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론(敎會論) VII

주경식/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2/03/28 [15:04]

참된 교회의 표지

 

한국만큼 교회가 많은 곳도 없을 것이다. 심지어는 한 빌딩 안에 무려 네 개의 교회 간판이 걸려 있다는 기사를 본 기억도 있다. 물론 서로 다른 교단의 교회라고 위로를 해보지만 그래도 개운치는 않다.

 

또한 많은 목회자들이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외친다. 초대교회가 이상적인 교회상을 보여 준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부분적으로는 맞지만 초대교회가 완전한 교회상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초대교회가 신약성경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서는 훌륭한 교회였을지 모르지만, 초대 교회의 원리와 형식을 현대교회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교회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교회같이 보이긴 하지만 교회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교회는 무엇 때문일까?

 

사실 초대교회에서는 참된 교회에 대해서 그리 큰 논란거리가 없었다. 그 교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부활을 직접 경험한 사도(제자)들이 있었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인정하는 공동체가 있었고 교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이단들은 출교를 시키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교개혁시기에는 심각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참된 교회를 어떻게 식별할 수 있을까?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를 참된 교회로 볼 수 있는가? 이와 같은 질문에 답하기 위해 종교개혁자들은 참된 교회의 표지가 무엇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개혁파 신학자들 안에서도 교회의 표지에 대해서는 이견들이 있었다. 베자, 알스테드, 아메시우스, 하이다누스, 마레시우스 등의 개혁자들은 오직 하나의 표지, 즉 ‘순수한 복음적인 교리의 전파’만을 개혁교회의 표지로 강조했다. 한편 칼빈, 블링거, 잔키우스, 유니우스, 고마루스, 마스트리히트, 아마르크 등은 ‘말씀의 순수한 전파’와 ‘성례의 바른 시행’을 표지로 주장했다.

 

다행스럽게도 참된 교회의 표식을 결정함에 있어 칼빈과 루터는 의견을 같이 한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순전하게 선포되고 들려지며, 성례가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대로 집행되는 곳에는 의심할 여지도 없이 하나님의 교회가 존재한다.”라고 정의한다. 루터교의 신앙고백서라 불리는 아우구스부르그 고백서(Augsburg confession)를 보면 “교회는 복음을 올바르게 가르치고 복음에 따라 성례를 올바르게 시행하는 성도들의 모임”이라고 정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와 달리 로마 가톨릭의 입장은 베드로와 사도들에게서 전승된 유형의 교회가 곧 참된 교회의 표식이라고 한다.

 

교회의 교회됨

 

교회라고 다 똑같은 교회일까? 이 땅에 존재하는 교회를 다 참된 교회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같은 고민은 지금이나 종교개혁시대에나 동일한 고민거리이다. 원래 “참된 교회의 표지”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교회를 구분하여 정의하게 된 배경에는 종교개혁시기의 역사적 배경에 기인한다.

 

당시 부패한 로마 가톨릭교회는 지나친 교황과 사제중심의 교회체제였다. 교황과 사제들의 권력은 하늘을 찌를듯 하였고, 심지어 사제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미사(예배)도 일반 백성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어려운 라틴어로 진행할 정도였다. 어디 그뿐인가? 화려한 예배당을 짓는데 재정이 부족하자 급기야는 면벌부까지 팔아 교회재정을 충당하였다.

 

이와 같은 교회의 타락과 부패는 종교개혁에 불을 붙였고 많은 개혁가들이 당시 로마교회의 횡포에 맞서 싸우다 순교들을 하였다. 결국 종교 개혁가들이 주장하는 개혁운동을 로마교회가 수용하지 않게 되자 “교회의 표지”는 개신교를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구분 짓게 하는 개신교회의 표지가 되어 버리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개혁가들이 바라본 로마 가톨릭교회의 미사는 어떠했을까? 칼빈은 그의 “교회 개혁의 필요성” 이라는 글을 통하여 로마교회의 우상숭배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첫째 빛보다 어두움을 더욱 사랑하는 자들은(로마 가톨릭은) 우리가 그들의 총체적인 우상 숭배를 지적하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 예배한다면, 그분의 이름으로 거짓된 예배가 시행된다면, 성자(聖者)의 형상을 향하여 기도한다면, 죽은 자의 뼈에 신적 영예를 표한다면, 그리고 이와 같은 일들이 예배에서 일어난다면 그것은 에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장 혐오하는 짓입니다.

 

칼빈이 지적한 대로 당시 로마교회의 예배는 말씀을 바로 전하는 설교보다는 눈에 보이는 예전이나 성상숭배와 성물숭배 등으로 사람들을 미혹하여 무지하게 만들고 미신적인 종교로 전락된 예배였다.

 

당시 로마 가톨릭 사제들이 성경에 무지하고 세속적인 탐욕에 눈이 멀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라틴어로 집행된 미사는 일반 백성들이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는 예배가 아니었다. 그래서 종교개혁가들은 말씀의 참된 전파를 개혁교회의 첫 번째 표지로 두게 된 것이다.

 

개혁교회의 표지: 말씀의 참된 전파

 

하지만 지금의 개신교회가 말씀을 참되게 전파하는 교회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매주 교회에서 선포되는 말씀은 순수한 복음보다는 목회자의 위장된 복음으로 장사되는 경우가 많다. 소위 ‘성공신화’와 ‘축복강좌’가 그것이다. 거짓된 확신과 긍정의 신념, 진정으로 죄의 용서를 갈구하지 않는 자들에게 값싼 은혜들을 장사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이클 호튼은 현대의 교회를 “세상의 포로된 교회”라고 역설한다.

 

현대의 개신교회는 중세 로마교회의 모습을 모양만 다른 채 답습해가고 있는 부분이 많이 있는 것이다. 예배도 순전한 말씀의 선포보다는 비정상적인 영적체험과 감정을 고조시키기 위해 찬양을 강조하는 예배로 흘러 가고 있다.

 

참된 교회를 분별해 주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르게 전파되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왜냐하면 교회는 말씀의 기초 위에 세워진 동시에 말씀을 수호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말씀이란 ‘값싼 은혜’ 복음이나 성공한 자들의 ‘간증 스토리’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예화를 총동원해서 그저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성경의 이해증진을 위한 단순한 강의만 되어서도 안 된다. 말 그대로 온전한 복음,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은혜와 이를 기초로 하나님의 백성의 삶이 어떠한가를 선포해야 한다.〠 (계속)

 

▲ 주경식 

주경식|본지 편집국장, 호주비전국제대학 Director, ACC(호주기독교대학) /ACT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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