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양원 목사에게 깊은 감화를 준 맥켄지 선교사

<매 씨 가족의 한국 소풍 이야기 특별전시회에 부쳐>

글|김환기 사진|권순형 | 입력 : 2022/04/25 [15:04]
▲ 시드니한국문화원은 지난 4월 8일부터 매 씨 가족의 한국 소풍 이야기 특별전시회를 7월 8일까지 3개월간 개최한다. ©KCCAu     

 

▲ 개막식에서 축사를 전하는 제임스 최 전 호주 대사     © 크리스찬리뷰


시드니한국문화원에서는 ‘매 씨 가족의 한국 소풍 이야기’란 주제로 특별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전시회는 4월 8일부터 7월 8일까지 3개월간 진행된다.

 

한국 최초의 한센인 요양 시설에서 29년간 헌신한 제임스 노블 맥켄지(Rev. James Novel Mackenzie, 한국명 매견시, 1865-1956) 선교사와 나환자 자녀들의 어머니 메리 켈리(1880-1964) 선교사 그리고 한국 전쟁 중 부산에서 일신부인병원을 설립해 대를 이어 의료 봉사 활동을 해 온 두 딸 헬렌 (1913-2009)과 케서린(1915-2005)에 관한 사진 전시회이다.

 

지난 4월 8일 전시회 개막식이 있는 날이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조금 일찍 도착하여 전시장을 돌아보았다. 한국문화원 김지희 원장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한국과 호주는 1961년 수교를 맺었다. 한호 수교 60주년 기념사업으로 작년에 전시회를 열려고 하였으나, 코로나 사태로 인해 연기되어 올해 열게 되었다.

 

호주 최초의 한국 선교사 조셉 헨리 데이비스

 

1889년 10월 2일 조셉 헨리 데이비스 목사(Rev. Joseph Henry Davies)가 그의 누이 메리와 함께 한국에 선교사로 입국함으로써 호주장로교회의 첫 한국 선교사가 되었고 한국 선교의 문을 열었다.

 

▲ 전시된 사진들을 관심있게 지켜보는 관람객들. ©KCCAU     

 

그러나 데이비스는 한국에 온 지 6개월 후인 1890년 4월 5일, 부활절을 하루 앞둔 토요일 부산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호주장로교회로 하여금 한국 선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어 주었고, 그의 희생적인 헌신과 죽음의 결과로 호주의 한국 선교가 유지, 계승, 발전되어 지금까지 약 130여 명의 호주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사역했다.

 

부산과 경남 지역은 호주장로교에 의하여 복음화되었다. 초기 한국 선교지 분할 정책에 의하여, 1909년에 미국북장로회와 호주장로회 사이에 협정이 이루어져 미국 북장로회는 부산과 경남 지역을 호주장로회에 양도하고 떠났다. 이후 호주장로회는 부산과 경남 지역을 무대로 선교 활동을 하게 되었다.

 

한국 한센인의 친구, 제임스 노블 맥켄지와 메리 켈리

 

 

▲ 매견시 선교사가 한센환자들을 돌보며 목회했던 상애교회 입구. 재건축으로 인해 옛 모습을 찾을 길이 없다.     © 크리스찬리뷰

 

▲ 창대교회 사무실에 걸려있는 사진들     © 크리스찬리뷰


‘한국 나환자들의 친구’, 제임스 노블 매켄지 선교사는 1910년 2월 호주 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들어와 한국 최초의 한센인 요양시설인 ‘상애원’에서 29년간 사역을 하다가 1938년 73세 때 은퇴 후 호주로 귀국했다.

 

‘한국 나환자 자녀들의 어머니’, 부인 메리 켈리(Miss Mary J. Kelly, 매부인, 1910-1939)는 맥켄지 선교사 보다 5년 앞선 1905년에 입국하여 부산과 진주에서 사역하다가 1912년 맥켄지를 만나 결혼했다.

 

슬하에는 헬렌(매혜란), 캐서린(매혜영), 루시, 실라 등 네 딸을 두었다. 아들 짐은 두 살 때 디프테리아로 한국에서 사망하였다.

 

1909년 10월 영국 구라선교회가 부산 감만동에 한센 병원인 상애원을 창설하였다. 한센인들을 돌보기 위해 시작된 병원은 선교의 목적으로 시작하여 병원 교회를 ‘상애원교회’라고 했다.

 

 

▲ 상애교회는 정관 신도시로 이전하고 교회명을 창대교회로 변경한 후 2004년 4월 입당에배를 드렸다. 오른쪽 건물은 낙원대 실버타운(65실)이다.     © 크리스찬리뷰


1911년 호주장로교 선교사인 맥켄지 선교사가 원장으로 부임하여 28년간 운영했다. 맥켄지 선교사는 상애원 병원장을 전담하면서 상애교회를 담임하며 선교사업에 주력했다. 그는 부산, 경남 지역 복음화와 의료 선교에 앞장서며 열정적인 선교의 본을 보여 당시 650여 명의 성도가 있었다. 한국 사역을 마치고, 1938년 호주로 귀국하여 1940년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 총회장에 당선되었으며, 1956년 7월 2일 92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맥켄지는 본래 정식 의사는 아니었다. 짧은 기간 의료 교육을 받은 일은 있었으나 나환자들을 위해 일하면서 간간이 필요한 의학 공부하였으며, 1931년에 시험을 거쳐 의사 면허를 받았다. 맥켄지 선교사는 사망진단서를 직접 쓸 수 있었다. 맥켄지는 나환자들을 위한 헌신적인 노력으로 믿는 자의 수가 많아졌다.

 

1926년에는 수용소 내에 새로운 교회당이 신축되었고, 1931년에는 수용자 수가 580명에 이르렀는데 이 당시 세례 신자가 234명이었다.

 

 

1941년, 일제 총독부는 상애원을 소록도로 이전할 것을 명령하였다. 특별히 갈 곳을 찾지 못한 한센인들은 소록도로 갈 수밖에 없었고, 이후 상애원은 강제 철거되었다. 1945년 해방 후 부산 영도구 동삼동에 ‘박애원 교회’로 재건하였다가 1946년 용호동 소재지로 이주하면서 ‘상애원교회’로 복명하였다. 부산시 개발 계획으로 인하여 교회는 이전을 해야 했다. 2004년 교회는 현재의 부산시 기장군 정관면 용수리로 이전하여 입당예배를 드렸다.

 

한편 1986년 ‘상애원교회’에서 ‘상애교회’로 개명하고, 2006년 지금의 ‘창대교회’로 다시 개명했다. 교회를 건축하면서 실버타운도 함께 지어 65세대 실버타운 원롬 아파트가 있다.

 

2010년 10월 필자는 부산 용호동과 창대교회를 방문했다. 아름다운 오륙도가 보이는 용호동은 호화 아파트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오륙도는 썰물 때는 5도가 되고, 밀물 때는 6도가 돼서 ‘오륙도’라고 한다. 아직도 눈에 선하다. 창대교회에서 만난 사람들의 얼굴은 한결 같이 감사의 미소가 가득했다.

 

맥켄지 선교사와 손양원 목사

 

▲ 사랑의 원자탄으로 알려진 손양원 목사     

 

▲ 창원공원묘원(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에 있는 순직 호주 선교사 묘원에 손영원 목사 순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 크리스찬리뷰


상애원은 지역 사회에 사랑의 본이 됐다. 1929년에는 사랑의 원자탄으로 알려진 손양원 목사가 전도사로 부임하여 한센인을 돌보는 사역에 동참했다. 그는 호주 선교부가 운영하던 진주에 있던 ‘경남성경학원’을 졸업하고 맥켄지 선교사 밑에서 사역하게 되었다.

 

그는 부산 감만동에 있던 나환자촌인 ‘상애원’과 부산 용호동에 세워진 ‘나환자의 집’ 등지를 돌며 맥켄지 선교사를 도왔다. 당시 감만동교회는 교인 6백여 명 대부분이 한센인이었다. 손양원 목사는 한센인을 향한 맥켄지 선교사에게 희생과 사랑 그리고 헌신을 보고 배우며 깨달았을 것이다.

 

손양원 목사의 원래 이름은 ‘손연준’이다. 손 목사는 ‘애양원’의 제2대 담임교역자로 부임하면서 이름을 ‘손양원’으로 개명했다. 애양원은 ‘사랑으로 양육한다’는 뜻이다. 한국 최초의 나병원인 광주나병원은 1925년 현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1번지에 터를 마련하고 1928년 한센병자 600여 명이 옮겨와 지금의 애양원을 이루게 되었다. 이어 1936년 여수 애양원으로 명칭을 바꾸면서 여수 애양원 시대가 시작되었다.

 

오래 전 필자는 ‘여수애양원’에 갔었다. 비도 오지 않는데 사람들이 장화를 신고 다니는 것을 보았다. 마중 나온 장로님에게 “왜 장화를 신고 다니느냐”고 물었다. “나병이 심한 사람들은 돌 뿌리에 부딪치거나, 나무에 걸려서 피가 흘러도 느끼지 못합니다.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장화를 신고 다니는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는 1938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였지만 신사참배 반대자라는 이유로 목사 안수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1939년 애양원교회가 그를 담임교역자로 청빙하였다. 1940년 신사참배 반대를 이유로 투옥되어 목회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해방 후 출옥하여 손양원 목사는 다시 애양원교회에 부임하고, 1946년 2월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러나 1948년 10월 21일 여순사건으로 두 아들이 ‘안재선’을 중심으로 한 좌익 학생들에게 순교를 당하는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안재선을 용서하고 양아들로 삼았다. 이를 기록한 ‘사랑의 원자탄’ 책자가 나왔다.

 

▲ 손양원 목사 생가 앞에서 손 목사의 양손자 안경선 목사와 본지 권순형 발행인 (왼쪽)     © 크리스찬리뷰

 

6·25 전쟁 중 손양원 목사도 공산군에게 끌려가 1950년 9월 27일 총살당하며 순교자가 되었다. 한센병이 퇴치되면서 애양병원은 ‘애양원역사박물관’으로 바뀌었다. 애양원은 역사의 증인이 되어 이곳을 찾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감화를 주고 있다.

 

헬렌와 케서린 맥켄지

 

▲ 2달 된 캐서린을 안고 있는 메리 켈리와 캐서린의 언니 헬렌(오른쪽).     © 크리스찬리뷰

 

부산에서 태어난 두 딸 헬렌(Helen P. Mackenzie, 매혜란, 1913~2009)과 캐서린(Catherine M. Mackenzie, 매혜영, 1915~2005)은 부모님의 뒤를 이어 부산에서 의료선교사로 사역했으며, 전쟁 속 힘겹게 사는 여성과 아이들을 위해 1952년 부산에 ‘일신부인병원’(현 일신기독병원)을 건립해 20년간 헌신적으로 봉사했다.

 

헬렌은 ‘한국 모자 보건의 영웅’이란 닉네임을 가지고 있다. 헬렌의 미들 네임은 ‘진주’(Pearl)이다. 맥켄지 선교사가 부인인 켈리 선교사를 진주에서 만난 것을 기념해서 ‘진주’(Pearl)란 이름을 넣었다.

 

캐서린은 ‘한국 간호조산사 교육의 선구자’이다. 대학을 졸업할 때 조산사 교육을 받았던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 일신부인병원을 설립한 산부인과 전문의 매혜란 선교사의 진료 현장.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4월 6일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 크리스찬리뷰

 

▲ 어린 시절 헬렌     © 크리스찬리뷰


헬렌과 둘째 딸 캐서린은, 부산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평양 외국인학교에서 고등학교와 호주에서 대학을 마치고 의사와 간호사가 되어 1952년 부산에 의료선교사로 돌아왔다. 1952년 당시는 한국전쟁 상황이었다. 그들 자매는 처음에는 부산진교회의 유치부실을 빌려서의료사역을 시작했다.

 

이것이 나중에는 부산에서 유명한 ‘일신부인병원’이 된다. 이들은 6·25사변이 일어나 우리 민족이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있을 때 헌신적으로 의료사업을 펼쳤다. 이 병원은 부산의 산부인과병원으로 자리를 잡아, 1982년 11월 ‘일신기독병원’으로 승격했으며 지금은 320병상의 종합병원이 되었다.

 

1972년, 헬렌과 캐서린은 병원 설립 20주년을 맞이하여 아무런 조건 없이 모든 운영권을 한국인에게 일임하였다. 그들은 자신들 없이도 스스로 병원을 운영할 수 있도록 헬렌은 4년간을 더 사역을 하다 1976년 귀국했고, 그 후 2년 후에 캐서린은 1978년에 귀국했다. 호주로 귀국할 때도 조그만 가방 하나가 20여 년 한국 생활을 정리하는 짐의 전부였다고 한다.

 

▲ 의사 언니 헬렌과 일신부인병원을 설립한 간호사 캐서린. 그는 ‘한국 간호 조산사 교육의 선구자’로 불리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 헬렌이 동생 루시를 안고 앉아 있고, 캐서린이 옆에 서있다.     © 크리스찬리뷰


헬렌과 캐서린 선교사는 한국에서의 사역을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늘 한결같은 답을 했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가장을 잃고 눈물을 흘리던 산모들이 생각납니다. 그들이 아기 잘 낳고 안 죽고 살아나니 얼마나 감사했는지요. 저는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봉사와 박애의 정신을 전하며 만족감을 얻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답니다."

 

시드니한국문화원에서 만난 사람들

 

사진을 감상하고 있던 중 옆에 그곳의 음식을 담당하는 주방장이 사진을 보며 감탄사를 연발하는 것이다.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이렇게 열악한 나라에 와서 봉사할 생각을 했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크리스찬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Love of God'에 대하여 설명을 했다. 인간적인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왔을 것이라고 했다. 그때야 조금 이해하는 것 같았다.

 

맥켄지 선교사의 셋째 딸은 ‘루시’이다. 루시의 아들이자 헬렌과 캐서린의 조카인 ‘챨스 레인’(Charles Lane)이 가족 대표로 인사말을 전했다. 맥켄지 가족에 대하여 한국에서 잊지 않고 이렇게 전시회를 열어 준 것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했다.

 

그는 오늘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멀리 퍼스에서 왔다. 그와 대화 중에 “어머니 장례식에 참석했었다”고 하자, 그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감사하다고 했다. 루시는 2014년 8월 21일 하나님을 부르심을 받았다. 천국환송예배가 9월 5일 오전 11시, 멜번에 있는 딥딘(Deepden) 교회에서 열렸다. 나는 그날 그곳에서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 본지와 인터뷰를 마친 후 기념촬영한 맥켄지 선교사의 셋쩨 딸 루시(오른쪽)와 넷째 딸 실라(2012. 7.)     © 크리스찬리뷰

 

▲ 바바라 마틴 선교사와 본지 영문편집위원 김환기 사관.     © 크리스찬리뷰


멜번에서 온 바바라 마틴(Dr. Barbar Martin, 한국명 민보은)도 만났다. 그녀와 몇 번 만나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나는 전시된 사진을 보다가 궁금한 점이 있어 그녀에게 물었다. “헬렌은 1976년에 귀국을 했고, 캐서린은 1978년에 귀국을 했습니다. 왜 같이 귀국하지 않고 따로 따로 귀국했나요?”

 

“헬렌이 캐서린보다 2살이 많습니다. 은퇴 년도가 달라서 따로 귀국한 것입니다.”

 

바바라 마틴과는 호주 선교 110주년 기념행사 때에도 만났다. 오래전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찰스 그린 중령의 부인인 올윈 여사께서 시드니에 살다가 딸이 살고 있는 멜번 양로원으로 이사를 갔다. 그녀에게 복음은 전했지만 믿음에 확신이 없는 것 같아 바바라에게 연락을 하여 방문해 줄 것을 부탁했었다. 바바라는 몇 번 올윈 여사를 찾아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했다.

 

▲ 일신기독병원에 있는 맥켄지 선교사 기념비 앞에서 질녀 조지아 레이(Georgia Ray씨가 민보은 선교사와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2010. 10)     © 크리스찬리뷰

 

1964년 바바라는 한국에 봉사활동으로 일 년만 있으려고 왔다가 32년 동안 선교사로 사역을 했다. 바바라는 1957년 멜번 의대를 졸업했고, 영국에서 산부인과 전문의 시험에 합격했다. 그 즈음에 ‘호주장로교선교회’의 부탁을 받고, 1964년에 안식년을 떠나는 ‘헬렌 맥켄지’의 대리의사로 한국 땅을 밟게 되었다.

 

1965년 헬렌이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후에도 바바라는 계속 일신병원에서 사역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우연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하나님의 섭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그는 간증했다.

 

1976년 헬렌 맥켄지 의사가 호주로 귀국한 이후 바바라가 맡은 주요 책임은 레지던트 의사들을 훈련시키는 것이었고, 레지던트들이 협회에 논문을 발표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녀는 1978년 자신이 하는 일 외에도 의료부원장으로서 행정적인 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녀는 대외적으로도 여러 활동을 했다.

 

청주의료센터에서 오랫동안 이사로 섬겼고, 1987년 양지재활센터를 건축할 때 이사회에서 일하면서 많은 지원을 했다. 그녀는 1985년 10월 의료 공적을 치하하는 대한적십자 박애상을 받았고, 1993년 12월 부산의 명예시민이 되었다. 그녀는 1995년 11월, 32년간의 선교사역을 마치고 호주로 귀국하여, 1996년부터 2004년까지 뉴카슬에서 말기완화치료 분야에서 일했고, 그 후 멜번의 노던 병원의 말기완화치료 자문으로 일했다.

 

나가면서

 

이제 맥켄지 가족은 한국에 없다. 하지만 그들이 남긴 믿음의 유산은 지금도 이 땅 어디에선가 열매를 맺고, 또 하나의 열매를 기다리고 있다. 전시관 마지막 벽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다.

 

“Journey is still not over" (끝나지 않은 소풍)

 

전시회 개막식 날 누군가 이런 글을 남겼다.

 

“왜 이 백인 가정은 대한민국 부산까지 소풍으로 갔어야 했는가? 부산-멜번의 험하고 먼 길을 마친 후에야 그 이유를 깨달았을까? 타지에서 아이를 키우는 엄마, 아빠 그리고 선교사라는 무거운 직책. 사명감에 타향에서의 시간은 무심히 흘러갔으리라.

 

▲ 매 씨 가족의 한국 소풍 이야기 전시장 마지막 벽에 ‘끝나지 않은 소풍’이라고 쓰여있다.©KCCAU    

 

문둥병 환우들을 돌보는 일이라는 것이 결코 만만한 일은 아니었으리라. 감염의 위험을 무릅쓰고 사회로부터의 격리를 단절시키기 위해서 노력한 그들에게서, 그 수고 가운데 문동병자를 고친 예수를 떠올리기는 매우 자연스럽다. 문드러지는 손을 잡아주고 피와 고름이 흥건히 젖은 옷가지를 챙겨서 주는 예수의 ‘구원’-‘치료’가 이 백인 가정을 통해 한국의 한 도시에 성육하셨으리라.”〠

 

김환기|본지 영문편집위원 권순형 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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