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평 전투, 가평 길, 가평 프로젝트

글/주경식 사진/권순형 | 입력 : 2022/03/28 [14:04]
▲ 가평 전투에 참전했던 조셉 베즈고프 옹이 본지와 인터뷰 중 중공군과 전투를 벌였던 당시를 회상하며 사격 자세를 취하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호주에 한국 지명인 가평 길(Kapyong Road)이 존재하고 있는 것을 아는 동포들은 많지 않다.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니라 지금까지 찾아낸 곳만 무려 10곳이나 된다. 시드니에 3곳(Belrose, Bardia, Macmasters Beach), 캔버라에 1곳(Campbell), 콥스하버에 1곳, 브리즈번에 2곳(Caboolture, Witheren), 골드코스트에 1곳(Arunde), 타운스빌에 1곳, 퍼스에 1곳(Karrakatta)이다.

 

뿐만 아니라 가평 다리(Kapyong Bridge)도 2개나 된다. 아들레이드와 멜번에 있다.

 

본지 권순형 발행인은 “가평 길(Kapyong Street)은 분명히 한국전에 참전했던 호주 참전용사들이 붙인 이름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더라도, 적어도 한국 전쟁시 호주군이 혁혁한 공을 세웠던 ‘가평전투’ (Kapyong Battle)와 연관이 있다는 것은 확신했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호기심과 취재 열망으로 가평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작년, 권 발행인은 호주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동포들에게 주위에 혹시 가평 길(Kapyong St, Rd, Lane 등)들이 있으면 본지로 알려 달라고 광고를 했다. 그렇게 해서 호주 전역에 무려 10군데나 가평 길(Kapyong St)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현재까지 발견된 것이 10개이다. 앞으로 더 발견될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앞으로도 혹시 주위에 Kapyong 지명이 사용되고 있는 곳이 있으면 알려 주기를 바란다).

 

▲ 호주 내 가평길     © 크리스찬리뷰

 

작년 6월 호 크리스찬리뷰의 가평길(Kapyong St) 기사가 나가자 연합뉴스, JTBC, KBS 등 한국의 언론사들은 앞다투어 권 발행인을 인터뷰하고 ‘호주의 가평길’(Kapyong Street)에 대한 많은 관심들을 보여 왔다.

 

또한 다음 포탈 사이트에 올려진 기사에는 6월 25일 하루 동안 365개의 댓글과 함께 ‘감동’이란 클릭 숫자가 1천4백여 개에 달했다. 고국에 있는 많은 동포들이 그 기사를 보고 ‘감동’에 젖어 호주를 생각하고 특히 한국전에 참전한 호주 참전용사들에게 감사의 인사들을 전해온 것이다.

 

이런 뜨거운 반응들을 보고 ‘크리스찬리뷰’는 ‘가평 프로젝트 다큐 팀’을 구성하고 호주에 있는 ‘가평 길’(Kapyong Street)을 취재하고 ‘가평전투’에 참전했던 호주 참전용사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다큐멘터리 작업을 해야겠다는 의지가 일었다.

 

2023년이면 한국전쟁 정전 협정 체결 70주년이다. 이에 본지에서는 한국전쟁 정전협정 70주년을 기념하고 가평전투에 헌신한 참전용사들의 역사적 기록을 남기기 위해 내년 4월까지 살아 계신 가평전투 참전용사들을 인터뷰하여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또 그들로 말미암아 조성된 호주에 있는 ‘가평 길’(Kapyong St)을 취재하고 한국전 사진전을 개최하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 가평길 프로젝트 다큐멘터리 제작 팀은 골드코스트 가평 로드에서 드론을 이용해 가평 로드 주변을 촬영했다.          © 크리스찬리뷰

 

이렇게 해서 작년 12월 일차적으로 콥스하버, 골드 코스트, 브리즈번 지역에 있는 가평길 취재를 다녀온 것이다. 그리고 작년에 이어 이번에는 뉴사우스 웨일즈 울릉공 인근 불라이(Bulli) 지역에 살고 있는 가평전투 참전용사인 조셉 베즈고프 옹을 인터뷰하게 되었다.

 

가평대대(Kapyong Battalion)를 아시나요?

 

1950년 한국전쟁이 벌어지자 호주는 전 세계에서 두번째로 한국 전쟁에 우방국으로 참전했다. 그리고 육·해·공군 전군에 걸쳐 1만 7천164명이나 되는 군인들을 보냈다. 뿐만 아니라 사리원 전투, 가평전투, 마량산 전투 등에 참전해서 많은 공을 세웠다. 그중에서도 가평 전투는 호주군 역사에 길이 남을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1951년 4월, 중공군은 춘계 대공세를 펼치며 파죽지세로 남쪽으로 내려왔다. 특히 한국군 6사단을 격파한 중공군 118사단은 4월 23일과 24일 이틀 동안 전략적으로 용이한 가평천 골짜기를 통해 서울-춘천 간 도로를 차단함으로써 연합군의 전선을 갈라놓고 수도 서울을 탈환하려고 했다.

 

대공세를 펼치며 남하하던 중공군은 4월 23일 밤 10시경, 6사단을 격파하고 중공군 118사단 선두 연대는 가평을 신속히 점령할 목적으로 가평 계곡을 따라 진격하던 중 호주군의 방어에 기세가 꺾였다. 왕립 호주연대 3대대가 가평 504 고지에 배치되어 5배가 넘는 중공군의 공격을 막아낸 것이다.

 

▲ 제3대대에 전시되어 있는 가평전투 기념비     © 크리스찬리뷰

 

주춤했던 중공군은 이튿날인 24일 새벽 1시경 연합군 전차부대가 재보급을 위해 잠시 철수하자 즉시 반격을 가해왔다. 그 후 밤새 호주군 3대대와 중공군의 밀리고 밀치는 전투는 24일 아침녘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날이 밝아오자 연합군의 항공폭격과 포병사격이 집중되자 중공군은 산더미 같은 시체를 남기고 급히 철수했다.

 

▲ 제3대대 연병장에 38선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 크리스찬리뷰

 

중공군은 가평전투에서 1만 명 이상이 전사하는 큰 피해를 입은 것이다. 호주군 1개 대대가 인해전술로 밀어붙이던 중공군 1개 사단을 이틀 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물리치는, 전쟁 역사에 믿기 어려운 전과를 올린 것이다. 한국 전쟁사에서는 당시 왕립 호주연대 3대대가 가평에서 중공군을 막지 못했다면 한국전쟁의 양상이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전투로 가평 전투에 참여한 왕립 호주연대 제3대대는 미국의 트루만 대통령으로부터 부대훈장을 받았다. 이후로 왕립 호주연대 제3대대는 ‘가평대대’(Kapyong Battalion)라는 별칭이 붙었다(올 4월에는 타운스빌로 옮긴 왕립호주연대 3대대 가평대대를 취재할 계획 중에 있다).

 

그리고 적어도 호주 참전 용사들에게는‘가평’ (Kapyong)이 한국인들보다 더 생생하고 잊지 못할 이름이 된 것이다.

 

가평전투 참전용사 조셉 베즈고프 옹

 

▲ 조셉 베즈고프 옹의 가슴에 달려 있는 훈장과 휘장들이 그의 공적을 말해 주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조셉 베즈고프(Joseph Vezgoff, 93) 옹(翁)은 가평전투 참전용사이다. 현재 뉴사우스 웨일즈주 울릉공 근처 불라이(Bulli)에서 아내 트리쉬(Trish Vezgoff)와 함께 살고 있다. 트리쉬는 울릉공대학의 사회학과 교수였고 최근까지 결혼 주례사와 장례 지도사의 일들을 하기도 했다.

 

크리스찬리뷰 가평 프로젝트 다큐 팀은 2월 말 불라이에 사는 가평전투 참전용사 조셉 베즈고프 옹을 인터뷰하기로 논의했다. 그리고 인터뷰와 촬영 약속을 잡기 위해 연락을 취했다.

 

기자가 연락처에 표기된 대로 로컬 번호로 전화를 했고 다행히 조셉 옹이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귀가 어두운 관계로 정상적인 통화를 하기가 어려웠다. 하는 수 없이 부인이 다시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다시 전화를 하기로 하고 끊었다. 이렇게 일면식도 없는 상황에서 인터뷰를 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은 여러 가지이다. 드문 일이기는 하지만 인터뷰를 거절하는 경우도 있고, 인터뷰어의 사정에 맞게 취재 날짜를 잡는 것도 쉽지는 않다.

 

그날 오후 다시 전화를 했는데 다행히 조셉 옹의 아내 트리쉬가 전화를 받았다. 자초지종 설명을 한 후 인터뷰 요청을 했다. 처음에는 요즘 사기 전화들도 많이 오는 터라 경계를 하는 듯 보였지만, 인터뷰 취지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하니 경계를 풀고 흔쾌히 인터뷰 요청을 허락했다. 하지만 조셉 옹이 연세가 높아 청력과 시력에 문제가 있어 인터뷰할 때 조심해 줄 것을 요구했다.

 

▲ 인터뷰에 앞서 주경식 편집국장(오른쪽)과 오페라 가수 테너 김재우 씨가조셉 베즈고프 옹과 부인 트리쉬 여사에게 자택 거실에서 촬영 진행 사항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인터뷰 날짜가 3월 19일(토) 12시로 잡혔다. 가평 프로젝트 다큐 팀은 다른 때와 달리 시나리오를 짜고 만반의 준비를 했다. 이번 인터뷰는 조셉 옹의 인터뷰를 크리스찬리뷰지에 기사화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큐멘터리 제작에 사용할 영상녹화를 염두해 두고 진행하는 일이라서 신경이 많이 쓰였다.

 

권 발행인은 시나리오를 짜기 위해 조셉 옹 자택과 인근 공원과 바닷가 등 사전 답사할 목적으로 불라이를 한 주 전에 다녀오기도 했다. 마침 울릉공에 거주하는 이기범 씨 부부가 취재 당일 날 BBQ 점심 준비를 하는 것을 도와주기로 약속을 받았다.

 

이번 인터뷰의 컨셉은 조셉 베즈고프 옹을 단순 인터뷰하는 것이 아니라 촬영 팀이 조셉 베즈고프 옹 자택을 방문하는 장면부터 조셉 옹 가족들과 같이 식사도 하고 걷기도 하는 등 내러티브가 있는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진행하는 것으로 콘티를 잡았다.

 

그래서 식사를 포함, 모든 준비는 가평 다큐 팀이 준비하고 최대한 조셉 옹 가족에게는 폐를 끼치지 않게 하기 위해 조심했다.

 

▲ 조셉 베즈고프 옹의 자택 거실에서 진행된 인터뷰 전경.     © 크리스찬리뷰

 

인터뷰와 촬영을 위해 총 4개 팀이 움직였다.

 

Team 1 : 정성택 감독과 김신일 목사가 11시쯤 먼저 도착해서 BBQ 준비를 한다.

Team 2 : 울릉공에 거주하는 이기범 씨 부부가 11시쯤 도착해 식사준비를 돕는다.

Team 3 : 기자와 오페라 가수 테너 김재우 씨가 11시 40 분쯤 도착해서 조셉 옹 자택에 들어가는 장면부터 카메라에 담는다. 그리고 인터뷰 준비를 한다.

Team 4 : 권순형 발행인 부부는 촬영장비와 불고기, 잡채 등 식사와 필요한 도구들을 준비하고 전체 일정을 조율한다.

 

처음 조셉 옹의 부인 트리쉬 씨와 연락할 때 조셉 옹이 참전용사 유니폼을 입고 촬영에 임해주면 고맙겠다고 메일을 보냈다. 하지만 지금 군복도 없고 남편이 입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다는 메일을 받아서 내심 걱정했는데 고맙게도 당일 조셉 옹이 참전용사 복장을 하고 우리 팀을 영접해 주는 것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물어보지 못했지만 촬영과 인터뷰를 위해 이렇게 협조해 주는 것에 내심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다

 

이번 인터뷰는 단순 인터뷰는 아니다. 말그대로 스토리가 있는 다큐멘터리이다. 그래서 연출을 위해 시나리오도 작성했고 플랜 A, 플랜 B도 세워놓고 발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생각하며 촬영을 준비했다.

 

BBQ를 위해 불피우는 장면, 조셉 베즈고프 옹의 집안 스케치, 조셉 옹 가족과 함께 식사하는 장면,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테너 김재우 씨의 즉흥 연주 그리고 인터뷰 후에 여건이 되면 조셉 옹을 모시고 근처 불라이 해변에 가서 같이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도 화면에 담을 계획을 세웠다.

 

연출한 대로 조셉 옹 가족의 환대를 받으며 집안에 들어가는 장면, 점심을 준비하고 조셉 옹 가족과 함께 식사하는 장면, 인터뷰하는 장면, 조셉 옹의 특별한 요청으로 테너 김재우 씨의 즉흥 연주 장면,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보너스로 조셉 옹의 화실에서의 대담 장면 등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그는 은퇴 후에 미술활동을 해왔는데 그의 그림 실력은 취미활동 수준을 넘어설 정도로 미술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1995년부터 2005년까지 무려 10년 동안 울릉공 전통 예술 협회(Wollongong Traditional Arts Society)의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불고기 BBQ가 요리되자 준비해간 김치, 잡채, 각종 전들을 펼쳐 놓았다. 김치도 혹시 매워 못 먹을 수 있어, 백김치까지 준비하는 섬세함을 잊지 않았다. 부페식으로 원하는 만큼 가져온 후 모두 식탁에 앉아 한국식으로 식사를 했다.

 

▲ 불고기와 잡채 등 가평 다큐 팀이 준비한 한식으로 오찬을 함께 나눴다. 가운데 작은 사진들은 조셉 베즈고프 옹의 작업실과 작품들. 오른쪽 하단은 조셉 옹 부부와 아들 폴의 가족사진.     © 크리스찬리뷰

 

아마도 부인 트리쉬와 아들 폴은 처음 한국요리를 접해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를 마치자 아들 폴은 아버지 조셉이 보통 점심식사 후 낮잠을 자기 때문에 졸려 할 수 있으니까 빨리 인터뷰를 진행하자고 서두른다.

 

자리를 정돈하고 촬영 장비를 셑팅 한 후 조셉 옹 부부가 중앙에 앉았다.

 

가평전투에 대해 듣다

 

인터뷰는 김재우 씨가 진행했다.

 

“제 이름은 조셉 베즈고프입니다. 저는 1928년 뉴카슬의 위컴(Wickham)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제 나이 21살에 호주 육군에 입대했습니다. 그때가 한국전쟁이 터지기 전인 1949년이었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해인 1950년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10월경으로 추정하는데 저는 왕립호주연대 3대대원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습니다. 맨 처음 일본에 도착해서 몇 주간 훈련을 받고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왕립호주연대 3대대는 11월경 북한쪽 지역에서 중공군과 맞닥트린 지역에서 전투를 수행했습니다.

 

그때 저희 부대는 트럭을 타고 이동 중이었는데 중국 국경 80km 지점에서 숲속에 매복해 있던 중공군의 공격을 당했습니다. 저는 첫 번째 트럭에 타고 있었는데, 한 트럭당 30여 명 정도 타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머리 위로 총알이 휙휙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갑자기 총소리가 들리자 순간적으로 트럭 안은 아비규환이 되었고 총에 맞은 전우도 있었습니다. 놀라서 고개를 숙이고 트럭에서 뛰어내려 몸을 피했습니다. 적을 향해 총을 쏴야 하는데, 제 맘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때 두려움에 저의 손이 갑자기 떨리기 시작하는데, 순간 잠시 정신이 나갔던 것 같습니다. 다행히 그때 이후로 전투에서 그런 현상은 없었습니다. 빗발치는 총성과 함께 저희 중대는 흩어지게 되었고 최전선에서 중공군을 맞닥트린 것이 이때가 처음이었습니다.”

 

▲ 인터뷰를 마치고 테너 김재우의 즉흥 연주가 이어졌다     © 크리스찬리뷰

 

▲ 조셉 옹이 자신의 작품을 김재우 씨에게 선사했다.     © 크리스찬리뷰


조셉 옹은 당시를 회상하는 듯 잠시 숨을 골랐다. 한참 혈기 왕성한 시기인 21세 청년기 때라도 전장에서 갑자기 머리 위로 지나가는 총성을 들었을 때 그 놀람과 두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조셉 옹은 이때의 기억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다른 어떤 이야기보다 이때의 순간을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조셉 옹은 한국전쟁 후에도 말레이시아 전투와 베트남 전쟁에도 참전한, 말 그대로 노련한 베테랑 용사이다. 그러나 그가 한국전쟁에 참전해 중공군으로부터 처음 공격을 받았던 이 때의 기억은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을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가평전투에 대해 이어갔다.

 

“저희 왕립 호주연대 3대대는 1951년 4월 가평 7km 북쪽 지역에 위치한 곳에서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를 막아내야 했습니다. 인해전술로 내려오던 중공군은 중부전선을 방어하던 한국군 6사단을 격파하고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대공세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유엔군 제9 군단장 윌리엄 호지(Wiiiam M. Hoge)소장은 영연방 제27여단에게 가평지역을 중심으로 중공군의 대공세를 막아내는 작전을 세웠습니다. 영연방군에 속해 있던 저희 왕립호주 연대 3대대는 가평지역 504고지를 포함한 북동쪽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 조셉은 말라야(말레이시아)에서 영어로 구르카스 훈련을 시켰다. 중간에 밝은색 군복을 입고 있는 군인이 조셉이다.     © 크리스찬리뷰

 

저는 그때 찰리 중대(C중대)에 속해 있었는데 다행히 찰리 중대는 예비 중대로 알파 중대(A 중대) 서남쪽 1 Km에 예비 진지를 파고 본부의 명령을 기다리는 중이었습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저희는 몇 차례 이동을 하며 적당한 곳에 진지를 구성했습니다. 이동하는 중에 돌맹이들을 주웠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중공군의 동태를 살피는 데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저희가 진지를 파고 숨 죽이며 적의 동태를 살피는데, 너무 어두워 10미터 전방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중공군이 가까이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저희는 돌맹이를 던졌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까 중공군을 확인하기 위해 돌맹이를 던지면 중공군이 수류탄인 줄 알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면 중공군이 가까이 있는 것을 알게 되는 거죠.

 

▲ 마량산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조셉을 언덕 아래로 운반하는 것을 도운 두 명의 중공군 포로들이 짚차에 앉아 있다. ©Joseph Vezgoff     

 

▲ 조셉이 한국으로 오기 전 일본에서 촬영한 사진.©Joseph Vezgoff  


A중대나 D중대에 비해 다행히 저희는 아주 치열한 전투는 치르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504 고지를 탈환하는 임무를 맡은 D중대는 희생이 많았습니다. 또 앞쪽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던 A중대도 중공군과 맞닥트려 치열한 전투를 했습니다. 대신 저희는 D중대나 A중대에 병력을 지원해 주었습니다.

 

그래도 전쟁터라 총알이 날라다니고 옆에서 포탄이 터지고 무섭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 저는 그때 병장 계급이었는데 9명의 분대원을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저희 C 중대는 부상자들을 호송하고 다른 중대에 탄약과 장비들을 보충하는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러면서 저희 중대는 방어선을 유지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23일 밤새 빗발치는 총탄과 포탄 소리를 들으며 살아남았다는 것이 정말 행운이었습니다. 저희 C중대는 그 때 막바지에 도망가는 중공군 포로들을 많이 생포했습니다.”

 

조셉 옹은 가평전투에서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강조했다. 다섯 배나 많은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꽹과리를 두들기며 공격해 올 때 정말 무서웠을 것이다. 아마도 기도가 저절로 나오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그렇게 가평전투에서 승리한 3대대는 그해 10월에 호주군이 수행했던 또 하나의 탁월했던 전투인 마령산 전투를 치르게 된다.

 

조셉 옹은 가평전투뿐만 아니라 마량산 전투에도 참전했다. 호주군 가운데 가평전투와 마량산전투 두 전투를 다 참전한 군인은 많지 않다. 계속해서 마량산전투에 대해 들어보자.

 

마량산 전투에도 참전하다

 

“마량산 전투는 그해 10월경이었던 걸로 기억됩니다. 저희 왕립 호주연대 3대대는 중부전선 휴전선 부근 전곡지대에서 10km북쪽 마량산을 공격하는 임무를 하달 받았습니다. 그때 저희 3대대는 마량산 고지 중앙을 맡아 공격했고, 영국군은 좌측을 맡아 공격했습니다. 저희가 중앙 정면을 맡아 더 위험하다고 볼 수 있죠. 마량산은 높고 험준한 산입니다. 그때도 저희 C중대는 예비중대였지만 나중에는 D중대를 앞질러 마량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때 저희 C중대는 마량산고지를 뺏기 위해 희생이 많았습니다.

 

저희 중대장도 부상을 당했고 저희 중대원 대다수가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때 저는 부상자들을 적의 폭격으로부터 피신시키는 일을 수행하면서, 저도 그때 다리에 부상을 입었습니다.

 

중공군은 후퇴하면서 박격포를 쏘아댔는데 그 박격포에 많은 저희 중대원들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저는 그때 MA SH(Mobile Army Surgical Hospital, 이동식 야전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다가 일본으로 후송되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에 있는 병원에서 재활치료를 받다가 1951년 12월에 호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저는 1950년 10월부터 1951년 10월까지 한국전쟁에 참전했습니다.”

 

▲ 가평 프로젝트 다큐멘터리 팀은 조셉 옹 가족과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모든 일정을 마감했다.     © 크리스찬리뷰

 

올해 93세인 조셉 옹은 휠체어를 의지하지는 않지만 걷는 것도 불편하고 청력과 시력 모두 약해져 조셉 옹을 모시고 근처 불라이 해변가를 걸으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테너 김재우 씨가 그의 멋진 목소리로 조셉 옹에 고마움을 표시하고 가족을 위로하기 위해 즉석에서 오페라곡 ‘금단의 노래’(Música Proibita)를 열창했다. 그의 노래를 듣고 부인 트리쉬 씨와 조셉 옹은 내심 흐믓한 듯 감사의 표시를 했고 답례로 조셉 옹은 자신의 작품 한 점을 마음껏 골라 가지라고 선심을 베풀었다.

 

에필로그

 

조셉 옹은 2002년, 50년 만에 한국을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 바로 한국정부가 한국전쟁 정전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마련한 행사에 초청을 받아 30여 명의 한국전쟁 참전 호주 베테랑들과 함께 한국을 방문한 것이다. 한국을 방문해 눈부신 한국의 발전상을 보았고, DMZ을 방문했다. 이때 만감이 교차했다고 한다.

 

조셉 옹은 한국에서의 경험이 그의 인생에 중요한 경험이 되었고 이때 얻은 자신감은 그의 남은 인생을 개발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실제 그는 전역한 후 다양한 비즈니스 컨설턴트로 직장생활을 하다가 은퇴한 후 미술에 심취하여 울릉공 전통 예술협회의 회장직도 오랫동안 수행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그린 작품들로 몇 차례 작품 전시회도 가졌다.

 

촬영과 인터뷰를 마친 가평 프로젝트 다큐 팀은 불라이 비치에 앉아 멀리 보이는 울릉공 바다를 감상했다. 비록 조셉 옹 가족들과 함께 오지 못해 아쉬었지만 그 분들이 보여준 호스피탈리티(Hospitality, 환대)에 감사하는 마음이 일었다.

 

특히 오늘 조셉 옹을 인터뷰하는 동안 한국전쟁에 참전한 호주 용사들의 희생과 헌신에 대해 다시 한번 감사의 생각을 갖는 시간이 되었다. 이분들의 희생과 헌신이 없었다면 자유 대한민국의 앞날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니 다시 한 번 참전용사들의 수고와 희생에 머리를 숙이게 된다.〠

 

글/주경식|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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