이곳을 발견한 존 맥두갈 스튜어트(John McDougall Stuart)는 이곳이 호주의 중심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테넌트 크릭은 호주 3대 금광으로 바클리 테이블랜드 지역의 중심이다. 테넌트 크릭은 다윈에서 약 1천 km이고 엘리스 스프링스에서는 약 502km에 위치해 있었다.

 

이곳에 테넌트 크릭 AIM(Australian Indigenous Ministries) 교회가 있었는데 우리 일행은 이 교회 원주민 성도들과 함께 연합 예배를 드리기로 해서 수요일 밤에 방문하게 되었다.

 

이곳은 Harold Daywaters 선교사와 Richard and Sue Davise 선교사가 사역을 하고 있는 교회라고 정기옥 교수가 미리 말해 주었는데 그들이 어떻게 예배를 드리는지 무척 궁금한 마음으로 예배에 참석했다.

 

테넌트 크릭 AIM 교회 성도들은 예배를 교회 앞 마당인 야외에서 저녁에 드리고 있었다. 예배 인도자는 호주 선교사가 아니라 원주민들 스스로가 예배를 인도하고간증하며 찬양도 하고 온 성도들이 예배에 참여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필자의 눈과 귀를 단번에 집중시킨 것은 원주민으로 구성된 찬양 팀이었다. 키보드 한 개와 기타 3개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들의 음악이 너무나도 귀에 익숙하게 들렸다. 그들 음악 속에는 묘한 슬픔이 녹아 있었는데, 많은 한이 서려 있음을 금방 느낄 수가 있었다.

 

▲ 찬양하고 있는 테넌트 크릭 AIM 교회 원주민 성도들.   ©SCD    

 

그들의 땅을 빼앗긴 설움과 백인들의 압제를 받으면서 살아온 슬픈 역사들이 노랫말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항상 천국에 대한 소망과 부활을 믿기에 처음에는 가사의 시작이 슬픔으로 시작하다가 나중에는 기쁨과 소망이 폭발하는 가사로 끝을 맺고 있어서 듣는 모든 사람들이 안도의 숨을 쉴 수가 있는 찬양이었다.

 

언젠가 라 페루즈에서 목회하던 케빈 메이 목사가 필자에게 찬양 테이프를 하나 주면서 원주민들의 음악을 들어보라고 해서 듣게 되었는데, 그때 들었던 라 페루즈 원주민들의 찬양이나 노던 테리토리의 원주민 교회에서 원주민 찬양팀들의 찬양이나 어쩌면 그렇게 묘한 슬픔과 기쁨이 교차가 되는지 참으로 신기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케빈 메이 목사가 준 테이프 속의 가사가 생각났다.

 

“엄마를 봐요 걸음걸이가 너무 느릿느릿 하네요. 이제 얼마 후에는 엄마가 천국에 갈 것 같아요. 아빠를 봐요 아빠 머리카락이 너무 희어졌네요. 이제 얼마 후에는 아빠도 천국에 갈 것 같아요. 그러나 난 기대해요. 그 언젠가 엄마, 아빠를 저 천국의 하나님 보좌 앞에서 만날 것이니까요. 그때 우리 만나서 함께 이야기해요.” 라는 가사였다.

 

이 노래는 처음에는 슬픈 단조로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기쁜 장조로 끝을 맺고 있었던 그 음악이었는데 지금 눈 앞에서 원주민들이 부르는 찬양이나 얼마나 묘하게 닮았는지, 그들의 찬양을 들으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기쁨이 솟아났고 필자도 저들 속에 끼어서 함께 연주하고 싶다는 감정을 억제하느라고 힘이 들었다.

 

한참 예배가 은혜 중에 진행되고 있는데 원주민 청년 하나가 목발을 짚고 들어왔다. 빈 의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어이 땅바닥에 털썩 주저 않았는데 한쪽 다리가 많이 짧은 장애인이었다. 그는 예배 중에 혼자 중얼거리기도 하고 불만이 가득한 몸짓을 보이기도 하더니 급기야는 큰 소리로 설교자를 욕하기 시작을 했다.

 

▲ SCD 호주 원주민 선교 학술 탐사팀이 테넌트 크릭 AIM 교회에서 찬양하고 있다.  ©SCD     

 

그것도 모자라서 양손의 가운데 손가락을 세우더니 하늘로 향해 찌르면서 엄청 심한 욕을 하다가 일어나서 예배 장소를 떠나려고 했는데 일어서다가 제대로 목발을 짚지 못해서 땅바닥에서 나뒹굴어지고 말았다. 그제서야 함께 예배 드리던 사람들이 부축을 해주었고 그는 화를 참지 못해서 심한 욕을 하면서 예배 장소를 빠져나갔다.

 

필자는 이 모습을 보면서 ‘ 아! 이런 것이 호주 원주민 선교의 살아 있는 현장이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원주민 선교는 억지로 강요해서도 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들어오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고 들어오면 함께 예배 드리고 그렇지 않고 욕을 하고 비난을 하면 그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고 또 그들이 그러다가 넘어지면 따뜻하게 일으켜 세워주는 것이 원주민 선교사들이 하는 일 이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원주민 선교는 단기간에 이루어지는 사역이 아님을, 그리고 긴 시간의 인내가 필요함을, 그들이 올 때까지 따뜻한 마음으로 기다려주어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 성급하게 원주민 선교를 생각했던 필자의 잘못된 생각을 부끄러워하기에 충분한 밤이었다.

 

그날 밤 그 예배 현장에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하나님의 자녀 된 원주민들도 있었고, 그 예배에 대하여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고 그냥 지나쳐 가는 원주민들도 있었고, 또 어떤 청년처럼 예배를 방해하고 설교자에게 심한 욕을 하면서 예배 장소를 떠나가 버리는 원주민도 함께 공존하고 있음을 그 현장에서 깨닫게 되었다.

 

이 원주민 교회에서 오랫동안 사역하고 있는 리차드 데이비스(Richard Davise) 선교사도 함께 그 예배 현장에 있었는데, 그가 원주민 선교에 대하여 우리들에게 한 첫 마디는 자기는 원주민들을 가르치려고 하지 않고, 지금도 그들로부터 배우려고 한다고 했다.

 

원주민 선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원주민들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것을 먼저 배워야 한다고 했다. 원주민 사역을 몇십 년 해오고 있는 선배 선교사의 그 말이 원주민 선교에 대하여 무지했던 필자의 마음을 찌르는 것 같아서 좀 부끄러웠다.

 

우리는 때때로 열매가 너무 보고 싶어서 선교에도 ‘빨리빨리’를 적용하여 서두르다가 그만 망쳐버리는 선교를 그동안 참으로 많이 보아 온 것이 사실이다. 이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원주민 교회의 장로 한 분이 들려준 말이다.

 

자기는 시계가 필요 없다고 했다. 아침에 해가 뜨면 일어나서 일하고, 저녁에 해가 떨어져서 어두우면 잠자리에 들어간다고 했다. 이런 사람들에게 우리는 시간을 재고 빨리 뭔가를 해서 이루려고 하니 늘 원주민 선교에 엇박자가 나는 것이로구나! 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원주민 교회 성도들의 간증과 예배가 끝난 후 그들은 우리들에게 찬양을 요청해 왔다. 그래서 탐사 대원들 모두가 함께 앞으로 나가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찬송을 불렀다. 이 땅의 원주민들이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주님을 영접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다.

 

참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넘쳤던 원주민들과의 예배 시간이었다. 함께 어울려서 사진 촬영을 할 때 온 성도들이 기쁨으로 함께하며 서로의 사랑을 짧은 시간이나마 주 안에서 나누면서, 아! 우리는 온 세계 그 누구와도 이렇게 주님의 피 안에서 한 형제 자매가 될 수 있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온 세상의 ‘주’이신 주님 그리고 한 하나님의 백성임을 확인할 수 있었던 귀한 호주 원주민들과 함께 드렸던 예배 시간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연합예배를 매우 기뻐하셨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던 성령 충만한 밤이었다.

 

문짝이 다 떨어져 나간 모텔 입구의 피아노

 

우리 일행은 수요일 밤에 테넌트 크릭의 조그만 모텔(Goldfields Hotel Motel)에서 짐을 풀었는데 모텔 입구에 낡은 피아노가 한 대 놓여 있었다. 피아노 뚜껑은 이미 떨어져 나가 있었고 하얀 건반은 이미 탈색이 되어서 흰색인지 회색인지 구분이 안될 지경이었다.

 

검은 건반 역시 검은 색을 많이 잃어버렸는데, 그래도 어쩐지 정이 많이 가는 피아노였다. 필자가 조심조심 피아노에 다가가서 C코드를 살짝 눌러 보았는데 이 세상에서 처음 들어 보았던 이상한 화음이 되어서 귀를 괴롭혔다.

 

이번에는 A마이너 코드를 눌러 보았는데 이 역시 C코드와 똑같은 음이 나왔다. 몇 가지 다른 코드를 눌러 보았지만 소리는 오직 한 가지였다. 이 피아노의 운명과 이곳 호주 원주민의 운명이 비슷함을 그때 느껴 보았다. 모텔 안으로 들어가서 사람들 앞에서 연주하는 피아노도 아니고 그렇다고 모텔 밖으로 나가서 버려지지도 않는 피아노였다.

 

원주민들이 호주 주류 사회 속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호주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그런 원주민들의 삶과 이 피아노의 신세가 비슷한 것 같았다. 건반을 눌러도 제대로 된 소리가 나지를 않고 그 어디를 눌러도 똑같은 소리만 나는 어떻게 변화될 수가 없는 원주민들의 삶과 묘하게 오버랩이 되는 순간이었다.

 

호주 백인들에게 있어서 원주민은 가까이 하기에 너무나 먼 당신이 된 것 같고 그렇다고 멀리 하기에는 뭔가 부담스런 존재가 되어버린 그런 사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깐이나마 피아노 의자에 앉아서 하게 되었다.

 

이런 원주민들을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 인식하고 그들을 따뜻하게, 포근하게 우리가 품어야 하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을 하면서 아쉬운 마음으로 피아노 곁을 떠나왔다.

 

원주민 선교의 산 증인인 리차드 데이비스 선교사와의 만남

 

유러피언 백인들 중에서도 잘 생기고 기품이 풍기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닥터 지바고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인 오마샤리프가 썼던 비슷한 모자를 썼었는데 무척 잘 어울렸다.

 

그의 강의는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들을 수가 없는 특별한 강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영어를 모르는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효과적으로 제시하려고 데이비스 선교사는 그 어떤 그림이나 기호를 만들어서 복음을 제시했는데 우리 일행들 앞에서도 그런 그림이나 부호를 사용하여 복음을 선포했다.

 

▲ 리차드 데이비스 선교사는 그림과 기호로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한다.©SCD     

 

말로써 듣는 복음의 메시지보다 그림으로 배우는 복음이 얼마나 귀에 쏙쏙 잘 들어오는지 정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리 교민교회 주일학교에서도 이런 방식으로 복음을 가르칠 수 있겠다고 생각했을 때 친절하게도 자기 강의 내용을 담은 사이트를 보내 주겠다고 약속하면서 함께 기뻐했다.

 

AIM Community Church Tennant Creek

 

선교사의 강의 가운데서 자신은 지금도 원주민들에게 배우고 있다고 겸손하게 말했던 모습은 참으로 가슴에 와닫는 말씀이었다.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고 주님을 섬기고, 애보리진들을 위해서 삶을 살아가는 진정으로 섬기는 종의 모습이라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리고 원주민들이 사용하는 기호나 그림 등으로 설교를 하는 모습은, 인간을 위해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종으로서의 주님의 모습을 느끼게 해주는 설교 방법이었다.

 

우리들의 방식이 좋고 현대적이고 발달된 것이라고 그들에게 우리의 것을 전달하려고 하는 선교가 아닌 그들의 방법대로 그들이 이해할 수 있고 수용할 수 있도록 말씀을 전하는 것을 보면서 진정으로 양들을 돌보며 그들의 눈 높이에 맞추어서 복음 사역을 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알게 해 준 강의였다고 본다.

 

리차드 데이비스 선교사는 원주민들이 모래에 앉아서 어떤 사람의 말을 듣고 난 후에 그들이 일어나면 엉덩이가 모래 속에 패인 모습을 U자 모양의 말발굽과 같은 그림으로 나타냈다.

 

▲ 리차드 데이비스 선교사가 강의를 마친 후 SCD 호주 원주민 선교 학술 탐사팀과 기념 촬영을 가졌다. ©SCD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들은 U자 모양의 말발굽으로 표시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사람들은 거꾸로 된 U자 모양의 말발굽으로 표시하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실제로 리차드 데이비스 선교사의 강의를 들으면서 묘하게 이해가 너무나도 잘 되고 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영어를 모르는 원주민들에게 이런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면서 그 많은 세월을 원주민들을 선교하느라 수고한 리차드 데이비스 선교사가 필자의 눈에는 작은 예수로 보였다.

 

리차드 데이비스 선교사의 강의 내용

 

주님이 종의 형태로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을 섬기시며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셨다면 우리들도 주님과 같이 복음을 전하는 대상들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들을 위해서 그들에게 맞는 사역을 해야 한다고 본다.

 

데이비스 선교사가 사용했던 원주민 설교 방법을 원주민 선교의 비전과 함께 아이들에게도 선교사의 방법대로 설교를 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키옥’이라는 또 다른 코리언 원주민

 

어느 날 오후 우리 중 몇몇 일행이 펍(pub)에서 콜라를 마시고 있는데 정기옥 교수가 원주민 한 명과 함께 들어왔다. 필자가 누구냐고 물어보니 정 교수가 길을 걸어 가는데 어디서’키옥’하고 부르더라는 것이다.

 

돌아보니 이 원주민이 다짜고짜 맥주 한 잔 사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를 데리고 펍에 가서 맥주 한 잔을 사 주었는데 또 다른 펍에 가서 한 잔 더 사달라고 해서 우리가 있는 펍으로 왔다고 했다.

 

정 교수는 이 원주민 사회에서 ‘키옥’으로 불린다고 한다. ‘키옥’은 20여 년의 세월을 원주민 선교를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었던 원주민 선교의 산 증인이요 이미 이 분야의 베테랑이 되어 있음을 필자는 다시 한번 더 확인할 수가 있었다.

 

‘키옥’은 그들의 눈에는 더 이상 코리안이 아니고 그들 원주민의 한 종족으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정 교수는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고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는데 혼자서 이 먼 길을 달려서 원주민들과 함께 먹고 자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줘 가면서 외로운 선교를 했다는 생각을 하면서 필자는 늦게나마 그에게 미안한 생각과 또 다른 존경하는 마음이 생겼음을 솔직히 고백해 본다.

 

그는 이번에 원주민 선교 학술 탐사팀을 이끌면서 그가 원주민 선교에 대하여 알고 있는 그 모든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싶어서 입술이 부르트면서까지 설명하고 또 설명을 해주었다. 덕분에 우리 모두는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배우고 이해할 수가 있었다.

 

‘키옥’은 필자가 마시고 있던 콜라를 한 모금 들이키고는 또 다시 그 원주민을 데리고 펍의 맥주바로 향했다. 아무래도 한 잔 더 사주어야겠다는 말을 남기고 그 원주민 친구를 데리고 씩 웃으면서 나갔다.

 

필자는 그 모습을 보면서 ‘키옥’이 원주민 선교를 위해 흘렸던 땀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확신을 할 수가 있었다. 우리 한인 사회에도 이런 ‘키옥’들이 많이 나와서 이제는 ‘키옥’이 더 이상 외롭지 않는 원주민 사역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혼자 해보았다.

 

호주 원주민 선교 학술 탐사팀은 지난 세월 동안 호주 원주민들을 복음화하기 위해 많은 기관들과 사람들이 많은 수고를 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쏟은 땀과 눈물은 결코 헛되지가 않아서 우리 일행은 곳곳에서 그들의 열매를 볼 수가 있었다. 계속해서 그런 기관들과 수고한 사람들을 크리스챤 리뷰 독자들과 함께 나누기를 바라면서 첫 번째 연재 글을 맺는다.〠 <계속>

 

김성두|시드니경향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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