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화가에서 주님의 화가로

글/김환기 사진/권순형 | 입력 : 2022/02/28 [12:53]
▲ 스마트폰 캔버스에 성화를 그리는 폰 일러스트레이터 서정남 목사. 그는 2015년부터 매일 성경 한 장을 묵상하고 성화를 그렸다고 설명했다.     © 크리스찬리뷰


지난 2월 8일 오후 2시, 시드니주안교회에서 서정남 목사를 만났다. 변호사인 아들 오승리는 동시통역을 하면서 주안교회를 섬기고 있다. 1994년 서 목사는 자녀교육 위하여 뉴질랜드로 갔다가 2001년 소명을 받고 호주로 왔다. 브리스번순복음교회에서 대학청년부 전도사로 섬기다가 2005년 귀국하여 감리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환갑이 넘어 늦깎이 목사 안수를 받았다.

 

아들은 호주 대학교에서 법을 전공하였고 딸 오예리는 서 목사와 함께 귀국하여 이화여대를 다닐 때 대학가요제에 출전하여 자신이 직접 작사하고 작곡한 노래를 불러 대상과 특별상을 받았다.

 

대학 4년간 장학혜택을 입은 이화여대에 수상금을 선뜻 장학금으로 후원하며 감사를 전하였다. 유명 기획사에 소속하여 싱어송 라이터로 활동하다가 사회적 기업의 매니저로 전환하고 지금은 육아 휴직 중이다.

 

주님을 만남

 

서 목사는 기독교 불모지인 울산에서 자랐다. 딸만 여섯을 둔 부모님이 자녀를 모두 서울로 유학을 시켰다. 중·고등학교 시절 미술부 활동을 했었고 대회에서 수상을 독차지했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었다.

 

▲ 서정남 목사의 성화 작품.  ©서정남     

 

서 목사는 미술을 전공했다. 졸업 후 울산으로 돌아와 관인 미술학원을 경영하며 후진 양성을 힘썼다.

 

사업가였던 어머니의 사업체가 고속성장을 하다가 서 목사가 결혼한 지 8년 즈음에 부도를 맞았다. 장밋빛 아스팔트 인생길을 걷던 서 목사에게 시련이 닥친 것이다.

 

그녀는 하나님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의지할 수 없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그녀에게 고난은 위장된 축복이었다.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서 목사는 뜨거운 성령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 가정이 살고 가족이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임을 확신하고, 부모님과 자매들에게 전도하기 시작했다.

 

자신들만의 세계관을 가지고 잘 사는 자매들에게 전도하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하나님은 각자의 성격에 맞게 다른 방법으로 역사하셨다. 지금은 부모님과 여섯 자매 모두가 예수를 믿는다.

 

▲ 스마트폰으로 그린 서정남 목사의 성화 작품들.©서정남     

 

▲ 서울 토포하우스에서 스마트폰으로 그린 성화를 설명하고 있는 서 목사.©서정남     

 

▲ 서 목사의 딸 오예리. 열 살 때 호주로 와서 밴드 및 음악활동을 하다 21살 때 대학을 중퇴하고 귀국, 이화여대에 들어가 ‘이대 나온 여자’를 결성하여 MBC 대학가요제에 참가해 대학생들의 고민을 반영한 곡 <군계일학>으로 특별상과 대상을 거머쥐었다.©서정남    


여섯 자매 중에 세 명이 목사이고, 1명은 의사이다. 한 여동생은 국내에서는 가장 큰 규모의 조선족 목회를 하고 법무부 지정 동포체류 센터를 하는 여 목사이다.

 

다른 여동생은 기독교 탄압국에 가서 엘리트 청년들을 전도하여 이제는 그들 스스로 교회를 꾸려가도록 중동선교 비전을 가진 제자들을 세워놓고 탄압에 의해 12년 만에 귀국한 여 선교사이다.

 

또 다른 여동생은 병원을 운영하면서 신학박사 과정 중에 있는 의학박사이다. 2년 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어머님은 예수 이름으로 많은 나눔을 실천하셨던 명예 권사였다.

 

▲ 인터뷰를 하면서 스마트폰에 성화를 그리는 기법을 설명하는 서정남 목사.     © 크리스찬리뷰

 

▲ 서정남 목사의 성화 작품들.©서정남  

 

▲ 감신대에서 열린 서정남 목사의 성경 삽화 전시회.©서정남     


이민 시절

 

1994년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뉴질랜드로 갔다. 언니가 자리를 잡고 있어서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던 중 뜻하지 않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평화로운 땅 뉴질랜드에서 유례없이 같은 집에 두 번씩이나 도둑이 침입했다.

 

좀 더 안전한 집으로 이사를 했는데 세 번째는 도둑이 강도로 변해 딸이 생명의 위협을 받기까지 했다. 하나님은 사람과 사건을 통해서 계속 서 목사에게 말씀하고 계셨다.

 

어느 날 새로 창립하는 교회에 초대를 받아 창립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다. 놀랍게도 교역자는 서 목사의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의 아들이었다. 그 예배에서 요한복음 21장으로 소명을 받았다.

 

신학을 하기 위하여 호주로 왔다. 서 목사는 브리스번순복음교회의 대학청년부 전도사로 사역을 시작했다. 매주 전도를 나선 결과 17명으로 시작한 청년부가 70명으로 급성장하고 교회가 성전을 건축하는 등 부흥의 불길이 일었으나 하나님은 서 목사를 위하여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서 목사는 말씀에 순종하여 모든 것을 내려놓고 딸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갔다.

 

주님을 전함

 

54살에 감리교신학대학원에 입학했다. 등록금이 없어 눈물로 하나님께 하소연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서 목사를 부르신 하나님은 신실하셨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서 목사는 은혜로 신학교를 마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진급시험을 볼 때 성경시험을 100점을 받기도 했다.

 

2014년 서 목사는 서울 상도동 지하상가에 교회를 개척하였다. 폐지를 줍는 할아버지가 첫 번째 교인이었다. 서 목사도 폐지를 주워 매 주일 할아버지에게 드리면 정말 기뻐하셨다. 귀가 안 들리는 할아버지가 은혜를 받고 치유된 적도 있었고, 중풍에 걸린 할머니가 주님을 영접하여 감격적인 적도 있었다. 적은 성도였지만 한 영혼을 천하보다 더 귀하게 여기며 돌보았다.

 

어느 날 자신은 아무런 재능이 없는 것 같아 울며 기도하고 있었다. “네가 가진 것이 무엇이냐”는 하나님의 질문에, 그림 그리는 재능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마침 사위가 엡을 다운로드 받아 핸드폰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서 목사는 비록 목회자로서의 경험은 짧지만 평신도의 입장에서 교회생활을 하고 설교를 듣고 성경을 읽어온 기간 동안 평신도들이 무엇을 어려워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서 목사는 성도들과 성경공부를 하면서 스토리텔링 기법을 사용하였다. 또한 성경을 시각화시켜서 그림으로 보여줄 때 사람들은 쉽게 성경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한 성경공부가 일주일에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쉬워 매일매일 묵상말씀을 SNS로 나누다 보니 받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여기에 자신만의 묵상그림을 삽화로 첨부하니 말씀을 이해하고 감동받는 폭이 넓어지게 됐다.

 

서 목사는 많은 교회의 초청을 받아 말씀도 전하고, 그림 전시회도 하고 있다. 언젠가는 인사동에서 전시회를 가질 기회가 있었다. 인사동은 세상 그림을 전시하는 곳이고 옆에는 조계사가 있다.

 

▲ 서정남 목사가 전시회에서 관람객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서정남     

 

그녀는 전시회를 하기 전에 많이 기도했다. 일주일 동안의 전시회는 성황리에 마쳤다. 길을 가던 스님들도 서 목사의 그림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그녀의 그림은 엽서, 주보 봉투, 달력, 영상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서 목사는 그림을 그리기 전에 기도하고 그리면서 기도하기 마무리하고 기도한다. 말씀을 그리는 서 목사는 세상의 화가에서 하나님의 화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오늘도 잡힌 바 된 잡은 것을 향하여 힘차게 달려가고 있다.〠

 

글/김환기|크리스찬리뷰 영문편집위원, 구세군라이드교회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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