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백악관 국가장애위 정책차관보 강영우 박사 생애와 사상 탐구

눈먼 새, 창공을 날다 '길러진'인재 강영우, 집중분석

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09/04/30 [13:13]
▲ 호주를 처음 방문한 강영우 박사가 시드니오페라하우스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했다.     © 크리스찬리뷰
김선태! 이익섭! 강영우!'
 

필자가 25년 동안 취재한 1천여 명 가운데, -김선태, 이익섭, 강영우-이 세 사람만의 독특한 공통점이 있다. 바로 시각장애인으로 한 시대를 걸출하게 일궈낸 개척자들이란 점이다. 그들의 삶이 녹아있는 독특한 어록도 인상 깊다.
 

김선태 (실로암안과병원장) : 이 병원은 역설적이지만 적자가 나야 제대로 운영되는 병원입니다.
 

세상에 서울시내 큼직한 병원이 적자라니? 그도 그럴 것이 실로암안과병원은 안과종합병원으로, 후원에 의해 유지되기 때문이다. 모든 시각장애인들의 치료비는 물론 보호자들의 교통비, 숙박비까지 무료로 제공한다. 의사들의 월급은 다른 병원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니 사명감 없으면 근무할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잘도 운영되고 있다. 
 
이익섭 (연세대 사회복지대학원장) : 장애는 불편하지만, 불행은 아닙니다. 
 
그는 당시 지체 장애자들에게 응시 기회도 주지 않던 대학에 시험칠 자격이라도 얻기 위해 모친과 함께 그 대학 총장을 만났을 때, 대뜸 그 총장이 모친에게 이 학생 말귀는 제대로 알아듣습니까?하는 말을 가장 아프게 기억하고 있었다. 단순한 시각장애자인 그를 청각장애와 학습장애까지 가진 걸로 오해했던 게, 당대의 석학이자 지성인으로 자부하는 어느 일류 대학 총장의 장애자에 대한 의식수준이었다. 
 
강영우 : 인물은 길러지고 명문가는 만들어진다
 
그렇다. 그의 체험적 이 한 마디만으로도 이번 호주 교민들에게 충분한 메시지를 던졌다고 본다. 
 
필자는 위 세 사람을 차례로 만나오면서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다. 
 
1) 세 사람 모두가 후천적으로 시각장애를 가진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누구나 예외 없이 예비장애자라는 엄숙한 사실에 서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 기억하는가? 장도니크 보비라는 유명한 저널리스트가 사고로 전신마비되고, 왼쪽 손만 겨우 움직일 수 있을 때 그가 절규한 한 마디를! 고이다 못해 흘러내리는 침을 삼킬 수만 있어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2) 이 세 사람은 장애가 전혀 장애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인터뷰 때도 시선(?)이 필자와 마주했다. 정안인(正眼人)처럼 보였다. 오랜 세월 정상인 속에서 죽음보다 깊은 고통의 세월을 거쳐오면서 숙성된 삶이 표현되고 있었다. 이들의 성장 시기에 맹인들이 할 수 있는 직업은 점쟁이, 안마사, 소매치기 등 세 종류밖에 없었다. 주변 사람들도 그런 일을 직접 간접으로 권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이런 직업을 단호히 거부하고 맞섰다. 정상인들이, 아니 정상인보다 훨씬 크고 놀라운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전 생애를 통하여 보여주었다. 
 
3) 이 세 사람을 통해 필자는 하나님은 모든 장애를 이겨낼 전략을 갖고 계신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할 수 있었다. 모두 장애가 인생의 장애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장애를 통해 하나님의 그랜드 플랜이 장엄하게 펼쳐지는 것이 목도되었다. 장애가 인생의 거침돌이 아니라 디딤돌로 되어 훨씬 높고 큰 세상으로 이끌림을 받고, 장애가 축복의 통로가 된 산증인이었다.
 
4) 이 세 사람 모두 대학시험을 치를 때 원서접수조차 거부당하는 서러움을 처절하게 경험했지만, 결코 주저앉지 않았으며, 내친김에 미국 대학에서 박사를 받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삶의 모든 굽이굽이마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체험을 해야하는 것은 예외가 아닌 필수코스였다. 
 
▲ 강영우 박사의 큰아들 진석 군(왼쪽)이 하버드의대 3학년 때 동생 진영 군과 백악관에서 아버지 부시 대통령을 만났다     ©강영우

장애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실력과 재능과 달란트를 계발하고, 정상의 자리에서 사표의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이 과연 장애가 되지 않고도 이러한 삶을 살 수 있(었)을까?하는 가정법을 붙여보았다. 장애란 가장 무거운 멍에를 짊어지고도, 인생의 맥스마이즈를 살 수 있는 비결이 하나님의 뜻(예정)에 순응하며 결코, 결코, 결코 포기하지 않은 도전과 응전의 삶이었다.
 

오히려 장애 덕분에 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하고, 장애덕분에 더 크고 많은 기회가 주어졌던 것을 볼 수 있었다.
 

1%의 가능성에 도전
 

이제 우리는 본격적으로 인간 강영우의 대탐험을 해야 할 것이다. 이미 그의 삶은 1995년 방송대상을 받은 MBC 눈먼 새의 노래와 영화 빛은 내 가슴에를 통해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고전이 되어버렸다. 한 마디로 그의 삶은 1%의 가능성에 도전한 삶이다. 시각 장애인으로서 처음 한국 대학의 문을 뚫고 들어갔으며, 처음으로 유학의 관문을 뚫은 것을 비롯하여 그가 이룬 일들은 저의 전부가 1%의 가능성을 향한 끊임없는 도전이었다. 
 
말이 좋아 1%의 가능성에 대한 도전이지, 어디 그게 쉬운 일인가? 그건 바로 불가능에 도전한다는 말과 99% 비슷한 말이다. 승률이 1%밖에 안되는, 거의 모든 사람이 불가능하다고 포기하고 중도하차하는 일에 도전하여 성취해낸 것이다. 이 1%의 가능성에 도전한 사람들을 토인비의 말을 빌린다면 창조적 소수자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사실은 한 사람이 1%의 가능성에 도전해서 불가능의 벽을 깨면 그 뒤를 이어 수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역사를 창조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과 인류의 역사 속에서, 1%의 가능성에 도전함으로 새 역사를 창조한 무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는데, 오늘 우리가 만난 강영우 박사 또한 이 반열에 등재할 수 있다. 
 
그가 머물렀던 숙소 노보텔 호텔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과 장애자 올림픽이 열려진 바로 현장이다. 한치도 흐트러짐 없이 깔끔하게 매만진 넥타이가 유독 눈에 띄었다. 그러나 그 촉감은 하얀 물때가 커다랗게 원을 그리고 있는 양복을 읽어내진 못했다. 그래도 좋았다. 우리의 만남엔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동안 양복에 묻은 작은 얼룩 하나, 티끌 하나에도 신경쓰며 살아온 것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약간 허스키한, 그렇지만 밝고 쾌활하게 어린 시절부터 시원시원하게 들려주었다. 어린 시절 아픔들도 한편의 동화를 듣는 듯이 아름다웠다. 오늘의 그가 있게 된 것, 역시 공짜는 아니다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헌신된 부모의 기도가 그의 생애에 밑거름으로 다져졌기에 가능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외가 쪽 어머니가 모태 교인이었습니다. 고향은 경기도 양평군 서정군 문호리, 그러니까 서울에서 한강을 거슬러 80리 정도를 올라가면 남한강과 북한강이 마주치는 양수리에 도달합니다. 여기서 다시 북한강을 타고 20리를 가면 문호리가 나옵니다. 그곳은 경치도 아름답고 개신교가 비교적 일찍 들어왔습니다. 
 
한국 장로교 초기 선교 곽안련(Charles Allen Clark) 박사(필자 주 : 한국에서 40년 선교사로 있으면서 36년간 평양신학교 교수로, 마지막 6년은 신사참배를 강요하던 당시 평양신학교 교장을 지냄)가 세운 승동교회, 연동교회 지교회로 우리 문호교회가 중앙에 연결이 되어 있었습니다. 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북한 인민 정부 시절, 북에서 일부 신학자들이 남쪽으로 내려올 때였습니다. 
 
그때 원산신학교 교수로 계시던 차보은 교수님이 오셔서 6.25때까지 우리 집에서 2년을 사셨습니다. 6.25사변이 터지자 서울대학에 계시던 신사훈 박사, 김관석 목사님도 우리 집으로 피난을 오셨습니다. 차보은 선생님 소개로 김정준 목사께서 자주 우리 집에 드나드셨습니다. 
 
당시 이들은 한국교계의 소장파 교수들이었지만, 60년대 이후 한국 교계를 이끌어가는 거목들이 되는데, 그의 집은 장차 이 거목들이 자란 모판과 같은 역할을 했다. 차보은 박사와 김정준 목사는 나중에 한국신학대학 교수로, 학장으로 봉직하고, 신사훈 박사는 서울대 종교학과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고, 김관석 목사는 기독교방송 사장과 NCC 총무로 교회일치의 상징적인 인물이 된다. 

 
▲ 클린턴 대통령 내외 초청 백악관 만찬모임에서 힐러리 여사와 인사하는 강영우 박사 부부     ©강영우

왕대밭에 난 왕대싹 
 
왕대밭에 왕대가 자란다고 했듯이, 이런 장차 한국교계의 왕대들이 그의 집을 모판으로 삼았을 때, 소년 강영우 역시 왕대의 싹으로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어렸을 때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신앙을 가르쳐 주셨지만, 특히 연세가 지긋하셨던 차보은 선생님을 할머니라고 부르게 하여 나는 할머니가 한 분이 더 생겼다고 좋아하기도 했습니다.
 
신앙의 기라성같은 인물들에게 받은 그의 어린 시절 신앙교육은 평생 그의 인생을 지탱하는 버팀목이 되었다. 그의 부친은 문호리에서 뚝섬으로 장작을 운송하던 배를 여러 척 소유하여 운송업도 하고, 농지도 넉넉하여 베푸는 삶에 익숙한, 그리고 교회 살림을 도맡아 하는 소위 기둥 집사였다. 
 
당시 시골 교회는 사택이 따로 없었다. 자연스레 그의 사랑채가 사택이 되었고, 교회에 오고가는 손님들을 접대하는 응접실에 되었다. 교회잔치가 그의 집의 잔치가 되는 날이 다반사였다. 교회와 가정을 분리하여 생각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난 것이다. 가정을 확대하면 교회가 되고, 교회를 축소하면 가정이 되는 환경 속에서 소년 강영우는 성장한 것이다. 
 
우리 집이 뒷문으로 나가면 교회로 연결되게 집이 되어 있었습니다. 담임목사님이셨던 이원동 목사님은 총각으로 부임하셔서 우리 집에서 결혼잔치를 치르기도 하였습니다. 북한에서 월남하신 성직자들을 위해서는 아예 안방을 내어드렸습니다. 왜냐하면 갑자기 수상한 사람들이 찾아오면 다락으로 피신하기 쉬웠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가정에서 영우 소년은 특별히 차보은 할머니의 섬세한 손길에서 신앙이 양육되었다. 
 
차 선생님 보고, 뭐라고 기도하고 먹어요?라고 물으면, 먹을 것 많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기도하면 된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 둘 신앙의 골격을 세워가며 자랐습니다. 
 
그렇게 추억이 깃든 문호교회가 몇 년 전, 창립 100주년 성회 때 그가 강사로 인도하기도 했다고 한다. 
 
최근 문호교회에 부임하신 목사님은 미국에서 박사학위도 하고, LA에서 목회경험도 쌓은 분입니다. 내 신앙의 모태가 된 교회가 지금은 큰 교회가 되어 선교사를 단독으로 파송할 정도입니다. 옛날에는 가난했는데 그곳에 별장이 많이 들어오니, 땅 한 평에 100만원이 될 정도입니다. 전원주택이 들어오고, 교인들도 서울 사람이 절반이 넘게 차지합니다. 교회도 크게 잘 짓고 말입니다.
 
그러나 6.25가 할키고 간 상흔은 그의 가정은 더욱 심하게 움푹 패었고, 후유증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아파왔다. 
 
1.4 후퇴 때, 우리 마을이 다시 북의 손으로 들어가자 일곱 살 난 나는 피난 보따리를 걸머진 아버지를 따라 걸었습니다. 어머니는 한 살 난 여동생을 안고, 다섯 살 된 남동생의 손을 잡고 걸었지요, 그 추위에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밤새도록 걷고 또 걸었지만 겨우 이천 땅에 도착했습니다. 그때부터 휴전이 될 때까지 먹을 것이 없어 죽으로도 끼니를 못때우고, 소나무 가지껍질을 벗겨 먹고, 칡뿌리를 캐먹으며 버텼습니다. 고향집 지하실 광속에 양식을 잔뜩 저장해 놓았으니 집에만 간다면 고생이 끝난다는 희망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집으로 돌아와보니 교회도, 학교도, 우리 집도 몽땅 불타고 없었습니다. 살림살이도 다 잿더미로 변하고, 아버지의 사업 근간이 되었던 배들도 온데간데 없었습니다. 농지 외에 모든 것이 송두리째 날아간 것을 본 아버지는 농지를 팔아 서울로 올라가 창신동에 전세방을 얻고 전매청에 일자리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의 깊은 후유증, 갑작스런 환경변화는 그의 부친에게 심각한 위기를 안겨주었다. 점점 쇠약해가던 부친은 삶의 무게를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결국 유명을 달리했다. 그의 나이 열세 살, 부선망 호주가 된 것이다. 부친의 성실에 감동한 전매청에서 그의 모친에게 일자리를 제공했지만 가난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설상가상은 그에게서 터졌다. 특히 왕대가 왕대답게 성장하는데는 천둥과 먹구름이 한꺼번에 내리치는 무서운 공포와 아픔과 무서리 속에서 불면의 밤을 보내야 했다. 
 

왜 내게?(why me?) 
 
부친이 소천한 다음해인 1958년 중 3때, 따뜻한 봄날 축구를 좋아하던 그는 학교를 마치고 친구들과 축구를 했다. 그의 포지션은 골키펴. 코너킥으로 들어오던 공이 그의 왼쪽눈을 세차게 때리고 지나갔다. 통증은 잠시 후 없어졌지만, 눈앞에 어른거리는 무수한 점들이 사라지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보이는 것이 안개낀 듯이 희미해지고, 걸음걸이를 비롯하여 온몸이 중심을 잘 잡지 못했다. 그냥 그러다가 치료되겠지 했지만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안과를 찾기 시작했다. 반년 동안 병원을 찾아 전전한 끝에 세브란스병원 안과과장이 선고하는 망막박리라는 치명적인 병명을 들어야 했다. 
 
수술을 해서 망막을 다시 붙여야 하는데 망막은 안구의 내충막으로 수술이 까다로워 성공률은 반반이고, 수술에 실패하면 시력을 상실하여 맹학교에 가서 공부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실을 말해준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그 뒷감당이 안됐습니다.

당시 비록 약시지만 나는 보행은 물론이고 책도 자유롭게 읽을 수 있을 정도의 시력은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엄청난 수술비를 들이고도 장님이 되는 지름길을 택할 확률이 50%나 된다니 망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친이 소천한 후 그에 대한 기대가 컸던 모친은 드디어 결단을 내렸다. 며칠 동안 금식기도를 마친 다음 시골에 남은 농지를 팔아 수술을 받기로 했다. 농지를 내놓고 구입할 사람을 기다리고 있을 때 국립의료원에서 선진국에서 온 유능한 의료진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서둘러 그곳으로 가 외래진료를 받다가 사고 1년 3개월 만인, 1959년 8월 5일에 입원했다. 
 
당시 안과과장이던 덴마크인 라슨 박사는 떨어진 망막을 다시 붙이는 수술을 하기엔 이미 때가 늦었지만 최선을 다했다. 처음엔 3개월 동안 절대안정요법으로 눈을 가린채 누워서 먹고, 마시고, 용변을 보고 목욕을 해야 했다. 행동반경이 넓은 사춘기의 소년에겐 생지옥같은 나날이었지만 잃어버린 시력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으로 버텼다. 88일째 되던 날 병상 아래로 발을 디딛는 순간 그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발목관절에 심한 통증이 왔다. 감이 좋지 않았다. 그토록 고대했던 절대안정요법도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라슨 박사가 다음 주에 수술을 해준다는 말에 뛸 듯이 기뻤다. 세계적인 의사의 수술이니 당연히 낫는다는 기대가 폭발했다. 라슨 박사는 몇 명의 한국 의사들에게 도형을 그려가며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의사들은 숙연한 태도로 듣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사태의 심각성은 짐작하면서, 이내 깊은 숨을 내쉬라는 말 한마디를 듣고 전신마취제를 맞은 그의 의식은 서서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물! 물!하며 애타게 부르짖는 소리가 귀에 들렸다. 그 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자 타는 목마름으로 더욱 애타게 물을 찾기 시작했다. 평소 그를 진료했던 구본술 박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영우 박사는 골드코스트 서퍼스 파라다이스 해변을 홍요셉 목사(브리즈번순복음교회) 와 함께 걸었다 .                   © 크리스찬리뷰
목이 말라도 참아야 돼. 물을 마시면 토하니까.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타는 듯한 갈증도 잠깐 잊고,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감을 느꼈습니다. 내 눈에 어른거리는 무수한 점들이 아직도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술에 실패하면 맹인이 된다는 말을 들은 후부터 그토록 두려워했던 사실이 현실로 된다는 공포를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며칠이 지나면 이 점들이 없어지고 볼 수 있겠지 하고 내 자신을 위로하면서 실날같은 희망을 잡고 있었습니다. 
 
수술 후 며칠 동안 붕대를 풀지 않았다. 그러니 더욱 초조와 불안 속에 밤낮도 구별못하는 어둠 속에 지내야 했다. 어느 날 아침, 모든 사람들의 기대 속에 안대가 풀렸다. 눈을 뜨고 휘둘러보아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같은 어둠 그대로였다. 사방을 휘둘러보아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라슨 박사가 자신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잘 보입니까? 
 
보이는 것이라곤 침대 주위에 둘러선 의사와 간호사들이 실루엣처럼 형태만 보였다. 그들의 얼굴조차 구별되지 않았다. 그동안 그의 눈을 밝혀주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 의료진들의 사랑을 생각해서라도 거짓말이라도 하고싶은 심정이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 있던 나의 운명을 건져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그분들을 실망시킨다는 것도 무척 힘들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두 눈에서 흐르는 눈물로 대답을 대신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라슨 박사는 들고 있던 가제로 손수 내 눈물을 닦아주며 위로하셨습니다. 다시 수술을 시도할 것이며 재수술은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수술의 실패 확률은 더 높았고, 그 확률을 증명해 주었다. 당시 국립의료원은 전쟁 후 외국인 의료진이 많았다. 특별히 스웨덴, 노르웨이 등지에서 온 간호사들도 있었다. 시력이 나빠진 것 외에는 두 번 다시 받기 어려운 그들의 사랑을 듬뿍 받기도 했다. 두 번째 수술마저 실패로 끝난 3개월 후, 그를 그토록 사랑하며 친손주처럼 돌보아 주던 라슨 박사는, 본국으로 귀국하기 전 마지막 회진에서 그를 잡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평생 맹인으로 기구한 운명으로 살아가야 하는 어린 나를 보고 너무 불쌍해 흘린 눈물이란 걸 나중에 나의 주치의가 된 구본술 박사님으로부터 들었습니다. 그때까지 나는 정식으로 실명선고를 받지 않았습니다. 어느 주일 오후 구본술 박사님이 저를 부르셔서 조심스레 말씀하셨습니다. 현대의학으로는 선진국에 간다하더라도 너의 떨어진 망막을 다시 붙일 수가 없으니 이제는 재활의 길을 찾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일본의 이와하시 다께오 선생님 이야기를 해주며 나를 격려하셨습니다. 그분은 와세다 대학 재학 때에 실명을 하였지만 영국 에든버러 대학에서 유학하여 오사카에 일본 맹인 재활센터를 창립하여 재활계의 선구자가 되었을 뿐아니라, 글과 강연으로 국제적인 인물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그 당시 나에게 아무런 위로도 의미도 되지 못했습니다. 
 
짐승처럼 처절하게 부르짖었다. 하나님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깁니까? 왜? 왜?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으신 채 침묵하고 계셨다. 그 침묵을 이해하기엔 나는 너무 어렸다. 
 

▲ UN에서 만난 슈퍼맨과 함께 한 강영우 박사와 부인 석은옥 여사    ©강영우

하나님의 침묵 
 
그에게 온갖 희망을 걸고 있던 모친도 절망이었다. 장차 크면 신학교에 가서 하나님의 종이 되기를 간구했던 어머니의 기도가 꺼져가는 것을 직감했는지도 모른다. 목사가 되기를 기도했던 사랑하는 아들이 점쟁이나 안마사가 될 지도 모른다는 절박한 심정은 심장을 도려내는 듯 아팠을 것이다. 이 사랑하는 아들이 장님만은 되지 말게 해주옵소서라고 간절해 매달렸던 모친은 이미 장님이 된 아들의 현실을 받아들이기엔 차마 감당이 되지 않았다.
 
그가 병원에서 퇴원하기도 전에 뇌졸중으로 불귀의 객이 되어 하늘나라로 가버렸다. 어머니의 죽음은 그가 병원에서 퇴원하고 나온 날엔 이미 4개월이나 지나 있었다. 그동안 매일같이 면회 오던 어머니가 오지 않자 교통사고를 당해 당분간 오지 못한다고 깜쪽같이 숨겨왔던 것이다. 
 
평화롭게 살던 그는, 안되려고 하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는 말처럼, 13세 부친의 소천 이후 그에겐 욥의 시련과 같은 엄청난 시련이 연달아 뻥뻥 터졌다. 자신의 실명, 어머니의 죽음, 거기에다 평화시장에서 밤새도록 재봉일을 하며 소녀가장 역할을 해왔던 누나마저 과로로 죽음에 이르렀다. 모두가 4년만에 일어난 사건들이었다. 하나만 해도 십대 소년이 감당하기에 버거운데, 십대 맹인 소년이 이 모든 짐을 지기엔 너무나 무거웠다. 
 
이런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을 당하니 슬픔과 더불어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 하나님에 대한 분노가 일었습니다. 무엇보다 신앙적인 갈등이 제일 컸습니다. 왜 하나님을 믿는 가정에서 착하게 살았는데, 이런 시련과 역경을 우리에게 주시는가? 좋으신 하나님, 선한 목자되신 하나님이 어디로 가셨는가?하는 갈등이 생겼습니다. 그토록 눈을 고쳐달라고 피눈물 기도를 했는데, 왜 하나님은 내 기도를 안들어 주셨는가? 하는 이런 신앙적인 갈등을 겪었습니다. 그런 문제가 퍽 심각했습니다. 
 
당시 대조동에 천막교회를 하며 치유와 이적의 역사가 나타나는 조용기 목사가 이끄는 순복음교회를 다니며 매번 기도 때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더러운 마귀는 물러가라. 하나님 현대의학으로 못고치는 이 눈을 고치시어 영광받으소서하며 기도를 수 만번이나 했다. 조용기 목사는 주일마다 안수기도를 해주었지만, 하나님은 그 많은 기도에 침묵하셨다.
 
이후 그는 맹인이 되어 살기도 어렵지만 죽기도 어렵다는 사실을 경험했다. 진정제를 충분히 모아 만물이 잠든 고요한 시간에 한꺼번에 입에 털어놓고 자살을 시도했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토록 절망적인 밤에 하나님의 침묵은 더욱 그를 미치게 했다. 엄연한 현실과 부딪혀야 했다. 맹인 소년가장으로서 선택할 수 있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결국 원치 않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두 동생과의 이별이었다. 열세 살 된 남동생은 철물집으로 보내고, 아홉 살 된 여동생은 고아원으로 보내고, 자신은 맹인 재활원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길밖에는 다른 선택의 길이 없었습니다. 세 식구가 뿔뿔이 흩어지는 날 우리는 서로 끌어안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주어진 운명을 탄식하며 울고 또 울었습니다. 
 
▲ 청와대를 방문하여 김영삼 대통령을 접견하는 강영우 박사 부부   ©강영우

지각인생 
 
그가 입원했던 병원의 사회사업가 이선희 씨와 공병우 박사의 도움을 얻어 맹학교 입학수속과 기숙사비, 그리고 기숙사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여 맹학교에 입학했다. 병원 입원과 재활훈련 등으로 동년배보다 5년이나 늦은 출발이었다. 동년배 친구들은 고 3이나 대학생이 되어있을 때 그는 중학교 1학년 과정에 입학한 것이다. 
 
맹학교 입학금과 첫 납입금은 이선희 씨가 주선해 주어 해결되었지만, 다음 분기 학비가 문제였다. 이때 미국계 보험회사에 다니며 소녀단 지도자 양성을 맡고 있던 권순기 씨가 나타났다. 그를 반기며 아주 적극적으로 말했다. 내가 사회사업가는 아니지만 내 힘껏 도와줄게 
 
그리하여 그가 지도하고 있는 소녀단 지도자 양성훈련을 받고 있던 여대생들에게 그의 처지를 소개하고, 스스로 자신의 월급봉투를 열며 함께 돕자는 제의를 했다. 이때 용돈을 털어 맹인학생을 도운 여대생 중에 오늘 그의 부인이 된 숙명여대생 석은옥 양이 있었던 것이다. 하루는 그가 도와준 여대생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섭리적인 만남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후 여대생 석은옥 양과의 관계는 그의 눈이 되어주었고, 손과 발이 되어주었고, 오누이에서, 연인으로, 부부로 진전되었다. 
 
특히 이선희 씨는 사회사업가 연수로 1년 반 동안 미국에 체류하면서, 그에게 양부모를 주선해주어 연세대학 졸업 때까지 학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게 해주었다. 
 
장애자로서 정상인 못지않게 공부를 잘한 그가 대학지원을 할 때 문제가 생겼다. 장애자란 이유로 입학원서 자체가 거절당한 것이다. 그때 도와준 손길이 바로 6.25 당시 그의 집에서 피난살이를 했던, NCC 총무로 김관석 목사가 철옹성처럼 강하게 닫혀있던 문을 열어주어 입학시험을 치를 수 있어서 합격했고, 졸업 때에는 문과대학 전체 차석이었다. 장애자로서 극복 못한 체육과목을 재수강까지 해도 D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즈음 고명딸로 곱게 자라온 석은옥 양은 무역회사를 다니다, 어느 날 그의 주치의였던 구본술 박사로부터 소개받은 사람들과 연락을 취해, 미국 펜실베니아 주정부 맹인재활청 자문위원회 위원인 크리이그 여사의 주선으로 1년 동안 미국 전역의 주요 맹아학교, 정부재활기관, 사립복지기관을 시찰하며 배우는 연수교육을 받게 되었다. 이때 미국 상류층 사람들과 교제하면서, 그들의 봉사정신, 그들의 가치관을 배우고, 또 대인관계를 넓혀가며 그때 맺은 아름다운 관계를 지금까지 유지해오고 있다. 
 

▲ 리차드 손버그 미 전 법무장관(왼쪽)과 인사하는 강영우 박사. 강 박사는 손버그 장관의 주선으로 UN에 진출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강영우
 
 
만남의 축복 
 
부모와 누나를 한꺼번에 잃은 영우 군에겐 새로운 가족을 만나는 축복이 소낙비처럼 쏟아졌다. 무엇보다 미국서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한 살 연상 누나인 석은옥 양과 평생 한 침대 가족으로 약속한 것이다. 가끔 들렀던 신촌 독수리 다방에서 의남매 관계를 청산하고 약혼자의 관계로 새 출발하기로 하던 날, 영우 군은 중대한 선언이라도 하듯, 석은옥이란 이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며 인생 설계도를 펼쳤다. 
 
나도 눈뜬 사람들을 섬기고 봉사하는 삶을 살 날을 기다리면서, 아내의 이름 석자, 한자에 각각 10년씩 시대를 구분했습니다. 즉 석의 시대 10년은 돌밭을 걸어가는 것같은 시련과 역경을 극복하는 시대로, 대학가고 유학가는 것까지로 정했습니다. 
 
은의 시대 10년은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에서 자녀들을 잘 기르며 공통된 이상을 구현해 나가는 시대이고, 옥의 시대 10년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사회에 봉사하는 것으로 정했습니다. 석의 시대, 은의 시대, 옥의 시대로 점점 나아지는 인생을 상징하면서 분명하고 전략적인 접근을 했습니다. 
 
석의 시대가 끝난 것이 72년인데, 바로 달성됐습니다. 연대 졸업하고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해 은의 시대가 시작되는 건데 역시 다 이루어져서 아이들도 잘 자라 박사가 되었습니다. 82년부터 옥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다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분명한 목적이 없었다면 그냥 그대로 지났을 건데, 시대별로 뭘 해야 하는 지를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두눈 밝은 성한 사람도 되기 어려운 박사학위과정도 만만찮은 도전이었다. 국제로터리클럽 장학금이 1년만 제공되어 그 다음부터는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그때 아내가 피트버그 병원에서 청소원 자리를 구했지만 이민국에서 노동허가를 받지 못해 실망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일반고교에서 수학교사로 일하는 맹인 여교사 부부를 만났습니다. 그녀는 태생 맹인이었는데, 스탠포드대와 하버드대 교육대학원을 나온 우리 또래의 교사였습니다. 남편은 스탠포드와 하버드 법학전문대학원을 나온 정상인으로 유명한 변호사였습니다. 그들이 함께 살자면서 집을 비울 경우 아이를 돌봐주고, 설거지를 해달라는 거예요. 그들과의 만남도 축복된 만남이었습니다. 
 
미국 상류층 가정에서 미국의 문화와 전통적인 가치관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3년 반 동안 박사과정을 마칠 때까지 생활비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되었습니다. 
 
이들에게 만남의 축복은 아주 사소한 사건을 통해서 일어났다. 박사학위를 받은 그를 불러주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조국의 대학 강단에 서고 싶었지만 역시 문턱은 높고, 찬바람만 일었다. 학생비자도 만기되고, 장학금도 끊어져 절망 중에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큰 아들 진석이와 함께 캠퍼스 잔디밭에 있었는데 뛰어놀던 아이가 없어졌다. 미친 듯이 아이를 찾아 부르며 다녔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아이가 전혀 뜻밖에 실로 우연히(그러나 섭리적으로) 폴 메이스너 사대 학장실을 노크하여 들어간 것이다. 메이스너 박사는 한국교육개발원 설립을 돕기 위해 자주 서울에 오가며 한국 정부에 막강한 영향을 미치는 인물이었다. 염치 불구하고 한국 대학에 취업을 부탁했다. 그러나 메이스너 박사는 그보다는 박사 후 과정에 들어가 학생비자도 연장하고, 더 연구하라고 조언하며, 1년 기간의 장학금까지 주선해 주었다. 
 
이때부터 그는 한국행을 포기하고 미국에서 적극적으로 일을 찾으며, 미국 고등교육사, 교육의 종교적 기초, 민주주의와 교육 등 세 강좌를 수강하며 특별히 일반교육에서 신앙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크게 깨달으며 종교와 신앙을 접목시키는 작업을 했다. 
 
이후 그는 인디애나 교육부 개라시 특수교육부장, 노스이스턴 일리노이대 특임교수로 임용되어 배운 지식을 마음껏 풀어놓기 시작했다. 작음 만남이 인생의 물줄기를 변화시키는 큰 축복을 경험하는 그는 계속하여 만남의 축복이 이어졌다. 

 
한 권의 책, 가공할 위력 
 
이즈음 그는 한 권의 책의 위력도 새삼 깨닫게 되었다. 82년에 빛은 내 가슴에란 책을 종로서적에서 펴냈더니 부인 간증까지 써달라고 하여 어둠을 비추는 한 쌍의 촛불이란 책을 펴냈다.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시력과 양친, 그리고 누나를 잃은 상태에 있을 때 나에게 세 가지 소원이 있었습니이다. 그것이 또 내 인생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첫째는 맹인이 되어 맹학교에 가보니, 맹인이 할 수 있는 직업이 안마사와 점쟁이밖에 없었습니다. 내 소원 중에 하나는 기독교인이 점쟁이 되어 살 수는 없으니, 남은 것은 안마사인데, 그 안마사 안되는 게 소원이었습니다. 안마사가 안되려면 대학을 가고 유학을 가고 전문직에 종사하는 것밖에 없지요. 그래서 대학을 가고 유학가는 꿈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양친이 돌아가시고 집이 없으니 다른 맹인 학생들이 부러웠습니다. 눈뜬 사람이 아니라 친구들은 주말이면 부모가 찾아오고 여름방학 겨울방학이면 친구들은 집에 가는데 나는 돌아갈 집이 없었잖아요? 그래서 나도 행복한 가정을 꾸미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셋째는 당시 60년대만 해도 장애자에 대한 차별이 심했습니다. 아침에 장님 보면 재수 없다고 침 뱉을 때이고, 시장에 가면 되돌려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나의 상태는, 눈뜬 사람에게 짐이 되고, 그 사람들에게 차별이나 받는 삶을 살고 있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가리고 있으니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게 해달라는 소원이었습니다. 이제는 사실 세 가지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젊은 세대들에게 남은 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지침을 주고, 젊은이들이 글로벌 리더가 되는 꿈을 갖게 하기 위해 책을 썼습니다. 
 
그러나 그 때만해도 그는 알려지지 않았을 때였다. 빛은 내 가슴에를 써도, 어느 출판사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자 다시 그의 은인인 김관석 목사가 NCC에서 기독교 방송(CBS) 사장으로 자리를 옮겨있을 때 가서 의논했다. 그러자 김 목사는 먼저 기독교방송에서 방송한 다음, 기독교 방송에서 출판하자고 하여 그렇게 했다. 
 
판로가 없었지만 27,000권까지 판매되었습니다. 이렇게 처음 나온 책이 MBC 특집극 눈먼 새의 노래와 영화 빛은 내 가슴에의 주소재가 되었습니다. 
 
특히 책을 통한 만남으로 세상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의 만남은 아버지 부시 대통령이다. 나중에 영어로 나온 빛은 내 가슴에(A Light in My Heart)란 책을 차남 진영이가 다니는 필립스 아카데미 앤도버 교장에게 한 권 기증하자, 교장을 통하여 이미 동문이자 오랫 동안 이사로 있던 아버지 부시 대통령에게도 전달되었던 것이다. 정확히 5주 후에 책에 대한 찬사와 더불어 회신이 왔다. 이를 계기로 아버지 부시 대통령이 그 책을 MBC 특집극에 실제로 출연하여 에필로그에서 강영우 박사를 보십시오, 인생에 등을 돌려야 할 절망적인 상황, 한계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투쟁하여 오늘날 주류 사회에 진출했습니다. 그는 만인의 귀감입니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그 드라마가 예술성 작품성으로도 인정받아 그해 방송대상을 받고, 국제상으로 입상되어, 영어자막으로 1995년 유엔에서 방영되기도 했다. 1997년에 클린턴 대통령 당시 백악관에서 방영되면서 그의 무대가 유엔과 백악관으로 넓혀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 한 권의 책이 정계에서 파장을 일으킨 과정을 살펴보자. 
 
이 책을 서울대 교수하다가 청와대 공보수석으로 있던 대학원 선배 김학준 박사(현 동아일보 회장)가 노태우 대통령에게 읽게 하고, 그분과 면담을 시켜주었습니다. 한국 대통령과 최초의 면담이었습니다. 노 대통령이 금일봉을 주면서 나를 도와주라 하여 1992년 사회복지 법인 국제재활교류재단이 창립되었습니다. 한국에서 사회복지 재단으로는 두 번째입니다. 지금은 서울시 소속이지만 그때는 보사부 법인으로 만들었습니다. 그걸 통해 한국에도 큰 영향을 주는 일을 했는데 17년의 역사가 됩니다. 
 
초대 이사장 오재경, 2대 정근모, 3대 송자 박사 등 장관급 인사들이 맡으면서, 막강한 인맥이 형성되었다. 이 재단에서 개회하는 학술교류행사에 세계적인 학자들을 초청했다. 특히 아버지 부시 대통령에게 강사로 와달라고 하니 93년도에 비디오로 연설해 주었다. 이를 계기로 당시 김영삼 대통령에게 연설해 달라고 하니, 비서관들이 그런 민간단체에 하는 행사에는 보사부 국장이나 차관 정도나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거절했다.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미국 대통령은 국장 수준밖에 안돼서 하느냐고 말입니다. 미국 대통령이 비디오 연설을 했으면 대한민국 대통령도 그 정도는 해줘야 하지 않느냐고 해서 김영삼 대통령도 비디오로 연설을 하여 보내주었습니다. 그리고 강사가 대통령 수준이고 국제 노동기구 사무총장이나 미국 유엔 대사, 케네디, 루즈벨트 대통령의 가족들을 초청했습니다. 그랬더니 재단을 통해 한국으로 오는 손님들 때문에 청와대로 가서 대통령을 접견합니다. 
 
김영삼 대통령을 처음 만났을 때의 에피소드는 그가 유엔으로 진출하는 계기가 된다.
 
1995년 6월 17일 리차드 손버그 전 법무장관 내외분을 모시고 가는데, 이분이 워낙 거물이라 당신 한국에 아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하니 아는 명단 7명을 주었습니다. 1번 노태우 대통령부터 이종남 법무장관..이렇게 하여 7번째에 유종하 씨가 있었습니다. 이분이 유엔대사 하다가 김영삼 정부 때 청와대 외교안보 수석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유종하 수석에게 편지 썼습니다. 
 
손버그 장관을 모시고 가는데, 이분이 유엔 사무부총장할 때, 당신 안다고 하는데, 김영삼 대통령과 면담 주선해 주십시오하고 편지를 띄웠습니다. 그 편지를 받고 우 수석이 팩스로 회신이 왔습니다. 어떻게 그분을 모시고 옵니까?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시 친한파로 우리를 많이 도와주신 분이오. 아주 거물입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하고 말입니다. 
 
그 편지 한 장 써서 선 버그 장관 모시고 한국에 간 그 한 주 동안 한국의 대표적인 교회, 영락교회, 남서울교회, 사랑의교회, 대흥침례교회 등 네 군데서 간증을 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물론이고, 미래 대통령인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 연희동 전 대통령, 레이니 대사(손버그 장관과 정당은 달라도 예일대 선후배였다) 초청 등 얼마나 바쁘게 보냈는지요. 
 
만나는 사람들마다 하나같이 첫 마디가, 워낙 이 분이 거물이니, 아니 강 박사님이 한국에 오자고 하니 들어줍디까?해요, 그러니 여기 모시고 왔지요했습니다. 그때 기록을 세웠습니다. 
 
사실 손버그 장관이 일 주일 스케줄을 그분이 준 명단에서 짜여졌는데, 이 일 후에, 이분은 또 내가 엄청난 거물인 줄 알고 나보고 유엔 세계장애위원회에서 활동해야 한다고 주선했어요. 의장이 아버지 부시였고, 위원으로 밥돌, 손 버그, 등소평 아들 등 이런 세계적인 거물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명단을 보니 일단 한국 사람은 한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능력이 없어 쫓겨나도 잃을 것이 없을 것 같아 들어갔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그가 이 책을 안썼다면 안됐을 것이라고 밝혔다. 모든 것이 그냥 갑자기 된 것이 아니라고 거듭 밝혔다. 
 
책을 안썼다면 김학준 박사가 노태우 대통령에게도 나에 대해 소개할 방법이 없었을 것이고, 또 그분에게 금일봉을 받아 교류재단을 설립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재단 만들 때 김학준 박사도 첫 이사 중에 한 분입니다. 
 

▲ 강영우 박사는 브리즈번순복음교회에서 집회를 마친 후 청년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크리스찬리뷰
유엔에서 
 
손버그 장관의 주선으로 그가 유엔에 진출하던 1996년, 그해가 마침 유엔 창립 50주년, 유엔 주창자인 루즈벨트 타계 50주년이 겹친 해였다. 유엔장애위원회에서는 루즈벨트 대통령이 20세기의 영웅이고 다른 나라 대통령도 존경하니 이를 기념하는 사업으로 루즈벨트 국제장애인상을 제정했다. 강 박사는 이 상의 제정자 중에 한 사람이자, 그해 96년 첫 수상국을 결정하는 심사위원 27명 중에 한 사람으로 참석하여 첫 수상국으로 한국을 줘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모인 모든 사람들이 다 놀랐다. 와이 코리야?냐고 질문을 해댔다. 냉소적인 분위기도 있었다. 그러자 그는 차근차근 그의 경험을 곁들이며 설명했다. 
 
인간적인 상대평가를 하면 한국은 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상은 선진국들의 나눠먹기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심판의 방법으로 나온 절대평가를 하면 한국도 충분히 받을 수 있습니다. 절대평가를 기준으로 합시다. 그동안 장애자정책에 대해 괄목할만한 발전한 나라를 주자 하니 다 동의했습니다. 그래서 유종하 외교안보수석 행정관 (마영삼 과장 현 이스라엘 대사, 허철 현 외교부 국장) 이 두 사람이 행정적인 데에타를 모으고, 나 개인적인 경험도 밝혔습니다. 
 
그때 그가 밝힌 세 가지 이유를 보면 한국의 장애자에 대한 정책들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첫째, 나의 모교인 연세대학교는 시대를 앞서가는 기독교 대학으로 미국 선교사들이 세운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기독교 사학 명문이지만, 1968년 내가 대학 입시를 치를 때는 연대에서도조차도 입학원서조차 거부할 정도였는데, 그 후 세월이 흘러 1996년 현재는 대학에 장애인 특례 입학제도가 국립대학에도 있다. 
 
둘째, 내가 연대 전체 차석으로 졸업하고, 국제 로터리재단 장학생으로 뽑혔지만 장애자란 이유로 유학시험도 못보게 할 정도였는데, 연대와 한미재단이 이 불평등 조항을 없애달라는 청원을 하여 민관식 장관이 승인함으로써 해결되어 한국 최초 유학생으로 왔다. 그러나 1996년 현재 한국에 장애인에게 필요한 복지법인이 완벽하지는 않지만, 특수교육 진흥법, 심신장애 복지법, 장애인 고용촉진법 등 장애인 관련 기본법이 다 준비되어 있다. 
 
셋째, 1976년에 나는 한국인 최초의 시각 장애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맹인이란 이유로 어디에도 교수로 받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96년 현재 국가서열 3, 4위에 해당하는 헌법재판소 소장이 소아마비 장애인을 임명할 정도로 획기적인 발전을 했다. 
 
이런 제안에 만장일치로 대한민국이 첫수상국으로 결정되었다. 김영삼 대통령이 이 상을 받을 때 의전비서관이 반기문 현 유엔총장, 유정한 현 장관이 따라왔다고 하였다. 김영삼 대통령의 수상 연설은 유엔 사회발전과 인권위원회 공식 문서로 채택되어 전 세계 유엔 회원국 원수들에게 보내져 상상을 초월하는 국위선양을 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이러하다.
 
코리아를 보십시오, 전쟁으로 초토화되었던 나라가 온갖 역경을 다 극복하고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세계 경제대국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회복지 분야에서도 이에 버금가는 괄목할만한 발전을 이루어 유엔 창립 50주년에 즈음하여 시작된 루즈벨트 국제장애인상을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이걸 본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 의원이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한국을 칭찬하기도 했다. 이 상은 세계적인 조각가 조 데이비슨 작품인 루즈벨트 흉상과 함께 대표적인 장애인 기관에 돌아가는 5만 불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수상금과 국가에서 10억을 보태어 올해의 장애극복상기금으로 국회에서 통과시켜 주었다. 해마다 4월 20일 장애인의 날에는 이 상이 대통령 메달과 함께 상금을 수여한다. 
 
지난 번 극동방송에 출연해 달라 하여 갔더니 담당 MC인 신봉규 목사가 처음 강 박사님을 뵙지만 저의 은인입니다. 제가 2003년도 올해의 장애극복상을 받는 바람에 PD로 취직되었고, 작년에는 PD협회에서 주는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해요. 
 
그 이후 김영삼 대통령과 제일 가깝게 지내며, 상도동 자택을 자주 방문하기도 한다고 하였다. 헤어질 때 자동차 타는 데까지 배웅하면서 또 오라고 하는 게 인상깊다고 하였다. 해마다 성탄절에는 붓글씨로 성탄 카드 먼저 보내준다고도 하였다.
 

더 넓은 무대 
 
한글로 책을 쓴 이후 영어로 그 책을 다시 쓴 후, 상상을 초월하는 파급효과가 일었다. 빛은 내 가슴에가 미 장로교 총회출판사를 통해 87년도에 나오자 특히 로마 교황청에서는 개신교 신자의 책이지만 추천도서로 선정했다. 또 수녀원에서도 공식 교재로 채택할 정도였다. 그의 신앙 간증 자체도 미국 주류 속에 스며든 기독교 핵심 가치관과 동일함으로 그가 세계적으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되었다. 
 
수정교회 로버트 슐러 목사와 연결되어 수정교회에서 간증을 하고, 적극적 사고방식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노만 빈센트 필 목사에게도 알려져 그가 발행하는 가이드 포스트지에 그의 간증이 실리기도 했다. 
 
그의 책이 6개 국어로 번역되어 세계적으로 퍼져 나가가게 되자 두 번째 책이 출판되었다. 
 
두 번째 나의 장애, 하나님의 능력(My Disability, God's Ability)'이란 책 제목은 영어로 리듬이 잘맞는데, 제임스 레이니 박사가 정해 주었습니다. 그분은 19세 때 한국에 군인으로 나갔다가 예일대에서 공부하여 목사 안수받고 선교사로 다시 한국에 5년 동안 활동하신 분입니다. 미국에 돌아와 신학교수 하다가 에모리 대학 신대 학장을 거쳐 총장을 16년 하신 분인데 이 분이 에모리 대학을 일류로 만드신 분입니다. 이분에게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장차 목사가 될 그분에겐 섬김과 나눔의 성품이 탁월했습니다. 그분이 살던 동네 허름한 집에 노인 한 분이 홀로 살고 있었는데,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인데도 매일 그 집을 방문하여 도와드릴 것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찾아오는 소년이 너무 반갑고 기특하게 생각되었습니다. 
 
어느덧 소년은 대학생이 되어 예일대로 진학하느라 동북부로 이사를 갔습니다. 이후 한국 선교사로도 다녀오고, 예일대 교수를 거쳐 총장이 되기까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하루는 그분 소년 시절 긍휼한 마음을 갖고 방문했던 노인댁을 방문했는데 이미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누추한 집에서 홀로 살았던 그 노인이 코카콜라 창립회장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노인이 돌아가실 때 매일 찾아와서 안부를 묻고 도와드릴 일이 없느냐고 물었던 그 착한 소년, 성도 모르고 단지 이름이 제임스라는 애칭인 지미만 기억했는데, 그 소년 지미에게 코카콜라 회사 주식 상당부분을 양도하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사실입니다. 지미가 다시 그 노인을 찾았을 땐 에모리대학의 총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레이니 총장은 그 많은 자산을 다 학교재단으로 헌납했는데, 이를 계기로 에모리가 25대 명문대학으로 진입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놀라운 일이다. 이런 기적의 주인공인 그가 클린턴 대통령에 의해 주한 미대사로 임명받았다. 한국과는 군인으로, 선교사로, 대사로 참 깊은 인연을 가진 인물이다. 그가 강 박사의 책 제목을 정해주고, 서문을 써주었다. 서문에서 그는 강영우 박사는 현대판 바울이다. 첫째는 바울이 자기 육신의 가시, 장애를 가지고 그것을 제거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지만 제거해 주지 않으시고,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는 음성을 들려주시면서 나의 권능은 약함 속에서 온전해진다는 바울과 같은 삶이다. 강 박사 자신의 장애는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그런 역할을 한다는 말씀을 가지고, 나의 장애는 낮아지고, 약점은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현대판 바울이다. 빌 4:13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무엇이나 할 수 있느니라는 말씀으로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 현대판 바울이라는 요지로 써주었다. 
 
그가 쓴 두 권의 영어책은 미국회 도서관에서 오디오 북으로 만들었고, 두 번째 책은 출판사에서 오디오 북으로 만들어 2만 5천권을 공립 도서관에 기증했고, 2005년 10월에 이달의 도서로 선정되기도 했다. 먼저 남침례교와 연합감리교에서는 평신도 필독서로 선정하기도 했다. 두 번째 책이 나왔을 때 부시 여사가 감동하여 직접 백악관에서 다시 와서 연설해 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한국어로 책을 써서 영향을 미치긴 했지만 아주 제한적입니다. 영어는 세계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내가 세계 정상으로 가는 하나의 도구 역할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역사하셨습니다. 책이 보급되면 책을 통해서 영향이 그 후대까지 미치니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승리의 삶, 성공의 삶을 살 수 있는가를 교육학적으로 접근합니다. 
 
그냥 교수나 하면서 평범한 교수의 삶으로 이어졌을 그의 삶은 작은 불씨가 큰 불을 일으키듯, 어찌 보면 사소한 계기가 엄청난 일을 만드는 전환점이 되는 것을 본다. 오늘날까지 그를 지탱해온 말 가운데 그가 1976년 피츠버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고국에 돌아가 대학강단에 서고자 했던 꿈이 좌절되어 낙심하고 있을 때, 벤드슨 부총장이 드려준 이 한 마디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강 박사 이제 당신도 박사가 되었소. 사랑하는 아내와 영특한 아내가 있는 행복한 가정의 가장이오. 위대한 힘과 영향력을 발휘하는 위대한 인물은 길러지고, 명문가는 만들어지는 것이오. 이제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과 더불어 위대한 명문가를 만들어 보시오. 
 
그의 아름다운 만남, 하나님과의 만남, 배우자와의 만남, 위대한 지도자들과의 만남은 일찍 여윈 양친과의 만남을 보상해주는 듯했다. 그가 받은 실명과 가난의 고통은 분명 변장된 축복이었다. 눈먼새가 그 누구도 꿈꾸지 못했던 창공을 훨훨 날듯이.?
 


글/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두란노선교교회 담임목사)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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