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쟝발잔같이 감옥에서 나와 당장 먹을 밥도 잘 곳도 없는 사람을 돕기로 마음이 연결됐다. 조금씩 돈을 내놓아 쌀과 배추를 사서 김치를 만들었다. 가구점 주인이 변두리 뚝방 근처의 낡은 집을 하나 얻어 잠자리를 만들었다.
나는 우연히 알게 된 그곳에 쌀 두 가마를 사가지고 가면서 그들과 합류하게 됐다. 시장 안 재단사는 매달 삼만 원을 낸다고 했다. 작은 돈이지만 속이 따뜻해진다며 기뻐했다. 어느 순간 그 단체가 커지기 시작했다.
돈을 기부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법인으로 되어 국가의 보조금을 받게 됐다. 그 단체를 관리하게 된 사람이 변호사인 내게 물었다. 내가 그곳의 법률고문이 된 셈이다.
“기업을 찾아다니면서 기부금을 끌어모으는 게 전문인 사람이 있어요. 자기가 재벌그룹에 가서 떼를 써서 돈을 받아오면 그중 이십 퍼센트는 자기 수고료로 달래요.”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있는지 처음 알았다. 시간이 지나고 그 단체의 관리하는 사람이 내게 또 이런 말을 했다.
“정부 돈을 받으니까 주인이 공무원이 된 것 같아요. 수시로 감사가 나오는데 모든 걸 다 간섭해요. 그리고 하는 말이 정부 보조를 받으면 그 액수만큼 기부를 받아야 형평에 맞지 않느냐는 거예요. 이 일을 시작한 분들이 모두 가난한 분들인데 어떻게 그런 돈을 낼 수 있겠어요?
그래서 제가 여기저기 기부를 받으러 다니는데 정말 힘들어요. 서울의 대형교회에 도움을 받으러 가면 어떤지 아세요? 서류는 산만큼 내라고 하고 나중에 십만 원을 주기로 결정을 했다는 거예요. 차라리 안 받고 싶은 마음이예요.”
따뜻하던 단체가 어느새 얼음같이 냉냉해졌다. 처음에 그 단체를 이룬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모두 떠나가 버렸다. 나도 그 단체를 떠났다. 전혀 생각이 없는 그 단체의 장 자리를 내가 할까봐 다른 사람들이 나를 견제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음이 허전할 때 나는 내가 존경하는 스승인 백 년 전 현자 노인의 경험을 들어본다. 그 역시 단체를 이끌었고 잡지를 만들기도 했었다. 그는 이렇게 책을 통해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분의 일을 할 때 정부의 보조도 교회의 보조도 다 거절했소. 보조금이라는 건 그분이 아닌 사람에게 고개를 숙여야 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오. 사람에게 그렇게 하는 것은 그분에 대한 책임을 방해하는 것이었소.
나는 사람들로부터 추호의 속박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소. 그래서 보조를 받지 않았소. 그렇다고 일제의 돈을 거절한 것은 아니오. 자발적 호의에서 우러나온 것은 받았소. 아무런 조건이 붙지 않는 순수한 사랑에서 온 것 말이오.
그런 돈은 하늘에 계신 그분에게서 오는 것이었소. 내가 밀실에 앉아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분으로부터 받은 거요. 그분에게만 감사하면 되는 거지. 하나님에게는 불경기가 없소. 언제든지 우리가 필요할 때 우리가 필요한 것을 보내주는 분이오. 사람들에게 구걸하고 고개를 숙이지 않았소. 나는 큰 재벌총수를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마음으로 대담하게 처신했소. 그렇게 살아냈소.”
나는 사회의 눈치를 보고 세금같이 내는 기부금을 거절하기로 했다. 따뜻한 온기가 담긴 돈을 가지고 직접 사람을 찾아가 내 손으로 전해주기로 마음먹었다.
몇 년 전 이따금씩 탑골공원 뒷골목 무료급식소를 찾아간 적이 있다. 이백 명분의 급식이 끝나 밥을 먹지 못하게 된 한 노인이 하늘을 향해 눈물이 그렁그렁한 모습으로 서 있는 걸 보았었다. 그 노인에게 국밥 한 그릇 값을 주면서 말했다.
“저 위에 계신 분이 전해주라고 하시네요.”
눈물을 그치는 노인이 아이 같았다. 그렇게 말하는 내 속에서 따끈한 아랫목처럼 온기가 솟아올랐었다. 그분이 즉석에서 주는 큰 보상이었다. 어떤 기부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가리나 소리나는 구리판이 아닐까. 〠
엄상익|변호사, 본지 한국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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