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품격

최주호/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1/11/29 [14:43]
 ©최주호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인가?

 

더치 쉬츠의 책에 나온 예화다

 

어느 날 아침, 한 남자가 숨을 몰아 내쉬면서 도시 근교에 있는 철도역 안으로 급하게 뛰어들어 왔다. 그리고 매표원에게 물었다.

 

“8시 1분 기차가 언제 떠나지요?”

“8시 1분에요”

 

“그러면 내 시계로 지금이 7시 59분이고, 시청 시계로는 7시 57분, 그리고 역 시계로는 8시 4분인데 나는 어떤 시계에 맞추어야 합니까?”

 

“어떤 시계에 맞추든지 당신 마음대로입니다만 당신은 8시 1분 기차를 탈 수 없습니다. 그 기차는 이미 떠나 버렸거든요”라고 그 매표원은 말했다.

 

어느 기준에 따라 살지는 자기의 선택이지만 그 선택에 따른 결과는 당연히 자신의 몫이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인간이 범죄하고 난 후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이 생각났다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창 3:11) 아담이 범죄하고 난 후에 가장 먼저 취한 것은 무화과 잎으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는 일이었는데 바로 그 일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이다.

 

여기서 내가 본 중요한 단어는 ‘누가’다. 아니 너는 처음부터 벌거 벗었었고 벌거 벗음이 너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내가 분명히 말했는데 감히 누가(?) 내 말을 반대해서 너에게 그런 망언(?)을 했는가라는 책망이다.

 

이 말은 아담이 뱀의 꼬임이 빠져 자의적인 선택으로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아닌 사단이 말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은 그 타락 사건을 의미하는 말이다.

 

문제는 신앙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 중에도 자기가 판단근거의 기준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별 일 없을 때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별 일(?)이 생기면 꼭 그때에는 자기 생각이 기준이 되어 행동하게 된다

기타를 치다보면 반드시 치기 전에 튜닝을 해야 한다. 다른 악기와 같이 치려고 한다면 더군다나 절대음을 기준으로 삼고 튜닝해야 한다.

 

그렇게 조율되지 않은 기타를 치면 기타의 소리는 아름다운 연주가 아니라 듣기 싫은 소음이 되고 만다. 연주의 실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악기가 조율되었는가에 있는데 실은 우리의 삶도 그렇다.

 

아무리 훌륭하고 멋있는 삶을 사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말씀에 조율되어 있지 않은 삶은 그 자체가 소음만 내는 기구에 불과할 뿐이다.

 

오늘 말씀은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형제가 범죄했을 경우에 그 일을 처리하는 방법이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마 18:15)

 

여기서 주목해서 보아야 할 부분은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이라는 말인데 실제로 원어에서는 네 형제가 나에게 죄를 범하거든…이라는 말로 쓰였다. 이 말은 그냥 어느 사람의 범죄가 아니라 그 범죄가 나에게 직접적인 해를 끼칠 때를 말한다.

 

실은 이렇게 직접적인 손해를 입었을 때에 내가 취하는 대처 방법이 중요한데 이는 그리스도인의 진짜 실력이 그 대처하는 모습으로 증명되기 때문이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배우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하나님이 피해를 입은 억울한 나에게 그리스도인의 품격으로 해결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라는 한 사람의 태도는 내가 속한 그 공동체의 품격을 말한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세상의 사람들과는 다른 반응을 보이라는 것인데 이게 그리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은 막상 그런 어려움을 당해본 사람들은 잘 안다. 일단 내가 뺨을 맞으면 내 속에서 뭉클한 뭔가가 치밀어 올라 그 사람에 대한 분한 감정과 미움이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자동적으로 복수를 꿈꾸게 되는 것이 세상의 일반적인 현상인데 성경은 이 모든 세상의 방식을 뒤로 한채 하나님의 방식대로 풀라고 말한다. 먼저 1:1로 조용히 다가가서 그의 죄가 무엇인지를 드러내 주어야 한다.

 

그가 받아들이면 용서해 주고 그가 받아들이지 않아도 화를 내면 안된다. 실은 이렇게 하려면 심오한 신앙 내공이 필요하다. 그 후에는 두세 사람의 증인의 입으로 그 사람의 죄에 대해 다시금 권면하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교회에 말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고 하는데 이는 그 형제를 미움이 대상이 아닌 전도의 대상으로 생각하라는 말이다.

 

이 이야기를 통해 배우는 중요한 레슨은 형제가 나에게 죄를 져도 절대로 성질부터 내지 말라는 말인데 이게 O형을 가진 다혈질의 인간들(?)에게는 정말 말도 안되게 어려운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려운 이유는 우리의 본성과 다르게 행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본성은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성질도 내고 화도 내고 미워도 하는 것인데 하나님은 그런 것을 통틀어 옛 성품이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는 바로 이러한 부분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는 기도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내가 원하고 바라고 기대하는 것을 아뢰는 것으로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은 이런 행동도 포함되어야 진짜 기도가 된다. 내가 먼저 나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주고 기도해야만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

 

그렇다면 만약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향해 완악한 마음으로 악심을 계속 품고 있다면 결단코 우리의 죄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예전에 제자훈련을 할 때의 일이다. 제자훈련의 숙제 중에는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에게 편지를 쓰는 숙제가 있었는데 어느 집사님의 편지가 마음에 많이 와닿았다.

 

이 집사님이 보낸 편지의 수신인은 이민 와서 초창기에 친하게 지낸 친구인데 자신에게 금전적으로 큰 손해를 입히고 자신의 삶을 망가뜨린 사람에게였다.

 

그 집사님은 편지의 시작을 이렇게 했다.

 

“내가 너를 생각만 해도 억울해서 가슴이 뛰고 잠이 오지 않았어~”

 

그렇게 시작한 편지는 이렇게 이어졌다.

 

“어느 덧 그런 고통의 시간은 흘렀고 이제 나는 예수님을 믿고 제자 훈련을 하고 있으며 처음에는 절대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이제는 주의 사랑으로 용서해보려고 한다”는 내용이었다

 

말씀을 기준으로 삼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진짜 그리스도인의 삶이 시작된다.

 

오늘은 주일… 드디어 기다리던 대면예배가 시작된다.교회가 가진 위대함은 바로 그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고 사는 진짜 그리스도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산에 크게 자라는 고사리를 자세히 보니 참 그 모양이 신묘막측했다. 이제는 락다운이 풀렸으니 자유롭게 산행도 할 수 있다.〠

 

최주호|멜번순복음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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