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와 사회과학 : 갈등의 관계일까, 공존의 관계일까?

한길수/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2/05/30 [11:15]

들어가는 말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지 신앙생활을 잘 하다가 대학에 진학하여 인문학·사회과학을 공부하면서 신앙과 교회를 잠시 또는 오래도록 떠나는 경우를 우리 주변에서 종종 볼 수 있다. 그들은 인문학·사회과학에 접하면서 그들의 세계관과 종교관은 어떤 위기를 겪게 되는 것일까?

 

단순히 말하자면 그들은 많은 강의와 책을 통하여 얻는 지식을 통하여 새로이 정립된 세계관과 오랫동안 지녀온 종교관이 마찰을 일으키면서 양자택일을 해야한다는 위기에 도달하면서 자신의 종교를 “내려놓음”으로써 그 마찰을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그러한 마찰은 불가피 한 것일까? 기독신앙과 인문학·사회과학이 공존하며 상호 보완의 관계를 이룰 수는 없을까?

 

먼저 크리스찬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임을 인정하고 (잠 9:10),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고 (창 1:1), 하나님의 창조와 온 우주를 위한 보살핌과 관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이는 구약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 재림, 그리고 새 예루살렘의 건설에 대한 신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역사가 때로는 사람들의 손에 의하여 휘둘리는 것 같아도, 궁극적으로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믿는다.

 

세상에는 인간이 있고, 인간이 모여서 사회를 만들고, 인간과 사회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자연이라는 물리적 공간이 필요하다. 인간에 대한 이해와 인간답게 살기위해서 만들어진 학문이 인문학이고, 사회의 속성과 변화의 이해를 위한 것이 사회과학, 그리고 자연의 이해와 이용을 위한 것이 자연과학이다.

 

이 글을 통해서 나누고 싶은 것은,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접근에 관한 것인데, 이것은 늘 논쟁의 여지가 있다. 굳이 필자의 생각만이 옳다는 도그마틱 한 접근은 위험한 것임을 밝힌다. 필자의 생각은 단지 다양한 의견 중의 하나일 뿐이다. 필자는 기독 사회과학도로서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기독 신앙인 또는 사회과학을 공부하고 그 지식을 바탕으로 사회에 봉사하는 직장인, 그리고 사회과학의 가치에 대하여 고민하는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이 글을 쓴다. 이 같은 고민이 내 마음의 중심을 오래도록 차지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글은 필자의 자전적인 내용을 담는 글이기도 하다.

 

계속되는 창조의 일상

 

나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산책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지으신 대지를 누리며, 오늘 하루를 더해주신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감사하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에덴동산은 아니지만 내가 숨쉬고 생활하는 곳에서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지각하며 하나님이 주신 자연을 느낄 수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내가 이 땅에서 하나님께 감사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곤 한다.

 

작년 7월경 고향을 그리는 마음으로, 대추나무 한 그루를 주문했는데 60cm가량의 키에 젓가락처럼 가냘픈 대추나무가, 흙이 모두 털려 나간 채로 배달용 원통에 담겨져 배달이 되었는데, 이것을 심어 놓고 이것이 살 것인지 죽을 것인지 노심초사하였다.

 

다른 과일나무들은 벌써 푸른 싹을 티우고 꽃을 피웠는데, 이 대추나무는 겨울잠이 길어서 잠을 깨우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그런데, 9월이 오고, 봄이 되니까 기적과 같이 희미하게 푸른 싹을 티우며 그 생명체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하나님의 창조,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음에 놀랐다. 1년이 지나면서 나무의 키는 두 배로 커가면서 많은 꽃을 피웠지만 ‘과수원지기’의 부족함 때문인지 꽃은 모두 떨어졌고, 첫 해부터 3-4개의 대추 맛이라도 보려는 나의 간절함은 떨어진 꽃잎처럼 사그러졌다.

 

하지만 내년에는 꼭 대추 맛을 보려는 희망을 가져본다. 지극히 단순한 일상의 반복이지만 이 가운데, 그리고 거대한 우주를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란 사실을 전제하면서 사회과학이 가능하다는 것을 명시해 두자는 것이다. 산책을 하고 아침을 먹고나면 나의 일과가 시작된다.

 

신앙과 사회과학의 동행?

 

먼저, 성경과 학문의 관계에 대한 고찰이 왜 필요한가? 학자로서 연구와 강의를 하면서 나는 내 마음에 담아야 하는 두 가지 원칙들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원칙, 또 하나는 사회의 존재와 질서를 위한 원칙이다. 예를 들면 오래 전에 교회의 성장을 연구하면서 느낀 마음속의 불편함이 있었다.

 

갈등과 이권 다툼으로 가득한 교회의 문제점을 학구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내 마음에 큰 부담이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는 무리들이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불편했던 이유를 단적으로 말하자면, 사회과학이 조명할 수 있는 연구 영역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해서 내 머릿속에 정리가 되지 않았던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나는 ‘역사비평’에 투고했던 관련 논문을 철회하기도 하였다.

 

신앙인에게 교회라는 조직체는 그리스도께서 선별하여 불러주신 그리스도의 ‘신부’들이 모여 있는 거룩한 단체이다. 하지만 종교사회학자가 보면, 성도들과 교인들이 만나서 성경에 관하여, 때로는 이 세상의 여러 가지 일들에 관하여 대화하고 친목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심지어 교회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비둘기를 파는 사람, 제사에 필요한 동물을 파는 사람, 투전놀이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조직체이기 때문이다. 바람직한 일은 아니지만,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학자들은 깊이 있는 연구를 위하여 모든 일에 대해서 사실 그대로를 기술하고, 분석하는 것이 학자적 양심의 측면에서 당연한 일이다.

 

두 번째로, 이같은 배경을 고려하자면, 사회과학도이면서 기독신앙인으로 살려면 “두 가지 트랙”을 동시에 염두에 두고 고려,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편 92편을 보면 시인은 악인이 잘되고 승승장구하는 것에 의아해 한다.

 

하지만 그것은 피상적인 관찰일 뿐, 하나님께서 역사에 공의로우심으로 깊이 관여하심을 우리는 알고 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과 무관하게 하나님의 통치가 매순간 계속되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데, 여전히 수많은 사건, 사고의 많은 부분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의 사고와 하나님의 사고가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넓고 깊은 뜻을 다 이해할 수 없다. 공의와 심판의 때를 정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공의로만 다스린다면, 세상은 지금까지 존속되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내하여 주시고, 사람들은 때로 선한 경쟁을 하며, 때로는 자신들의 욕심을 위하여 분투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 사회과학이다. 과학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도 하고 더럽히기도 한다.

 

지금은 은혜의 때로써 두 가지의 법 - 하나님의 법과 세상의 법이 동시에 지배하는 시대이다. 그 둘은 때로 상치되고, 때로 공유하는 부분이 있다. 이 세상의 법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원칙에는 도저히 미칠 수 없는 하위의 법과 원칙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무시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 발붙이고 시민으로 살 수 없게 된다. 이것으로 인하여 기독 학자가 부딪히는 딜레마는 피할 수 없는 문제이다.

 

얼마 전 어느 학자가 내게 질문을 하기를, “자신이 하는 연구나 이론이 하나님의 뜻에 혹시라도 거스르지 않을까?”하는 신앙인의 순수한 의문이었다.

 

나의 대답은 이렇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바운더리 안에서 사고 하길 원한다는 각오가 있느냐?”이다. 하나님의 넓고 깊은 생각을 우리가 모두 이해하거나, 우리의 생각 속에 하나님을 가둘 수도 없을 뿐더러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기독인의 학문 활동을 제한하실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 최대한으로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하여 학문 활동을 펼쳐 나가도 될 것이라는 것이 나의 소신이다. 문제는 기독 학자들 중에도 학문 활동의 바운더리를 어디에 어떻게 정하느냐 하는 논제는, 성경을 바탕으로 한다해도 각 개인의 성경 이해와 해석에 맡겨질 수 밖에 없는데, 이 글은 내가 개인적으로 이해하는 성경의 원칙들을 나누는 것이다.

 

사회과학 연구의 대상은?

 

기독 인문학자와 사회과학자가 부딛치는 문제는 다루는 연구대상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며 그들 모두가 기독교인은 아니라는 것이 연구의 목적과 방법론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을 잊거나 저버리는 순간, 그는 이미 인문학/사회과학자가 아니라 바리새인과 같은 종교인 또는 오만한 심판자가 되어버릴 수 밖에 없다.

 

이처럼 ‘두 개 트랙’의 사고를 할 수 밖에 없는 것은내 자신이 학자로 산다는 것이 철저히 하나님의 부르심에 근거한다고 믿지만 또한 내가 수행하는 연구는 철저하게 이 땅의 원칙들에 의해 지배 받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하나님이 허락하시느냐가 관건이 된다.

 

이는 마치 예수님의 제자들이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하고자 할 때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기한이 오기 전까지는 알곡과 가라지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마태복음 13:24-30), 즉 둘 다 공존해야 함을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17:24-27에 보면 성전의 주인이 되시면서도 물고기의 입에서 동전을 가져다가 성전 출입 요금을 내도록 하신 예수님을 볼 수 있다.

 

또한 로마서 7장에 사도바울도 마음 속에 하나님의 법과 세상의 법이 공존한다는 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두 가지의 법에 의하여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겠다. 이 세상의 사회현상은 하나님의 법, 세상의 법등이 공존하고있음에는 두말할 나위가 없음은 물론이다.

 

인식론적 오류를 넘어서?

 

14세기부터 17세기까지 르네상스 기간을 거치면서, 또한 그 이후 산업화와 근대화를 경험하면서 사회과학은 급속도로 발전해왔다. 하지만 경제 발전을 이루면서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멀리하며 심지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문화의 추세가 학문 활동에도 반영이 되고 있는 것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이러한 현상은 포스트 모던 시대에 접어들면서 더욱 심화되고 있다.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되고, 다만 모든 개인의 생각들이 진리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넓고 깊은 하나님의 진리를 연구자의 머리 속에 가두거나 무시하는 이른바 “인식론적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존재나 사회현상에 대한 고찰로 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난무하는 이론에 먼저 관심을 두고 자신의 입맛에 맞는 이론을 사회 현상에 꿰어 맞춤으로 인하여 사회과학도는 그 이론에 매몰되고 지배를 받음으로 인하여, 사회현상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멀어질 수 밖에 없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과학과 더불어 사회과학도 인문학도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현대인은 어릴 적부터 이러한 학문에 바탕을 둔 교육을 받으면서 한 인간으로 성장하고 정상적인 시민으로, 직업인으로 준비되어진다.

 

이러한 학문활동은 대부분 진리와 정의, 자유를 수호한다는 이름하에 그 존재 가치를 두고 있다. 하지만 그 학문활동의 어떤 면은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의 정의를 수호하는데 사용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원하심과는 전혀 위배되는 측면도 있을 수 있다. 이 후자를 경계해야 하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수님만이 진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세상에 대부분의 사회과학자들의 머리 속에 존재하는 진리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거대한 진리의 한 부분 또는 그것에 접근하기위한 노력으로 간주될 수 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회과학자들은 하나님의 거대한 진리를 염두에 두고 학문에 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사회과학자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진리는 인간 사회에 존재하는 인간중심의 작은 진리일 것으로 이해한다. 이것을 망각하고 사람들이 만든 인문학과 사회과학이 우주 속에 존재하는 지식의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크나큰 오류에 빠질 수 있다.

 

과학의 이론은 결코 항상 완벽하다고 할 수 없다. 끊임없는 검증 과정을 거치면서 정제 되기도 하고 쓸모없는 이론으로 버려졌다가도 다시 회생하는 과정을 반복하기 마련이다. 거짓임을 증명하는 검증(falsification)의 과정을 거친다는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원칙과 말씀은 그 자체가 진리이며 검증(falsification) 과정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 말씀의 기준을 바탕으로 사회와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고 분석해야 하는지를 단언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주의적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사회와 역사를 보는 시각이 매우 다양한 이유이다

 

많은 사람들이 믿고, 원하고 따르는 보편타당한 논리나 사상이 성경적 관심에서 때로는 진리가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의 윤리나 도덕적 가치가 절대적으로 사회과학적 학문활동에 그대로 적용되는 것도 아니다. 아직은 하나님의 똘레랑스, 하나님이 기다리시고 인내하시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까지는 세상의 법이냐, 하나님의 법이냐의 양자택일을 해야 하기보다는, 두 가지를 어떻게 이해하며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것인가를 모색하는 것이, 기독인의 사회과학적인 또는 기독 사회과학자의 끊임없는 고민이 아닌가 생각된다.

 

예를 들면, 기독 학자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 분야의 연구에 종사하게 된다. 또한 그들은 대학의 임용제도에 따라서 대학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다. 즉, 학자의 활동이나 기독인들이 사회를 관찰·연구하는데는 하나님의 법의 관점과 사회/국가의 법의 관점을 분리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회과학도로 부르셨고, 그들의 달란트는 하나님의 섭리로 채워주셨음은 물론이다.

 

기독인으로서 사회과학에 종사한다는 것은, 마치 천지와 사람을 창조하시고 사람들의 행위로 인하여 사람들을 만드셨음을 후회하시면서도 하나님의 창조와 우주의 관리, 그리고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연민이 계속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 사람들을 바라보고 그들의 삶에 대하여 관심을 두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종말론을 믿기 때문에, 이 세상이 정화되고 발전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말을 눈도 깜박하지 않고 말한다. 나는 이 관점을 이해하기는 하지만, 내가 가진 성경적인 관점은 아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 세상의 문제들과 어려움을 해결하기에는 인문학·사회과학은 한계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불완전하고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나는 사회과학자로 일하고 있을까? 내가 사회를 변화 시킬 수는 없어도 사람 사는 사회의 현상에 대한 나의 이해를 더하고 때로 작은 해결을 위한 통찰력을 제언하는 것, 그리고 내가 힘 닫는 데까지 이땅에 공의와 사랑의 씨를 뿌리고 키우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소명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을 더욱 깨닫기 때문이다.

 

나가는 말

 

마지막으로 초대교회 당시에 누구 못지않은 훌륭한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사도 바울은 자신의 학문적 배경때문에 십자가의 복음이 손상될까봐 그 초등 학문을 배설물로 여기고, 투박하고 어눌한 복음전도자가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기”(고전 2:2) 때문이었다.

 

이방인 선교를 위하여 특별히 부르심을 받은 사도 바울은 무엇보다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일한 전도자이다. 독특한 것은 사도행전 14장에서 볼 수 있는 농경지역 루스드라 지역에서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자연의 현상을 통해서 즉,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였다(15절).

 

또한 사도행전 17장에서 볼 수 있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출생지인 아테네 사람들의 종교와 문화를 깊이 이해하고 접촉점을 찾아서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다.

 

인문학의 대가였지만 그것에 의해 매몰되지 않고 오히려 문화를 초월하여 하나님의 본체되신 그리스도를 빛나게 한 사도바울의 학문성과 헌신을 기억하며 글을 마친다.〠

 

▲     © 한길수

 

한길수|모나쉬대학교 교수, 커뮤니케이션·미디어 학과

https://research.monash.edu/en/persons/gil-soo-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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