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기 목사의 삶과 신앙

거목(巨木)’ 영산(靈山) 조용기 목사의 위대한 발자취

글/홍요셉 사진/권순형 | 입력 : 2021/09/27 [12:04]
▲ C3교회 집회 인도차 시드니를 방문한 조용기 목사를 본지가 만나 인터뷰를 가졌다. (2016. 2.25)     © 크리스찬리뷰


고(故) 조용기 목사의 행적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원로목사가 9월 14일 86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조 목사는 2020년 7월 뇌출혈로 쓰러진 후 서울대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오다 이날 오전 7시13분 소천(召天: 별세)했다.

 

고(故) 조용기 목사는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설립해 한국교회의 부흥과 세계교회 성장을 주도하며 개신교 선교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조 목사는 '20세기를 빛낸 위대한 복음 전도자'로 평가받는다.

 

그가 설립한 여의도순복음교회는 1993년 세계 최대 규모 교회로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다. 1958년 5월 고(故) 최자실 목사와 서울 은평구 불광동에서 천막교회로 시작한 여의도순복음교회는 1961년 서대문교회를 거쳐 1973년 여의도순복음교회로 이름을 변경, 한국 교회의 부흥기를 이끌었다.

 

1958년 가족 5명의 첫 예배로 출발한 여의도순복음교회는 폭발적인 성장세로 1993년 성도 수 70만 명을 돌파하며 세계 최대의 교회로 거듭났다. '조용기'라는 이름은 20세기 동안 전 세계에 가장 많이 알려진 한국인이기도 했다.

 

▲ 고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의 천국환송예배가 한국교회장으로 지난 9월 18일 오전 8시 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 대성전에서 진행됐다. ©국민일보     

 

폐결핵 시한부 인생에서 만난 예수님

 

조 목사는 1936년 2월 14일 경남 울주군에서 조두천씨의 5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산 동래중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조 목사는 부친이 민의원 선거에 나섰다 낙선하면서 가세가 기울자 기술자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부산공고에 진학한다.

 

그의 인생은 고등학교 2학년 때 폐결핵 3기로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으면서 바뀌었다.

 

그는 질병의 고통 속에서 영어사전을 외우고 교과서를 독파하며 삶의 의지를 불태웠다. 그러다 세 살 위 누나의 친구로 병문안을 온 동래여고 학생 김정애를 통해 복음을 듣고 예수를 영접하게 됐다.

 

병이 호전되지 않자 공기가 맑은 고향에 내려가 휴양을 하면서 부산으로 통원치료를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국인 켄 타이즈 선교사가 부산의 한 거리에서 인도하던 천막 부흥회에 참석해 은혜를 받게 됐고, 선교사의 통역을 도우며 기독교의 진리를 깨닫게 됐다.

 

분명한 확신이 없어 신앙적으로 갈등하던 그는 간절한 마음으로 금식기도를 했고 어느 날 찬란한 광채 속 나타나신 예수님을 환상 중에 만나고 성령 충만을 체험했다.

 

조 목사는 “폐병을 고쳐줄 테니 평생 내 종이 되겠느냐”는 예수님의 다리를 힘껏 붙잡았다. 폐결핵은 완치됐고 조 목사는 주의 종이 되기로 결심한다.

 

대조동 천막교회 개척기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1956년 서울에 올라온 조 목사는 순복음신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한다. 그는 탁월한 영어 실력을 인정받아 학교장 존 허스톤 선교사의 통역을 맡았고 가정교사를 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해결했다.

 

이곳에서 목회의 동역자이자 ‘믿음의 어머니’ 최자실(1915∼1989) 목사를 만난다. 급성 폐렴으로 사경을 헤맬 때 밤새 병 간호를 해준 이도 최 목사였다. 조 목사는 학생회장으로, 최 목사는 전도부장으로 노방전도에 나섰다.

 

1958년 3월 순복음신학교를 졸업한 조 목사는 최 목사의 요청으로 그해 5월 18일 서울 서대문구(현 은평구) 대조동 최 목사의 집에서 개척예배 설교를 했다. 원래 5명이 오기로 했지만 끝내 오지 않고 당시 최자실 전도사와 그의 세 자녀만 예배에 참석했다.

 

“성도 30명만 만들어 달라”는 최 목사의 요청에 조 목사는 원래 계획했던 미국 유학을 미뤘다. 교회는 점점 부흥했다. 성도가 50여 명에 이르자 마당에 천막을 치고 가마니 바닥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는 설교 때마다 “하면 된다, 해보자”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중풍으로 쓰러진 여인이 낫고, 걷지 못하던 소년이 일어서고, 귀머거리 벙어리가 낫는 기적이 일어나자 많은 사람들이 천막교회에 밀려들었다. 5명으로 시작된 천막교회는 3년도 안 돼 3백 명이 넘는 교회로 성장했다.

 

조용기 목사가 젊은 전도사 시절을 회고하며 간증했던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책상과 의자, 그리고 자전거가 필요해서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놀랍게 응답을 받았던 간증이다.

 

목회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는 매우 궁핍한 생활을 했다. 집안에 가구가 없어서 마룻바닥에서 먹고 자며 공부하고 매일 수십 리 길을 걸어 다니며 전도하고 심방해야 했다.

 

어느 날 조용기 목사는 예수 안에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무엇이든 응답을 받는다는 말씀을 읽고 성경의 약속을 믿고 기도를 시작하게 된다. ‘하나님 아버지, 저에게 조그만 책상과 앉을 만한 의자, 심방할 때 타고 다닐 자전거를 주십시오.’

 

▲ 여의도순복음교회 계단을 따라 운구되는 모습. ©국민일보   

 

▲ 경기도 파주시 오산리 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에 도착한 운구 행렬이 조용기 목사가 안장될 묘소로 이동하고 있다.   ©국민일보     

 

그런데 6개월이 지나도록 기도의 응답은 오지 않았다. 낙심이 되고 눈물이 났지만 그는 기도를 지속했다. 그 가운데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그것은 ‘네가 원하는 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구하라’는 말씀이었다. 그 후 그의 기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다시 책상과 의자, 자전거를 위해 기도하되 이번에는 구체적인 종류, 크기, 모양, 심지어 제품의 생산 국적까지 기도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또 다시 인내하는 시간이 요구되었다. 그 가운데 가슴에 불이 붙도록 다가온 말씀은 바로 로마서 4장 17절이다.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그는 이 말씀을 그대로 실천에 옮겼다. 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할 때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선포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마호가니 책상과 바퀴 달린 의자, 미제 자전거를 저에게 주셨습니다!”

조용기 목사의 형편을 잘 알던 성도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고 그들은 그 기도의 응답에 대해 확인해 보고 싶어했다. 조 목사는 하나님의 응답을 확인코자 자신의 집에 방문한 성도들을 향해 당당하게 말했다.

 

▲ 2007 부산-판문점-평양(PPP) 십자가대행진 서울출정식 및 화해와 평화통일 기원예배에서 조용기 목사가 메시지를 전하고 해외에서 참석한 인사들과 함께했다. 오른쪽은 NSW 상원의원으로 호주기독민주당 총재 프레드 나일 목사.(2007. 8.15) ©크리스찬리뷰     

 

하나님께 아뢴 그 마음의 소원이 자기 자신 안에 잉태되어 있고, 그것을 믿음으로 선포하고 기도했기 때문에 반드시 응답이 있을 것이라고.

 

함께 온 사람들은 배를 잡고 뒹굴며 웃었지만 조 목사는 계속해서 구하는 것들을 받은 줄 믿고 감사하며 계속 입술로 시인하며 나갔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가 되었을 때 기도한 모든 것이 정확하게 응답으로 왔다.

 

이것은 놀라운 영적 원리를 깨닫는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 믿음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것과, 바라는 실상을 그리며 그것을 입술로 시인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응답하시지만 거기에는 반드시 우리의 구체적인 기도와 마음의 소원, 믿음의 고백이 필요하다는 놀라운 영적 원리를 체득하게 되었다.

 

서대문 교회 부흥기

 

조 목사는 갑자기 입영 영장을 받고 1961년 1월 입대한다. 하지만 장질환으로 대수술을 받고 8개월 만에 의병제대한다. 다시 교회로 돌아온 조 목사에게 미국 하나님의 성회 동양선교부 선교사 존 허스톤 목사는 자신과 함께 사역할 것을 제안했다.

 

고민하던 무렵 조 목사는 “너는 곧 한국 최대의 교회를 세우게 될 것”이라는 음성을 듣는다. 당시 한국 최대의 교회는 한경직 목사가 시무하던 영락교회로 교인이 6천여 명이었다.

 

1961년 11월 서대문구 충정로1가에 1천500석 규모의 새 교회당이 완공됐다. 이듬해 2월 18일 헌당예배를 드리고 순복음 중앙부흥회관으로 명명했다. 그해 4월 당시 조용기 전도사는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 다음 달엔 순복음중앙교회로 명칭을 변경했다.

 

▲ 옥스포드 훨스(Oxford Falls)에 소재한 C3교회 에서 집회를 인도한 조용기 목사 (2016. 2.25)     © 크리스찬리뷰

 

성도들은 매주 20∼30명씩 증가했고 서대문 이전 3년 만인 64년엔 3천 명이 됐다. 늘어나는 성도들을 수용할 수 없게 되자 64년 5월 17일 주일부터 대예배 를 1부(오전 10시)와 2부(낮 12시)로 나눠 드렸다.

 

하지만 조 목사의 건강은 악화되고 있었다. 예배 중 쓰러지길 반복했다.

 

죽음의 절망 앞에서 조 목사는 입원 중 하나님께 출애굽기 18장 21~22절 말씀을 받는다. 장인 이드로가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는 모세에게 ‘작은 권한은 위임하라’고 권유하는 내용이다.

 

▲ 고 조용기 목사가 생전에 국내외에서 활동하던 모습들.     © 크리스찬리뷰

 

조 목사는 이 말씀을 통해 교회 일을 혼자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리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행 2:46~47) 말씀에서 가정집에서 모임을 하는 구역예배의 원리를 뽑아냈다.

 

여 집사를 중심으로 서울을 20개 교구로 나누는 구역조직을 탄생시켰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성장의 핵심인 ‘구역’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런 구역조직의 사역은 한국과 세계 교회에 큰 영향을 주었고 지금 세계 곳곳에 구역 셀 목회가 활성화되고 있다.

 

당시만 해도 한국사회는 유교적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어 여성을 리더로 세운다는 게 큰 모험이었다. 조 목사는 기도 중에 “나는 여성들을 구역 리더로 세우길 원한다”는 말씀을 받는다.

 

확신을 얻은 조 목사는 다음 주일 여선교회를 소집했고 최자실 전도사를 총 책임자로 서울을 20개 교구로 나눠 구역조직을 가동했다. 구역장들에게 담당구역의 성도들을 양육하고 기도· 전도하는 일을 맡겼다. 조 목사는 교회 성장의 비결로 ‘여성 구역장의 활약’을 꼽기도 했다. 여성들이 전도 일선에 나서고 평신도 조직의 책임을 맡으면서 비약적 성장이 이뤄졌다는 뜻이다.

 

구역은 묵도와 사도신경, 찬양, 합심 기도 후 구역장이 설교하거나 가르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주기도문으로 마무리한 뒤 가벼운 다과를 나누며 성도 간 교제를 갖도록 했다. 목사의 권한 위임을 통해 무한대로 성장하는 교회 안의 교회 개념이다.

 

구역원이 15명이 되면 새로운 구역으로 분리하고 구역예배를 가질 때마다 예배 보고서를 작성해 제출토록 했다. 여성구역의 성공을 보고 남성구역은 1968년 출범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성장의 ‘엔진’이라 할 수 있는 구역은 이렇게 시작했다.

 

20개 구역으로 시작한 구역조직은 현재 1만 9천93개로 성장했다. 한국교회에 널리 알려진 G12, D12 제자양육 시스템의 원조도 사실은 여의도 순복음교회 구역조직이다.

 

여의도 글로벌 수직 성장기

 

교회는 각 구역장에게 성도들을 양육하고 함께 기도하는 일을 가르쳤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할 것을 당부했다. 구역조직에 힘입어 성도 수가 1968년 8천 명에 이르자 주일 예배를 3부로 늘렸다. 하지만 나날이 성장하는 성도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조 목사는 여의도 이전을 계획하고 성도 1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성전을 건축하기로 했다. 당시 여의도는 모래 벌판이었고 교통편도 제공되지 않았던 미개발 지역이었기 때문에 극심한 비난과 반대에 부딪혔다.

 

▲ 생전에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말씀을 전하는 조용기 목사.     © 크리스찬리뷰

 

건축비 8억 원이 필요한 공사였지만 교회에는 100만 원밖에 없었다. 조 목사는 하나님만 믿고 건축헌금 작정에 들어갔고, 1969년 4월 기공식을 갖고 성전건축에 들어갔다. 하지만 공사가 시작되자마자 제2차 석유파동이 발생해 세계적인 불황이 닥쳤다.

 

결국 성전 건축이 중단되기에 이른다. 당시 조 목사는 “죽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나님께 “저는 실패자”라는 마지막 기도를 올렸다. 그러나 하나님은 “참고 견디어라. 내가 어떻게 일을 마무리하는지 보게 될 것”이라고 응답했다.

 

조 목사는 매일 새벽에 공사가 중단된 교회 바닥에 꿇어 앉아 울며 회개했다. 그러자 성도들도 ‘교회 살리기 운동’에 나섰다. 그렇게 성전은 완공돼 1973년 9월 23일 헌당 예배를 드렸다.

 

여의도 이전 후 교회는 수직 성장했다. 1979년 10만, 81년에는 20만 성도가 됐다. ‘여의도순복음교회’로 이름을 바꾼 84년 40만, 89년 50만, 93년에는 70만 명을 돌파했다. 기네스북은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단일 교회로서는 세계 최대 규모로 등재했다.

 

조 목사는 80년대 이후 해외 선교를 강화한다. 특히 92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3일간 열린 ‘모스크바 대성회’에는 4만여 명이 참석해 1만 5천여 명이 결신하는 놀라운 성과를 낸다.

 

사회구제 사업에도 적극 나선다. 불우 청소년과 무의탁 노인을 위한 엘림 복지타운을 건립하고 굿 피플을 통해 소외지역 개발과 빈곤퇴치, 아동보호 활동을 펼쳤다. 2007년 북한동포를 돕기 위해 평양 조용기 심장전문병원을 착공했다. 2008년 사랑과 행복 나눔 재단(현 영산 조용기자선재단)을 설립했다.

 

교회 리더십의 민주적 이양기

 

2008년 5월 조 목사는 3차례 투표를 통한 민주적 절차를 거쳐 ‘영적 아들’인 이영훈 목사에게 담임목사직을 이양했다. 대형 교회들이 ‘세습’으로 비난 받던 상황에서 신선한 충격이었다.

 

담임목사직을 내려놓은 후에도 조 목사는 매일 새벽 2~3시면 일어나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매주 주일 오후 1시 예배 설교도 계속했다.

 

조용기 목사의 성령운동과 희망목회

 

조용기 목사의 목회 스타일은 ‘희망 목회’로 불린다. 조 목사가 목회의 첫걸음을 내딛던 1960년대는 한국 경제도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때다.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면서 농촌을 떠나 서울로 시민들이 몰리는 이농 현상이 본격화했다.

 

이 시기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어렵게 뿌리내리던 이들에게 조 목사는 성령으로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며 ‘희망’을 설교했다.

 

조 목사는 생전에 “저 스스로 가난이 지긋지긋했다. 가난에 한이 맺혀 천당과 지옥 이야기보다는 용기와 희망을 설교하려 애썼다. 부자 교회 못 가고 우리 교회 온 가난한 사람들이 용기와 희망을 얻고 위로를 받는 것이 저에게는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의 65년 목회를 요약하면 오중복음(중생 성령충만 신유 축복 재림), 삼중 축복(영혼과 범사 잘되는 축복, 강건하게 되는 축복), 4차원의 영성(생각 꿈 말 믿음)이라 할 수 있다.

 

좀 더 축약하면 절대 희망과 절대 긍정의 신학이다. 특히 “성령님을 환영하고 인정하고 모셔들이고 의지하라”는 당부는 영산(靈山, 조 목사의 호) 신학의 요체다.

 

오중복음과 삼중축복

 

평생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강조했던 조 목사는 1950년대 미국 오순절 계통 선교사들을 통해 순복음신학을 접했다. 한국전쟁 이후 절망에 빠진 가난한 민중에게 희망의 신학을 전파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요 19:30)고 말씀하셨기에 고통과 절망, 병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절대 희망이 된다는 것이다.

 

특히 조 목사는 요한삼서 1장 2절 말씀을 강조했는데, 여기서 영혼과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삼중구원이 나왔다.

 

조 목사는 “성령께 나를 온전히 맡기면 성령은 내 삶의 주체가 되고 나는 객체가 된다”며 늘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강조했다.

 

그는 한국전쟁, 고난과 폐병, 신경쇠약, 심장병, 위장병, 파킨슨병의 고통 속 하나님의 임재와 치료를 체험했다. 그리고 이 경험에서 절대긍정, 절대희망, 바라봄의 법칙이라는 목회원리를 끌어냈다.

 

성령세례와 창조력 지닌 4차원의 영성

 

조 목사는 기하학적 비유를 통해 무질서와 혼동의 3차원의 세계를 지배하는 4차원의 영적인 세계의 원리를 소개했다. 3차원의 육적 세계에서 4차원의 영적 세계라는 문을 열기 위해선 생각을 바꾸고 꿈을 꾸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입술로 고백해야 한다는 것이다.

 

“혼돈과 흑암의 3차원 세계라 할지라도 성령께서 운행하시면 굉장한 창조력이 생기고 생기가 돈다”면서 “3차원의 물질세계에서 생각 꿈 말 믿음을 통해 십자가를 붙들고 성령님을 모시면 4차원의 영적세계와 연결되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는 게 조 목사가 평생 외친 4차원의 영성이다.

 

이런 조용기 목사의 성령사역은 변방에서 중심으로 그리고 세계로 뻗어 나가게 되었다. 1953년 시작된 신생 교단이었던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는 여의도 순복음교회의 폭발적 부흥에 힘입어 국내 3대 교단에 올라섰다. 순복음 세계선교회는 65개국에 6백60여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대규모 단체가 됐다.

 

미래 목회 내다본 선각자요 선구자요 선지자

 

조 목사는 20세기 한경직, 김준곤 목사와 함께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목회자였다. 미국 대통령이 방한하면 조 목사를 초청해 안수기도를 요청할 정도로 깊은 영성과 통찰력이 있었다.

 

조 목사는 50년 전 매스미디어(mass media) 선교를 시작하고 대규모 주차장을 마련하고 사회봉사에 앞장서는 등 세상이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 미래 목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예측했다. 요즘 말로 하면 ‘메타버스’를 타고 움직인 선각자였다고 평가되고 있다.

 

▲ 2007 순복음세계선교대회에서 조용기 목사로부터 표창장을 받는 필자 홍요셉 목사. ©크리스찬리뷰 자료    

 

▲ 잠실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조용기 목사 성역 50주년 기념성회에 참석한 홍요셉 목사 부부(오른쪽) 옆에 박무신 목사와 뒤에 김범석 목사가 보인다. ©크리스찬리뷰     


한국교회의 큰 별이었던 조 목사는 항상 예수를 강조했으며, 청중에게 비전과 꿈을 심어주고 주님을 영접하도록 인도했다. 설교 후 늘 영과 육의 치유를 위한 기도와 선포로 성도를 깨웠던 참된 목회자였다.

 

산업화 시대 한국인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개한 새마을운동과 조 목사의 성령목회를 통해 부정적 사고를 긍정적으로 바꾸고 사회변혁을 이뤘다.

 

조용기 목사는 한국교회의 거목이요, 세계교회의 위대한 복음 전도자였으며, 그가 생전 펼친 성령 운동을 통해 그가 전한 희망과 긍정과 용기의 복음은 그 어느 때보다 심한 갈등을 겪는 우리 사회와 황폐한 심령에 다시 성령의 바람 같은 불 같은 역사가 있기를 바란다.〠

 

글/홍요셉|순복음 오세아니아 총회장, 브리즈번순복음교회 담임목사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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