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한인복지회의 도약을 꿈꾸며

글/주경식 사진/권순형 | 입력 : 2022/06/27 [11:27]

 

▲   7/2022 표지  © 크리스찬리뷰

 

▲ 호주한인복지회를 40년간 한결같은 마음으로 섬겨온 이용재 회장.     © 크리스찬리뷰


호주한인복지회(Australian Korean Welfare Association, AKWA)는 홈부쉬 웨스트에 새로이 신사옥을 구입하고 복지회관을 캠시에서 홈부쉬 웨스트로 이전했다. 한인복지회의 신사옥은 건평 300평방 미터의 이층 건물이다. 이층으로 된 건물은 일층은 100명 정도가 모일 수 있는 회관으로 사용되고 이층에는 사무실이 마련되었다.

 

그리고 지난 5월 26일(목) 저녁에는 새로 구입한 신사옥에서 복지회 관계자들과 교민들을 초청하여 호주한인복지회(이하 한인복지회) 신사옥 이전 기념의 밤 행사를 개최했다.

 

이번 한인복지회 신사옥이 구입되기까지는 이용재 회장의 30만 불 기부가 신사옥 구입의 씨드 머니가 되었고 이 회장의 두 딸들은 무이자로 20만 불을 호주 한인복지회에 빌려줌으로써 총 50만 불이 한인복지회 신사옥을 구입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호주 교민사회에서 이처럼 큰 금액을 한인 커뮤니티를 위해 기부한 사례는 흔치 않다.

 

이 회장은 1981년부터 한인복지회에 일반 회원으로 입회하여 이사, 부회장 그리고 회장으로 오늘날까지 40년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한인복지회를 섬겨왔다. 그는 한인복지회의 산 역사요 증인이라 할 수 있다.

 

지난 6월 6일 기자 일행은 한인 커뮤니티를 위해 이처럼 통 크게 큰 금액을 기부한 이용재 회장을 만났다.

 

▲ 호주한인복지회 직원들과 업무를 협의하고 있는 이용재 회장     © 크리스찬리뷰

 

유학생으로 호주 땅을 밟다

 

이용재 회장은 1979년 1월 31일 유학생으로 호주 땅을 처음 밟았다. 당시만 하더라도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한 시기여서 해외로 나오는 일이 쉽지 않은 때였다. 그러나 그는 브리즈번에 있는 켄모어 크리스찬 컬리지(Kenmore Christian College)의 초청으로 3년 풀 장학금을 받고 호주에 입국했다.

 

“나중에 호주 와서 알고 보니 켄모어 크리스찬 컬리지에서 장학금을 준 것이 아니라, 브리즈번 투움바(Toowoomba)에서 농장을 운영하는 한 장로님께서 장학금을 희사하신 것이었어요. 그렇게 켄모어 크리스찬 컬리지에서 2년을 공부하고 1981년 시드니대학교 디비니티 스쿨(Divinity School)로 학교를 옮겼습니다.

 

그때 같이 공부했던 동기로 호주연합교회의 변조은 목사님(Rev. John Brown) 아들인 마이클 브라운과 함께 공부를 했습니다. 그곳에서 논문만 남겨놓은 상태에서 설립된지 얼마되지 않은 맥콰리 대학교에 가서 문화인류학을 공부했습니다.

 

▲ 호주한인복지회 업무를 보고하는 이용재 회장 ©AKWA     

 

그 시기에 제가 한인복지회에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공부보다는 사회봉사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나중에 제가 윌리엄 국제대학교에서 문학도 공부하고 남호주 대학교에서 호주 원주민 연구 등도 했습니다만 복지회일에 더 많은 관심을 두다 보니까 나중에 해야지 하면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그는 한국에서 교수 요원으로 선발되어 전액 장학생으로 호주에 왔다. 하지만 누구나 그렇듯이 인생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는 젊은 날 한인복지회에 발을 담근 것이 평생 한인 복지회를 위해 헌신하는 일로 그의 삶을 이끈 것이다.

 

호주 한인 복지회와 함께

 

한인복지회는 1976년쯤부터 시드니에 거주하는 전문직종에 근무하는 교민 선각자들에 의해 논의되기 시작했다. 한국인의 호주 이민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노동당 당수인 고프 휘틀럼(Gough Whitlam)이 1972년 호주의 총리가 되면서 백호주의를 철폐하고 유색인이민문호를 개방하면서부터라 할 수 있다.

 

이때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한국 군인들이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호주로 이민을 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당시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등 남아메리카로 이민을 갔던 동포들도 호주로 재이민을 들어오는 숫자 또한 늘어났다.

 

이렇게 시드니에 한인 동포사회가 구성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점차 한인 이민자들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이민자들의 정착을 돕는 일들이 필요한 일로 대두되면서 한인들을 돕고자 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모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가 1979년 정식으로 한인복지회가 설립되고 초대 회장으로 우재린 박사가 봉사했다. 이때 한인 복지회에 같이 힘을 보탠 사람들은 이경재, 김석환, 이태봉 신부 등이다. 이때부터 한인복지회는 한인 이민자들의 정착서비스를 포함하여 은행 개설, 자녀들의 학교 등록, 통역, 임금 체불 중재 등 한인들의 복지증진을 위해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했다.

 

한인복지회는 바로 다음해인 1980년에 뉴사우스 웨일즈(New South Wales) 주정부로부터 자선 단체로 정식 승인을 받게 된다. 그리고 1983년에는 호주 연방 정부로부터 펀드를 받아 한인 동포 역사상 처음으로 공개 채용을 통해 2명의 한인복지회 직원을 채용했다.

 

▲ 한국의 지자체, 학교 등 많은 사회복지 관련 단체에서 호주한인복지회로 해외 연수를 오고 있다.©AKWA     

 

이용재 회장은 1981년 이경재 회장의 추천으로 호주 한인복지회에 발을 들여 놓았다. 그때 유학생 신분이었던 이용재 씨는 한인 사회의 젊은 인재였다. 영어가 필요한 한인 이민자들을 돕기 위해 영어가 비교적 자유로운 젊은 인재가 필요해 이경재 회장이 그를 추천하고 한인복지회로 이끈 것이다.

 

시드니에서 오래 사신 분들은 이름을 대면 알만한 분들이 그동안 한인복지회를 거쳐갔다.

 

“제가 지난 신사옥 이전 기념의 밤에 제1대 우제린 회장부터, 이경재 회장, 유의규 회장, 강기호 회장, 이영대회장, 김석원 목사 등 예전 한인복지회를 위해 수고하신분들을 초대한 것은 그분들의 공로와 헌신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 홈부쉬 웨스트 신사옥에 입주한 호주한인복지회. 2층의 건물 아래층은 강당과 회관으로 사용하고 이층은 사무실과 회의실로 사용하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그분들이 안계셨다면 지금의 한인복지회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1983년 연방정부로부터 펀드를 받아 최초 직원을 뽑아 근무하신 분들이 김방이 선생, 유성자 선생 등입니다. 이분들 한인사회에 얼마나 유명하신 분들입니까? 이분들이 모두 한인복지회를 거쳐 가신 분들입니다.”

 

▲ 지난해 칠순을 맞은 이 회장이 생일 축하 모임에서 인사하고 있다.©AKWA     

 

이용재 회장은 1981년에 한인복지회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리고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는 한인복지회를 위해 무급으로 봉사를 하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그는 70회 생일을 맞이했던 지난해 한인복지회를 위해 인생의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바로 사재를 털어 30만 불을 한인복지회의 발전을 위해 통 크게 기부를 한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두 딸들을 권유하여 딸들이 복지회를 위해 20만 불을 무이자로 빌려주게 했다. 총 50만 불이나 되는 거액을 한인복지회의 도약을 위해 헌사한 것이다.

 

170 만 불 신사옥 구입

 

“제가 한인복지회와 함께 한 것이 40년이 넘었습니다. 1981년 이경재 회장님의 권유로 인연을 맺었는데 벌써 40년이나 된 것입니다. 물론 제가 잠깐 복지회 임원을 떠난 적은 있었어도 언제나 한인복지회에 관심을 갖고 봉사해 왔습니다. 작년이 제가 70세가 되는 해였습니다. 70회 생일을 맞이하면서 그리고 한인복지회에 입회한지 정확히 40주년이 되는 해인데 복지회를 위해 뭔가 획기적이고 의미있는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한인복지회 여러 이사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제가 한인복지회 3차 도약을 위해 제가 먼저 헌신하자는 생각에 한인복지회 봉사활동 40주년 기념으로 30만 불을 기부하여 한인복지회 건물 구입을 위한 종잣돈으로 삼은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딸 둘도 아빠의 정신을 높이 사 자발적으로 각각 무이자 20년 상환으로 20만 불을 복지회에 대여해 주었습니다.

 

한인복지회 봉사를 오랫동안 해오면서 느꼈던 것은 우리만의 공간이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갈수록 주택 값은 천정부지로 치솟는데 지금 뭔가 하지 않으면 영영 우리 자체 건물을 갖기 어려울 수 있겠다는 위기감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모든 것이 맞아 떨어져 지금의 홈부쉬 웨스트의 건물을 구입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웨어 하우스 건물은 구입했는데 덩그러니 창고 건물이다 보니 내부 인테리어 등 공사할 것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감사하게도 많은 분들이 전기공사, 페인트, 커튼등 무료로 공사해 주시고 봉사해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현재 홈부쉬 웨스트에 있는 호주 한인복지회 건물은 2층으로 되어있다. 일층과 이층을 합쳐 총 300평방미터 크기인데 일층 150평방미터는 1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회관으로 꾸며져 있고, 이층 150평방 미터는 직원들의 사무실 및 회의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이용재 회장은 이 건물이 한인복지회의 복지센터를 넘어 동포사회의 쉼터로써의 역할과 한인 역사 자료집을 위한 공간으로도 활용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한인 복지회의 역사적인 일들

 

40년간 한인복지회에서 봉사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질문했다. 그러자 이용재 회장은 두 가지 사건을 풀어 놓는다.

 

“1994년 제가 한인복지회 부회장으로 있을 때입니다. 그때 저희 복지회는 2세들의 한글 교육에도 큰 관심을 갖고 한인커뮤니티에 봉사했었습니다. 그래서 제2 외국어로써 한국어가 HSC 시험에 시행될 때 저희가 앞장서서 입시를 앞둔 학부모들에게 한국어 시험 실라버스 설명회도 개최하고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때 제 생각에 한국 도서들이 한인 커뮤니티와 호주 카운슬에도 전시되면 한국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텐데 하는 생각이 많았습니다. 그때 제가 마침 주정부 토요학교 한국어 고교 후원회장도 맡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한국 정부와 연결되고 한국의 독지가가 나타나서 1만 7천169권이나 되는 엄청난 양의 책을 한국으로부터 기증받아 호주 연방국회 도서실 및 각 대학교, 한국어를 개설한 호주학교 그리고 시드니 한인 밀집지역 카운슬 도서관에 배포한 것입니다.

 

그때 그 책들을 분류하기 위해 전문 사서를 임시 고용하여 책을 분류하고 각 곳으로 배포하는 일을 했습니다. 다행히 제가 창고를 갖고 있어서 그 엄청난 책들을 제 창고에 보관하고 분류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한인 커뮤니티를 위해 얼마나 열심이 특심이었는지 알 수가 있는 대목이다. 굳이 이런 고생을 사서 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그저 감투만 쓰고 적당히 시간만 때우다 임기를 마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한인 2세들과 한인 커뮤니티를 위해 사서 고생을 한 것이다. 1만7천 권이 넘는 많은 양의 책을 도네이션 받는 일도 힘들지만 그 책을 호주로 입항하여 세관을 통과하고 그 책들을 분류하는 일들도 만만한 일들이 아니다.

 

▲ 이용재 회장의 가족사진. 두 딸은 한인복지회 건물을 구입하는데 아빠의 정신을 높이 사 자발적으로 무이자 20년 상환으로 20만 불을 복지회에 대여해 주었다. (왼쪽부터 큰딸 이조이, 부인 이인숙, 이용재 회장, 둘째 딸 이지니) ©이용재     

 

어디 그뿐인가? 그 책들을 연방국회 도서관을 포함 각 대학교 및 한국어 개설 호주학교와 한인 밀집 카운슬까지 배포하는 일은 더 많은 손길이 가는 일이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각 카운슬 도서관에서 한국어 책들 대여 횟수가 적으면 한국어 전시대가 없어질 수 있으니 동포들에게 한국어 책들을 빌려보라고 교회와 한인커뮤니티를 돌며 호소까지 한 것이다. 실로 대단한 열성이 아니라 할 수 없다.

 

“또 하나 자랑스런 일은 호주연방정부 이민성과 공동으로 합동 시민권 수여식을 개최한 것입니다. 2000년부터 시작했는데 2001년에는 무려 353명이 참가해 호주 역사상 단일국가로서는 최다 수여식이 되었습니다.

 

호주 시민권을 받기 위해서는 시민권 테스트를 거쳐야 했는데 시험은 어렵지 않지만 다른 조건들은 까다로웠습니다. 그런데 시민권 취득을 원하는 한인들을 모집해서 일요일에 한인회관에서 함께 시험을 치르게 하고 시민권을 수여하니까 나름 혜택이 있었습니다.

 

▲ 호주 여러 정부기관의 지원금과 한인 단체의 기부금으로 운영되는 호주한인복지회는 교민들의 복지 증진과 지역사회개발 프로그램들을 제공한다.©AKWA     

 

그리고 시험에 떨어진 사람들은 제가 따로 불러서 다시 교육하고 재시험을 치르게 해서 그날 함께 시민권을 받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한마디로 시민권 수여식을 이벤트화 한 것입니다. 그때 오리온 센터를 빌려했는데 350명이 시민권을 받다보니 그 가족들까지 합치면 1천명이 넘는 인원이 오리온센터를 가득 채웠습니다.

 

그러다 보니 연방 이민장관은 물론 연방정부, 주정부 하원의원들과 시장 카운슬 시의원들까지 다 와서 큰 행사가 되었습니다. 시민권을 받는 순간 유권자들이 되니잘 보여야 하니까 정치가들이 부르지 않아도 알아서 온 것입니다.

 

2006년까지 7년 동안 이어졌는데 그만 이민성 장관이 바뀌면서 한인들만 모아서 시민권 수여를 하는 것은 다문화 정책에 위배된다고 하면서 중지하는 바람에 끊어졌죠. 하지만 이일로 한인 커뮤니티의 위상이 높아졌고 시민권 취득을 원했던 한인들에게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기발한 아이디어였다. 호주 연방정부 이민성과 합동 시민권 수여식을 생각한 것은 기발한 아이디어가 아닐 수 없다. 혼자서 시민권 테스트를 준비하는 것이 두려웠던 교민들에게는 한인들이 함께 모여 시험도 같이 치르고, 시민권도 그날 함께 받게 된다는 것이 얼마나 용기를 주는 일이었겠는가?

 

7년이나 이어져 왔던 좋은 행사였는데 합동 시민권 수여식이 중지된 것이 아쉽게 느껴진다 

 

명품 수요 도보회, 토요 도보회

 

이용재 회장은 매주 수요일마다 거르지 않고 8-9명의 동지들과 함께 시드니 곳곳을 걷는다. 이렇게 함께 걷기 시작한 것이 햇수로 8년째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원래 시드니순복음교회 장로 선배들과 한인장로교회 몇 분이 14년 전에 산을 오르는 모임이 있었어요. 그때 제가 제일 막내로 거기를 쫒아 다녔습니다. 그때는 제가 제일 어려서 펜셔너 혜택도 받기전이라 저는 공공 교통 요금도 제값을 주고 따라다닐 때였습니다.

 

그래서 그때 그분들이 저보고 우스갯소리로 우리는 2불 50이면 어디든 가는데 너는 돈을 그렇게 많이 쓰고 다니냐며 놀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같이 다니던 분들 가운데 관절이 안 좋은 분이 있었습니다. 이에 그분들을 쫒아가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분하고 저하고 그 모임에서 나와서 수요일에 가볍게 따로 걷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게 벌써 7년 반이 넘었습니다.

 

저희 회원이 15명 정도 되는데 매주 꾸준히 8-9명 정도가 시드니 곳곳을 찾아서 걷고 있습니다. 수요일 걷는다고 해서 ‘명품 수요 도보회’로 정했습니다.”

 

한 가지 일을 꾸준히 하는 것은 쉽지 않다. 40년을 한인복지회에서 봉사한 이력을 보면 그가 얼마나 꾸준한 사람인 것을 알 수 있다. ‘명품 수요 도보회’도 매주 거르지 않고 수요일마다 시드니 곳곳을 찾아 걷는다. 7년 반을 이어왔다고 하니 대단한 끈기이다. 7년 반을 걸은 킬로수를 따지면 호주는 안될지라도 어림잡아도 남한 전체를 종주한 킬로수는 되지 않을까?

 

아마도 이분들만큼 시드니의 명소와 시드니의 구석구석 동네들을 알고 있는 한인들은 많지 않으리라. 그리고 수요도보회는 관절이 불편하여 걷는 것에 제한을 두고 있어 더 많이 걷기를 원하는 분들을 모아 ‘토요 도보회’를 만들었다. 토요 도보회는 말 그대로 원 없이 마음껏 걷는 걷기 모임이다.

 

매주마다 두 번의 걷기 모임에 참석하는 이 회장을 보면서 그의 끈기와 부지런함이 오늘의 그를 만들지 않았나 감탄이 나온다.

 

호주 국민훈장 수훈

(OAM, Medal of the Order of Australia)

 

이용재 회장은 2019년 호주국민훈장(OAM)을 호주정부로부터 받았다. 호주국민훈장은 1975년 2월 14일 영국 연방 여왕 엘리자베스 2세에 의해 호주인 가운데 수훈자의 업적이나 공헌을 치하하기 위해 제정된 훈장이다. 한인 교포 가운데 호주 국민훈장을 받은 사람은 몇 사람 되지 않는다.

 

특히 이 훈장은 본인 모르게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추천하여 그 공적이나 업적이 호주 정부로 인정된 사람이 받는 명예로운 훈장이라 할 수 있다. 그는 2019년 호주 국민훈장을 받으며 이렇게 인사했다.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더욱 열심히 봉사하겠습니다. 한인복지회는 제 삶의 절반 이상입니다. 복지회장으로 총회에서 선출된 1995년부터 ‘너는 내 이웃이다. 내 삶의 최대 목표는 나누고 섬기고 봉사하는 것이다.

 

Joy of Serving! 봉사하는 기쁨으로 살아온 지 25년 한인복지회에서 봉사는 37년째입니다. 제 삶의 절반이상을 한인 복지회에 쏟아 냈습니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함께 해주신 복지회 이사님들, 선배 회장님들의 질책과 도움, 여러 직원들과 30여 명의 자원봉사자들의 헌신적인 도움이 여기까지 올 수 있게 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명품 수요 도보회와 토요 도보회 모임은 시드니 명소와 시드니 인근 지역 명소 곳곳을 찾아 걷고 있다.©이용재    

 

▲ 이용재 회장은 2019년 1월 26일 호주의 날(Australia Day)에 호주국민훈장을 수훈했다.©이용재     

 

▲ 이용재 회장은 호주한인복지회 인근에서 모자 도매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제3기 호주 한인복지회의 도약을 꿈꾸며

 

성경은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이 있다”(마 6:21)라고 말씀한다. 30만 불이라는 액수는 개인이 희사하기에는 큰 금액이다. 그만큼 이 회장의 기부는 그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하는 대목이다. 한인복지회에 대한 그의 애정은 한인사회의 그 누구보다도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 그는 그의 청춘을 한인복지회에 바쳤고, 그의 호주에서의 인생은 한인복지회와 함께 한 인생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아낌없이 그의 남은 인생 또한 한인복지회를 위해 투자하고 있는 것이다.

 

▲ 이용재 회장     © 크리스찬리뷰

 

그는 한인복지회의 캠시 사무실 시대가 한인복지회의 1기였다면 홈부쉬 웨스트 새사옥은 2기에 진입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5년 이내에 더 큰 공간으로 이전하여 한인 사회를 위해 더 많은 봉사가 이루어지기를 꿈꾸고 있다.

 

한인복지회는 현재 홈케어 패키지 제공을 위해 호주 정부의 승인을 기다리고 있다. 이것이 이루어지면 현재 연로하신 어른들을 위해 하고 있는 데이케어 서비스가 더 확대될 전망이다.

 

이외에도 한인 복지회는 소셜 써포트 그룹, 취학전 아동교육, 방과후 특별학습지도, 복지문화센터 운영, 이외에도 한국의 정부와 지방자치 정부, 사회복지단체들의 방문을 받고 도움이 되는 정보들을 제공하고 있다.

 

2023년부터는 한인 복지 장학금을 조성하여 복지관련 전공자들에게 장학금을 희사하고 사회복지사들을 지원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의 비전대로 5년 이내에 더 큰 도약이 이루어지기를 응원한다.〠

 

글/주경식|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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