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의 여성 자선사업가, 캐롤라인 치점

정지수/ 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1/10/26 [11:29]
▲ 호주에서 가난한 여성들을 위해 자선활동을 펼친 캐롤라인 치점의 초상화     


호주에서 가난한 여성들을 위해 자선 활동을 펼친 캐롤라인 치점(Caroline Chisholm)의 삶은 우리에게 많은 감동과 도전을 준다.

 

그녀는 1808년 5월 30일, 영국의 노샘프턴(Northampton)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돼지를 판매하는 상인이었는데 세 명의 아내들이 모두 출산과 질병으로 사망했고 네 번째 아내인 사라(Sarah)와 결혼해 캐롤라인을 낳았다.

 

캐롤라인은 12번째 자녀로 집안에서 막내로 자랐다. 그녀의 아버지는 캐롤라인이 여섯 살되던 1814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많은 유산을 아내와 자녀들에게 남겨 주었다.

 

1830년에 캐롤라인은 22살이 되었고, 가톨릭 신자인 아치볼드 치점(Archibald Chisholm)과 결혼을 했다. 그는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에서 동인도 회사(East India Company) 소속인 마드라스 군대(Madras Army)에 속한 장교로 나이가 캐롤라인보다 10살이 많았다.

 

그들은 노샘프턴(Northampton)에 있는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캐롤라인은 영국 국교회(Church of England)에 다녔지만, 결혼한 후에는 남편을 따라 가톨릭으로 개종했고, 자녀들을 가톨릭 신자로 키웠다.

 

결혼 후에 아치볼드는 먼저 인도로 돌아갔고, 캐롤라인도 1년 6개월 후에 남편이 있는 인도로 갔다. 군부대에서 군인들과 함께 생활하는 군인 가족들의 삶을 자세히 살펴본 그녀는 군인들의 딸들을 위한 교육 시설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녀는 1834년에 ‘유럽 군인들의 딸들을 위한 기술학교’(Female School of Industry for the Daughters of European Soldiers)를 설립했다.

 

▲ 광역 런던 카운슬 벽면에 부착되어 있는 캐롤라인 치점의 기념 동판. “자선사업가 이민자들의 친구가 이곳에 살았다”라고 적혀 있다.    

 

이 학교에서는 군인의 딸들에게 읽기, 쓰기, 종교, 요리, 가사, 간호에 관련된 과목들을 가르쳤다. 많은 군인들이 자신들의 딸들을 이 학교에 보냈다. 한편, 인도에 사는 동안 캐롤라인은 두 명의 아들을 낳았다.

 

1838년에 그녀의 남편인 아치볼드는 건강이 나빠져 2년 동안의 휴가를 신청했다. 아치볼드와 캐롤라인은 영국으로 돌아가는 대신 호주에서 2년 동안 휴가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캐롤라인 가족은 1838년 10월 시드니에 도착했다. 시드니 곳곳을 여행하면서 캐롤라인은 영국 식민지였던 호주의 상황을 자세히 살펴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영국과 유럽에서 온 많은 이민자들이 경제적으로 아주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특히, 캐롤라인은 젊은 여성들이 생존을 위해 매춘을 하는 안타까운 상황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캐롤라인은 젊은 여성들을 도와줄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녀는 주지사에게 도움을 요청해 젊은 여성들이 머물 수 있는 여성 보호소를 설립하기 시작했다. 2년 후에 남편 아치볼드는 호주에서의 휴가를 마치고 다시 인도로 돌아가면서 그녀에게 호주에 남아서 자선 활동을 계속하라고 격려했다.

 

캐롤라인은 호주에 남아서 젊은 여성들을 위한 보호소를 시드니에 세웠고, 시드니 외각 지역에도 여러 보호소들을 설립했다. 그녀의 자선 사업이 크게 확장되어 여성들뿐만 아니라 많은 이민자들도 도움을 받을 수가 있었다.

 

1842년 3월, 캐롤라인은 이스트 메이트랜드(East Maitland)에 있는 주택을 임대해 숙소로 개조했다. 그녀는 이 곳을 일자리를 찾아 메이트랜드까지 온 가난한 이민자들을 위해 숙소로 제공했다.

 

▲ 이스트 메이틀랜드에 있는 캐롤라인 치좀 코티지. 1999년 4월 2일 NSW주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1851년부터 1835년까지 존 스미스에 의해 지어졌다.     

 

이 숙소는 캐롤라인 치좀 코티지(Caroline Chisholm Cottage)라는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데, 이 숙소를 통해 우리는 1800년대 호주 노동자들의 숙소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한편, 캐롤라인은 7년 동안 호주에 살면서 자선 사업을 펼쳤는데 그녀의 자선 사업을 통해 약 1만 1천 명 이상의 사람들이 숙소를 제공 받거나 일자리를 얻었다. 그녀는 자선 활동을 하면서 종교 단체나 사회활동 단체로부터 후원금을 받지 않았다.

 

그녀는 오직 개인적인 후원만 받았는데 그 이유는 그녀가 다른 단체로부터 간섭을 받지 않고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는 독립적인 자선 활동을 펼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자선 사업이 점점 크게 성장하자 의회에서는 그녀에게 자금의 출처를 밝힐 것을 두 번이나 요구했다. 많은 사람들이 캐롤라인을 존경했고 그녀의 자선 사업에 동참했다.

 

▲ NSW주 브레달베인에 있는 캐롤라인 치좀 기념교회.     

 

캐롤라인은 자신의 자선 활동 내용을 중심으로 한 책을 1842년에 출판했다. 이 책의 제목은 ‘시드니의 이주민 가정을 통해 본 여성의 이민’(Female Immigration, Considered in a Brief Account of the Sydney Immigrants' Home)이었는데 이 책은 호주에서 여성이 쓴 최초의 책이었다.

 

한편, 그녀의 남편은 1845년에 인도에서의 군생활을 마치고 호주로 돌아와 캐롤라인의 자선 사업을 도왔다. 두 부부는 영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NSW 전 지역을 방문했다. 그들은 여러 마을들을 방문하면서 그곳에서 정착해 살고 있는 6백여 명의 이야기를 듣고 메모로 남겼다.

 

그들은 1846년 영국으로 돌아갔고 이 메모들을 바탕으로 호주에서 어렵게 정착해 살아가고 있는 유럽 이민자들의 삶을 소개하는 소책자를 발간하기도 했다. 영국의 유명한 작가인 찰스 디킨슨 (Charles Dickens)이 이 소책자에 실린 이야기들을 인용하기도 했다.

 

영국에서 캐롤라인과 아치볼드는 의회에 출석해 호주로 이주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말하며 영국에 남아 있는 호주로 이주한 죄수들의 아내와 자녀들을 위해 호주로 가는 이주 비용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는데, 영국 의회는 이들의 의견을 지지했다.

 

두 부부는 1849년에 여러 정치인들과 상류층 인사들의 도움으로 호주로 이주하는 사람들의 경비를 빌려 주는 대출 회사를 설립했다(Family Colonization Loan Society).

 

▲ 캔버라(ACT)에 있는 캐롤라인 치좀 센터.   

 

이 회사는 호주로 이주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이주 경비의 절반을 대출해 주었는데 대출을 받은 사람들은 호주에 살면서 2년 안에 대출금을 상환했다.

 

▲ 빅토리아주 디거스 레스트에 있는 쉼터. 이 쉼터는 빅토리아주에서 금이 발견된 지 15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졌다.   

 

캐롤라인은 이 회사를 운영하면서 호주로 이주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으며, 그녀는 호주로 이주하는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조언들을 제공해 주었다.

 

또한, 그녀는 이주민들이 안전하게 배를 타고 호주로 갈 수 있도록 선박의 숙박 시설을 개선해야 한다고 영국 의회에 강력히 주장했다. 그녀의 주장은 받아들여져 영국 의회는 해상 여객법을 개정하였다.

 

한편, 그녀의 회사는 호주로 가는 이주민들의 안전한 여행을 위해서 직접 배를 빌려 운행하기도 했다. 이 회사를 통해서 약 3천여 명의 사람들이 도움을 받아 호주로 이주했다.

 

그녀는 영국 전역에서 호주 이민에 관한 강의와 연설을 했다. 그리고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했고 이탈리아에서는 교황 피오스 9세(Pope Pius IX)로부터 자선 사업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메달(papal medal)을 수여받았다.

 

1854년에 캐롤라인은 호주로 돌아왔다. 그녀는 빅토리아 주에 금광이 있는 발라랏(Ballarat) 지역을 여행했는데 그곳에서 대부분의 광부들의 집이 금광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광부들과 광부들의 가족들이 사용할 수 있는 숙소를 금광 근처에 건립할 것을 정부에 강력히 제안했다. 정부는 캐롤라인의 제안을 받아드려 지원해 주었다. 그녀는 멜번과 발라랏을 오가며 자선 사업을 펼쳤다.

 

하지만, 1858년에 그녀의 건강이 나빠져 그녀는 가족들과 함께 다시 시드니로 돌아왔다. 일 년 정도 시드니에서 휴식을 취하자 캐롤라인의 건강이 좋아졌다.

 

▲ 이민자들의 친구'로 알려진 캐롤라인 치좀. 호주로 온 가난한 이민자들과 함께 일한 그녀의 초상화는 20년 이상 동안 5달러 지폐에 있었다.    

 

한편, 그녀는 시드니에서 네 번의 강의를 했는데 그녀는 강의에서 이주민 가족들이 작은 농장을 소유할 수 있도록 토지를 할당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이러한 토지 분배를 통해서 부의 양극화 현상을 막고 많은 이주민들이 극빈자로 전락하는 상황을 줄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녀는 1866년 영국으로 돌아갔고 1877년 3월 25일, 영국 런던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남편인 아치볼드는 같은 해 8월에 사망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영국과 호주에서 그녀의 이름으로 된 학교들이 세워졌고, 캔버라에서는 그녀의 이름으로 된 행정구역이 생겨났다.

 

또한, 호주에서 1967년에 발행한 5달러 지폐에 그녀의 얼굴이 새겨졌다. 그녀의 헌신적인 자선 활동과 삶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도전을 주고 있다.〠

 

정지수|크리스찬리뷰 영문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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