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 김영옥이 전해주는 매 자매 이야기

글/김명동 사진/권순형 | 입력 : 2022/07/20 [15:00]
▲ 멜번에서 호주 매 씨 가족의 한국 소풍 이야기 특별전이 열리고 있는 시드니한국문화원을 찾아온 일신기독병원 간호사 출신 김영옥 씨와 남편 로버트 도울링 씨.     © 크리스찬리뷰


‘호주 매 씨 가족의 한국소풍이야기’ 특별전.

 

시드니한국문화원에서 열린(2022년 4월 8일-7월 8일) 낯선 제목의 전시회 이름이다. 호주 매 씨. 찾기 힘든 희귀 성씨지만 여느 희귀 성씨가 아니다. 본관이 호주이기 때문이다.

 

호주 매 씨는 1910년 2월 호주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들어간 ‘제임스 맥켄지’(Right Rev. James N. Mackenzie, 1865-1956)의 본관과 성을 말한다. 매견시가 그의 한국 이름이었다. 그는 한국 최초의 한센인 요양시설인 ‘부산나병원’ 관리를 29년간 맡았으며, 73세 때 은퇴 후 호주에 귀국했다.

 

부산에서 태어난 딸 헬렌(매혜란, 1913- 2009)과 캐서린(매혜영, 1915-2005)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부산에서 의료선교사로 사역했다. 이들은 한국전쟁 속 힘겨운 삶을 살아가던 여성과 아이들을 위해 1952년 부산에 ‘일신부인병원(현 일신기독병원)’을 건립해 20년간 봉사했다.

 

▲ 1952년 9월 17일 천막을 치고 설립된 일신부인병원은 1956년 75병상의 건물(위)를 신축했다.     © 크리스찬리뷰

 

▲ 종합병원으로 성장한 일신기독병원.     ©크리스찬리뷰

 

자매는 병원을 운영하면서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 무료로 치료했다. 당시 남녀 쌍둥이 출산 시 아들에게만 젖을 주는 차별 관습을 없애기 위해 남녀 아이를 모두 데려와야만 치료를 해주는 ‘쌍둥이 파티’를 열기도 했다. 간호학교 졸업생을 대상으로 조산사 교육을 하는 등 한국 모자보건의 영웅이자 간호 조산사 교육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한국정부는 낯선 한국 땅에서 산모와 아이를 위해 헌신하고, 호주로 귀국한 후에도 재단을 설립해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무료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일신기독병원에 기금을 지원한 자매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과 목련장을 추서했다.

 

경기대 소성박물관은 2012년 매씨 가족이 남긴 자료 1만여 점을 일신기독병원으로부터 받아 10년간 디지털화와 정리 작업을 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그들의 삶의 흔적을 사진과 영상, 문서 등으로 만나 볼 수 있게 꾸몄다.

 

문화원은 한국전쟁의 폐허 속에서 어려움에 처한 환자들을 위해 헌신한 호주선교사 매씨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양국이 공유한 역사와 오래된 우정을 조명하고자 전시회를 기획했다.

 

33년간 성자 옆에서 살았죠

 

특별전에는 매 씨 일가가 그동안 찍어온 한국의 일상 사진들이 전시됐다. 매 씨 가족이 주로 활동한 부산을 포함한 각 지역의 모습이 생생하게 기록돼 있고, 사람과 풍속 그리고 다양한 문화재를 확인할 수 있다.

 

휠체어에 의지한 채 매 자매의 제자 김영옥(74)씨가 남편 로버트 도울링 씨와 함께 전시장에 나타났다. 불편한 몸으로 멜번에서 서둘러 온 그녀는 “안녕하세요~”를 크게 외치며 환한 웃음으로 기자를 맞이했다. 도울링 씨는 허리를 굽혀 한국식으로 인사를 했다.

 

“참 어려운 걸음을 하셨습니다.”

 

"글쎄요. 불편한 몸으로 어떻게 시드니를 가냐고 모두 막았어요. 그렇지만 안 오면 평생 후회될 것 같아서요. 올해가 결혼기념 46주년이거든요. 비행기 표를 알아보라 했죠. 결혼 46주년 기념으로 온 겁니다”

 

그녀는 15년 전 한국을 방문하면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3년여 동안의 투병생활 끝에 재활에 성공했다.

 

“아주 참, 선생님 생각이 사무치게 나네요. 사진을 보니깐”

 

은퇴한 간호사이자 조산사인 김영옥 씨는 1967년 공주에서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1968년에 부산으로 내려가 일신부인병원에서 조산학을 공부했다. 이곳에서 매 자매와 2년 반 근무하다가 1971년 23세가 되던 해 호주로 건너와 멜본 퀸 빅토리아병원에서 3년 반 공부했다.

 

이어 부산으로 내려가 부산복음병원에서 6개월간 일하다가 1976년 호주로 이주해 미드와이프 및 간호사로 근무했다.

 

이후 매혜란, 매혜영의 제자 중 유일하게 호주에 남아서 두 자매와 30년 넘는 세월을 함께 했다.

 

“사실 전 매 원장님에게 매우 실망을 준 제자입니다.”

 

“실망을 주셨다니요?”

 

▲ 일신기독병원 개원 50주년을 맞아 맥켄지 선교사의 넷째 딸 실라 여사(가운데)가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부산 좌천동 가지길에 있는 옛집을 찾았다. 오른쪽은 김영옥 씨.     © 크리스찬리뷰

 

“저에 대한 매 선생님 기대가 무척 컸어요. 호주에서 공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면 많은 일을 할 거라고요. 그런데 그 당시에 장기려 박사님께서 매 선생님에게 일신에는 호주에서 공부한 두 사람이 있으니까 김영옥 씨는 우리 복음간호학교로 보내달라고 해서 매 선생님이 저를 복음간호학교로 보냈는데 6개월을 일하고 다시 호주에 오니까 매 선생님이 기가 차서 우시는 거에요. 그때 저를 야단치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요.”

 

“호주에 정착하게 되신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으셨나요?

 

“복음간호학교에서 일하고 있을 때 장기려 박사님께서 ‘너는 호주에 가서 두 매 선생님 딸이 돼라’고 해서 호주로 다시 오게 된 거지요.”

 

살아있는 성자로 불리던 의사 장기려(1911-1995) 박사는 혜란, 혜영의 제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분들은 결혼도 안하고 한국인을 위해 일생을 바쳤어요. 호주가서 은퇴해 살고 있는 그분들의 딸이 돼 주세요. 두 분에게 효도하고 부모처럼 모시기를 원해요.”

 

김영옥 씨는 그 말을 듣고 호주로 건너와 두 자매를 모시고 살았다고 했다.

 

“두 분에 대해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으신지?”

 

"어느 날 근무하고 있는데 시골집에 있는 동생에게서 급한 전화가 왔어요. 어머니가 자궁에 출혈이 심하다는 거에요. 일신병원으로 모셔왔는데 걱정이 앞섰어요. 간단한 치료가 아니라 자궁적출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수술비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걱정을 했어요.

 

▲ 일신기독병원을 설립한 매 씨 자매의 흉상이 일신기독병원 맥켄지 역사관에 전시되어 있다. 의사 매혜란(헬렌, 오른쪽))과 간호사 매혜영(케서린)     © 크리스찬리뷰

 

사실 당시 월급은 동생 학비로 들어갔고 수중에 남은 돈이 없었어요. 어머니의 수술이 끝난 뒤 조심스럽게 말씀을 드렸지요. 휴가를 반납하고 일을 해서 수술비를 갚도록 하겠다고요. 그랬더니 헬렌 원장님은 괜찮다며 어머니를 퇴원시켜 주었어요. 지금도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원장님은 가난한 사람이 와도 차별하지 않고 정성껏 치료를 해주셨어요. 돈이 없다고 해서 그냥 내보내지도 않으셨고요. 오히려 끝까지 돌보아주고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병원 일자리까지 주선해 주었습니다.”

 

“두 분은 어떤 분이셨나요?”

 

“한국에서 성공한 의사와 간호사가 된 제자들의 도움을 받는 것도 바라지 않으셨어요. 종종 제자들이 보내는 용돈 또한 필요한 곳을 찾아 기부하셨지요. 선생님이 거세게 만류하셨는데도 1993년과 1995년 제자들이 호주를 찾아와 팔순잔치를 성대하게 치렀습니다.

 

모두 들어가서 앉기도 힘들었던 작은집에서요. 저는 33년 동안 성자 옆에서 살았습니다. 그 두 분의 삶은 무소유였어요. 가진 게 없었어요. 있으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다 쓰시고 교회에 기부하셨어요."

 

그녀는 사진으로 두 선생님을 마주하니 감격스럽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33년간 두 분과 함께 지내면서 ‘눈물이 많은 사람이 됐다’라고 했다.

 

매씨 가족의 2대에 걸친 한국사랑

 

매 씨의 조선선교는 부인 메리(1880-1964)로부터 시작됐다. 메리는 25세 처녀의 몸으로 1905년 한국선교를 자원했다. 그리고 맥켄지는 1910년 부산항에 들어왔다. 두 사람은 선교현장에서 만나 맥켄지의 청혼으로 한국에서 결혼했다.

 

▲ 부산 용호동의 한센환자 정착촌(2000년). 현재 이곳은 개발되어 고층 아파트 단지로 조성되었다.     © 크리스찬리뷰

 

두 사람은 맥켄지의 뜻에 따라 부산 감만동에 나환자(한센병)촌을 조성하고 구제선교에 나섰다. 경남 진주를 중심으로 하루 수십km를 걸으며 복음을 전하던 메리는 나환자 자녀를 위한 집을 운영했다. 부부는 선교보고를 위해 하루하루를 기록하고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이 사진 9천여 장은 딸들이 운영했던 부산 일신기독병원 창고로 보내졌다. 이중 사진 2천여장을 경기대 박물관에서 디지털화와 정리 작업을 했다.

 

맥켄지의 나환자 사역은 1938년까지 계속됐다. 목사로서 1920년 중반까지 부산을 중심으로 13-15개 교회 순회목회도 겸했다. 지금의 부산 창대교회(옛 상애원)는 나환자선교에서 비롯됐다. 맥켄지는 나환자를 위해 의사면허도 취득했다.

 

아내 메리는 나환자 자녀를 돌보고, 부산진 지역의 여성을 위한 신앙교육에도 나섰다. 그런 부부가 은퇴해 39년 호주로 돌아오자, 나환자들은 맥켄지를 기념해 ‘한국 나환자들의 아버지’라는 기념비를 세웠다.

 

부부의 헌신은 6.25전쟁 직후 일신기독병원을 세운 딸 매혜란, 혜영 자매에게 이어졌다. 부산에서 태어나 평양외국인학교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고 호주 멜본에서 대학을 다녔던 그들은 의사와 간호사가 돼 한국으로 돌아갔다. 부모를 이어 한국의 가난한자를 돌보겠다며 1952년 한국전쟁 중 건너가 부산 일신부인병원을 설립한 것이다.

 

"매혜영 간호부장님께서 2005년에 별세하셨고 매혜란 원장님이 2009년에 별세하셨는데요. 이후에 남겨진 유물들과 사진이 9천 장이 넘는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는데 이 많은 자료들을 어떻게 한국에 넘기게 되셨나요.”

 

“매 원장님은 교통사고를 당하신 후 기억력을 좀 상실하셔서 막내 동생 실라의 도움으로 사시다가 양로원으로 가셨어요. 그 후 실라가 뇌졸중으로 양로원에 가면서 매 원장님이 사시던 집을 팔아야 했습니다. 그때 집 정리를 하면서 매 원장님과 매 선생님 방에 있는 물건들을 가족들의 허락을 받아 한국 일신병원 맥켄지 역사관으로 보냈죠. 거기에 사진도 있었습니다.”

 

“1960년대 당시 일신부인병원은 어떤 곳이었습니까?”

 

▲ 제임스 노블 맥켄지(매견시) 선교사 가족사진. 매견시 선교사 기념비와 기념 대문 그리고 묘비. ‘건강한 아이들을 위한 집’(고아원) 개원 12주년 기념. ©크리스찬리뷰 *상단 왼쪽부터 시계방향     

 

▲ 리타(문의덕), 도로시(원성희), 헬렌(매혜란), 케서린(매혜영), 바바라(민보은) 선교사와 서두화 목사의 두 자녀들     ©크리스찬리뷰

 

“한국이 무척 가난한 시절이었습니다. 그 당시 일신병원은 누구나 와서 잘 치료받고 돈 없는 사람들은 무료로 치료해주는 병원으로 소문나 항상 사람들이 북적였죠. 무척 바빴고 아침마다 병실에서 예배드리고 일을 시작하는 병원이었어요.”

 

“만남을 통해 파악하신 두 분의 성격은 어떠했나요.”

 

“수술을 잘하시고 강의도 참 잘하셨어요. 그런데 우리가 제대로 하지 못하고 실수를 하면 눈을 부릅뜨고 크게 야단치셨어요. 아주 무서웠지요. 눈에서 번쩍번쩍 빛이 났어요. 그래서 우리가 호랑이 선생님이라고 불렀어요.

 

그때마다 선생님은 “이 공부가 끝나면 너희들이 무의촌으로 봉사를 나가고 섬기고 할텐데 철저히 배워야 실수를 안 하지”라고 하시면서 배울 수 있는 환경과 여건을 많이 만들어 주셨어요. 그래서 당시 일신병원 조산학하면 전국에서 이름이 났고 입학하기도 어려웠어요.

 

사실 평소 조용하시고 인상은 지적이고 딱딱해 보이지만 언뜻언뜻 비치는 속내는 다정하신 면도 있고, 남을 돕고 싶어 하는 마음이 크셨어요. 그걸 말로 앞세우거나 겉으로 드러내면 자기자랑으로 비칠까 스스로 경계하고 조심하시며 사신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녀는 한 사진 앞에 서더니 “아, 인덕이 아냐?” 하며 그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인덕이는 매혜란 원장님의 양녀였어요. 한 번 호주에 왔었는데 그 뒤로 소식이 없어 궁금했어요. 잘 살고 있는지”

 

▲ 호주 본가 앞에서 찍은 가족사진(1950년)     © 크리스찬리뷰

 

▲ 맥켄지 선교사 본가 전경. 이곳은 개발되어 현재 타운하우스가 들어섰다     © 크리스찬리뷰

 

▲ 수영로교회에서 만난 매혜란 원장의 양녀 김인덕 씨와 반갑게 만난 민보은 선교사.     © 크리스찬리뷰


“저희가 한호선교 13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을 때 부산 수영로교회에서 만났어요. 민보은 선교사님(Dr.Babara Martin 1964년부터 31년간 일신병원 근무)하고 함께 점심식사도 했는걸요.”

 

“아, 그래요?”

 

기자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2019년 10월 한호선교 13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호주선교사 후손 일행들과 한국을 방문했었다. 방문 마지막 날 이규현 목사의 초청으로 부산 수영로교회를 찾았다. 대예배실에서 함께 기도를 하고 나오는데 누구인가 민보은 선교사의 팔을 잡았다. 김인덕(71) 씨였다.

 

“선교사님”

 

“이게 누구인가?”

 

“저에요, 인덕이요.”

 

민보은 선교사는 김인덕 씨의 두 손을 맞잡고 그저 놀랍고 즐거워서 더덩실 춤을 추었다.

 

“인덕이가 어렸을 때 많이 아팠어요. 5살 때인가 그땐 너무 아파 내가 무척 돌봐줬는데”

 

“선교사님, 어떻게 이런 곳에서 우연히 만날 수 있나요.”

 

두 사람은 흥분하여 박장대소를 했지만 그 웃음의 여운에는 묘한 쓰라림 같은 것이 깃들어 있었다.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던 매 자매

 

사진의 또 한 장면. 1905년 메리의 사진. 갓을 쓴 한 조선 노인이 근엄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작은 탁자의 책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 양옆으로는 스코틀랜드풍 복장을 한 서양 여인이 책을 펴 읽고 있다. 노인은 조선 초대교회 장로 박신연, 오른쪽은 메리, 왼쪽은 호주 여선교사 엘리스다.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박 장로에게 두 서양 처녀가 조선어를 배우고 있는 것이다. 현지어를 알아야 복음을 전한다는 절박함이 묻어난다.

 

또 다른 사진. 비탈진 산자락에 서양식 2층 벽돌집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었다. 의자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은 헤롤드 레인과 조지 앤더슨 선교사, 뒤쪽으로 장년의 남성들이 아이들과 함께 그의 부인들이 서 있다. 바로 ‘건강한 아이들의 집’ 사진 풍경이다.

 

“맥켄지 선교사의 부인인 메리 켈리가 결혼하면서 한국이름으로 매 부인이라고 불렀거든요. 이분이 뭘 했냐하면 나환자들이 나병원에 들어갈 때 감염되지 않은 자녀를 버리고 들어갔어요. 감염이 되니까요. 그 아이들을 거두어서 1918년도에 ‘건강한 아이들을 위한 집’이라는 시설을 만들어서 그 아이들을 돌봤어요. 그래서 거기서 자녀인 매혜란, 매헤영과 함께 키웠던 거죠.

 

그 아이들이 자라서 일신병원을 짓는데 큰 도움을 준 거죠. 그러니까 나환자들의 자녀들이 성장에서 한국에 돌아온 매 자매를 도왔던 겁니다.”

 

자그마한 규모의 전시회장을 둘러보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김영옥 씨는 관람 내내 흑백 사진 하나하나에 눈을 떼지 못했다.

 

“저 사진도 보세요. 매혜란 원장님이 직접 제작한 분만대인데 현재까지 그 어떤 최신장비보다 편리하게 사용하고 있어요. 사진으로 두 분을 마주하고 있다니 기분이 참 묘하네요. 몸을 사리지 않고 헌신한 참 귀한 분들이셨습니다.”

 

“두 분과 가장 인상에 남는 일이 있으셨다면 이야기 해 주시지요.”

 

“아버님이 남겨준 집에서 사셨는데요. 그때 내가 놀란 것은 집이 작은 집이었어요. 거실도 조그마하고 부엌도 두 사람이 있기가 힘들 정도로 작았어요. 차도 없고 정부에서 주는 연금으로 생활하셨는데 기가 막혔어요. 모든 것을 한국에 주시고 아무 것도 안 가지고 이곳에 오셔서 그래도 아주 편안하게 사시는 모습은 꼭 살아있는 성자 같았습니다.

 

매 선생님 어릴 때 한국에서 있었던 일인데요. 콩나물국을 그렇게 좋아하셨대요. 한번은 옆집에 사는 한국인집에 가서 콩나물국을 얻어먹고서는 집에 와서 엄마한테 크게 야단맞았대요. 가난한 집에 가서 음식을 먹고 왔다고요.

 

공부도 잘하셨대요. 평양에서 공부할 때인데 미국 선교사들이 설립한 외국인학교였어요. 시설도 좋고 유명한 학교였는데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미국영어를 쓰게 됐는데 그러면 그렇게 어머니한테 야단을 맞았다고 그래요.

 

공부를 참 잘하시고 운동도 좋아하셔서 테니스도 잘치고, 특별히 아주 음악을 잘하셨어요. 첼로도 잘하고 피아노와 오르간도 잘 치셔서 일신병원에서 아침마다 병원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그때 선생님이 찬송가를 풍금으로 연주하셨어요. 평양외국인학교 졸업할 때는 수석으로 졸업을 하셨대요. 그런 이야기를 자주 하셨어요.

 

또 한 가지 인상에 남는 건 매 원장님은 정원 일을 참 좋아하시고 잘 가꾸셨어요. 그런데 정원 일을 하실 때 꼭 우리나라 남자 고무신을 신고 일을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한국을 방문하면 꼭 고무신을 사서 두 분께 드렸어요. 그러면 되게 좋아하셨어요.

 

매 원장님이 선물을 주실 때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시는데 하루는 ‘얘야, 너네 정원에 한국 무궁화 꽃이 있어야 되지 않나? 이건 정말 한국 무궁화 꽃이야’ 이러면서 무궁화 나무를 주셨는데 지금도 그 나무가 우리 집 정원에 있어요.

 

그리고 한국뉴스가 나오면 신문을 다 오려서 갈 때마다 저한테 주시면서 한국얘기를 그렇게 하셨어요. 그러니까 이분들은 한국 사람이었어요. 한국을 무척 사랑하고 아끼시는 그런 분들이었습니다.”

 

“매 자매 두 분은 한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한국어가 유창하셨을 것 같은데 어떠셨나요?”

 

“부산 사투리를 굉장히 구수하게 잘 쓰셨어요.”

 

그녀는 영상에 나오는 부산의 발전된 모습을 보고 감격했다.

 

“야, 한국이 저렇게 변했다고요? 시상에, 해운대잖아요.”

 

▲ 결혼 46주년 기념으로 불편한 몸을 이끌고 멜번에서 시드니까지 2시간 30여분에 걸친 관람을 마치고 당일로 돌아간 김영옥 씨 부부.     © 크리스찬리뷰

 

“한국에 다녀오신지 오래 되셨나봅니다.”

 

“예, 15년 정도됐어요.”

 

기록하지 않았다면 스쳐 지나갈 사실이 매 씨 가족들을 통해 불멸의 역사로 남았다. 사진에서 보이는 조선의 풍경, 사진들을 보면서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이렇게 험한 시절을 거쳐 왔구나’ 정말 비참하고 가난한 생활, 그런데 힘든 삶의 순간에도 사진 속의 사람들은 카메라 셔터가 ‘찰칵’하는 순간에 환하게 웃고 있다.

 

사진 앞에서 거침없이 허공을 향해 ‘아-’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숙연했던 김영옥 씨도 카메라 앞에서는 살며시 웃음을 지었다.

 

“정말 꿈만 같아요. 이분들이 조건 없이 한국에 심은 사랑의 씨앗이 오늘도 어딘가에서 열매를 맺고 또 다른 씨앗을 심고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너무 보고 싶어요.”〠

 

김명동|본지 편집인

권순형|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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