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는 악도 아니고 선도 아니다
 
김환기/크리스찬리뷰
▲ 1895년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가 최초로 영화 제작을 위해 만든 시네마토그래프.  ©Louis Poyet   


영상은 움직이는 사진이다. 최초로 영상을 만든 사람은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이다. 1891년 에디슨은 '키네토그래프 카메라'와 '키네토스코프 관람 상자'를 만들었다. '키네토(kineto)'는 ‘움직인다’는 뜻이다. 키네토스코프는 혼자밖에 볼 수 없어 영상이지 영화는 아니다.

 

1895년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가 대중이 볼 수 있는 ‘시네마토그라프’(Cinematographe)를 만들어 최초의 영화를 만든 사람이라는 명예를 얻게 되었다. ‘시네마토그라프’라는 말은 ‘움직임을 기록한다’는 의미이다. 에디슨이 발명한 ’케네토스코프‘처럼 한 번에 한 사람만 감상할 수 있었던 기존 방식과는 달리, ’시네마토그라프‘는 여러 사람이 동시에 하나의 영상을 감상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영화는 대중과 교감하는 매체이므로 ‘시네마토그라프’를 영화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오늘날 사용하는 ‘시네마’라는 단어가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최초의 영화

 

1895년 12월 28일, 프랑스의 한 카페에서 ‘뤼미에르 형제’는 자신들이 만든 작품을 영화사인 고몽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이때 상영된 세계 최초의 영화는 ‘열차의 도착’이라는 50초의 짧은 내용의 작품이었다. 당시의 기술로 필름에 담을 수 있는 최대 시간은 90초였다.

 

▲ 세계 최초의 영화 ‘열차의 도착’. 1895년 12월 28일 프랑스 파리에 있는 그랑 카페에서 상영되었다. 이날 각각 1분 정도 되는 25분짜리 영화를 보기 위해 후원자들은 1프랑을 지불했다. ©NFSA   

 

▲ 뤼미에르 형제     © 크리스찬리뷰


이 영화는 아무런 스토리도 없이 단순히 열차가 도착하는 장면만 보여주는 것에 불과했지만 19세기 후반의 사람들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다. 영화는 다음 해인 1896년에 베를린, 런던 등 유럽 주요 도시에 상영되었다.

 

뤼미에르 영화 필름은 대부분 정적 화면이지만, 촬영 기사들의 독창성이 아주 뛰어나 최초로 줌이나, 정지 카메라 상태에서 파노라마 화면으로 편집하는 영화 촬영 기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최초의 장편 영화

 

1906년 찰스 타이트 감독이 제작한 세계 최초 장편영화로 19세기 후반 호주의 ‘로빈 후드’로 불렸던 ‘네드 켈리’의 영웅담을 그린 작품이다. 세계 최초의 장편 영화는 미국도 아니고 유럽도 아닌 호주에서 만들어졌다.

 

▲ 세계 최초의 장편 영화로 19세기 후반 호주의 전설적인 대강도로 명성을 떨쳤던 ‘켈리 갱의 이야기’(The Story of the Kelly Gang)의 한 장면.     © 크리스찬리뷰

 

▲ ‘켈리 갱의 이야기’ 포스터 (호주, 1906)     © 크리스찬리뷰


1880년 25살의 나이로 사형당한 악명 높은 갱 ‘네드 켈리’의 영웅담을 그린 이 영화는 개봉 이후 9년 동안 호주와 뉴질랜드, 영국을 돌며 놀라운 흥행 성적을 거두었다. 또한 약자들의 영웅이었던 그의 범죄를 모방한 사건이 빈번히 일어나자 한동안 상영이 금지됐을 정도로 화제작이었다.

 

1906년 첫 상영시 67~70분 가량의 분량이었으나, 당초 제작되었던 필름이 사라져 원형을 볼 수 없었다. 이후 개인 소장가와 영국 국립기록보존소 등에서 발견된 필름 조각들을 호주 국립영상자료원의 디지털 복원을 통해 총 18분 분량의 필름을 완성,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최초의 멀티미디어 공연

 

1900년 9월 13일 멜번 시청에서 ‘십자가의 군병들’ (Soldiers of the Cross)이 공연되었다. 호주 구세군의 라임라이트(Limelight) 부서에서 공연하였다. 초기에는 최초의 장편영화라는 칭호까지 받았지만, 영화뿐 아니라 다양한 장르가 함께 연출되어 인정되지 않았다.

 

2천 명이 넘는 관객 앞에서 90초짜리 16편의 영상을 비롯하여, 2백 장 이상의 매직-랜턴 슬라이드 필름, 오케스트라와 찬양대 그리고 호주 구세군 사령관인 ‘허버트 부스’(Herbert Booth)의 감동적인 강연까지 무려 2시간 30분 동안 공연을 하였다.

 

▲ 유리 슬라이드 필름으로 상영된‘십자가의 군병들’중 한 장면  ©NFSA   

 

▲ 호주 구세군은 멜번 타운홀에서 ‘십자가의 군병들’ 첫 공연을 가졌다. (1900. 9.13)     © 크리스찬리뷰


‘십자가의 군병들’은 로마 병사에게 쫓기어 어린아이를 안고 도망하는 크리스찬 여인의 이야기다. 그녀가 개울을 연결한 좁은 나무다리를 건너고 있을 때 반대편에 있는 동료가 빨리 강을 건너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이때 다리를 건너려는 병사가 달려오는 속도와 몸의 무게 때문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물 속으로 떨어지게 된다. 관객들은 가난한 크리스찬 여인의 탈출과 당황하는 로마 병사를 보며 긴장은 기쁨으로 바뀌었다.

 

공연 내내 숨을 죽이고 영화와 슬라이드 필름에 집중하고 있던 관객들은 소리를 높여 환호하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 호주 구세군은 호주 최초의 영상 스튜디오를 만들어 호주정부가 출범한 1901년 1월 26일에 등록하고 30일부터 일을 시작했다.  ©호주구세군    

 

▲ 호주 구세군에서 처음으로 영상 사역을 시작한 조셉 페리 사관.  ©호주구세군    


구세군은 호주 최초의 영상 스튜디오를 만들어 호주정부가 출범한 1901년 1월 26일에 등록하고 30일부터 일을 시작했다. 호주 구세군의 영상 사역은 조셉 페리(Joseph Perry) 사관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페리 사관은 ‘Ballarat Prisons Gate Brigade Home’에서 출소자를 위한 사역을 하고 있었다. 1891년 멜번 본영에서 근무하던 프랭크 배릿(Frank Barritt) 사관이 그곳을 방문하였을 때 페리 사관이 매직 랜턴 프로젝터를 사용하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페리 사관은 매주 토요일 밸러랫(Ballarat)에서 프로젝트를 사용하여 홍보하고 있었다. 구세군 본영으로 돌아온 배릿 사관은 페리 사관에게 프로젝트와 함께 멜번으로 오라고 하였다. 배릿 사관은 특별 부서를 만들어1891년 9월에 호주를 방문할 구세군 대장인 윌리엄 부스를 홍보할 계획이었다.

 

▲ 라임라이트 부서에서 제작한 예수의 최후의 만찬을 묘사한 유리 마법 등나무 슬라이드 ©NFSA     

 

▲ 호주 구세군에서 영상 사역을 시작했던 조셉 페리 사관이 당시의 사진 장비들을 보여 주고 있다.©호주구세군   


이때 구세군의 영상을 담당하는 라임라이트 부서가 만들어졌다. 처음으로 페리 사관은 ‘이스마엘의 딸’이란 내레이션이 들어 있는 랜턴 슬라이드를 만들었다. 1895년까지 라임라이트부서는 2중 렌즈의 프로젝트를 소유하게 되어 6백 개 이상의 유리 슬라이드를 만들었다. 당시 페리 사관은 프로젝트를 가지고 호주와 뉴질랜드로 전도여행을 다녔다. 총 522회의 공연을 했고, 469명이 구원받았으며, 선교를 위한 1천784 파운드의 모금도 했다.

 

▲ 바이오라마 부서의 스틸 카메라와 동영상 카메라 기사들이 카키색 유니폼을 입고 공식사진을 촬영했다. 앞줄 가운데 앉아 있는 사람이 조셉 페리 사관이다.(1906. Canterbury Times, New Zealand)  ©호주구세군     

 

▲ 1896년 호주의 구세군 사령관에 취임한 허버트 부스는 영상 사업을 적극 지원했다.     © 크리스찬리뷰


1896년 구세군 창립자 윌리엄 부스의 아들인 허버트 부스가 호주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필름 사역에 관심이 있는 허버트 부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프랑스에서 제작한 여행용 필름을 수입하였다. 1897년 라임라이트 부서는 필름을 여러 지역을 다니며 상영하였다.

 

허버트 부스 사령관은 페리 사관을 부서의 책임자로 임명하고 자체적으로 필름을 만들 것을 요청하였다.

 

1898년 5월 구세군 멜번 시티 교회에서 뤼미에르 필름과 랜턴 슬라이드 그리고 구세군 음악이 연합한 공연이 있었다. 멀티미디어를 이용한 선교는 구세군 교회는 물론 구세군 사회사업과 사관학교에서도 사용되었다.

 

1900년대의 사회는 단순하였다. 당시에 멀티미디어로 선교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때이다. 구세군은 창조적인 새로운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확장하였다. 길가의 건물에 슬라이드를 비쳐 가로전도를 하기도 했다. 구세군 사람들에게 교회로 모이라고 하는 대신, 사람들을 찾아 거리로 나가는 적극적인 선교를 하였다.

 

1901년 1월 1일 구세군은 호주란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나라의 역사의 현장을 필름에 담았다. 역사가 크라이스트 롱(Christ Long)은 그날의 순간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지속적인 필름의 프레젠테이션, 길고 중요한 내용,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지속적으로 많은 산업에 영향을 끼쳤다.”

 

1901년부터 1905년까지 구세군은 호주에서 만드는 80% 이상의 필름을 제작하였다. 필름은 구세군의 복음전도와 사회사업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 1909년 호주 사령관으로 부임한 제임스 헤이는 영상 사업을 완전히 끝냈다.     © 크리스찬리뷰

 

제임스 헤이(James Hay) 새로운 호주 사령관이 1909년 9월 부임하면서 구세군의 영상사업은 사양길을 걷게 되었다. 1910년에 라임라이트 부서는 문을 닫고, 장비는 팔리고 필름들은 사라졌다.

 

제임스 헤이 사령관은 영화를 제작하는 것은 구세군에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영화는 우리를 진정한 구세군에 합당하지 않은 사악한 길과 가벼움으로 인도한다. 그러므로 내가 이 사업을 완전하게 끝낸다.”

 

미디어와 관련된 구세군의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다. 아름답다는 것은 시대를 선도하는 창조적이고 공격적인 방식으로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이고, 슬프다는 것은 필름사업이 지속적으로 연결되어 오늘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늘날은 멀티미디어 시대이다.

 

더구나 코로나 시대는 미디어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크다. 미디어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다. 미디어를 누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선이 될 수 있고, 악이 될 수도 있다.〠

 

글/김환기|크리스찬리뷰 영문편집위원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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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08/30 [14:14]  최종편집: ⓒ christian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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