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과 공허와 어둠을 바꾸는 빛

최주호/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2/06/27 [14:14]


한 집사님의 살아온 이야기를 듣다가 아버지와의 관계를 듣게 되었다. 전직 운동 선수였던 아버지의 가정 폭력과 도박으로 인해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것과 그래서 일찍 집을 나와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아버지를 용서하기가 참 힘들다는 고백도 곁들였다. 마치 ‘새롭게 하소서’의 간증처럼 그 집사님의 인생 여정을 듣다 보니 고통스러웠던 그분의 어린 시절에 대해 연민의 마음이 많이 들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시작점이라고 부를 수 있는 죄에 대해서 다시 곱씹어 보게 되었다. 죄가 갖고 있는 가장 큰 힘은 파괴다.

 

요한복음 10장 10절의 말씀처럼 죽이고 도적질하고 멸망시키는 것은 죄가 가는 곳마다 일어나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런데 이 죄가 갖고 있는 더 무서운 힘은 자기만 파괴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연관된 주변도 파괴시킨다는 것이다.

 

나의 죄로 인해 이웃도 파괴되고 나의 죄로 인해 살고 있는 그 세상도 파괴된다. 이런 예가 죄에 대한 적절한 예가 아닐까 한다. 예전에 음주 운전자의 사고로 인해 화상을 입고 꽃다운 나이에 불구의 몸이 된 이지선 자매의 경우다.

 

분명히 죄는 그 음주 운전자가 지은 것인데 막상 그 죄에 대한 영향은 엉뚱한 곳으로 불똥이 튄 것인데 이것이 바로 죄가 갖고 있는 무서운 파괴력이다. 죄는 가는 곳마다 파괴를 가져오고 그 파괴력으로 인해 모두를 신음하게 만든다.

 

바울은 죄를 생각할 때마다 잊지 말아야 할 죄의 기원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한 사람으로 인해 시작된 죄가 마치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듯이 세상 모든 사람의 삶에 번져서 죄의 결과인 사망으로 이끈 것인데 이 땅에 두 발을 붙이고 사는 사람들 중에서 파괴적인 죄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단언컨데 아무도 없다는 선언이다.

 

그런 의미로 다시 처음 그 집사님을 생각해 본다면 그 집사님의 아버지의 폭력과 일탈로 인해 자녀의 삶에 남긴 깊은 상처는 어쩌면 그 아버지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 아버지의 부모에게서 시작된 결국 처음 아담이 지었던 죄의 영향력이 세대를 거쳐서 만들어진 결과물일 뿐이다.

 

그런 이유로 인해 우리는 죄의 피해자인 동시에 죄의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2022년도를 시작하면서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설교를 하고 있다.

 

우리 안에 새 일을 행하시는 그 하나님은 안식과 자유와 질서를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죄 용서의 은혜도 베푸시는 분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새 일을 경험한 사람은 자신을 얽매는 죄의 사슬에서 벗어나 완전한 자유를 누린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 죄 용서에 대한 이야기다.

 

요한복음 8장에 등장하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의 이야기는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한 번쯤 들어보았음직한 이야기인데 바로 그 이야기의 주제가 하나님의 용서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기 위해 그 용서를 향한 길을 열어 주시고 그 용서의 길의 마지막에 용서를 선포해 주신다.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끌고 온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이상한 행동 하나를 하신다.

 

마치 에스겔이나 이사야처럼 자신의 메시지를 몸으로 표현하는 것인데 예수님은 몸을 굽히시고 손으로 땅에 글을 쓰신다.

 

실제로 많은 신학자들이 예수님이 무슨 글을 썼는지에 대해서 말하지만 이 구절에서 주목해서 보아야 할 사실은 예수님이 땅에 쓰신 글의 내용이 아니라 예수님이 땅에 글을 쓰신 그 행위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이스라엘의 죄와 심판을 예언하기 위해 사용한 일명 sign-action이라고 불리는 예언 행위다.

 

예수님도 그 예언 행위를 하신 것인데 이는 유대인들을 향해 율법을 자기에게 적용시키지 않고 타인의 죄를 정죄하는데 사용하는 악한 습성을 경고하기 위해서인데 예수님이 땅에 손가락으로 글을 쓰신 행위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써주신 십계명의 돌판을 기억나게 한다.

 

“그 판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요 글자는 하나님이 쓰셔서 판에 새기신 것이더라.”(출 32:16)

 

예수님은 지금 구약의 율법을 가지고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는 사람들을 향해 외친다.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들었던 뇌성처럼그들의 닫혀 있던 양심의 문을 두드렸을 것이고 그 율법의 말씀을 들려지게 되자 그들은 적나라하게 드러난 자신의 죄를 보면서 양심의 가책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후에 예수님은 또 다시 몸을 굽히시고 땅에 손가락으로 두 번째로 쓰신 다음에 홀로 남겨진 그녀를 향해 죄용서를 선포하신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예수님은 그 성전에서 죄 용서를 위해 율법으로 우리의 양심에 호소하시고 복음으로 우리의 죄 용서를 선포하신다.

 

그러니까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하나님이 행하신 새 일은 이 땅에 오실 메시야이신 예수를 통해서 선포될 그 죄용서의 선포가 실현되는 것이다. 물론 그 여자는 자신을 얽어매던 그 죄의 사슬로부터 완전하게 해방되어 새사람이 되었을 것이고 자신의 죄를 용서한 예수의 증인이 되었을 것이다.

 

카린 케다는 용서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용서는 마치 창세기 1장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습과도 같다고 말한 것을 읽었다.

 

하나님이 첫 번째 날에 빛을 창조하기 전의 세상은 혼돈과 공허와 어둠이 지배하는 세상이었다. 그런데 이 혼돈과 공허와 어둠이야 말로 죄가 지배하는 세상을 지칭하는 말인데 이러한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는 능력은 그 세상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엘로힘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결국 죄로 인해서 파괴된 우리의 인생은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의 복음으로 인해 주어진 놀라운 축복이라는 말인데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깨닫는 계기를 얼마 전에 내 삶에 경험했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섭섭한 일을 있어서 마음이 크게 힘들 때가 있었다. 그 사람과 그 일만 생각하면 속이 많이 상해 속으로 이런저런 원망과 불평을 했었다. 그러다가 기도를 하는데 내 안에 갑자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너는 정말 그 사람을 사랑하니?”

 

하나님은 정말 뜬금없이 나에게 그 사람에 대한 사랑 여부를 물으셨고 그 말씀을 듣자 내 마음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실제로 구약의 613가지의 율법의 요약이 사랑인데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사랑을 알고 있는가라는 질문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그 음성을 듣자마자 그때까지 나를 괴롭히던 그 사람에 대한 원망이 내 자신의 문제로 옮겨졌고 그렇게 되자 나를 힘들게 하던 문제는 사라지고내 문제로 하나님 앞에 서서 회개하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회개 기도를 마치자 나를 힘들게 하던 그 사건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마치 혼돈과 공허와 어둠을 빛이 이긴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의 상처를 해결해 주신 것이다.

 

그때에 김준곤 목사님이 선포하시던 백문 일답이 생각났다.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님의 복음 밖에는 없는데 그 이유는 모든 문제의 뿌리인 죄가 용서받았기 때문이다.

 

주일은 죄 용서의 선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믿음의 백성들이 함께 모여 찬양하는 날이다. 부디 우리 모두가 예수로만 행복했으면 좋겠다.

 

단대농에서 사슴을 보았다.

캥거루가 아닌 사슴도 있다니... 〠

 

최주호|멜번순복음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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