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황금시대

배용찬/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1/08/30 [14:46]

황금의 청장년시대가 지나면 이내 쇠락하는 노년이 따라오는 것은 정한 이치이지만 사람들은 그 노년을 조금이라도 늦추어보려고 별별 짓을 다 하고 있다.

 

그래서 늙은이라는 말이 싫어서 중늙은이라는 말을 만들어 굳이 그 말에 머물러 있으려고 한다. 아마도 60대와 70대 초반에 이르는 노인을 이렇게 부르고 있을 것이지만 50에도 이르지 못한 젊은이들에게는 늙은이나 중늙은이나 그게 그것일 것이다.

 

시간은 태초부터 정해진 개념인데 21세기에 와서 갑자기 빨라질 이유가 없을 터이지만 나이가 든 우리들이 빠르다고 생각되는 것은 상대적인 시간감각의 차이일 것이다.

 

청소년 시절에는 시간이 가지 않는다고 일부러 한 살이라도 더 나이를 부풀려 부르며 호기를 부렸으며 중년을 거쳐 장년 때까지만 해도 경쟁사회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하여 앞과 뒤를 돌아볼 틈도 없이 바삐 살다보니 그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시간에 대한 감각이 없었기도 했다.

 

그런 시간이 이제 노년에 와서 새삼 빠르게 지나간다고 느끼는 것은 아마도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예전과 같지 않게 느리다 보니 시간의 속도를 상대적으로 빠르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이런 시간의 차이를 생각하면 이 노년에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다. 무슨 일이든지 마음먹고 시작하려고 하면 이미 끝나버리는 그 속도를 따라잡기는 애당초 틀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가장 즐겨하는 일은 ‘멸치 다듬기’나 ‘마늘 까기’와 같은 시간에 관계없는 일들이 되어 버렸다. 아내를 도와주는 일이라는 명분도 있으며 조금 늦어도 별 탈이 없고 잘못해도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이런 일들이 노년생활에 안성맞춤이 되어 버린 것이다.

 

보다 차원이 높은 일들, 그러니까 그림 그리기나 글쓰기와 같은 젊어서 해보지 못했던 취미생활을 해 보겠다고 나설라 치면 여지없이 아내로부터 태클이 들어오게 마련이다.

 

돈도 되지 않는 일에 공연히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그 시간에 건강관리나 하라는 엄명에 한마디 항변도 못하고 스스로 일을 접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생활의 주도권을 송두리째 박탈당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무슨 약속이나 나들이 갈 일도 아내가 주선해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자가 되어가는 형편이 노년의 모습이다.

 

그래서 노년에 여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돈과 건강, 친구, 딸 등 실제로 실감나는 대상들이 거론되지만 남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아내, 집사람, 마누라, 애들 엄마라고 하는 이야기는 이런 노년의 남자들을 슬프게 하는 것들이다.

 

아내와 딸들 간의 전화가 24시간 통화 중 상태인 것을 보고 사람들은 그런 집을 부러워하지만 아버지는 그 대화에 끼어들지 못하는 설음 때문에 늘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다.

 

이러다 보니 제 아비의 일거수일투족이 속속들이 딸들에게 전달되어 평생 이루어 놓았던 허울뿐인 아버지의 그 알량한 권위마저 땅바닥에 떨어진 지 오래되었다.

 

어쩌다 딸들에게 무엇 하나 부탁을 하려고 해도 모든 일을 아내라는 통제관의 수중을 거쳐야 하는 서글픔에 마음을 접어야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렇게 무기력해지고 목에 들어있던 힘이 다 빠져 나갈 즈음에 내 주위에 걸쳐져 있던 세상의 찌꺼기들이 한둘씩 떨어져 나가고 있다.

 

작은 명예에 집착하던 마음이 없어지고 나에게 주어진 무거운 짐들을 스스로도 내려놓다 보니 나의 몸은 옛날보다 훨씬 가벼워진 듯하다. 하던 일에서 정년퇴임한 시점을 기준으로 뒤로 물러설 줄 알게 된 것은 나에게 더없는 축복으로 다가왔다.

 

현대 의술의 발달로 생명이 연장된 결과 나 역시 본의 아니게 그 장수 대열에 끼이다 보니 이제 70대의 마지막쯤에서 다시 마음을 고쳐먹을 수밖에 없다. 지금의 내가 내 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황금시대를 구가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자랑하게 된 지금이 나의 노년이 아닐까 여겨진다.〠

 

배용찬|멜본한인교회 은퇴장로

▲ 배용찬     © 크리스찬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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